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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나르시시즘에서 융의 주체성을 거쳐 불교 무아론으로 / 프랑수아 마르탱발라스
[71호] 2017년 09월 01일 (금) 프랑수아 마르탱발라스 신항식 옮김 ssbrand@hanmail.net

편집자 주
** 이 논문은 프랑스 그레노블 대학의 프랑수아 마르탱-발라스(Franḉois Martin-Vallas) 교수가 Journal of Analytical Psychology, 2017년, 62권 1호에 기고한 “From Freudian narcissism to the Buddhist notion of anatman, via Jung’s idea of identity,”(pp.50-66)를 번역한 것이다.

1. 서론: 주체성과 자아

   

프랑수아 마르탱-발라스
(Franḉois Martin-Vallas)
 프랑스 그레노블 대학 교수

필자는 융의 자서전을 읽다가 주체성에 관한 융의 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서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종종 돌 위에 홀로 앉아 있곤 했는데 거기서 상상력 놀이를 했다. 이를테면 “돌 위에 앉은 자가 나인가, 아니면 누군가 앉아 있는 돌이 나인가”를 상상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질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융의 깊은 불안감을 나타내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의사로서, 또 다른 의사인 위니코트가 말했던 것, 곧 융이 어릴 적의 심리작용으로부터 고민하였을 법한 문제를 겪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질문 뒤에 숨겨진 이유와 원인을 우리에게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 순전히 정신의학적인 관점일 뿐이다.

융의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질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내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는 자인가, 아니면 내가 지각하는 세계가 나인가?”이다. 이는 지각된 객체와 주체의 주체성 사이에서 진동하는 어떤 것을 드러낸다. 데카르트적인 이원론, 즉 관찰자와 관찰된 사물(존재)을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에 주체는 단지 세계를 보는 자일뿐만 아니라 그 세계가 되기도 한다. 어린 융의 경우,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만으로도 주체는 그 자신의 주체로서 현존한다. 이 경험이야말로 정신의학적 의미에서 순전히 정신병적 경험과 다른 것이다.

필자는 융의 자아 관계에서 시금석이었던 이 경험을 끌어와, 보다 더 근원적으로 그의 인식론과 윤리론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자아와 자기와의 관계, 혹은 의식과 개인과의 관계를 그의 전체성 속에서 점검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론의 영역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처럼, 그가 돌인지 아니면 돌 위에 앉은 자인지 처음으로 의심을 품었던 때, 그는 후자의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의식하는 주체, 즉 관계 속의 주체에 대한 문제이다.

돌 위에 앉아 돌에 대하여 명상하고 있던 만큼 그는 이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숙고하고 있었는데, 그 경험은 객체의 현실과 생각하는 주체의 현실이 본질에서 서로 다르다고 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맥락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 그만의 돌 위에 앉은 그는 자신의 주체성에 연관된 어떤 불확실성 속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그는 모호한 주체라기보다는 그 자신이었다. 돌 위에 앉아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생각하는 어린 사유자로서 그의 지성뿐만 아니라 인지에 관해서도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전의 언급을 달리 말하면, 그는 17세기 철학자들에게는 육체적인 경험과 동시에 정신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고를 의미했던 코기토(cogito)의 일차적인 의미를 우연히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의 난제로부터 유래하여, 몇 사람은 융이 안정되고 잘 정의된 주체성의 위치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위니코트의 논문이 이런 시각을 지지하는 듯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식의 논의 배경에는 그나 다른 이들이나 프로이트를 벗어나는 몰이해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융의 정신이 신경증의 증세가 아니라 온전하게 정신병적인 증세이며, 병리적인 방향이 아니라 그의 주체성에 있어서 주체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고도 모호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믿는다. 개인적인 주체성을 상실할 때만 정신병적 진단이 필요하다. 이와 유사한 태도가 프랑스의 프로이트주의자인 드 뮤쟌(de M’Uzan)의 글에 나타난다.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기 정신의 정신병적 토대 가운데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덧붙여, ‘정신병적인 것(psychotic)’과 정신병(psychosi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드 뮤쟌이 명시한 것과 같이, 필자의 입장으로는 정신병적인 것과 정신병 사이에서 더 이상의 혼동은 없다. 이는 정신병적 과정을 더 이상 병리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분은 이론적인 재고를 하는 필자에게도, 정신분석 대상자와 환자의 말을 경청하는 본인의 의학적 태도에서도 핵심적이다. 한편, 우리는 융의 글에서도 정신병으로서 병리적 상태로부터 정신병적 과정을 구분하는 참고 내용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융이 제임스 조이스나 피카소의 예술적 창의성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이다. 융이 정신병에 관하여 말할 때는 이러저러한 정신적인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융은 오로지 사물을 분별할 자아의 능력이 파괴되거나 자유의지가 상실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

