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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욕지족(少欲知足), 불교적 삶의 지향* / 김광수
[71호] 2017년 09월 01일 (금) 김광수 wonthong1@hanmail.net

1. 시장경제의 실상

1) 살처분과 후쿠시마

조류독감에 의해서 3,200만 마리의 닭과 오리들이 살처분되었다. 구제역으로 인해 소 돼지의 살처분도 확대되었다. 당시에는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그 문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멀어져 갔다. 살처분은 그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 겨울에는 돼지 구제역 때문에 또한 무수히 많은 돼지들이 산 채로 땅에 묻혔다. 그 참혹한 현장이야말로 이루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렇게 끔찍한 살처분은 해마다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고통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양돈농가, 양축농가에서는 전 재산이 땅에 파묻히기 때문에 피눈물이 나겠지만, 애써 기른 동물들을 그렇게 파묻고 괴로워하는 것이 경제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동물들의 감정이 인간이나 조금도 다름없어서, 요즘 SNS에는 그들의 우정과 애정과 새끼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동영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 것들을 볼수록 우리가 동물들을 더 이상 그토록 잔인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고, 불자로서 이렇게 지옥 같은 문명을 과연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도 그러하다. 후쿠시마에 살던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옥토를 잃고, 재산을 잃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제 일본산 물고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팔릴 수 없게 되었고, 일본 탈출(Japan Exodus)도 늘어나고 있다. 무엇이 일본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이 해일(海溢)이라는 불가항력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해일이 올 줄 모르고 그토록 해로운 원자력 발전소를 그곳에 세웠다는 말인가? 원자력 발전소가 절대로 안전하다면 어째서 서울이나 동경에 세우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그토록 참혹한 결과를 당하고도 일본 정부는 원자력 발전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 해외투자 실패, 등등 무수한 경제 실책과 부패를 저질렀다. 경제를 살려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경제라는 것이 그토록 지구를 파괴하고, 자비심을 파괴하고 고향을 잃게 하면서도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요즘은 또 미세먼지 때문에 난리인데, 사람들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외계인들 속에서 사는 것 같아서 끔찍하다. 지구의 종말이 벌써 온 것만 같아서 더욱 무섭다. 미세먼지는 먼지가 아니다. 매연, 즉 스모그(smog)이다. 그러니 이렇게 숨도 못 쉴 정도로 국토를 만들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그 경제라는 것에 연연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불교는 제 땅 하나 제대로 못 가꾸면서, 제 삶의 터전을 인간이 살지 못할 땅으로 만들어 놓으면서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2)헬조선과 대중빈곤

결국 오늘날 사람들은 경제에 종속되고,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돈이 인간의 주인이 되고, 사람들은 돈에 마비되어 여러 가지 고통을 받고 있다. 그것은 주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때문인데 이 시장경제가 초래하는 문제점은 대단히 많다.

(1) 실업

기업이 잘 되려면 우선 인건비를 줄여야 한다. 그것은 즉, 저임금과 실업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업이 잘된다는 것은 국민이 고통받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기업이 잘되어야 국민이 행복하다’는 거짓말이 너무도 당당히 판을 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은 또 그렇게 주입받는다. 기업이 잘되기 위해서 결국 대중은 실업자가 되거나, 저임금 노동자나 임시직이 된다. 이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일이고 자기 자신의 일이다. 이제 무인 자동차가 나오고, 무인 자판기, 인터넷 구매 등이 계속되면서 실업자는 더욱 늘어난다. 그리고 대중빈곤의 시대는 점점 더 가속화된다. 그러므로 4차 산업혁명과 생산자동화는 결국 온 국민의 무덤을 파는 일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도(顚倒)되어 있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인 것이다. 경제가 좋다는 것은 누구에게 좋은가? 그것은 대기업에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에 좋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실업과 저임금을 준다는 것이다. 즉 자본가에게 좋은 것이 국민에게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이 범국민적인 전도몽상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달한다는 뜻은 생산이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하고, GNP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성장해야 하고, 대기업에서 이윤이 많이 나기 위해서는 우선 인건비부터 줄여야 한다. 그 결과가 기계화이고, 독과점이고, 저임금이고, 임시직이고 노조 탄압이다.

