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리 · 문화적 개황

동남아시아(東南亞細亞, South-East Asia)는 지리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하는 나라는 미얀마(Myanmar), 라오스(laos), 태국(Thailand), 베트남(vietnam), 캄보디아(Cambodia) 등이고, 말레이 제도에 속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Malaysia), 싱가포르(Singapore), 인도네시아(Indonesia), 필리핀(Philippine), 브루나이(brunei), 동티모르(East Timor) 등이다.

‘동남아시아’라는 지역 전체를 일컫는 호칭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일반화되었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서로 다른 인종 · 언어 · 종교 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라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서 지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67년 설립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은 동남아시아의 정치 · 경제 · 문화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하는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과 말레이 제도에 속하는 싱가포르는 대부분 불교를 믿고 있다. 말레이 제도의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즉 도서 지역에는 이슬람교가 널리 퍼져 있다. 필리핀과 동티모르는 유럽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를 거쳤기에 기독교가 우세하다. 이처럼 현재의 동남아시아에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계 3대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남아시아가 정치 · 경제 · 문화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는 배경에는 종교적 유대 관계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불교는 ‘상좌불교(上座佛敎, Theravāda)’라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동남아시아불교는 빠알리 삼장(Pāli Tipiṭaka)을 근거로 상가(Saṅgha, 僧伽)가 운영되기 때문에 의례는 물론 승려의 생활방식과 복장도 같다. 이처럼 동남아시아불교는 상호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기불교 교단의 모습을 비교적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2. 불교의 전래

스리랑카의 연대기에 의하면 붓다는 마가다국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王) 왕이 즉위한 지 8년째 되는 해에 입멸했다고 한다. 아자따삿뚜 왕은 아버지 빔비사라(Bimbisāra)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강력한 군주로서 여러 나라를 합병하여 마가다국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마가다국은 그 후 몇 대에 걸쳐 존속되었지만, 나가다사까(Nāgadāsaka) 왕 시대에 백성들이 왕을 몰아냈다. 당시 대신(大臣)이었던 수수나가(Susunāga)가 왕위에 올라 수수나가 왕조를 건국했다. 그러나 수수나가 왕조도 얼마 가지 못하고, 난다(Nanda) 왕조로 교체되었다. 난다 왕조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지만, 22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 왕조 시대인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서북인도에 침입해 왔다. 알렉산더 대왕은 서북인도에 그리스 국가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세웠다. 그런 다음 그는 회군하여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던 중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객사했다. 그 때문에 인도의 중원(中原)은 그리스인에게 정복되는 것을 모면하게 되었다.

그리스인이 서북인도에 침입한 혼란한 시기에 찬드라굽따(Chan-dragupta)라는 청년이 군사를 일으켜 재상 까우틸야(Kauṭilya)의 도움으로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마우리야(Maurya, 孔雀) 왕조를 세웠다. 그는 서북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전 인도를 정복하여 강대한 왕국을 건설했다. 찬드라굽따 왕은 24년간 통치했다. 그 뒤 그의 아들 빈두사라(Bindusāra)가 왕위를 계승하여 28년간 통치하면서 각지에 잔존하고 있던 반란 세력들을 진압하고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다. 이 빈두사라 왕의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저 유명한 아소까(Asoka, B.C. 268~232년경) 왕이다.

