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불교는 독자적이면서도 폭넓은 예술영역을 딛고 서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구현하고 있는 종교적인 모든 분야를 예술의 범주 안에 묶을 수 있다. 가람 배치, 탑, 불상, 탱화에서 조형미술을 염불과 범패, 찬불가에서 음악성을 찾을 수 있다. 경전 속 게송과 선사들의 선시 그리고 전생담부터 각종 설화는 문학성을 띠고 있다. 승무나 바라춤까지 더하면 예술의 각 장르와 불교의 접점은 다양해진다. 나아가 영화, 연극과 마당극 그리고 뮤지컬에 불교 소재가 차용되면서 대중예술로서 그 영역을 확장해왔다.

반면 대중예술로서 ‘불교연극’은 다소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영역이 좁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지만, 관객의 호응 등 대중성과 상업성 부족을 꼽을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교연극’의 개념 규정, 역사 정리, 희소한 ‘불교희곡’, 공연사 기록 등 선행연구나 자료가 많지 않다. 이 논문을 구성하면서 조사한 자료 역시 몇몇 개별 작품이나 인물 연구, 193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희곡들, 공연 기사와 리뷰 기사에 불과하다. 국립중앙도서관을 뒤져도 많은 자료를 찾기 어렵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검색 키워드로 ‘불교연극’을 입력했을 때 검색되는 자료는 16건에 불과하다. 단행자료(도서, 전자책) 9건, 연속자료(학술기사, 전자저널) 6건, 멀티미디어자료 1건뿐이다. 그나마 유의미하게 살펴볼 자료는 적다.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시도되지 않은 셈이다. 박노현의 지적대로 “종교극으로서 불교연극은 고구(考究)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양적 · 질적 축적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변명이 되겠지만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서는 모든 ‘불교연극’을 대상으로 논지를 전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필자의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 단,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불교연극’ 개념 규정을 시도해보고 ‘불교희곡’ 목록 정리, 공연 사례 등을 최대한 밝히기로 한다. 본고에서 본의 아니게 제외된 불교연극과 불교희곡이 있다면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2. 불교연극

1) 연극의 기원

연극(演劇)은 배우가 특정한 연희(演戲) 장소에서 관객을 앞두고 극본 속 인물로 분장해 몸짓 · 동작 · 말로써 표현하는 예술이다. 대체로 고대 제의적 형태에서 왔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인류사에서 첫 번째 배우는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수렵 또는 농경 의식에서 토테미즘, 샤머니즘에 이르는 광범위한 제의에서 대중의 염원을 신에게 갈구하는 온갖 행위를 대신 표현하는 제사장(祭司長)이다.

서양연극의 시작은 기원전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찾는다. 포도와 포도주의 신이 된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디티람보스[神頌歌舞]에서 극이 출발했다. BC 5세기경 연극 형태를 갖추고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봄에 열었던 디오니소스 제전을 비극으로, 겨울에 열었던 디오니소스 제전을 희극으로 발전시켰다.

한국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연극이 형성됐다. 3세기경 한반도 여러 부족의 생활상을 기록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기타 중국 역사서의 단편적 기록에 따르면 어느 부족사회나 1년에 한두 차례 가무백희(歌舞百戲)를 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춘추농경제, 가락의 희락(戱樂)이 대표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삼국 및 통일시대에는 악(樂) · 가(歌) · 무(舞)가 종합적으로 표현된 악(樂), 기(伎)라는 공연예술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연극은 고려시대 산대잡극, 나희, 조희와 조선시대 산대나희 형식으로 나타난다. 개화기에 이르러 무대가 설치된 이후에 근현대적 성격의 연극이 꽃피었다.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경축식을 위해 개설한 황실극장 협률사가 최초로 설립된 극장이었다. 협률사는 전국의 명인 · 명창 · 무희 등 170여 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구성했다. 이후 협률사는 1908년 7월 원각사라는 민간 대역극장으로 재개장하고 개화기 신문물 추세에 판소리를 대화창으로 바꾸어 공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창극으로 발전했다. 판소리보다 새롭다고 해서 신연극이라 불렀고, 1908년 11월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신연극’이라 칭하며 원각사에서 공연했다.

2) 불교연극의 개념과 기원

아무튼 인간이 소리와 몸짓, 그림과 만듦 등 행위로 신에게 다가가고 종교적 성정을 표출하며 때로 주술적 종교적 결과를 기대하는 게 동서고금을 막론한 본연적 현상이다. 구미래는 이런 메시지들이 구상화되고 체계화되어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음악, 무용, 연극, 미술, 건축 등 종교예술 영역을 구축해왔다고 봤다.