(2) 대중빈곤

실업과 저임, 혹은 고용불안은 결국 대중빈곤과 같은 말이다. 젊은이들은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하고 집도 못 사고 출산도 못 한다. 그런데, 기업이 생산한 물건을 누가 사는가? 소비자가 산다. 소비자가 사 주어야 공장이 돌아가고 기업이 산다. 소비자가 돈이 없고 가난하면 물건이 안 팔린다. 결국은 분배우선주의가 되어야 서로 살 수 있는데, 현재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 경제에 매달려서 경제를 짝사랑해 왔건만 경제는 야멸차게 우리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버린다. 경제를 위해서 핵발전소를 포기할 수 없고, 경제를 위해서 살처분을 계속해야 하고, 경제를 위해서 온 국토를 숨도 못 쉬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다고 해도 경제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고민이다.

3) 생산과잉

(1) 과잉생산

자본주의는 기업의 생산활동을 그 기본으로 한다. 즉, 기업이 생산을 잘함으로써 인간이 행복해진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물론 ‘물질에 의해서 인간이 행복해진다’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비열한 발상에 의한 것이다.
기업은 생산된 상품을 잘 팔아야 하지만, 오늘날은 생산되는 물자가 너무 많다. 상점마다 시장마다 물건이 너무 많다. 그러나 살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이 생산과잉이다. 생산품을 소비할 수 없다면 기업은 도산한다. 국가는 왜 이러한 과잉생산을 통제하지 않는가. 그걸 보면 국가도 전도몽상이다. 시장 자유주의는 국가가 이러한 생산에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국가는 기업에 간섭하지 말고 기업에 무한한 자유를 주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결국은 그러한 자유에 의해서 무수한 기업이 도산한다. 그러니 국민을 불행으로 이끄는 길이 이 ‘자유’라는 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2) 성장제일주의

올바른 경제정책이란 중소기업을 살려야 하고, 자영업을 살려야 하고, 독과점을 방지해야 하고, 분배우선 정책을 써야 한다. 그것은 성장우선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장을 포기하면 대기업이 망하고, 국제 경쟁력이 낮아지고, 외국 기업의 먹이가 되고, 결국은 나라가 외국에 먹히고 만다. 경제성장도 하면서 중소기업도 살리고, 자영업도 살리고, 실업도 줄이고, 분배정의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빵을 먹고 나서 동시에 손에 들고 있을 수는 없다. 성장과 분배를 함께 성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경제성장을 한다고 해도 그 성장의 결과는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한 실업과 경쟁과 빈곤대중만 늘어난다.
(3) 경쟁

기업은 항상 극심한 경쟁 상태에 있다. 그래서 저임금을 유지해야 한다.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임금을 억제하고 고용을 줄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렇게 생산된 물건이 잘 팔려야 한다. 그리고 시장에서의 판매는 경쟁을 전제로 한다. 그 경쟁은 무수한 사업가, 기업가들을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사업을 해 본 사람들은 기업 간의 경쟁이 얼마나 피를 말리는 일인지 잘 안다. 그러니 이렇게 지옥과도 같은 경쟁을 전제로 하면서도 경쟁이 인간을 잘살게 해 준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또한 전도몽상이다.

(4) 배금주의와 소비

안 팔리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 물질문명이 고안해 낸 방법이 상품광고이다. 광고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비자들을 현혹한다. 오늘날 광고는 시청각 매체와 과학 기술의 발달로 매우 현란하다. 어찌 보면 요즘 사회는 광고가 이끌고 가는 듯하다. 신문, TV는 물론, 인터넷 포탈이나 SNS 등도 광고수입을 통해서 운영된다. 선거도 광고전략이 큰 영향을 준다. 결국 국민의 의식과 생활과 가치관은 광고주-기업-에 의해서 좌우된다. 심지어 올림픽 경기도 광고수입 때문에 운영되는 것이요, 한 나라의 국토개발 정책도 올림픽운영위원회에 의해서 결정된다.