인도불교사에서 아소까(阿育王) 왕의 재위 기간에 불교가 가장 번성했다. 그는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여기는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간주되었다. 그가 불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 특히 그는 인도의 변방 지역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에 의하면 아소까 왕의 원조 아래 빠딸리뿟따(Pāṭalīputta)에서 제3결집을 마친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가 이웃 나라에 전도단을 파견했다. 연대기에 묘사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맛잔띠까(Majjhantika)는 까쉬미라(Kasmīra)와 간다라(Gandh-āra)에 파견되었다. 그는 다른 네 명의 장로와 함께 까쉬미라와 간다라로 가서 그곳에서 신통력으로 ‘알라왈라(Āravāḷa)’라는 뱀을 항복시키고, 사람들에게 《아시위소빠마숫따(Āsīvisopama-sutta, 蛇喩經)》을 설했다. 이때 8만 명이 불교를 받아들였고, 10만 명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왔다. ‘까쉬미라’와 ‘간다라’는 인접해 있는 국가였다. 경전에서 ‘까쉬미라’와 ‘간다라’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은 한때 이 지역이 한 왕조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까쉬미라는 파키스탄의 수도 페사와르(Peshawar), 지금의 카슈미르(Kashmir) 지역이고, 간다라는 붓다 시대 16대국 가운데 하나였던 딱까실라(Takkasilā)의 수도, 지금의 라왈삔디(Rawalpindi) 지역이다.

② 마하데와(Mahādeva)는 마히사만달라(Mahisamaṇḍala)에 파견되었다. 그는 마힌다(Mahinda)에게 구족계를 수여할 때 갈마사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데와두따숫따(Devadūta-sutta, 天使經)》를 설했다. 그때 4만 명이 불교를 받아들였고, 4만 명 이상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마히사만달라는 지금의 인도 ‘마이소르(Mysore)’ 지역이다.

③ 락키따(Rakkhita)는 와나와사(Vanavāsa)에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아나마딱가 상윳따(Anamatagga-saṃyutta, 無始相應)》를 설했다. 그때 6만 명이 불교를 받아들였고, 3만7천 명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왔다. 또한 그는 그곳에 50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와나와사는 남인도 까나라(Kanara) 북쪽 지역으로 추정된다.

④ 담마락키따(Dhammarakkhita 혹은 Yonaka-Mahādhammara-kkhita)는 아빠란따까(Aparantaka)에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악긱칸도빠마숫따(Aggikkhandhopama-sutta, 火聚喩經)》를 설했다. 그때 3만7천 명이 불교를 받아들였고, 1천 명의 남성과 그 이상의 여성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왔다. 아빠란따까는 인도의 구자라뜨(Gujarāt) 서북쪽 지역으로 추정된다.

⑤ 마하담마락키따(Mahādhammarakkhita)는 마하랏타(Mahāra-ṭṭha)에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하나라다깟사빠 자따까(Mah-ānāradakassapa Jātaka)》를 설했다. 그때 8만4천 명이 불교로 개종했고, 1만3천 명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왔다. 마하랏타는 고다와리(Godāvarī)의 자료에서 마라티(Maraṭhī)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곳은 지금의 뭄바이 부근인 마하라스뜨라(Mahārāṣṭra)로 추정된다.

⑥ 마하락키따(Mahārakkhita)는 요나(Yona)에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깔라까라마숫따(Kālakārama-sutta, 迦羅羅摩經)》를 설했다. 그때 17만 명이 불교를 받아들였고, 1만 명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왔다. 요나(Yona)는 야와나(Yavana) 또는 요나까(Yonaka)라고도 한다. 빠알리어로 추정되는 ‘요나(Yona)’는 그리스 박트리아(Bactrian 혹은 Bactriana)인 이오니아(Ionia)와 일치한다. 《아살라야나숫따(Assalayana-sutta, 阿攝和經)》에는 요나(Yona)와 깜보자(Kamboja)가 같은 장소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아소까 왕의 마애법칙(磨崖法勅) 제5장과 제12장에 요나와 깜보자가 언급되어 있다.

⑦ 맛지마(Majjhima)는 히마완따빠데사(Himavantapadesa)에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sutta, 轉法輪經)》를 설했다. 이때 8백만 명의 사람들이 예류자(預流者, sotāpanna)가 되었다. 다섯 명의 장로들은 각자 다섯 왕조를 개종시키고, 각자 1만 명을 출가시켜 승단에 들어오게 했다. 히마완따(Himavanta)는 지금의 히말라야(Himālaya)를 말한다.