흔히 불교연극이라고 표방할 수 있는 연극들의 양상도 이 범주 안에서 이뤄졌다. 한데, 불교연극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본고에서는 박노현이 4가지 범주로 정리한 ‘불교적 연극’을 ‘불교연극’이라 통칭하고자 한다. 불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 불교 사상을 담아내는 것, 불교적 소재를 차용하는 것, 불교적 공간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진태는 신라시대 국교로서 불교가 채택된 뒤 국가적인 종교의식도 기존 샤머니즘적 토착 제의에서 불교의식으로 교체되거나 무속과 불교가 습합되는 현상을 보였다면서 팔관회와 연등회를 예로 들었다. 특히 팔관회에서 연희가 됐다는 가무백희 기록에 나타나는 무애무(無㝵舞)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인 구성은 호리병을 두드리며 나아갔다가 물러갔다 하는 형식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어떤 광대가 큰 바가지를 가지고 춤추고 희롱하는 것을 본떠 원효대사가 도구를 만들고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을 따서 ‘무애’라고 했다.

신라시대 원효의 독무로 출발한 무애무는 고려시대에 두 기녀와 여러 제기들이 출연하는 궁중 정재의 형태로 양식화되었다. 《고려사》 악지(樂志)의 ‘속악(俗樂)’에는 무애무의 절차가 수록되었다. 검은 한삼에 단장한 두 기녀가 무애사를 노래하고, 여러 기녀들이 화답했으며, 두 기녀가 무애를 어르다가 잡고 춤을 추는 것이 주요한 동작이다. 이 대목에서 김미미는 무애무를 ‘불교포교극’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무애무의 연극 희작 가능성을 《세종실록》에서 찾기도 했다. 세종 16년인 1434년 양주 회암사에서 불전 중수 모연을 위한 법회 기록이 그것이다.

중 혜희(慧熙)가 화려한 채색 가사(袈娑)를 입고 법당(法堂)에 앉아 불경(佛經)을 강론하니, 부녀자와 중과 여중들이 한 당(堂)에 같이 모여 차례로 앉아 보고 들었으며, 전 지군사(知郡事) 이대종(李大種)과 박동미(朴東美)도 같이 앉아 보고 들었다. 중 각원(覺圓) · 신주(信珠) · 신현(信賢) 등이 무애희(無㝵戲)를 시작하자 부녀자들이 시주라 하여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승희(僧戱)도 눈에 띈다. 사찰 등 종교적 영역에서 대중으로 불교연극이 퍼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승희를 구경한 뒤 이렇게 썼다.

승려의 무리 십수 명이 깃발을 들고 북을 둥둥 울리며 때때로 마을 안에 들어와 입으로 염불을 외며 발을 구르고 춤추면서 속인의 이목을 현혹시켜 미곡을 요구하니 족히 한 번의 웃음거리가 된다.

이상 살펴본 대로 불교연극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했다. 개화기 이후 불교연극은 포교라는 분명한 목적으로 좀 더 대중 안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인다.

3) 불교연극의 목적

굳이 김상현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원효는 포교를 위해 〈무애가〉 〈미타증성가〉 등 노래를 지어 불렀다. 무애무도 원효대사가 췄다고 하는데 춤사위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다만 춤사위에는 강한 상징적 표현이 있다고 김상현은 분석했다. 두 소매를 휘날리는 것은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장애로부터 벗어나려는 손짓이고 다리를 세 번 들었다 놓은 것은 세속적인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발짓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김상현은 중생교화를 위한 방편으로서 용(用)이 공연예술과 비슷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불교연극의 목적이 대중성을 띈 종합예술로서 전법포교에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흔히 연극을 ‘종합예술’이라 칭하는데 문학 · 미술 · 음악 · 무용 등 예술 분야와 밀접하기 때문이다. 희곡(문학) · 무대장치 · 조명 · 분장(미술)과 음악이나 무용은 그 기원에서나 공연예술로서 상호 친밀하다. 개화기 이후 희곡이나 무대장치, 조명 등 종합공연예술로서 토대가 형성되자 불교연극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목적은 역시 대중교화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교육과 포교를 강조한 불교개혁이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핵심적인 개혁 방안 중 하나로 불교의 대중화가 주요 과제로 설정된 것이다. 이때 다양한 저술과 간행이 이뤄졌고, 1924년 7월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창간한 월간 《불교》가 대표적이다. 불교희곡 대다수는 《불교》에 수록됐다. 사찰 운영권 상실, 전통불교 명맥 계승 중단 등 위기에 처한 식민시대 불교는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포교를 택한 셈이다. 1930년대 연극이 성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유행하는 문화를 사찰로 옮겨 대중들 기호에 맞춘 포교로서 불교연극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치진 작 〈마의태자〉 공연(1950년대).