융의 인식론에 관한 문제로 돌아오면, 출발부터 확실해 두어야 할 것은 이 문제가 데카르트의 입장과는 완전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체의 실체가 연장된 것(res extensa)과 생각된 것(res cogitans)은 동일한 현실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양자는 본질에서 다르다. 전자만이 오로지 시공간의 연속 체계를 관장하는 세계에 대한 현실로 이해된다. 반면, 후자, 곧 생각된 것들은 신이 내린 자연으로서 설명된다. 역설적으로, 데카르트는 신자임에도 신이 만든 바로 그 세계에서 창조자를 배제한다.

젊은 융은 이런 기초에 따라 의학적 연구를 정착시켰으며,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믿음인 생기론(生氣論)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애디슨이 상기시킨 것처럼 생기론은 물적인 에너지와 정신적인 에너지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다고 하면서 생명의 실체를 전일적으로 바라보는 지평을 열었다. 20세기로 넘어가던 당대에는 비정상성에 대한 또 다른 유행 사조가 있었는데 이 또한 융을 사로잡았다. 필자는 이 부분도 앞선 운동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세계로부터 도망쳐 죽음이나 정신병을 통해서 위안을 찾는 시도를 어린 시절에 이미 기피했던 것처럼, 정신과 의사가 되던 때 그는 무슨 비밀결사원이라든가 사이비 교주같이 될 수도 있는 주술적인 믿음에 얽매이는 자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예로서, 그는 직업적 명성을 높이려면 언제라도 최면술을 걸어 증상을 회복시킬 수 있었던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보고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환자와의 경험이 오히려 치료법으로서 최면을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증상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경이로운 결과에 기대어 만족할 수 없었다. 즉 돌 위에 앉은 소년처럼, 그에게 관심이 있던 것은 결과가 아니라, 경험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이었다. 필자는 이것을 융의 직업 생애에서 품질보증 상표라고 보는데 실로 이후로도 그가 지녔던 자세는 업무와 업무지식에 대한 전반적인 윤리였으며, 이는 우리의 임상 활동에서도 핵심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그의 윤리적인 태도는 의식의 통제소로서 자아(ego)에 대한 그의 개념과 관련된다. 자아는 의식과 혼동되지 않고 의식을 관장하는 센터의 역할을 하며, 전체 속에서 주체와도 혼동되지 않는다. 이런 융에게 의식의 통제소로서 자아가 모든 사고와 경험에 대하여 질문을 거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이 태도는 교차하고 충돌할 것인데 이렇게 해서는 질문을 거는 태도 자체마저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 태도를 수차례에 걸쳐 기술한다. 예를 들면, 1942년 그는 “무의식처럼, 자기(the self)라는 것은 자아(ego)가 발달한 데서 벗어나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는 자아의 무의식적인 전조이다. 나 자신을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며, 그보다는 내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프로이트가 제안하고 설명한 자아와는 아주 다르게, 여기서는 주체가 출현(emergence)의 과정을 통해 주체성을 얻는다. 프로이트의 관점을 살펴보면, 그는 자아가 도피의 결과에서 자라난다고 본다. 곧, 억압을 통해 자기의 일부분을 받아들여야 하는 주체가 이를 실제로 거부함으로써 자아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융에게 자아는 자기에 대한 주체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다. 주체라는 것은 존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아닌 것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나서 태어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은 명확하게, 자기에게 향하는 주체를 확신하는 능동적인 태도와 더불어 자기와 주체를 비교하여 확신을 멈추는 태도가 모두 필요하다고 같이 인정하고 있다. 프로이트적인 주체는 고로, “내가 아닌 것을 억압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인 반면, 융의 주체는 “나는 누군가?”를 말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경우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주체가 무엇이 아닌가를 결정함에 따라 자아를 떠오르게 하지만, 융의 경우에는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거는 주체를 통해서 그가 그 자신으로부터 생겨난다.