⑧ 소나(Soṇa)와 웃따라(Uttara)는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 金地國)에 파견되었다. 그들이 수완나부미에 도착했을 때, 당시 바다의 여신은 왕의 후계자가 태어나면 잡아먹는 습관이 있었다. 마침 장로들이 수완나부미에 도착했을 때, 왕자가 태어났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장로 일행을 악령의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로들이 신통력으로 악령을 물리치고, 《브라하마잘아숫따(Brahmajāla-sutta, 梵網經)》를 암송하여 나라 주변에 방어벽을 세워 악령이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6만 명이 불교를 받아들였고, 3,500명의 청년과 1,500명의 왕실 여성들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왕실 가족으로 태어나는 모든 왕자는 ‘소누따라(Soṇuttara)’라고 불렀다.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는 일반적으로 하부 버마(Lower Burma)의 타통(Thaton) 지역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이 지역을 쑤판부리, 나컨빠톰, 랏차부리, 나컨씨탐마랏 지역이라고 주장하며 쑤완나폼의 수도를 나컨빠롬(Nakhon Pathom)으로 추정하고 있다.”

⑨ 마힌다(Mahinda)는 랑까디빠(Laṅkādīpa)에 파견되었다. 마힌다는 그의 제자 잇티야(Iṭṭhiya), 웃띠야(Uttiya), 삼발라(Sambala), 밧다살라(Bhaddhasāla) 등 네 명의 장로와 여동생 상가밋따(Saṃgh-amittā)의 아들 수마나(Sumana) 사미와 함께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그는 처음 데와남삐야띳사(Devānampiya-Tissa, B.C. 247~207) 왕에게 《쭐라핫티빠도빠마숫따(Cūḷahatthipadopama-sutta, 象跡喩小經)》를 설했다. 왕은 곧바로 불교에 귀의했다. 같은 날 그는 왕과 수행원들에게 《사마찟따숫따(Samacitta-sutta, 等心經)》를 설했다. 그다음 날 왕의 요청에 따라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를 방문했다. 그는 왕궁에서 공양을 마치고, 《뻬따왓투(Petavatthu, 餓鬼事經)》와 《위마나왓투(Vimānavatthu, 天宮事經)》 및 《삿짜상윳따(Sacca-Saṃyutta, 諦相應)》를 설했다. 그때 아눌라(Anulā) 왕비를 비롯한 500명의 여성이 예류자(sotāpanna)가 되었다. 그 후 마구간에서 청중들에게 《데와두따(Devadūta, 天使經)》를 설하고, 저녁에는 난다나와나(Nandanavana)에서 《발라빤디따숫따(Bālapaṇḍita-sutta, 賢愚經)》를 설했다. 밤에는 마하메가와나(Mahāmeghavana, 大雲林)에서 보냈다. 다음 날 왕은 마하메가와나를 승가의 대표인 마힌다 장로에게 기증했다. 셋째 날은 난다나와나에서 《아시위소빠마숫따(Āsīvisopama-sutta, 蛇喩經)》를 설해 3만 명을 불교에 귀의시켰다. 넷째 날은 난다나와라에서 《앗수숫따(Assu-sutta, 淚經)》를 설했고, 다섯째 날에는 《캇잔니야숫따(Khajjanīya-sutta, 團食經)》를 설했고, 여섯째 날에는 《고마야삔디숫따(Gomayapiṇḍi-sutta, 牛糞經)》을 설했고, 일곱째 날에는 《담마짝깝바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sutta, 轉法輪經)》를 설했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의 연대기에 묘사된 내용 중에 일부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9개국으로 파견된 전도단은 모두 다섯 명씩 한 조를 이루고 있었다. 변방에서 구족계(具足戒)를 수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섯 명의 장로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9개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마힌다 장로가 랑까디빠(Laṅkādīpa, 지금의 스리랑카)에 전한 불교만이 소멸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가 다시 해로를 통해 동남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상좌불교, 즉 동남아시아불교이다. 이시오 요네오(石井米雄)는 이 불교를 ‘스리랑카계(系) 상좌불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도 몇 차례 상좌불교의 전통이 단절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른 상좌불교 국가의 도움을 받아 상좌부의 구족계 전통을 되살렸다. 그 과정에서 불교국가 간의 불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3. 불교국가 간의 불교 교류