3. 불교연극의 성격과 종류

연극이 성행했던 시기에 불교연극의 목적과 성격은 뚜렷하다. 불자를 포함한 대중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성격이 짙었다. 이는 대은소하(大隱素荷, 1894~1989) 스님의 글에서 드러난다. 스님을 주목하는 이유는 교단이 임명한 첫 포교사였고 문서포교와 예술포교 전면에 나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유학 시절에는 《금강저》를 발간하고, 귀국 후엔 《불교》 주필을 역임했으며 《불교시보》와 《금강산》을 발행하기도 했다. 당시 불교를 소재로 글을 쓸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아 원고의 30~40%는 스님이 직접 썼다. 친일행적을 논외로 하고 스님이 주력한 대중불교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측면에서는 불교연극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 불교도 현대적으로 선전하자면, 아모리 하드래도 현대적 예술의 힘을 빌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생각하고 기회를 바라고 있든 차에, 마침 이번 성도재일을 당(當)하야 신앙 본위로 불타의 정신에 감응하고 모인 청년 남녀가 삼십여 명이나 되어서 그룩하게 성도가극(成道歌劇)을 연습하고 출연하야 마치엿는고로 ……중략…… 나는 더욱 더욱이 성극(聖劇)을 연구하야 현대물질 추구에 여념이 없는 민중에게 혹란(惑亂)된 정신을 시처주고 십다.

인용문은 불교합창단 ‘월인코러스’와 불교극단 ‘롬비니드라마클럽’ 창단 경위를 밝힌 글이다. 스님은 예술에서 현대적인 불교 선전, 즉 포교 방편을 찾았고 합창단과 극단을 창단했다. 성도가극은 스님의 첫 번째 희곡인 〈승리의 새벽〉이다. 덧붙여 불교연극은 종교극이나 성극이라고 불렸다.

스님은 김태흡 · 김대은 · 김소하 · 김삼초 등 필명으로 불교 잡지에 다수의 글을 남겼다. 김기종이 조사한 스님의 작품은 자유시 7편, 시조 5편, 소설 8편, 찬불가 8편, 희곡 19편이다. 그가 갈무리한 스님의 불교희곡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승리의 새벽〉 〈떡〉 〈불심〉 〈우주의 빗〉 〈쌀〉 〈눈을 뜨지 마랏드면〉 〈입산〉 〈불멸의 광〉 〈애욕의 말로〉 〈구리선녀〉 〈우란분〉 〈전화(錢禍)〉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불교》에 발표됐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는 스님이 창간한 《금강산》에 〈보시공덕(布施功德)〉 〈싸우지를 말앗드면〉 〈항마(降魔)의 밤〉 〈보시태자(布施太子)〉를 게재했다. 1937년에는 5월부터 매달 《신불교》에 희곡을 실었으며 〈누구든지〉 〈불타의 감화〉 〈불타의 홍원〉이 있다.

스님은 대체로 ‘불교 선전’을 목적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이 가운데 불교연극의 토대가 되는 불교희곡은 스님이 주필로 있었거나 창간했던 불교 잡지에 수록됐다. 소재는 대부분 경전 속 내용이었다. 〈승리의 새벽〉 〈우주의 빗〉 〈불멸의 광〉은 부처님 일대기인데, 부처님 탄생 내용인 〈우주의 빗〉은 작품 일부가 누락됐다. 불교 교리에 의한 작품들 중 〈불타의 홍원〉도 전편이 전하지 않아 결말을 알 수 없다.

