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냄새도 없이 천지는
언제나 써지지 않은 경(經)을 되풀이 읊고 있나니.

일본에서 농민철학자라거나 농민성자로 불리기도 하는 니노미야 손토쿠는 천지, 즉 우주를 하나의 경전으로 인식했다. 경전이란 ‘종교의 교리를 적은 책’을 이를진대, 우주를 경전에 빗대면서 ‘써지지 않은 경전’이라고 했으니, 이 말은 우주란 영원히 해석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진정한 경전은 기호를 넘어선 진리 그 자체란 의미이기도 하겠다. 만약 우주가 누구에게든, 그리고 어떻게든 해석되어 기호화된다면 더 이상 경전이 아닐 터, 한낱 시인이 어찌 감히 우주를 통달한 듯 함부로 언설을 일삼으랴. 귀를 열어 우주가 읊고 있는 독경을 다만 경청할 뿐.

천지간에 입 하나 지우고 두 귀를 세우나니
— 졸시 〈문(門)〉 전문

‘물을 문(問)’ 자에서 ‘입 구(口)’ 자를 지우면 ‘문 문(門)’ 자가 된다. 문 저 안은 피안의 세계. 곧 진리에 이르는 길은 입말이든 글말이든 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거늘, 진리란 말이나 글로 전할 수 없다는 이치는 분명해 보인다. 선종에서도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역설하지 않는가.
문자는 기호화된 말이다. 기호는 반드시 표시되는 것인 만큼 언중은 언어의 속성을 ‘드러냄’으로만 인식하기 일쑤지만, 기실 언어는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은폐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드러냄과 숨김이라는 언어의 이중적 속성을 가장 용의주도하게 구사하는 문학 갈래가 바로 시다.
‘시 시(詩)’ 자는 ‘말씀 언(言)’ 자와 ‘절 사(寺)’ 자를 조합한 글자다. 한자가 뜻글자임을 감안하여 시의 뜻을 헤아려보자면 ‘시는 말씀의 절(집)’ 또는 ‘시는 말씀으로 지은 절’쯤 되겠다. 시에 대한 정의를 넘어서 시인의 시를 바라보는 세계관, 또는 시를 쓰는 태도까지 두루 고려하자면 아무래도 뒤엣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시를 쓰는 일이나 절을 짓는 일이나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 터. 〈적멸〉은 주지 스님과 인연이 있는 어느 절의 대웅전 상량식에 보낸 시였다.
말로 절을 지어 시(詩)가 되고/ 시가 고요해지고 고요해져서// 마침내/ 말이 사라지면 절(寺)이 되는 법// 쉿,/ 스님은 묵언수행 중이시고// 뎅,/ 바람방울소리는 우주를 흔들고
— 졸시 〈적멸〉 전문

말로 절을 짓는 구도자로서 시인의 본분을 망각한 채 가볍디가벼운 세속의 말에 편승하여 시의 본질을 훼손해온 그동안의 일탈에 대한 반성으로 모인 시동인이 ‘작은詩앗 · 채송화’다. 책을 낼 때마다 동인들이 번갈아가면서 머리말을 쓰는데 2008년에 펴낸 세 번째 묶음에서 이렇게 썼다.

(앞부분 생략) 함부로 말을 다 뱉고 난 뒤의, 그 썰물 진 갯벌 같은 허무감으로 둘러보니 말도 없고, 시도 없고, 독자도 온데간데없었다. (중간 생략)
낮지만 우주적 상상력에 가닿은 시, 작지만 세상을 움직일 만한 울림을 지닌 시, 단단하지만 누구나 동요처럼 흥얼거릴 수 있는 시, 짧지만 유성처럼 무한 광대한 하늘을 가르는 여운을 남기는 시, 그런 높고, 깊고, 크고, 정겹고, 한없이 기나긴 시를 꿈꾼다. 그러나 선문답 같은 시를 경계한다. 시는 오직 시여야 하기 때문이다. 말을 버려서, 비로소 말을 얻는 일이 어찌 그리 말처럼 쉽겠냐만,
다만, 구도자의 심정으로 또다시 오체투지의 길을 스스로 재촉할 따름이다.
—《작은詩앗 · 채송화》 3호

채송화, 작은 꽃 하나에도 온 우주가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보는 것, 즉 하나는 전체(一卽多)이고 전체는 하나(多卽一)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유한에서 무한을 보는 것이 화엄의 눈이라면 ‘작은詩앗 · 채송화’가 추구하는 시야말로 화엄의 시학이라 해도 영 얼토당토않은 억지는 아닐 성싶다.

오인태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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