동남아시아의 불교국가 간의 불교 교류 흔적은 스리랑카의 연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하방사(Mahāvaṃsa)》에 의하면, 스리랑카의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i, B.C. 101~77) 왕 재위 기간에 완성된 ‘마하투빠(Mahāthūpa, 지금의 Ruvanvālisaya)’의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까쉬미라(Kasmīra)에서 웃띤나(Uttiṇṇa) 장로가 28만 명의 승려를 이끌고 스리랑카의 수도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에 도착했다.

또한 마하투빠의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요나(Yona)의 알라산다(Alasanda)에서 요나까-마하담마락키따(Yonaka-Mahādham-marakkhita) 장로가 1만3천 명의 승려들을 이끌고 스리랑카의 수도 아누라다뿌라에 도착했다. 알라산다는 당시 불교 승려들의 본부였음을 알 수 있다. 알라산다는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세운 그리스 국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말한다. 이곳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남쪽과 파키스탄 북쪽에 위치한 빠로빠미사다에(Paropamisadae, or Paropamisus)이다.

이로 미루어 다른 9개국에 파견되었던 전도사나 그 후예들이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대기에는 언급이 없다. 아무튼 기원전 1세기경에 역사상 최초의 불교국가 간의 불교 교류가 이루어졌다.

하부 버마의 타통 지역에 거주하던 몬족은 일찍부터 상좌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받아들인 상좌불교는 기원전 3세기 소나(Soṇa)와 웃따라(Uttara)가 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불교가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세기 이후 미얀마와 인도 간에 해상교통이 활발해졌다. 4~5세기경에는 남인도의 콘제베람(지금의 따밀나두 주)으로부터 힌두교와 대승불교가 전해졌다.

문헌에 나타난 스리랑카와 미얀마 간의 최초 불교 교류는 11세기 미얀마 아노여타(Anowyahta, 1044~1077) 왕 재위 기간이었다. 당시 스리랑카는 외침으로 나라가 최악의 상태였다. 이때 승가의 구족계 전통도 단절되었다. 스리랑카의 위자야바후 1세(Vija-yabāhu Ⅰ, 1059~1114) 왕은 스리랑카의 승가를 복원하기 위해 버마(Burma)의 아누룻다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누룻다 왕은 저명한 장로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해 주었다.

미얀마 장로들이 스리랑카 승가를 복원시켜 준 불교는 원래 스리랑카에서 미얀마에 전해 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쇠퇴한 본거지의 불교 재건에 공헌하였던 것이다.” 그 후 스리랑카의 빠락까마바후 1세(Para-kkhamabāhu Ⅰ, 1153~1186) 왕 시대에는 상좌부 승가는 통일되었고, 수많은 학승이 배출되어 많은 논서가 저술되었다. 이때 저술된 논서들은 태국과 하부 버마에 전해졌다.

스리랑카 꼿떼(Kotte) 왕조의 부와네까바후 6세(Bhuvanekab-āhu Ⅵ, 1473~1480) 왕의 재위 기간이었던 1476년 페구(Pegu, 지금의 미얀마)의 담마쩨띠(Dhammaceti, 1460~1491) 왕이 비구들을 선발하여 스리랑카로 파견했다. 그들은 스리랑카의 껠라니야(Kelaniya)에서 구족계를 받고 미얀마의 라만냐(Ramañña)로 돌아가 깔라니시마(Kalyānisīmā)를 설립했다. 이것을 ‘시할라상가(Sīh-alasaṅgha)’라고 한다.