대은 스님의 작품 외에도 각종 자료에서 불교희곡이 보인다. 보통 불교에서 소재를 가져와 극적인 구성을 덧붙였다. 근현대 연극 개념에 부합하는 첫 번째 불교희곡으로 홍사용(1900~1947) 시인의 〈출가〉를 꼽는데, 현재까지는 큰 이견이 없다. 홍사용 시인은 1923년에 조직된 극단 토월회(土月會) 문예부장이었다. 손수 희곡을 써서 직접 출연하는 등 연극에 정열을 쏟았던 그가 불교희곡을 썼다. 자세한 희곡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줄거리는 경전을 토대로 싯다르타의 구도행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인간이 스스로의 자각으로 구도의 길에 오르는 심리묘사가 관념적이지 않아 부처님의 인격이 구체적으로 도드라진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공연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교희곡을 정리한 소중한 자료에는 대표적인 작품들이 실려 있다. 불교연극과 불교희곡에 지대한 관심과 연구를 한 김흥우 동국대 전 예술대학원장이 갈무리했다. 그는 1991년 처음 지정된 ‘연극영화의 해’를 맞아 《한국불교 희곡선집》 시리즈를 엮었다. 8권으로 제작된 책에는 73편이 실렸는데, 4번째 시리즈에서 하유상 작가의 불교희곡 외엔 목록으로만 확인 가능했다. 김흥우는 앞서 1990년 민족사에서 《현대불교 희곡선》을 내기도 했는데, 홍사용의 〈출가〉 등 6편만 수록됐고 1년 늦게 집대성된 《한국불교 희곡선집》에 실린 작품과 중복됐다. 불교희곡 목록화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며, 속명으로 된 스님은 필자의 확인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법명으로 바꿨다. 앞서 소개한 대은 스님의 불교희곡은 제외했다.

유치진 〈마의태자〉, 이서구 〈파계〉, 대은 스님 〈불타의 홍원〉, 일엽 스님 〈이차돈의 사〉, 서항석 〈에밀레종〉, 이광래 〈남모와 준정〉 〈지옥문을 열어라〉, 서정주 〈영원한 미소〉, 전봉건 〈무영탑〉, 한상직 〈장야사〉, 홍사용 〈출가〉, 함세덕 〈동승〉, 천애자 〈연애〉, 이석훈 〈취〉, 조종현 〈꽃피는 동산〉, 정동민 〈지옥과 인생〉, 일봉 스님 〈석가〉, 차범석 〈순교자 이차돈〉, 김경옥 〈파계〉, 삼초 〈입산〉, 이경손 〈은행나무밀〉, 김정환 〈지옥문을 닫아라〉, 박노아 〈사명당〉, 백우 〈흰젖〉, 하유상 〈윤회의 굴레〉 〈아리나〉 〈달, 비, 피리〉 〈업보〉 〈자비의 눈물〉 〈관음보살의 테관〉 〈에밀레종〉 〈만다라〉, 홍승주 〈마지막 죽어가는 황새 한 마리〉, 전옥주 〈불행한 행운아〉, 윤조병 〈불타는 집〉, 김용락 〈얼과 빛〉, 이재현 〈님의 침묵〉, 노경식 〈탑〉, 김숙현 〈길〉, 김정률 〈그게 무슨 뜻이오〉, 이하륜 〈옴〉, 최명희 〈수련 고이 질 새〉, 김영무 〈출가〉 〈중생의 피〉 〈구름가고 푸른 하늘〉 〈오〉 〈가리왕의 땅〉, 유성조 〈건망증〉, 박운원 〈베틀노래〉, 이강렬 〈어허라 상사디야〉, 심회만 〈꽃녀 꽃녀 꽃녀〉, 임찬순 〈뿔〉, 진관 스님 〈염화미소〉, 오청원 〈업보〉, 서현수 〈죄 흐르다〉, 정순열 〈삼학도〉, 정동건 〈약사여래님 이빨을 삼켜 주세요〉, 우봉규 〈객사〉 〈남태강곡〉, 현장 스님 〈사문의 모〉 〈박〉 〈비구여 비구여〉, 해인 스님 〈천도〉, 김흥우 〈조신의 꿈〉 〈혼의 소리〉 〈천하대장군〉 〈오유선생〉 〈원효대사〉.

적지 않은 수의 불교희곡과 만남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김흥우의 선행연구와 집대성으로 가능했다. 희곡집에서 하유상 작가의 작품 몇 개를 소개한 그의 평가를 따르자면, 〈윤회의 굴레〉는 윤회를 옛날과 현대를 통해 모자이크식으로 배열했다. 하유상은 “우리가 겨울엔 겨울옷을 입었다가 봄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듯이 인간은 새로운 재생의 삶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작품의 성격을 밝혔다.

〈달 · 비 · 피리〉는 불교와 연관성이 크게 없는 운림지 전설을 소재로 강일도사를 등장시켜 주인공과 대결 구도를 그렸다. 〈업보〉는 1971년 계간 《현대연극》에 발표된 단막극으로 인과응보를 다뤘고, 〈관음보살의 테관〉은 손오공의 모노드라마다. 〈아리나〉는 1963년 국립극단에서 초연한 〈아리나의 승천〉을 뮤지컬화했고, 〈자비의 눈물〉은 어린이용 불교연극이다. 〈만다라〉는 김성동의 동명 소설에서 소재를 차용했다.