기업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 소비자들을 현혹한다. 소비자는 무엇을 가지고 상품을 사는가? 돈을 가지고 상품을 산다. 결국 돈이 소비자들의 인생을 좌우한다. 이렇게 오늘날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 광고가 지배하는 사회,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는 온 국민을 돈의 노예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상품시장, 시장경제, 상품광고가 존속되는 한, 사람들이 TV를 보고, 마트에 쇼핑하러 가는 일에 열중하는 한, 문학 · 철학 · 역사 공부는 외면당하고, 교회나 절을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4) 자원고갈과 지구파괴

이러한 생산 위주의 경제는 지구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초래한다. 지구가 파괴되면 당연히 인류는 멸망한다. 지구파괴의 내용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자원고갈이고, 둘째는 지구환경 파괴이다.

(1) 공유자산

기업은 생산활동을 위해서 공기를 쓰고 물을 쓰고, 산하대지를 깎아 먹고, 아름드리나무를 수만 평씩 베어낸다. 그래도 기업은 자연을 손상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기업이 공해를 수없이 배출해도 공해에 대한 부담금은 거의 내지 않는다. 시장경제는 이렇게 하잘것없는 물건들을 생산해 내면서 정말로 소중한 물과 공기를 더럽히고 산하대지를 파괴한다. 기업은 인간이 함께 소유해야 할 공유자산을 무참히 파괴하면서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 과정에서 생긴 소득과 이윤은 오히려 독차지한다. 어째서 이런 불공정하고, 부당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정치를 기업과 자본가들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빈부격차로 사회를 파괴하고 동시에 생산시설과 과학장비로 자연을 파괴한다.

(2) 자원고갈

자원고갈 문제로 흔히 드는 것이 석유 피크(oil peak)라는 개념이다. 즉, 앞으로 인류가 쓸 수 있는 석유자원이 그동안 썼던 양보다 적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석유의 소모량은 해마다 더 늘어난다. 그리고 오늘날 생산되는 제품 대부분은 석유화학 제품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화학산업도 모두 문을 닫게 된다. 농업도 석유가 없으면 짓지 못한다.

계절을 초월하는 온실농법이나, 혹은 비료와 제초제, 혹은 기계농법도 모두 석유에 의존하는 것이다. 다수확 품종의 개량이나 종자 생산도 석유에 의한 것이다. 난방도 물론 불가능하다. 석유 없이는 도시문명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한때 진흙(Shale) 속에 무진장의 액화가스가 묻혀 있다고 흥분했으나, 곧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채취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광범위한 지반 파괴로 인하여 국토를 완전히 못 쓰게 하기 때문이다. 석유를 뽑는 곳마다 땅바닥이 가라앉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문명은 대체 무엇에 쓰는 문명인가. 또 그렇게 땅바닥을 주저앉혀서 뽑은 석유로 자동차를 굴리고, 여객기를 쉴 새 없이 하늘에 띄우고, 쇼핑가를 밤마다 불야성으로 만들고, 팔리지 않는 상품들을 계속 생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쨌든 석유 고갈로 인하여 우리 생활이 일순간에 원시생활로 돌아가야 함은 확실하다. 그래서 대안으로 찾는 것이 원자력 발전이지만, 그것은 석유 고갈보다 더욱 위험하다.

(3) 지구환경 파괴

① 지구온난화: 지구온난화로 수많은 기상이변이 생겨나고, 해수면이 높아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온난화로 인하여 바다 밑이나 시베리아 동토 밑에 깔린 메탄가스(CH3)의 폭발이 발생한다면 지구의 파괴는 걷잡을 수 없다. 지구온난화는 왜 생기는가. 그것 역시 기업들의 생산활동에 의해서 생기고, 시민들의 소비활동에 의해서 생기고, 에너지를 과다하게 소비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기상이변에 의해서 벌들이 다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가루받이가 일어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곤충에 의해서 열매 맺는 농작물은 생산이 불가능해진다. 재앙이다.

