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들머리에 경주 남산을 다녀왔다.

어느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열암곡, 침식골, 양조암골 등을 둘러보고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경주 남산 답사가 처음이라고 하자 잡지사의 편집자는 산책하듯 천천히 둘러본 뒤 편하게 써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답사를 가던 날 나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작은 배낭에 물과 간식거리를 넣은 뒤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5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예매했던 터라 4시 10분 첫 버스를 타야만 했다.

사위는 아직 캄캄했고 새벽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무언가가 오른발을 툭툭 치는 것 같아 들어 보니 오른쪽 등산화의 밑창이 반쯤 떨어져 여름날 개의 혓바닥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집으로 되돌아가 다른 신발로 갈아 신을 시간이 없었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그대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역에 내려 근처 편의점에서 강력접착제를 구입했다. 기차에 올라 너덜거리는 밑창을 완전히 떼어낸 뒤 꼼꼼하게 접착제를 발라 붙였다. 조심스럽게 등산화에 발을 넣고 잘 붙어주길 바라며 적당한 힘으로 눌렀다.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 경주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오른쪽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역을 나서니 부드러운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봄이 왔음을 알리듯 희디흰 햇살이 가득했고 그 햇살에 찬 기운마저 한숨 죽어 외려 따스하기까지 한 공기가 내 안으로 흠뻑 밀려들어 왔다. 오른발을 조심스레 굴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밑창은 멀쩡해 보였다.

택시를 타고 열암곡으로 향했다. 잠이 부족했지만 푹 자고 난 것처럼 정신은 맑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청량하고 고즈넉한 풍경에서 구태여 불국의 흔적을 찾아보려 하지 않은 건 그 풍경이 주는 묘한 위안이야말로 이미 불국과 무관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열암곡 입구의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택시 기사가 손을 흔들고 떠났다. 산행이라기에는 머쓱할 만큼 짧은 여정일 테지만 열암곡을 품은 남산 남쪽 자락은 생각보다 품이 깊어 보였다. 그렇다 해도 등산화만 버텨준다면 편집자의 말대로 산책하듯 천천히 둘러볼 수 있을 듯했다. 산길을 따라 5분쯤 올랐을 때 누군가 오른발을 잡아끄는 듯해 내려다보니 기어이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 붙여봐야 소용이 없을 듯해 어쩔 수 없이 밑창은 배낭에 넣고 그대로 산길을 올랐다. 밑창 하나가 없을 뿐인데 그 작은 차이가 두 다리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쉬이 다리가 뻣뻣해졌다. 열암곡 석불좌상까지는 보통 걸음으로 30분이면 넉넉한 산길인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이를 수 있었다.

그다음 행선지는 양조암골이었다. 폐사지가 층층으로 남았다는 계곡이었다. 석불좌상 아래쪽에서 시누대들을 가로질러 오른쪽 계곡으로 접어들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수많은 안내서가 일러주었기에 그 말만 믿고 길도 없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때부터 나는 길을 잃고 계곡을 헤맸다.

아무리 찾아도 사람의 발길이 지나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반쯤 접은 합죽선 위를 걷듯 작은 골들을 수없이 건넜다. 주름진 치마 위를 기어가는 한 마리 개미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경사가 가파르고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아 미끄러지고 엎어지면서 능선을 넘고 골짜기를 건넜다. 마침내 어느 능선에서 길을 만났다. 돌아보니 겨우 한 시간여 헤맸을 뿐인데 한평생을 그러했던 것처럼 아득했다. 능선을 따라 내려오니 임도가 나타났다.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도를 더듬어 보았다.

내가 이른 임도가 침식곡 석불좌상으로 이어진 길임을 알 수 있었다. 완전히 길을 잃은 건 아니었지만 다시 주차장까지 내려가 열암곡으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거기까지 간다 해도 양조암골로 가는 길을 찾아낼 자신도 없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피로가 몰려왔고 다리와 허리의 통증이 새삼스러웠다. 남은 길이 까마득했고 먼 이국에 홀로 내던져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살면서 겪게 되는 대수롭지 않은 곤경일 뿐인데도 과장된 감정에 사로잡혔던 건 외롭다고 느껴서였을 것이다.

나는 터덜터덜 임도를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발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무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사뿐사뿐 내려오는 한 사내가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그이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남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처한 사정을 설명했다.

그이는 초행자라면 양조암골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이는 한참 동안 양조암골로 가는 길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으나 확신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런 내 머뭇거림을 알아본 것일까. 그이는 선뜻 나와 동행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주차장까지 내려간 뒤 두어 시간 전에 내가 올랐던 그 길을 함께 올랐다.

그이는 양조암골로 가는 확실한 길을 내게 일러준 뒤 손을 흔들고 내려갔다. 그이 덕분에 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열암곡의 엎드린 마애불, 본래 입상이었으나 지진 때문이었거나 세월의 힘 때문이었거나 앞으로 고꾸라져 지금처럼 엎드린 자세로 파묻혀 있다가 발견된 불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마애불. 마애불이란 낱말은 부드럽다. 울림소리 미음으로 시작해 울림소리 리을 받침으로 끝나기 때문이지만 말 그대로 절벽을[애(崖)] 문지르고 문질러서[마(磨)] 새긴 부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매달려 부처를 새겼던 이들은 사라졌고 부처는 땅속으로 파고들기라도 하듯 엎어져 있다.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야 했다.

절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며 고꾸라졌을 뿐인데 그 어떤 마애불보다 아니 그 어떤 불상보다 숭고하게 여겨지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해. 불상이 앞으로 넘어져 있을 뿐인데 가슴이 벅차오르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소리 없이 바람이 불었고 가까운 곳에서 나직하게 새가 울었다.

해가 손가락 한 마디쯤 더 높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부처는 중생의 떠받듦이 지겨워서 스스로 엎드려 버린 것만 같았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 속으로 스스로 내려가 그들과 더불어 오체투지를 하고 싶은 거였다. 중생에게 절을 받는 흔한 부처가 아니라 중생에게 절을 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부처. 부디 오래도록 거기 그렇게 계시라.

여기에 미처 밝히지 못한 게 하나 있다면 내가 “오래도록 생각해야 했”던 순간이 마애불을 지켜보던 그 순간만이 아니라, 밑창이 떨어져 나간 등산화 탓에 절뚝이며 걸었던, 양조암골을 찾지 못해 골짜기를 헤맸던, 뜻밖의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고 나머지 답사를 무사히 마무리했던, 서울로 돌아와 바로 이 글을 쓰기 위해 고심했던 그 모든 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부처가 인간에서 말미암았다는 사실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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