1960년대 작품 〈이차돈의 사〉는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 근대사의 신여성이자 여성운동가이자 사상가이자 한국불교의 대표적 비구니 스님인 일엽 스님이 썼다. 이 작품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출연 배우가 모두 불자였으며, 수덕사 사중에 있던 비구니 월송(月松) 스님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월송 스님은 후기를 썼는데, 여기에도 불교연극의 성격이 드러나 있다. 스님은 “불교를 흥미 있고 쉽게 알리기 위하여 포교연극을 하여 일거양득의 효과를 가지려는 이유에서 애초에 이 연극은 만들어졌다”고 회고했다. 김미미는 〈이차돈의 사〉를 두고 “예술을 통한 보다 본격적인 포교방식을 택했다는 근대 불교연극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불교연극 공연과 전개양상에 불교희곡이 중첩될 것 같아 이만 줄이기로 한다. 다만 널리 알려진 극작가인 김숙현 작가의 작품에도 불교희곡이 있다. 그는 동국대와 경남대에서 연극영화학과 문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대문학》에 희곡 〈잔영〉이 추천되고,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장막극 〈바벨탑 무너지다〉가 원로 연극인 이진순 씨 연출로 상연되면서 문학계와 연극계에 동시에 입문했다. 법정 스님에게서 대련화(大蓮華)라는 법명을 받은 불자다.

그는 50년 가까운 문학 인생 정리 차원에서 14편의 희곡을 엮은 희곡선집을 냈는데, 여기엔 2편의 불교희곡이 수록됐다.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와 〈환화여, 환화여〉다. 전자는 간화선에 임하는 수좌 스님들의 치열한 구도열과 화두 타파 정신을 담은 희곡이다. 후자는 7세기 신라를 배경으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무대에 등장시켜 현재 우리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부각시켰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원래 제목은 〈회향송〉이었고, 제2회 한국희곡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정순지 연출가는 “불교연극인 듯하지만, 불교 테두리에 가두지 않아 오묘한 매력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4. 불교연극의 공연 전개양상

연극은 일회성이다. 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고 공연이 끝나면 관람하기 힘들다. 공연 장소와 시기, 희곡과 연출가, 배우 등이 실린 당시 잡지나 신문기록에 의존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초창기 불교연극 공연은 주로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필자가 소집한 각종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불교연극의 최초 공연 사례는 선행연구와 달랐다. 《불교》 주최로 1928년 4월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에서 공연된 〈출가〉로 알려져 있다. 반면 〈동아일보〉 등 일간지에 소개된 공연 기사에는 불교청년회 범어사지회 주최로 1921년 5월 〈고진감래〉라는 제목으로 공연한 소인연극이 처음이다.

같은 해 7월에는 순천 선암사불교청년회에서 팔상도를 주제로 한 연극을 공연했다. 1923년 2월에도 원산불교소년회가 부처님오신날을 축하하고자 원산 동악좌에서 연극을 했다. 같은 해 5월엔 진주 호국시 불교진흥회가 〈목련〉이란 제목으로 극을 올렸다. 그러나 근대 첫 불교희곡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상황에서 홍사용의 〈출가〉를 좁은 의미로서 불교연극 첫 공연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홍사용의 작품 〈흰젖〉도 〈백유(白乳)〉라는 이름으로 일반 극장에서 공연됐다. 〈매일신보〉의 1921년 8월 19일 자 기사에는 “불교순회연극단”이란 제목의 기사가 있는데 활자를 확인하기 어렵다.