② 하천오염: 그 원인은 공장폐수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축산분뇨로 오염되어 있다. 소고기 돼지고기 몇 점 더 먹자는 것 때문에 온 산하가 더럽혀지고 있다.

③ 대기오염과 매연: 기업은 공기를 더럽히고, 산하대지를 더럽히면서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공장과 발전소, 자동차는 미세먼지를 만들어 숨을 쉬기도 어렵다.

④ 유전자 조작과 기업축산: 과학의 발달로 피임과 태아감별이 가능해 져서 성도덕이 파괴되고, 가정이 파괴된다. 유전자조작(GMO) 농산물이 대량 생산되어 그것을 인간이 먹고, 가축이 먹고, 그 고기를 인간이 먹어 불임이 늘어나고 급기야는 종족말살의 위기까지도 거론되게 되었다.

   


5) 구매력과 가계부채

기업이 생산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생산된 상품이 소비되어야 하는데, 상품을 소비해 주어야 할 소비자들은 구매력이 없다. 가계부채 1,400조 원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채무자란 무엇인가. 빚에 발이 묶인 노예이다. 노예란 무엇인가.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쇠사슬에 묶여 사는 사람이다. 빚을 졌기 때문에 건강을 해쳐 가면서까지 열악한 환경에서도 노동해야 하고, 부당한 노동조건에도 복종해야 한다. 빚이 바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족쇄이다. ‘우리는 수행해서 부처를 이루고, 보살행을 하여야 할 사람’인데 어찌 채무자가 되어 노예 생활을 하며 일생을 보낼 것인가.

사람들은 왜 빚을 지는가? 기업은 상품을 팔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비자를 현혹한다. 소비자는 빚을 내어 스스로를 노예화해 가면서 상품을 산다. 이렇게 현대의 소비자는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이다. 그렇다면 빚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날 대중빈곤의 시대에 수입, 소득을 늘릴 방법은 없다. 유일한 방법은 사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실업과 불완전 고용 그리고 대중빈곤은 더욱 심해지기 때문에 국민은 극단적으로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평생 채무자라는 노예세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빚은 지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또한 현재의 시장경제 구조로는 빚을 지고 나서 다시 그 빚을 갚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이는 대중빈곤이 심화된다는 뜻이고, 구조적 빈곤이 고착화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 빚지게 된 원인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빚을 갚을 가능성도 없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무모하게 빚을 내어 자영업을 하고 투자를 한다고 해서 용기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이렇게 오늘날은 극단적인 소욕지족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재화를 낭비하지 않고, 아껴 쓰는 일은 비단 불자들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인류의 위기를 이야기하는데, 그 위기는 바로 이러한 물자의 낭비와 사치, 과도한 소비생활 때문에 온다. 지구환경생태 위기와 자원고갈의 위기, 두 가지 모두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로부터 초래되는 것이다.

2. 발상의 전환

이처럼 생산과잉, 지구파괴, 지구자원 고갈은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필연적 귀결이다. 동시에 이는 배금사상과 소비과잉, 실업,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금전에의 노예 생활을 초래시킨다. 이런 생활에서는 수행이나 박애심도 불가능하다. 결국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자연을 죽이고, 지구를 죽이고, 인간을 죽인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장 귀하다고 믿는 우리 불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과잉생산을 줄이는 길밖에는 없다. 그것은 동시에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인다는 뜻이다. 불교는 물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불교는 인간이 편안함을 추구할수록 타락한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스스로 노력하여 건강하게 살고, 건강하게 수행하고, 건강하게 이타행을 하여 함께 잘살기를 가르치고, 그러자면 반드시 우리가 물질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은 적게 소비하는 과정에서 물질적 만족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류가 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노예적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동시에 기업은 지구보호와 환경보존을 위해 생산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기업가는 자발적으로 생산을 줄이지 않는다. 소비가 줄고 생산된 물건이 팔리지 않아야 비로소 생산을 줄인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운동이 바로 소비절제 운동이다. 인간이 물질적 향락을 누리고, 편리를 추구하면서 그와 동시에 경제적 예속을 벗어나거나, 지구파괴를 막을 수는 없다. 인간은 물질적 만족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 정신적 수행과 서로 아끼는 마음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소욕지족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야말로 지구를 구하고 예속적 인간을 구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이다.