바꾸어 말하면,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은 연속되는 콤플렉스의 역동성을 가지고 정신계의 지도를 구성한다. 융의 이론은 이와 달리 콤플렉스의 역동성을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구성 과정은 고정된 지도가 출현할지 어떨지 결코 보증하지 못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융의 생각을 따르면 주체의 주체성이 스스로 그 자신을 상실하는 정점에 항상 남아 있게 된다. 실로 주체의 삶에서 어떤 심각한 지점에 이르러서야 그때 내리는 선택이 필연이 된다.

2. 출현과 발제

필자는 앞서 용어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몇 번에 걸쳐 출현이라고 언급했다. 이제 융의 원형에 대한 생각을 둘러싼 많은 오해를 풀어내기 위해서 이를 정의하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이것은 한편, 주체성 문제와 분리시킬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융이 자아의 출현에 관하여 말할 때 주체성은 그가 뜻하는 바 그대로 자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출현의 개념은 19세기 영국 철학자들의 저술에서 처음 나타난다(특히 1875년의 조지 헨리 루이스와 1843년의 존 스튜어트 밀). 당시 이는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큰지를 관찰하는 데만 쓰였던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체계를 구성요소로 나누어 각 요소를 관찰하는 연구로서 최근까지도 과학적인 접근을 요했던 체계적인 절차인데, 이 연구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그 자체로는 제한된 가치였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체계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공부해서는 전체 체계가 가진 내용이 결코 통째로 추출될 수 없었다. 그 이래로 1960년대와 1970년대 물리학계에서 복잡계라 불리는 연구가 초기의 이 철학적 직관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이는 물리학, 생물학과 사회학의 많은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요소가 되었다. 현재는 몇몇 융 연구자들이 개념을 형성하는 데 핵심으로 작용한다.

의미를 명쾌히 하기 위해 필자는 아주 다른 데이터에서 나온 두 가지 사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의 것은 효소 같은 성질인데 거대분자의 3차원적 조직에 관한 것이다. 원리원칙에 따르면 하나의 거대분자라는 것은 단지 기본적인 분자들이 많이 모여 만들어진 분자다. 기본 구성분자들의 성질이 스스로를 서로 엮어 사슬을 만드는 것처럼, 이 집합은 기본분자들의 성질에 달려 있다. 순전히 화학적인 차원에서 이를 본다면 이 집합은 각 요소가 자기 옆의 것과 화학적 결합으로 붙어 있는 요소들의 긴 분자 사슬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결합된 거대분자의 화학적 성질이 구성분자들의 모든 화학적 성질의 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실상 이전의 화학적이고 공간적인 성질이 결합된 결과, 이런 배열 속의 분자들이 새로운 성질을 띠고 사슬공간 안에서 3차원 조직으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효소의 성질은 그런 성질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은 단순한 분자들의 결합에 의해 나타날 수 있다.

다음 페이지의 〈그림 1〉은 분자 구성요소 중 몇 개가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끌어당겨 거대분자 사슬이 비틀어진 결과, 효소가 활성화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 끌림과 연속되는 재조직은 하나의 체계가 일종의 사전 형태나 구조, 혹은 사전의 산출기획도 없이 어떻게 자체적으로 조직되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이 자체 조직은 구조의 몇 가지 구성요소에 소급적용되는 효과를 미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 조직은 몇 요소가 지닌 몇 가지 화학적 성질을 억제하여 결국 거대분자의 공간조직 내부구조 안쪽 깊숙이 효과를 미칠 수 있으며, 거기에서는 어떤 화학적 시약도 접할 가능성은 없다.

   

이와 같은 예로, 이런 체계 안에서 법칙들이 체계를 점진적으로만 흐트러뜨릴 뿐, 말 그대로의 예측불허 현상을 이끌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는 출현의 관념이 절대 주술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학적이고 화학적인 법칙들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이런 체계는 새로운 자질을 가지고 새롭게 출현하는 체계로 변하려고 스스로를 조직한다.