대개 불교연극은 1930년대 사찰에서 성행했다. 당시 불교 잡지 《불교》와 신문이던 〈불교시보〉 기사에서 기록이 보인다. 사대문 안의 첫 포교당이었던 각황사에서 1930년 성도절 기념법회에 활비극으로 소개된 〈황금〉을 시작으로 대은 스님 작품이 자주 무대에 올랐다. 불교연극이 인기를 끌자 무대는 사찰 밖으로 향했다. 초대 국립극단장을 역임한 박진의 〈나무아미타불〉이 1930년 초연된 것이 선두다.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가 창립공연으로 내놓은 최독견의 〈승방비곡〉도 있다. 대은 스님의 〈우란분〉도 부민관에서 5일간 공연하고 전국을 순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32년 8월 발표된 〈우란분〉은 《목련경》과 《우란분경》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1932년 5월 순천 선암사가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서 재공연했고, 1940년 5월 봉원사 성도봉축기념일 행사 기록도 있다. 《불교시보》는 1940년 공연 이후 관객들 호응이 높아 수원 소재 일반 극장에서 재공연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 시기 눈에 띄는 작품으로 함세덕의 〈동승〉이 있다. 함세덕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수류탄 사고로 35세에 요절했다. 그의 작품 〈동승〉은 1939년 3월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유치진 연출로 〈도념(道念)〉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됐다. ‘도념’은 극 중 14세의 사미승으로 〈동승〉의 주인공이다. 도념과 주지 혹은 미망인과 주지 사이의 대립으로 표출되는 불성과 인성의 적대적이지 않은 충돌을 그렸다.

1940년대 이후 여러 극단이 극장에서 불교연극을 공연했다. 극단 성군이 1941년 12월 동양극장에서 박영호의 〈이차돈〉을 상연했다. 극단 성군은 이듬해인 1942년 4월에 동양극장에서 송영 각색의 〈수호지〉의 막을 올렸다. 이 작품들은 불교에서 소재를 가져와 대중의 요구에 맞게 재창작했다고 한다. 1948년 극단 신협에서 유치진 작, 이화상 연출의 〈마의태자〉를 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교희곡이 꾸준하게 창작된 것과 달리 1950년대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연은 띄엄띄엄 이뤄졌다. 한국전쟁 탓도 있었다. 수도가 잠시 대구에 있을 때였던 1951년 5월, 동양극장에서 홍해성의 주도로 불교극 〈팔상록〉과 〈거연〉이 공연됐다고 한다. 대구불교부인회와 대구불교청년회 주최로 열린 석가탄생 축하의 〈성극의 밤〉 프로그램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6월 조선불교극 순례단이 조직됐고, 9월 대구극장에서 오상순이 편극한 4막짜리 희곡 〈불타 일대기〉가 상연됐다.

심정섭과 김미미에 따르면 1955년 극단 대중극회가 〈지옥과 인생〉을 공연했다. 특히 1967년 8월 한 주 동안 국립극장에 무려 2만여 명이란 관객을 불러 모아 성황을 이루었던 〈이차돈의 사〉는 기념비적인 불교연극이다. 이광수의 원작을 일엽 스님이 각색했고, 앞서 언급한대로 월송 스님이 주연을 맡았다. 화제작 〈이차돈의 사〉는 프로 불교극단 탑이 1968년 창립작으로 다시 공연했다. 〈경향신문〉에는 월송 스님 인터뷰 기사가 실리는 등 인기를 실감케 했다. 또 1969년 국립극단이 올린 지귀와 선덕의 설화 〈여왕과 기승〉이 오태석 작 이진순 연출로 상연된 사례 외엔 1960년대 불교연극 공연은 찾기 어렵다.

1970년대는 몇 작품을 제외하곤 기존 작품의 재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최인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김정옥 연출가가 이끈 극단 자유극장이 막을 올렸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숙명적 만남에서 불교적 연기의 세계를 보여준 작품이다. 이 밖에 국립극단에 공연된 하유상 작 이진순 연출의 〈에밀레종〉, 극단 신협의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인 노경식 작 이창구 연출의 〈탑〉, 박제천 시인의 연작시를 극화한 김창화 연출의 〈판각사(板刻師)의 노래〉가 있다.

1980년대는 학생들이 주축이 된 작품과 뮤지컬이 등장하는 등 영역이 확대됐는데, 극단 신협은 대한민국연극제에 김정률 작 심회만 연출로 〈터〉를 출품했다. 극단 대하의 김영무 작 김완수 연출의 〈구름 가고 푸른하늘〉이 대중을 만났고, 특히 김상렬이 쓰고 연출한 뮤지컬 〈님의 침묵〉은 창작 불교뮤지컬의 새 장을 열면서 불교연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소설로도 화제가 되었던 환속 작가 김성동의 자전적 이야기 〈만다라〉가 1981년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중광 스님의 예술세계와 기이한 행적을 그린 〈춤추는 걸레〉를 극단 미래가 1987년 3월 서울 동숭동 바탕골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원래 〈허튼소리〉였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의 합격보류 판정으로 막을 올리지 못했다가 제목을 바꾸는 등 우여곡절 끝에 상연됐다.