그 후에도 두 나라 간의 불교 교류는 계속되었다. 스리랑카 캔디(Kandy) 왕조의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Vimaladharmasuriya, 1592~1604) 왕 재위 시기에 비구의 맥이 단절되었다. 왕은 승가를 복원하기 위해 락캉가(Rakkhaṅga)국으로 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락캉가국은 지금의 미얀마 일부에 속하는 아라칸(Arakan)이다. 이러한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1592년 락캉가의 난디짝까(Nan-dicakka)와 짠다위쌀라(Candavisāla) 장로가 몇몇 스님들을 이끌고 수도 캔디(Kandy)에 도착하여 구족계를 설했다. 이때 많은 왕실 가족들이 출가하여 승가에 합류했다.

스리랑카에서는 상류 계층에서만 출가할 수 있었다. 그러자 하층민에 속하는 스리랑카인들이 1800년 해로로 미얀마에 도착하여 당시 수도였던 아마라뿌라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들은 1802년 다섯 명의 미얀마 스님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돌아와 승가를 형성했는데, 이것이 ‘아마라뿌라 니까야(Amarapura Nikāya)’이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와 미얀마는 불교 교류를 통해 깊은 유대 관계를 유지해왔다. 서로 상대국의 불교가 쇠퇴했을 때, 구족계 전통을 복원시켜주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상좌불교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태국의 불교는 쑤코타이 왕국의 람캄행(Ramkamhaeng, 1279~1298) 왕이 크메르 바라문교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불교를 도입해 왕권을 확립했다. 아유타야(Ayuthaya) 왕국의 버롬마콧(Borommakot, 1733~1758 재위) 왕은 식민 지배로 쇠약해진 스리랑카불교를 복원하기 위해 우빨리(Upāli) 장로를 대표로 하는 16명의 불교 사절단을 스리랑카의 수도 캔디(Kandy)로 파견했다. 그때 7백 명의 비구와 3천 명의 사미에게 수계했다. 오늘날 스리랑카 최대의 승가인 시암 니까야(Siam Nikāya)는 이때 복원된 것이다. 그 후 1759년 엑까탓(Ekatthat, 1758~1767) 왕 때 2차 사절단을 스리랑카에 파견했다.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의 오래된 종족인 크메르(Khmer)족의 후예로서 9~12세기 사이에 인도문화를 받아들여 앙코르에 대규모의 사원과 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크메르인들이 인도에서 직접 받아들인 종교문화는 힌두교와 대승불교였다. 특히 이때 전래된 대승불교는 북전으로 전해진 한자 문화권의 대승불교가 아니라 ‘산스끄리뜨계 대승불교’였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앙코르 유적군(群)’이다. “그리고 ‘크메르의 미소’로 알려진 관음보살을 4면에 새긴 바욘의 석탑은 대표적인 크메르 대승불교 미술로 꼽힌다.”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캄보디아에는 앙코르 유적군(群)으로 대표되는 힌두교와 대승불교의 종교 문화가 번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타이(Thai, 태국)인들이 크메르인의 영토를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앙코르 문명은 쇠퇴해졌다. 그리하여 옛날의 힌두교와 대승불교 대신 스리랑카계 상좌불교가 침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캄보디아의 상좌불교는 태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국인이 캄보디아로 침입해 오기 전인 12세기 말에 이미 자야와르만(Jayavarman) 7세(1182~1201 재위) 왕이 스스로 불교도임을 알리기 위해 왕자를 포함한 일행을 스리랑카에 파견했다. 이 사실은 미얀마 측의 기록에 나타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왕자가 상좌불교를 스리랑카에서 캄보디아로 전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자야와르만 7세 왕 이후 바라문교는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왕들은 바라문교를 신봉했지만, 상좌불교를 탄압하지는 않았다.