원시 수프(primordial soup)나 빅뱅에서 생명이나 관측 가능한 우주의 출현을 기술할 때 유사한 추론을 할 수 있다. 원초적 우주의 선조인 순수 무생물 조직으로부터 생명의 출현을 기술하는 데에 이 논리를 적용할 수도 있다. 많은 신경과학자가 이미 지적해 왔듯이, 종국에는 우리는 인류의 의식 출현을 설명할 때 이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 덧붙여 융이 “자신을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며, 그보다는 내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결정적으로 필자가 곧 설명할 미래적 차원에 결부된 출현을 의미하고 있다.
필자는 몇몇 조류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출현의 다른 유형 하나로서, 비상시 매우 간단한 일련의 법칙을 따르는 찌르레기의 특수한 경우를 소개하고자 한다. 개별 찌르레기들이 따라야 할 법칙은 서로 부딪치지만 않으면서 동료 옆에 최대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날아가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녀석이든 움직이는 녀석이든, 이로써 진정한 하나의 집단주체성이 출현한다. 유튜브 동영상의 찌르레기의 사례에서 관찰한 것을 곤충인 각다귀 떼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동물행동론에서 조망되는 양상에서나 앞선 사례에서나 새로운 자질의 출현은 많은 수의 구성물이나 체계들이 합쳐져 탄생한 체계 내부의 자체적 조직의 결과이다. 결합하고 분열하는 이중 역동성의 현재로부터 고정된 동시에 변화하는 일련의 개체성이 또한 당장이라도 출현할 수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잠시 옆으로 흘렀지만, 융이 단언한 “나는 자신에게서 나온다”라는 말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 말에서 동사인 ‘나온다(혹은 일어난다)’가 필자의 주의를 끈다. 왜냐하면 윔베르가 지적했듯이 이 동사는 융의 연구를 이해하는 3가지 동사 중 하나로서 그가 그 자신에게 유지했던 태도를 확인케 하기 때문이다.

3개의 동사 중 첫 번째 것은 윔베르가 프랑스어로 ‘가만 놓아두어 그리되도록 하다(laisser advenir)’로 번역했던 ‘geschehen lassen(그리되도록 내버려두다)’이다. 이를 영어로는 ‘to let it happen(일어나도록 하다)’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동사는 ‘be-trachten(주시하다)’로서 프랑스어로는 ‘considérer(고려하다)’ ‘engrosser(배태시키다)’이고, 영어로는 ‘to observe(관찰하다)’이다. 세 번째는 ‘sich auseinandersetzen(~와 부딪치다)’, 프랑스어로는 ‘se confronter avec(~와 대결하다)’ 영어로는 ‘to confront with(~와 대결하다)’ 혹은 ‘face up to(~을 대면하다)’이다.

이 모든 것을 다 취해 보면 관찰하는 주체, 능동적인 주체는 관찰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어떤 것에든 열려 있다. 관찰자나 관찰 대상 양자 모두에 영향을 주는 무엇에 맞서는 태도를 가진 것이다. 그러니까 융의 용어로서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고정된 상태, 즉 완전한 주체성이라기보다는, 주체를 계속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 일체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듦 속의 주체성이랄까, 그가 누가 되든지 끝없는 생성(becoming)과 같은 것이다. 앞서 말했던 비상하는 찌르레기 무리와 유사한 것이다.

필자는 융의 이 입장이 바렐라(Varela et al., 1992)의 발제(發製, enaction)의 개념과 매우 밀접하다고 본다. 발제는 단일 현상 속의 관찰행위를 관찰된 세계에 대한 지각과 서로 연결하는 개념이다. 여기에는 관찰자의 관찰 행위 이전에 앞서 미리 존재하는 세계도 없으며 관찰을 행하는 관찰자의 편협성으로부터 독립된 지각도없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므로 의식 자체가 주체의 발제가 되는 것으로 여기서 주체는 생각하는 행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생각하는 행위가 주체가 출현하는 주체성과 동시에 출현을 유발하는 것이다. 결국 의식의 출현은 명백하게 무의식의 출현과 함께 동반된다. 두 가지 모두가 존재 자체를 통해 서로 불가분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서구의 정신구조는 직선적인 인과론이나 최소한 시간적 연속성 속에서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 있어, 이런 논지가 무언가 생소해 보일 것이다. 서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떠오른 것처럼 보이는 이런 유의 사고는 기존에 있었던 몇 가지가 특정 시대에 나타난 것들, 즉, 좁혀 말하면 융이 종종 말했던 원형이라든가 구조 혹은 잠재성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것이 진정 필수적인 전제인가?