1980대 중반 이후에는 〈동아일보〉가 “종교계에 뿌리내리는 선교예술”을 보도하는 등 불교도 적극적인 포교 방편으로 연극을 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는 1991년이 ‘연극영화의 해’이어서인지 일간지뿐 아니라 교계 언론에서도 불교연극 소개가 잦다. 불교연극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은 1990년 4월 초연된 이만희 작가의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이다. 세속적 번뇌와 견성 과정을 극화한 작품으로 철학적 문학적으로 깊이 있는 대사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고고한 탈속의 세계가 아닌 속세와 연결된 번뇌 속에 담긴 휴머니티로 주목받았다. 백상예술대상 등 각종 상을 휩쓴 수작이다.

1996년 뉴욕 라마다극장에서 상연돼 극찬을 받았던 강만홍 연출의 불교 신체연극 〈두타〉가 한국을 찾았고, 1998년 〈느낌, 극락 같은〉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강백의 작품 〈느낌, 극락 같은〉은 불상 제작의 권위자인 함묘진의 두 제자 동연과 서연을 중심으로 예술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많은 상을 받았고 대중성도 확보한 성공작으로 회자된다. 1999년에는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인간복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철인붓다〉가 공연됐다.

2000년대에는 1993년 초연작 〈탈속〉이 인천연극제에서 재공연된 것을 비롯해 〈붓다를 훔친 도둑〉 〈한바탕 꿈인 것을〉 〈붓다마이바디〉 〈피고지고 피고지고〉 〈아름다운 남자〉 〈선〉 〈지대방〉 〈환화여 환화여〉 〈매혹-화암사 그 천년의 눈물〉 〈이뭣꼬〉 〈경허〉 〈나무목 소리탁〉 등이 꾸준히 관객과 소통했다.

1980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스님들이 직접 희곡을 쓰고 극단을 만들어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출연까지 하는 등 불교연극이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불교 잡지와 일간지, 교계언론을 조사하다 보면 스님 작가와 배우, 극단 대표에 관한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1982년 진관 스님의 첫 번째 희곡작품인 〈선객〉이 삼일로 창고극장에 올랐다. 종립 동국대는 1986년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문예회관에서 불교연극을 공연했다. 김흥우 작 김효경 연출의 〈조신의 꿈〉이 그 작품이다. 신촌 봉원사 스님들이 직접 출연해 범패와 바라춤을 선보였고 해인사에서 운반된 법고가 사용됐다.

서울 봉원사 전 주지로 1991년 8월 극단 종을 창단한 일봉 스님은 연극무대에 배우로 출연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스님은 극단 신협과 극단 종이 만든 창작극 〈서천꽃밭〉에서 율두 스님 역을 맡았다. 스님의 특이한 이력도 소개됐는데, KBS 첫 드라마인 〈고래〉에 출연하기도 했다. 스님은 출연 이유로 “부처님 가르침을 연극이라는 장르로 알리고 싶다”고 했다. 이후 극단 종은 1993년 전국을 돌며 함세덕 작, 김혜춘 연출의 〈사모곡〉을 공연했다. 마산 등 지방공연에서 큰 성황을 이뤘다고 전한다. 〈사모곡〉은 극단 신협이 공연한 〈동승〉의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이만희 작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같은 해 3월 극단 종보다 앞서 창단된 극단 바람은 특히 주목된다. 당시 서울 봉은사에 주석했던 현장 스님이 대표였으며 직접 불교희곡을 집필해서 공연했다. 극포교를 전면에 내세운 극단 바람은 불교극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람은 ‘정법의 바람, 정토의 바람, 불교문화의 바람’을 기치로 내걸고 현장 스님과 중앙승가대 학인 스님들, 불자들이 의기투합한 극단이었다.

스님들이 기획과 섭외 등 극단운영에 관여했고, 일부 스님들이 배우로 무대에 올랐다. 바람은 2명의 상임연출가와 15명의 전속단원을 둔 프로 불교극단이었다.

바람은 창단 1년 전부터 기획됐다. 1990년 중앙승가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현장 스님이 같은 학교에 다니던 지광, 호명, 덕호 스님과 불교문화운동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고, 김흥우 동국대 연극영화과 교수와 불자 연예인들 등 불자들이 참여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창단작으로 〈박(縛)〉을 청파소극장에서 공연했고 이어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사문의 모(母)〉의 막을 올렸다. 모두 현장 스님이 쓴 불교희곡이다. 〈박〉은 신라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번뇌 결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지와 해악으로 불법을 전한다는 내용이다. ‘불음(佛音) 걸식가’라는 부제가 붙었고 각설이와 접합을 시도했다. 바람은 1993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 현장 스님 작 양일권 연출의 〈화엄경 선재동자〉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상연하기도 했다.