라오스의 불교 전래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라오족 사이에서 상좌불교를 믿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라오스인들의 일상생활이 모두 불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실로도 추측할 수 있다. 라오스는 14세기 중반 루앙프라방을 중심으로 란상 왕국이 건설되었다. 라오족을 통일한 파군 왕(1354~1373 재위)은 청년 시절을 캄보디아 궁전에서 보냈다. 그는 캄보디아 고승을 초청함으로써 라오스에 상좌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라오스는 스리랑카로부터 직접 상좌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 같다.

4. 대승불교와 밀교와의 관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남아시아불교가 처음부터 상좌불교의 전통을 고수했던 것은 아니다. 인도의 아소까 왕 재위 기간이었던 기원전 3세기부터 인도의 다양한 문화가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전해졌다. 이를테면 바라문교(지금의 힌두교)는 물론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까지 혼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얀마와 인도 사이의 해상교통이 활발하게 된 것은 1세기 이후이다. 4~5세기경 남인도의 콘제베람을 기점으로 당시의 인도문화였던 힌두교와 불교가 미얀마에 전해졌다. 미얀마의 이라와디 강 하류의 프롬 부근에는 일찍부터 티베트-버마계(系) 민족인 쀼족(Pyu, 驃國)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경부터 점차 인도화 되어갔다. 이어 7세기에는 스리끄세뜨라(Sriksetra)와 아라칸 및 메르기 지역에도 인도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아라칸인은 버마인과 마찬가지로 티베트-버마계에 속하지만 해로로 인도 벵골 지역과 왕래가 더욱 용이했다.

아라칸에는 일찍부터 불교도가 있었다. 미얀마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다만 이 지역에서 대승불교, 그중에서도 밀교가 어느 정도 행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18세기까지 아라칸 왕국의 수도였던 무로하웅보다도 훨씬 오래된 유적인 웨타리에서는 범어 비문을 비롯해 불상과 힌두교의 많은 신상이 발견되었다. 그 신상들 가운데는 사우라파(派)의 본존으로 숭배되는 수리야(태양신)와 시바의 배우신(配偶神)으로 숭상되었던 두르가, 비슈누 등의 상(像)을 볼 수 있다. 이는 힌두교가 매우 번성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메르기는 헤나세림 강 하구의 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인도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특히 인도 죄인들의 유형지(流刑地)였다. 이곳에서 비슈누 신상을 비롯한 가루다(金翅鳥)와 하누만(猿王)의 상(像)이 발견되었다.