짧은 이야기 하나가 이 개념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6살 니콜라와 조각가 앙투안의 이야기이다. 여름 휴가 때이다. 니콜라는 시골에 가서 할아버지 댁에 머물렀는데 옆집 이웃이 앙투안이었다. 큰 트럭이 엄청나게 큰 벽돌을 싣고 와 앙투안의 앞마당에 놓던 날까지는 니콜라는 이 고독하고 뚱한 남자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니콜라는 아침 내내 벌어진 그 일에 꽂혀 있었다. 앙투안은 다음 며칠을 벽돌을 둘러 발판을 세우고 먼지투성이 속에서 시끄럽게 돌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결국 휴가는 끝나고 니콜라는 집으로 돌아가 학교에 가야 했다. 3개월 후 니콜라는 그곳에 다시 갔는데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밤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는 앙투안이 그 벽돌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 보거나 그냥 알기만이라도 하려면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 난 니콜라는 이웃집 앙투안에게 달려갔고 대문에 도착하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화강암 벽돌이 서 있던 곳, 그 마당 한복판에 멋진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던 것이다! 앙투안은 발판을 제거하고 말을 다듬질하고 있었다. 이에 니콜라는 힘껏 용기를 내어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던 앙투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물었다. “아저씨, 벽돌 안에 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필자는 이 이야기를 아주 좋아한다. 니콜라가 그랬듯이 우리가 얼마나 자주 순진함에 빠질 수 있는지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마술사의 모자에서 튀어나오는 토끼처럼 우리에게 갑작스레 나타난 모든 것이 언제라도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상상하는 순진함이다. 융에 따르면, 원형의 겉모습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마치 정신 속에서 이전에 존재한 면모라고 여기는 것은 니콜라와 매한가지 아닌가? 이야기 속에서 말은 오로지 조각가의 노력이나 실제 그가 했듯이 돌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끄는 행위에 의해서만 출현할 수 있었다. 오로지 그때만이 돌은 어린 니콜라의 눈 속에서 말이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발제의 한 사례라고 본다.

융에 따른, 정확히 말해서 최근의 인식론적이며 과학적인 발전에 비추어 그의 논지를 따른 필자의 가설이라면 이전에 존재하는 원형의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이것은 최소한 개념의 가치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가설이 주체의 주체성에 적용될 것인데, 이때 주체의 주체성은 의식 자체의 행위와 동시에 출현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확실히 우리는 어떤 심령으로 포장된 듯한, 혹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자아도취적인 구성체에 대한 프로이트의 접근방식으로부터 백만 마일은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에게로 마지막으로 돌아가 본다면, 그가 주체의 육체에 투여된 리비도라고 기술했던 나르시시즘도 발제라고 판단해 볼 수 있다. 투여(investment)는 육체의 출현과 함께하는 공동의 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에는 단계 하나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가(auto)’ 부분이 없이는 자가성애(auto-eroticism, 즉 나르시시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 자신은 기존에 만들어진 나르시시즘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차적 나르시시즘이 출현하는 조건은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이라 부르는 이전의 존재가 아니라, 이차적 나르시시즘의 선제적 존재일 것이다. 자기의 의식과 제 몸에 대한 자기성애적인 투여가 자기의 표현과 함께 공동으로 출현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활한 역설이다. 그러니까, 표현의 행위와 표현되는 리비도적인 투여(libidinal investment), 즉 이 경우 자기인데, 이들은 곧 하나이며 동일한 과정이다. 주체만의 주체성이 발제되는 과정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럼에도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을 상정하는데, 이는 구별되긴 해도 함께 결합하는 어머니와의 관계 속의 주체로 구성된다. 프로이트는 제안하기를, 아기는 구별에 대한 의식이 없어서 그 부족한 인식을 오래된 기원인 듯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동안의 유아관찰 연구들은 프로이트의 이 제안과 충돌한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계 사이에 어느 정도 구별된 지각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기의 지각이 불편, 불안, 심지어 공포의 원천이 된다 하더라도 아기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어느 정도의 능력을 또한 표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출현과 발제에 관한 생각에서 융처럼 부족함이 없지 않았을까? 사실, 과연 원초적인 나르시시즘과 이차적인 나르시시즘이 공동으로 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세계를 자기에게 다른 것으로 표현하고, 또한 그것을 다르지 않은 것으로 감각하는 행위는 하나라는 점, 불가분하게 동일한 난제라는 것을?