현장 스님의 작품 〈비구여, 비구여〉는 1993년 창단된 불교연극단 사군자에서 창립기념작으로 선정해 공연했다. 〈비구여, 비구여〉는 동진출가한 무애 스님의 구도과정을 그렸다. 사군자는 부광, 혜도 스님 등 스님들과 연극배우 조주미, 영화감독 이미례 등이 창단한 극단이다. 한편 서울 조계사와 수국사 전 주지 원담 스님의 10 · 27법난을 조명한 〈뜰앞의 잣나무〉와 수좌 스님들의 휴식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지대방〉은 다수 공연되고 널리 알려져 설명을 생략하고자 한다.

불교희곡을 쓰거나 불교연극을 연출하지 못했어도 물심양면으로 후방에서 극단을 지원한 사례도 있다. 전 군종교구장 정우 스님이 1990년 서울 구룡사 주지 재직 시절, 사찰에 〈구룡소극장〉을 만들어 불교연극을 후원하기도 했다. 극단 신시가 이곳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싯달타〉 등을 공연했다. 신시 대표인 김상렬이 1983년 3월 세실극장에 올린 뮤지컬 〈님의 침묵〉을 당시 조계종 교무국장 정우 스님이 관람하면서 시절인연이 맺어졌다.

5. 나가며-불교연극의 가능성과 전망

불교연극 자료를 뒤지면서 역사와 수많은 불교희곡을 만나 즐거웠지만, 개괄적인 자료 정리에 그쳐 다소 아쉽다. 그러나 자료를 살필수록 ‘불교연극’은 장밋빛 전망과 멀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2000년대 중반 원담 스님의 〈지대방〉 이후 눈에 띄는 불교희곡 창작이 드물다. 극단을 중심으로 몇몇 창작극이 무대에 오르고, 뮤지컬이나 무용 그리고 마당극으로 영역이 확대된 반면, 불교가 주체적으로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기존 불교희곡이 간간이 무대 위에서 상연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는 시대적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2000년 이후 영상문화가 삶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무대 위 배우와 객석 위 청중의 간격은 점점 멀어졌다. 하물며 인터넷 사용은 기본이고 실시간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고 인터넷 게임을 즐기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의 3분 이내 짧은 영상을 시청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손바닥 안 스마트기기는 물론 집에서 각종 영상서비스로 녹화된 방송을 보는 요즘엔 따로 시간 내서 특정 장소를 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소할 사람이 갈수록 줄어드는 실정이다.

더구나 연극계 자체도 배우 임금 체불과 흥행 참패 시 재정 부담 등 해소하기 어려운 문제에 오래 머물러 있다. 연극시장이 어려워지면서 불교연극도 설 자리를 잃었다. 대학로에 순수창작연극의 작품성보다 출연 배우의 티켓파워에 흥행이 좌우되는 현실은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포교를 표방한 불교연극의 미래는 자못 희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불자가 아닌 일반 대중의 공감을 얻을 뛰어난 불교희곡의 존재, 그런 불교희곡을 쓸 작가가 없다면 사찰 밖 극장에서 불교연극의 성공은 어렵다. 이 대목에서 김흥우가 20여 년 전 제안한 불교연극 활성화 방안이 새삼 놀랍다. 부처님오신날 등 불교 명절에 설법 대신 법극(法劇), 불교회관이나 포교당의 예술공간화, 구연동화 같은 설창(說唱)의 현대화가 불교연극의 토대로서 아직 유효하다. 불교계 안에서부터 불교희곡이나 불교연극에 관심이 부족하다면 미래는 불투명하다.

여기서 매년 성황리에 끝난 조계종 학인 스님들 대회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랩이 등장했고, 외국어로 뮤지컬을 공연했다. 마임, 노래, 유머, 만담, PPT를 활용한 설법으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고루하고 지루한 교리전달이 아니었다. 대회는 부처님 가르침이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공감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포교로서 혹은 대중예술로서 ‘불교연극’ 미래의 단초는 이미 주어졌다. 작가와 희곡, 무대 등 마중물이 필요하다. ■


최호승
〈법보신문〉 기자. 동국대 국문과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2005년 불교주간지 법보신문에 입사해 현장기자로 활동 중이다. 정부의 종교편향 고발기사로 불교언론문화대상, 선원빈기자상, 불교언론문화대상 신문부문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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