   

따라서, 경제 문제는 경제적 방법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물질과 편리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어떤 경제체제가 되더라도 인간을 만족시켜 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또 그런 체제가 가능하지도 않다. 이는 즉, 인간의 경제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 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심성의 문제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아니고는 지구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마음의 평화를 갖자면 우선 나부터가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고, 보시, 인욕, 지계의 육바라밀을 실천하자면 나부터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적 수행의 첫발자국이 바로 소욕지족의 두타행이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극도로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제적 굴레에서 벗어나서 이웃이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나부터 소욕지족을 실천하여야 한다.

3. 불교적 삶의 지향

불교는 고래로부터 절약하고, 적은 것에 만족하며 소비를 최소화하여 효율적인 경제생활을 하는 데 모범을 보여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불교의 훌륭한 전통이 오늘날 이 지구적인 파멸을 막아내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지구적 파멸을 막기 위해서는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며, 그것에 만족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살아가야 한다.

불교는 그 역사가 시작된 때로부터 무소유의 생활을 주장해 왔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이 지구의 파멸을 막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물자를 최대한 절약해야 지구의 위기를 구할 수 있다. GNP가 높은 국가가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많이 입증되었다. 잘살게 해 주겠다는 정치인을 뽑아서도 안 된다. 부처님의 정신으로 절약적인 물질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한편, 우리가 물질에 탐착하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수행에 힘쓸 여유를 갖게 된다. 그리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고, 남의 아픔과 괴로움을 이해하고 함께 도울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된다. 물질을 추구하여 시간과 노력, 관계들을 물질을 추구하는 데 쓰고, 몸과 마음을 거기에 투입하면, 혹은 채무자가 되어서 빚에 이끌려 다니게도 되고, 혹은 스스로의 생활도 못 찾고 이웃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가지기도 어렵게 된다. 그것은 불자로서의 떳떳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적은 것에 만족하고, 가능한 한 아껴 쓰고, 나누어 써야만 물질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물질이 없어도 행복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수행과 자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그것이 불자가 자본주의를 이기는 해법이다.

   

불자가 의식주를 낭비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행이다. 의식주에 할애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아끼면 수행을 위한 최대한의 시간과 노력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거지, 걸사(乞士)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거지란 무엇인가. 소유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저축도 없는 사람이다. 의식주를 최소한으로 하고, 수행에만 전념하고, 최소한의 의식주를 생활화하는 일 그 자체를 수행으로 삼는 것, 그것을 두타행(頭陀行)이라고 한다. 불가에서는 두타행, 즉 ‘의식주에서 재물을 최대한으로 극단적으로 아끼는 생활’을 초기부터 지금까지 매우 강조하였다. 도솔천(兜率天, Tusita)은 지족천(知足天)이라는 뜻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 유통 교환 등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작은 것을 지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불교경제학에서 말하는 소욕지족의 철학은 바로 오늘날 개인적 경제문제와 전 국가적 경제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데 가장 큰 해결책이 될 수 있다.

1) 소욕지족을 실천하려면

소욕지족은 누구나 바로 가정이나 직장에서 실천할 수 있다. 단지 소비를 최대한으로 줄이겠다는 결심만 있으면 된다. 소비하지 않고, 검소하게 정신적 즐거움을 누릴 생각, 즉 자발적 가난이라는 생각만 있으면 된다,

소욕지족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농촌으로 내려가고,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의 횡포가 심해지고, 시장자본주의의 폐해가 심해져서 취업이 안 되고, 자영업이 실패하고 소득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단칸방에서 굶어 죽었다는 어느 여류 작가의 이야기도 있다. 또 지하 단칸방에서 굶어 죽었다는 세 모녀의 신문기사도 있었다. 그대로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일단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 된다면 당장의 죽음은 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돈을 벌겠다고 가족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것부터가 사서 고생하는 일이다.

