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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과 성찰] 명상과 동굴의 비유 / 김선숙
[71호] 2017년 09월 01일 (금) 김선숙 happyssk@hanmail.net

지난 겨울에 친구와 우이동의 한 카페에 갔을 때의 일이다.

북한산이 바라다보이는 전망이 아름다운 자리에 앉아 한동안 풍경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겨울인데도 창문 밖으로 송홧가루가 날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겨울에 웬 송홧가루가 날리는가 놀랍고 이상하여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도 우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와 보더니 송홧가루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궁금함을 참지 못해 유리창 가까이 가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유리창에 다가갔더니 놀랍게도 전혀 다른 광경이 보였다. 우리가 보던 광경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송홧가루가 아니라 안개가 움직이는 것이고, 바라보던 북한산도 그 옆에 있던 다른 산이고 나무들과 전신주도 옆에 있던 것들이 반사되어 그림자가 비친 것이었다.

카페의 유리창이 노란색 곡면으로 되어 있어 옆의 사물들이 거울처럼 비쳐서 그림자를 보면서도 그것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정면에 있는 풍경을 그대로 직접 보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유리창에 비친 진짜가 아닌 산과 나무 전신주, 그리고 송홧가루라고 생각하던 안개의 그림자를 실물로 착각하며 아름답다고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경험은 내가 얼마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교육을 받았을 때와 받지 않았을 때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플라톤이 저술한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가 생각난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가 사물의 영원불변한 원형이고, 생성 · 소멸하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이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이며 불완전한 복사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사물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인간을 어릴 때부터 동굴에 갇혀 입구를 등지고 벽만 바라보도록 목과 다리를 묶인 채로 앉아 있는 죄수에 비유했다. 죄수들의 뒤편 위쪽으로는 불이 비추고 있고 그들 뒤에는 얕은 담이 있는데, 이 담을 따라 담 위로 사람들이 각종 도구들, 입상들과 동물의 형상들과 인공물을 운반하고 지나가서 벽에는 이것들의 그림자가 비친다.

죄수들은 보는 것이라고는 이 벽에 나타나는 그림자뿐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한 죄수가 풀려나서 보니 동굴 속에서 그들은 모조품의 그림자만을 보고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굴 밖으로 나와 빛나는 햇빛 속에 드러난 사물의 실재하는 모습을 본 그는 동굴로 돌아왔다. 옛날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예전처럼 그림자를 식별하는 경쟁을 할 때 어둠에 익숙지 않은 그는 동료 죄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또한 동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여전히 그림자 쪽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쇠사슬을 풀어주고 위쪽으로 데려가려는 자는 잡아 죽일 수만 있으면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동굴 안의 대상과 그림자는 감각적인 경험으로 아는 세계이고, 동굴 밖의 세계는 이성으로 통찰하여 아는 세계로 구분하였다.

그림자를 실재로 착각하는 죄수들에게 진리는 은폐되어 있다고 본다. 종교학 사전에 의하면 진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알레테이아(alētheia)는 망각, 은폐라는 의미의 lēthē에 부정의 기능을 가진 접두사 a가 붙은 것으로 탈은폐, 비은폐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진리란 은폐된 것을 깨고 있는 대로의 존재를 현현시킨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통찰명상인 위빠사나는 몸 · 느낌 · 마음 · 법을 알아차리는 4념처를 관하여 무상 · 고 · 무아의 지혜를 얻기 위한 명상법이다. 즉 우리의 감각과 느낌과 생각을 동일시하고 사는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의문을 갖는 자기성찰과 연관을 지어 볼 수 있다. 우리는 8번째 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습기로 인해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폭류와 같은 업식의 흐름에 떠밀려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뇌과학에서는 습관과 감정도 조건반사에 의한 것이라 한다. 명상에 의해 습관과 감정을 관찰하여 반복되는 패턴을 알아차리면 신경세포들이 서로 단단히 연결된 것들을 떼거나 연결된 회로를 변경할 수 있다. 알아차림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선택을 하게 해주는 마스터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깨어 있지 않으면 아뢰야식에 저장된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정보가 프로그램화되어 매트릭스 속에서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매 순간 얼마나 자유로운 선택을 하며 사는 걸까? 사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五蘊)의 작용에 거의 동일시하며 사는 순간이 대부분이고 그림자를 쫓아다니며 그것이 실물인 양 정신없이 사는 경우가 많다.

명상은 어떤 원리에 의해 가능한 것일까?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씩 일어나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하는 사띠(sati)라는 심소인 선심이 일어나면 그 순간에 몸 · 느낌 · 마음에 일어났던 것들은 대치되어 사라지는 원리가 적용된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저항하면 그것들이 지속되고 알아차려 바라보면 사라지게 된다. 또한 위빠사나 명상에서 알아차림을 하는 사띠의 순간은 한 생각 이전의, 부모미생전의 자리로 우리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다.

 그 순간은 나를 오롯이 들여다보고 나라는 자를 가장 잘 알게 되는 순간이다. 몸 · 느낌 ·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드디어 제대로 나의 주인이 되고 든든한 문지기를 세운다. 또한 그 순간은 이와 반대로 나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사물을 보는 초월적인 내가 된다. 자신의 몸 · 느낌 · 마음을 탈동일시하는 순간이 되어 이것들을 바라보는[觀하는]순수한 앎이라는 근원에 이르러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선 소위 초의식(super-consciousness)에 닿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는 너와 나를 넘어선, 주객을 넘어 이분법을 넘어선 중도의 자리이고, 희로애락이 일어나기 이전의 중(中)의 자리이다. 나와 부처 그리고 우주심이 하나인 자리로 가장 릴랙스하고 리셋(reset)이 된 자리이고, 깨어 있으면서 고요하고 텅 비어 있으면서 신령하게 아는 자리이다.

명상은 우리를 이 자리로 순간순간 가져다 놓아 쉬도록 한다. 마음챙김하는 찰나찰나 열반에 드는 순간이 된다. 원래 이 자리에서 왔으니 내 고향처럼 낯설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어떤 것도 붙잡지 않고 빈손으로 내려놓고 있어 잃을 것이 없는 안전하고 한가로우며 평안하다. 그저 ‘지금 여기’를 저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내맡기니 이럴까 저럴까 다툼이 없어 심신이 치유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바른 선택과 결정을 위해 원점에 서서 판단을 보류하고 중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숫자로 보면 ‘0’, 즉 제로의 자리로 음과 양을 아우르는 중립의 위치인 원점의 자리이다.

그리하여 명상 상태인 알아차림의 상태에서는 쓸데없이 전전긍긍하여 에너지가 낭비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충전하게 되어 우리를 원기 충만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명상은 자신에 대한 앎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반사적이 아닌 자유의 삶을 살도록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는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으로 몸과 마음의 원위치로 돌아와 미소 지을 수 있다.

김선숙 / 마음의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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