한편 스리끄세뜨라에서는 불교에 관한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의하면 스리끄세뜨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상좌부(上座部), 대중부(大衆部), 근본설일체유부(根本說一切有部), 정량부(正量部) 등의 부파불교가 행해지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대승불교의 보살신앙도 보급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이 지역에는 여러 유형의 불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인도불교는 7~8세기 이후부터 밀교가 성행했다. 빨라바(Pallava) 왕조가 벵골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여러 왕의 비호로 밀교는 위끄라마실라(Vikramaśīlā) 승원을 중심으로 앗삼과 오릿사로 포교 영역을 확대하여 인도의 변방 지역에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8세기경 스리끄세뜨라의 쀼족 왕이 아라칸의 인도계(系) 왕조와 혈맹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벵골의 밀교가 앗삼 지역을 거처 미얀마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밀교는 주로 스리끄세뜨라와 파간(Pagan)에 퍼졌다. 스리끄세뜨라와 파간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인도 빨라바 왕조 양식의 청동 소형 관음상과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힌두교와 비슈누나 시바의 신상(神像)도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에 힌두교가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벵골에서 미얀마로 들어온 밀교는 힌두교의 사크티즘(性力派)의 영향을 받은 좌도밀교(左道密敎) 계통이었다. 이 계통의 승려를 ‘아리(Ari)’라고 하는데, 이들은 사람들의 죄를 소멸시킨다며 주문을 외우고 뱀을 숭배하여 기적을 핑계로 민중을 현혹했다. 그들은 때로는 신자들에게 초야권(初夜權)을 행사하는 등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이와 같이 상부 버마(Upper Burma)의 파간에는 당시 뱀 숭배신앙과 좌도밀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아노여타(1044~ 1077 재위) 왕이 파간에서 이단들을 몰아내고 상좌불교 국가로 만들었다. 아노여타 왕은 1057년 몬족의 거주지였던 타통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그는 하부 버마(Lower Burma)에서 500여 명의 상좌불교 승려들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그는 몬족 출신 ‘신 아라한(Shin Arahan)’이라는 장로와 500여 명의 몬족 출신 상좌불교 승려들을 파간으로 모셔갔다. 그때 타통에 있던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들도 파간으로 가져갔다. 또한 아노여타 왕은 스리랑카 왕에게 사신을 보내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타통에 보관되어 있던 삼장과 주석서들을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타통에 있던 삼장과 주석서들은 남인도의 콘제베람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태국에 상좌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힌두교와 대승불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타이족이 중국 남부로부터 이주해오기 전 이 지역은 현재의 캄보디아, 즉 크메르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크메르 왕조는 당시 고도의 문화를 갖고 있었고, 타이족은 수백 년 동안 그 지배 아래 있었다. 타이족이 남중국에 있을 무렵, 그들은 중국의 대승불교를 신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크메르 왕조 아래서는 분명히 이 왕조 때 유행한 힌두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중엽 타이족은 크메르를 공격하여 북부 쑤코타이(Sukhothai)를 빼앗고, 타이족 최초의 쑤코타이 왕국을 건립했다. 쑤코타이 왕국은 미얀마의 아노여타 왕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대승불교를 몰아내고 상좌불교를 도입했다. 그때부터 태국불교는 현재까지 상좌불교 국가로 존속되고 있다. 하지만 민간 신앙 속에는 아직도 힌두교와 대승불교 신앙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데와따(Devatā, 女神)와 나가(Nāga, 龍) 신앙이 그것이다. 그리고 태국 최고의 문학도 인도에서 전해진 서사시이다. 사찰의 회랑 벽면에는 그 전설이 그려져 있으며 무용과 연극도 서사시에서 소재를 딴 것이 많다. 태국 왕실의 의식에는 인도적 양식, 특히 바라문적인 것이 많다. 또한, 애니미즘의 요소도 많이 남아 있다.

크메르인들이 인도에서 직접 받아들인 종교문화는 힌두교와 대승불교였다. 특히 이때 전래된 대승불교는 북전으로 전해진 한자 문화권의 대승불교가 아니라 ‘산스끄리뜨계 대승불교’였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앙코르 유적군(群)’과 바욘의 석탑이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태국으로부터 상좌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힌두교와 산스끄리뜨계 대승불교를 몰아냈다.

한편 라오스는 타이계(系) 종족에 속하는 라오족이 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마오족 · 야오족 · 쿰족 등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라오족은 대부분 불교를 믿지만, 이들 중에서도 흑타이족과 루타이족들은 정령과 조상숭배의 관념이 매우 깊다. 그리고 수도 비엔티안과 왕도 루앙프라방에는 중국인과 베트남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은 중국계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라오스인들은 모두 상좌불교도이지만 민간에서는 타이와 마찬가지로 정령숭배 신앙도 그 뿌리가 매우 깊다.