① 도시에서: 도시에서도 소욕지족을 실천하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것은 ‘도시 거지’가 되는 일이다. 그 이상적인 형태로 일찍이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거지 성자 ‘페터 노이야르’가 있다. 또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도시 거지로 살았다. 장점은 출근하지 않고 직업생활을 하지 않으므로 무한정의 남는 시간과 정력을 수행과 연구에 쏟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렇게 사는 것이 거저 되는 것은 아니고 나름 노하우와 훈련이 필요하다. 부처님법을 수행하는데 쉽게 되기야 하겠는가. 자발적 도시 거지가 많은 나라가 일본이다. 요즘 도시 거지 생존법이 일본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다. 대개 그들은 도시에서 가난뱅이 해방구를 만들고, 그곳에서 주로 폐품처리나 중고품 고물상을 하면서 서로 돕고 살아간다. 자기들끼리 지역화폐나 노동화폐(쿠폰)도 사용한다.

② 출가: 거지가 되는 또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출가이다. 비구는 원래 거지이다. 다만 거지와 다른 점은 수행을 위한 자발적 거지 혹은 목적성 거지라는 것인데 그것은 이 경우에 바로 해당되는 것이다. 결혼했거나 가족이 있어도 가능하다. 온 가족이 출가하면 더욱 좋다.

③ 농촌: 농촌은 도시보다 집값이 싸고 비어 있는 집도 있다. 도시에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만, 농촌에서는 돈이 없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도시는 원래 시장에서부터 기원한 것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공동체 개념이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돈이 없으면 일단은 도시를 피해야 한다. 물론, 거지 노릇을 하더라도 도시가 좋다면 그야 어쩌는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한 생활은 아니다.

④ 농사: 어떤 사람은 농사일이 매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노력하고 함께 극복하여야 한다. 취업도 안 되고, 농사일도 짓지 않겠다면 뭘 먹고 살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본적인 도덕성의 문제이고, 경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농사지어서는 먹고살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 수 없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결국 물질적 불만에 가득 차서 불행한 나날 고통의 나날을 보낼 뿐이다. 이런 사람을 교육시키고 반성시켜서, 빈한한 생활에 만족하며, 노동의 가치를 깨달아서 스스로 적극적으로 노동에 임하도록 하는 일이 종교가 할 일이다.

⑤ 공동체: 취업이 안 되고 출가도 못 한다면 농사라도 짓는 수밖에 없다. 세상이 달라져서 무산대중이 많아지고 실업이 많아지는 것은 가장의 무능 때문이 아니다. 또 한 가정의 경제를 아버지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이나 자녀의 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족 단위의 농촌농업 수행공동체가 권장된다. 다음 세 가지는 도시에서 실직했거나, 혹은 자발적 운동으로 소욕지족의 방법으로 농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슬기롭게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전략들이다.

2) 자발적 가난의 조직적 전략

소욕지족을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 가난이다. 그런데, 자발적 가난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소욕으로 만족하고,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과 전략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공동주거, 생태농업, 마을문화의 세 가지가 있다.

(1) 공동주거

공동주거의 대표적인 형태는 가족이다. ‘가족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 유의 격언은 너무도 많다. 기독교에서도 가정의 가치를 매우 중시하였다. 취업과 소비와 도시생활은 가족과 친구를 잃게 한다. 그래서 일단 도시생활을 포기한다면 매우 적은 비용으로 아주 높은 삶의 질을 얻을 수 있다.