이 질문들은 그가 돌 위에 앉는지 그가 앉은 돌이 그인지 어린 융의 진퇴양난과 연결된다. 결국 이 질문은 자아와 자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제로 끌고 갈 것이다. 정리하면, 무엇을 생각하든 융의 생각은 그를 이들 대안 중 어느 쪽으로든 기울도록 하지 않았다. 융이 ‘나’라고 뜻한 것은 전적으로 데카르트의 ‘나’와 매우 같은 것으로 코기토의 주체이다. 이는 그가 나온 세계를 감각하고 상상하는 자로서 언제나 해석될 수 있다. 그 세계가 자기의 내적 세계이든 돌의 외적 세계이든 두 세계는 종국에는 서로 공동 출현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다른 길을 걸었지만 프로이트와 융은 주체성, 의식이나 무의식 형태의 주체성 혹은 의식과 무의식적 주체성과 같은 인식론에서 서로 공통된 기초를 공유한다. 융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했던 이들에게는 융의 작업 속에서 이것이 지배적인 연구이기 때문일 것인 반면, 프로이트적인 접근에서 이는 매우 다른 선도연구로부터 천천히 발전되는 것이다. 확실히 프로이트의 마지막 저서인 《모세와 유일신교》(1937~1939)를 통해서만 그가 이 질문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것 아닌가?

융의 연구로 돌아와, 필자는 이런 맥락에서 주체성은 발제이며, 이는 주체와 객체뿐만 아니라 자기와 자아의 공동출현과 함께한다고 말해도 좋다고 믿는다. 이 토대 위에서 보면, 주체성은 더 이상 하나의 적절히 구성된 주체에 의해서만 형성되지도 않는다. 주체가 자기로부터 생겨난 이상, 주체 자신에 의해 그 경계선들이 지각될 수 있는 육체로부터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융의 출현적 주체성은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과정이며, 생명이 있는 한 끝없이 재작업이 이루어지는 동력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주체성은 진화의 보장된 산물로 여겨질 수 없다. 그보다는 어떤 잠재성으로서 아무런 보장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와 맞서 자각하는 자아의 행위 위에 기초된 잠재성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확실성을 거부하면서 결정되지 않는 고유의 주체성에 대한 의식을 받아들이는 윤리적인 행위이다. 돌 위에 앉든 그가 앉은 돌이든 존재의 확실성이 무엇이든 그렇다.

이 점에 이르면 우리는 일원론자라 부를 수 있는 세계관과 충돌한다. 그러니까 이 관점에서 세계는 물질과 정신 양상이 본질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지각되지 않다. 세계는 그 표현이 지각되는 방식 속에 있으므로 물질과 정신은 단지 그 발현이 다를 뿐이다. 애트맨스패셔는 공시성의 관념과 연관 지어 이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는 융이 파울리와 함께 어떻게 양면적 일원론에 가까이 도달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양면적 일원론은 우리 세계에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표현이 현재적으로 존재하지만 매우 우연적으로만 동시에 지각될 수 있다고 상정하는 일원론을 의미한다.

 2014년 논문에서 애트맨스패셔는 양면적 일원론의 이런 유형이 지닌 특별한 성격을 기술하고, 세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본질에 대한 지각이 가능한 산출물들은 공존하지 않는다는 중립적인 일원론과 그것을 구분하고 있다. 해당 논의로부터 너무 동떨어져서 필자는 이 생각을 여기서 더는 발전시키지 않을 것이다. 애트맨스패셔의 논문에서 도출하여 이어갈 것은 단순하다. 그는 원형과 공시성에 기대어 융과 파울리의 인식론으로 파고 들어가서 어떤 결정성의 부족을 부각시키는데, 필자도 똑같이 돌 위에 앉은 어린 융에 의해 경험된 그것에 기대어 인식론을 논의할 것이다.

추가할 것은 주체성의 그것이든 인식론적인 개념들에 있어서든, 이 결정성의 부족이 결정을 못한다거나 나름의 해결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거나, 혹은 병리학적 절차에 기인한 차별화의 무능력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이는 온전히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다. 주체에 의해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하나의 주체로서 선택을 만들어 온 바로 그 운동 속에서 발생한 선택이다. 주체는 이로써 주체성의 기초를 발견한다.