보로부두르나 바욘을 낳은 동남아시아 대승불교는 모두 그 전통이 끊겨, 현재는 남겨진 비문과 몇몇 문헌 자료를 통해서 당시의 신앙 실태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거대한 건축물만 남기고 사라져간 자바나 앙코르의 산스끄리뜨계의 대승불교는 동남아시아에서 사라졌다. 동남아시아의 상좌불교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처 초기불교 교단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게 되었다. 만일 상좌불교 국가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초기불교 교단의 전통은 단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5. 상좌불교의 중요성과 과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세계 불교계에서 동남아시아 상좌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상좌불교가 원래의 불교, 즉 초기불교 그 자체는 아니다. 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불교는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전해 주었던 불교의 한 부파, 즉 마하위하라(Mahāvihāra, 大寺派)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것을 ‘스리랑카계(系) 상좌불교’라고 한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마하위하라의 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승단정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스리랑카에는 마힌다가 전한 마하위하라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200년 후 아바야기리야위하라(Abhayagiriyavihāra, 無畏山寺派)가 생겨났다. 당시 왕은 아바야기리위하라를 지어 마하띳사(Mahātissa)라는 장로에게 헌납했다. 마하띳사 장로는 왕의 후광을 믿고 마하위하라 승려들에게 과도한 권력을 행사했다.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그가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상가에서 추방하려고 거죄갈마(擧罪羯磨)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아바야기리야위하라에 머물면서 별도의 상가를 만들었다. 이것이 스리랑카 최초의 승가분열(saṅgha-bheda)이었다. 그 후 다시 제따와나(Jetavana, 祇陀林寺派)가 생겼다. 세 부파로 분열된 스리랑카불교는 약 천 년 동안 서로 반목하며 대립했다.

그러나 12세기 빠락까마바후 1세(Parakkammabāhu Ⅰ, 1153~ 1186) 왕이 세 부파를 하나로 통일시켰다. 이것은 마하위하라 쪽에서 보면 이단이었던 무외산사파와 가타림사파를 스리랑카에서 완전히 쫓아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하위하라의 위대한 승리였다. 왜냐하면 무외산사파는 인도에서 발생한 웨뚤라와다(Vetu-llavāda, 方廣部)와 담마루찌(Dhammaruci, 法喜部)는 물론 대승불교와 밀교까지 수용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가 언제나 청정한 상가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상가가 극도로 타락해 있었다. 그때마다 왕들은 정화를 실시하여 청정한 상가를 유지하도록 했다. 왕들은 타락한 승려들을 환속시키거나 해외로 추방함으로써 마하위하라의 청정한 상가 전통을 지켰다.

스리랑카에서 빠알리 삼장을 문자로 기록한 것도 마하위하라의 전통을 후세에까지 전하기 위함이었다.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에는 대기근이 들어 나라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그들이 존경하던 비구의 시신까지 먹었다. 그때는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져 온 삼장의 구전 전통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비극적인 시기에 승려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본 대장로들은 지역 족장들의 보호를 받아 마딸레(Mātale)의 알루위하라(Aluvihāra)에 모여 ‘진실한 교법을 유지하기 위해서(ciraṭṭhitatthaṃ dhamma-ssa)’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삼장을 문자로 기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사에서 최초로 주석서를 포함한 삼장 전체를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현존하는 빠알리 성전의 원형이다. 만일 그때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들을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다면 붓다의 법과 율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때 스리랑카에서 문자로 기록된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들이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에 전해졌다. 지금의 상좌불교 국가는 자국의 문자로 기록된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경과하면서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에 다른 부파의 사상이나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의 사상까지 습합되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곰브리치(Gombrich)는 이러한 상좌불교를 ‘변모한 불교(Buddhism Transformed)’라고 표현했다. 그는 현재의 상좌불교는 경전의 불교(Textual Buddhism)와 행동의 불교(Behavioural Buddhism)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상좌불교 국가에는 비불교적인 힌두교와 정령신앙 등이 무분별하게 행해지고 있다. 무지한 승려들이 기복을 핑계로 온갖 잡스러운 행위들을 부추기거나 권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순수한 상좌불교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상좌불교 국가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한편 스리랑카를 비롯한 상좌불교는 현재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안으로는 상가 내부에 물질주의가 침투해 들어와 점차 세속화되어가고 있다. 밖으로는 물질을 앞세운 타 종교의 공격적 선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까지 탁발에 의존해 상가가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상좌불교가 어떻게 물질주의를 극복하느냐에 따라 상좌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 상좌불교 국가들이 해결해야 할 공통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석사, M.Phil).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저서로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등이 있으며, 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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