성장경제는 가족의 가치를 무시하고, 소득만을 강조한다. 소득을 위해서 수많은 가치를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러한 미망에서 벗어나서 가족의 가치에 새롭게 눈떠야 한다. 기업은 개성의 강조, 자기주장의 강화 등을 통하여 양보와 배려라는 미덕을 없애고, 혼자 살기를 부추기고, 일인가족을 양산한다.
그러나 가족과의 재결합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부모와의 세대 차이도 있고, 형제도 많지 않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것이 공동주거 운동이다. 이러한 co-housing은 현재 대학가나, 공장촌, 혹은 종교공동체에서 많이 추진하는데, 도시 지역에서도 가능하지만 농촌 지역에서 추진하는 것이 더 좋다. 공동주거 운동을 통하여 소욕지족의 자발적 가난 운동을 함께 실천할 수 있다. 운동은 함께 조직적으로 실천해야 지속되고 가능해진다.

(2) 생태농업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더 이상의 수입이 필요 없다면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무언가 생업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생태농업이어야 한다. 농업의 가치는 거듭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오늘날의 농업은 지나치게 자연을 파괴하고, 에너지 소모가 많고, 상업적이고 시장생산적이다. 그러므로, 소중한 농업을 농업 본래의 가치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적 생태농업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물론 살생을 전제로 하는 어업이나 축산업은 배제된다.

생태농업의 큰 장점은 비용이 적게 들고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즉, 최소한의 노력과 투자로써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꾸어 쓰고, 다시 쓴다는 ‘아나바다’ 원리는 농업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상업적 경영에서는 금전적 수익성을 위해서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버려 버린다. 생태농업의 또 다른 측면은 수익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수익을 조금 덜 내더라도 비교적 적은 시간을 들이고 남은 시간을 통하여 수행하고, 독서를 하고, 학문연구를 하고, 교유하고, 가치생활을 하여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온종일 일해서 조금 더 소득을 얻는다 한들, 삶의 질이 떨어지고 소중한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 소득이란 의미 없는 것이다.

도시노동자는 도시생활에 높은 지출을 하면서 유혹적 소비에 많은 돈을 지출하고, 또한 높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힘든 노동을 감내한다. 그러나 도시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소비유혹을 뿌리치고 농촌에서 아나바다의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한층 높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3) 수행공동체 문화

인간은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인생의 보람과 가치도 느껴지고, 어려움도 덜어지고, 운동의 성취도 가능해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큰 부작용은 인간을 단자화(單子化)시킨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상품경제)는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인간을 직장과 돈으로 얽어매어 개별자로 떼어 놓는다. 그 결과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고 시들어간다. 오늘날 현대 사회병리 현상의 많은 부분이 혼자 산다는 데서 생겨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취업인지 모를 상황이다. 교육마저도 이러한 체제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때문에 공동주거를 하고, 생태농업을 하더라도 적절한 공동체 문화가 필요하다. 그 첫 번째가 수행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는 당연히 수행공동체이다. 불법의 가치를 함께 공부하고 단련하며, 동시에 소욕지족의 가치를 함께 수련하는 일이다. 그밖에 공동주거를 통해서 철학이나 학문, 혹은 예술이나 문학, 가무, 기타 취미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를 함께 영위한다면 공동체의 상호이해와 결속을 다지고, 삶의 질을 한층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도 필요하다.

4. 맺는말

이 글은 소욕지족으로 거대한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문제의 극복은 쉽지 않다. 그것은 매우 정교하고 전문적이고 치열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국민에게 소욕지족의 정신이 없다면, 즉, 성장이 좋고 돈이 좋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어떠한 경제정책도 실패할 것이다. 즉, 심성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소욕지족만으로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소욕지족 없이 또한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이 혹엄(酷嚴)한 야수(野獸)와도 같은 자본주의 시대를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

김광수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 대학원 졸업(치의학 박사). 동국대 불교대학교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불교경제학적 연구〉 〈불교의 가치관을 통해본 심층생태론 비판〉 〈소비사회에 대한 불교의 역할〉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불교사회경제사상을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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