3. 동양에서 주체성의 개념

필자가 진전시켰던 주체성에 대한 접근은 동양에서 발견되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특히 힌두교와 불교가 그러한데, 이 두 전통 속에서 주체의 주체성은 자아나 의식으로 축소될 수가 없다. 실상 이 전통에서 의식적인 주체를 단지 주체의 의식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끼이다. 이는 허상이며 인간의 깊은 고통의 원천이며 인식론적인 의미에서는 병리의 원천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삶의 목적은 자기의 탈주체성을 찾는 것이 된다. 세계 속에 자기를 녹여버리는 것이다.

서양인은 동양철학을 서구적 방식으로 바라보기에 이를 데카르트적 사유와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서양에서는 누구라고 정해져야 가치를 얻으며 개인은 주변과 구별되어 깔끔하게 정의된다. 아니면 어린 융의 원초적인 질문에 다시금 응답해 보면, 서양은 “나는 돌 위에 앉아 있는 자이다”라고 응답할 것이고 동양은 “나는 그가 앉은 돌이다”라고 응답할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서양인의 귀에는 후자가 모호할 것이다. 데카르트적인 관점으로 보면 문장 속의 ‘나’는 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외면적인 모호성에 대한 응답으로, 동양의 수많은 명상 전통은 실견(實見)이나 견성(見性)의 개념으로 대꾸한다. 여기서 실견은 자아에 대한 융의 정의와 연계되면서, 의식에 이르는 무엇을 의식하도록 남겨진 의식의 부분을 대변한다. 그러나 불교나 힌두교의 전통을 보면, 실견은 융의 자아와 달리 의지를 향하지도, 행동을 향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융의 자아들은 스스로 인식되면서 현전하는 정신적 동력과 부딪치도록 요구받으며 또한 항상 구별된 자아의 상태로 준비된다. 반면에 명상의 견성은 마치 하늘도 없이 아무런 방해 없이 유유자적하게 하늘 위를 지나는 구름처럼 주체를 혼란시키거나 가로지르는 모든 역동성과 재현을 의식하도록 운명 지워진다. 여기에는 충돌의 관념이 없으며 실견은 어느 한쪽도 취하지 않고 개인적인 것에 집착하려는 생각도 버린다.

한편에 동양이 제시하는 윤리적인 입장이 있고 이와 다른 한편에 융의 입장이 있다. 이 차이는 정신의학적 전이가 한순간 의사들에게 생겨서 증인으로 있게 되지만 그 전이의 동력에는 개입하지 않는 우리의 임상 업무에서는 아주 익숙한 것이다. 의학적 분석의 어떤 순간에는 간혹, 부분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분석가와 함께 참여하거나 분석가와 충돌하기도 한다.

의사의 분석적 주체성의 이 양상을 말미에 잠시 다시 언급할 것이지만, 자기분석과정이란 정신적 동력에 의해 자기가 이끌리도록 하여, 종국에 가서는 그 동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끔 구성하는 것이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이 과정을 발전시키는 도중에 융에게서 분석적 주체성의 양상이 보인다. 이는 주체가 내적 정신의 동력과 충돌하여, 그에게 무엇이 벌어지는지 증인으로서 주체의 태도를 아울러 요구하는 하나의 윤리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불교도나 힌두교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융에게 주체의 주체성은 자기가 의식하는 자기에 관한 그런 양상들로 축소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 의식은 단지 자기의 통제소이며, 주변이든 중앙이든 어느 정도이든 주체의 통제소와 혼동될 수 없다. 대문자 주체(Subject)로서 주체를 정의할 수 있도록 힌두교도들은 이를 아트만(atman)이라 칭하며, 불교도들은 이를 붓다라 칭한다. 심리학적이기보다는 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관념은 융의 자기에 대한 생각과 명백히 동맹적일 수 있지만, 이 생각들이 실상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고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불교에서 궁극적인 실재란 없기에 붓다는 또한 무아(無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는 허상인데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의 비영원성, 즉 무상 때문에 그렇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신성적인 실재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도록 결정되어 있다.

그러니, 아(我)라고 할 만한 것 또한 없다.
여기 세계에 대한 두 형이상학적 개념 사이에 잘 알려진 대립이 있다. 이 대립은 너무 강조되어서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것은 원형에 대한 질문, 특히 자기에 대한 주제로 파고들자마자 부딪치는 것으로 융 커뮤니티의 보다 더 심리학적인 문맥 속에서 우리가 어느 경우든 마주치는 대립이다.

기성 구조로서 원형을 보는 것이나 출현으로 원형을 보는 것은 화해 불가능하다. 그뿐인가? 사실, 시간적 연속성으로서만 그것을 고려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이 질문을 풀지 못하게 된다. 연속성의 생각에는 함축된 논리가 있기 때문인데, 구조가 조직하는 표현에 필연적으로 이미 앞서 있는 구조를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원형은 고유의 표현들을 지닌 기성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융이 지녔던 것으로,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이런 선험성을 강제하지 않는다.

 연속적인 시간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논지로 세계를 생각하는 인간의 강한 충동인데, 이때 시간성은 변할 수 없는 준거의 틀이 된다. 이런 경우를 빼면 말이다. 그러하니 출현을 말하는 것은 이 준거의 틀에 위협을 주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예로 든 효소의 생화학적 구조를 다시 떠올리면, 결정론적인 한 묶음이 구조를 출현케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조는 출현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은 없으며 단지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모임이 후발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탄생케 한다. 이것이 효소와 동일한 시간에 발생한 효소의 구조이다. 생명이 발생하는 과정의 조건을 보면서 우리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이해한다. 선천적인 것은 생명이 발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지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필자는 강조한다. 그리고 효소와 그 구조를 탄생시키는 것은 과정 그 자체라는 점도 강조한다.

 이 선천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은 물론 충분하지 않다. 그것들을 활성화하는 환경에는 그것들이 부딪쳐야 할 다른 조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 특성이냐 획득된 특성이냐에 대한 질문은 이 단계에서 불분명해진다. 이것들은 어떤 복잡한 전체에게 주어지는데 이 전체는 고전적인 그런 극단성뿐만 아니라 양자가 벌어지는 환경마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형의 주제, 혹은 그보다 자세하게, 융의 사고에서 주체의 주체성의 토대가 되는 자기에 대한 주제로 이제 되돌아오면, 자기는 자기 표명이 없이는 안 되는 것으로, 자기 표명을 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첫 번째로 표명되는 것부터 개별적인 자기인 것이다. 그러니 융의 ‘자기’와 힌두교의 무아 사이에 강한 연결이 있어 보인다.

   

다시 여기서, 돌 위에 앉아 있음에도 혼동과 분리 사이의 선택을 거부할 때를 보면, 융의 윤리적인 입장은 완전한 주체성과 텅 빈 주체성 사이의 선택을 거부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무아도 마찬가지다. 가장 극적인 대립들 사이에 있다 해도 몇몇 인간은 어느 하나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이기도 한다. 이는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맥락 속에서 두 극단 사이의 모순된 대립을 붙잡는 것이다. 이는 솔직한 망설임, 주체성에 대한 원초적인 의심이며, 이는 결국 자신의 강함과 강건함을 그 유연성을 통해, 그리고 불안정한 자연과 구조적 무상감을 통해 틀어 버리는 주체성에 대한 원초적인 의심, 솔직한 망설임이다. 필자의 관점으로, 주체성의 생각에 대하여 동양과 서양이 제기했던 고전적인 접근으로부터 융의 접근을 엮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결론으로 임상 처방에서 분석가의 주체성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의사인 우리 또한 우리 인성에 대하여 아는 무엇과 환자 개인들과 함께 정신의학적 전이를 하면서 우리 안에 흔들리는 무엇 사이에서 우리의 주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불확실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은 현시점의 분석가로서 우리 주체성의 근저에 깔린 불확실성을 우리가 붙잡아 두려는 데에 수반하는 윤리적인 딜레마가 아닐까?

〈그림 2〉는 이와 같은 주체성의 불확실성을 묘사한 것이다. 두 개의 태양 주변을 도는 지구의 궤도 예인데 이를 보고 명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화상은 다음 웹을 참고하면 된다.
(http://www.upscale.utoronto.ca/PVB/Harrison/Flash/Chaos/ThreeBody/ThreeBody.html.) ■


 
   
신항식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서양 근현대사로 DEA, 파리 디드로 대학에서 제3세계 사회학으로 DEA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 등 역임. 현재 한양대, 이화여대, 연세대 초빙교수이다. 주요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커뮤니케이션》 등이 있고, 〈신자유주의 디아스포라〉 등의 논문을 썼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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