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월 초 나는 한 영화관을 찾아 영화 〈박열(朴烈)〉을 보았다. 내가 이 영화 상영관을 찾게 된 것은 최범술(崔凡述, 1904~ 1979) 효당사(曉堂師)가 일제강점기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서 반제국주의 아나키스트 열혈 청년 박열(1902~1974)을 불령사(不逞社) 동지로 만나 벌인 항일투쟁 과정을 어떻게 그렸나가 궁금해서였다.

영화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진 폭발로 일제가 조선인 대학살의 만행을 저질러 놓고 그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의 대로망의 주인공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불령선인 동지들을 잡아들임으로써 그들의 거사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나, 역으로 재판과정을 통하여 일제의 만행이 만천하에 폭로되는 실화를 영화화하고 있었다.

한편 과연 영화 중에는 최영환 소년(최영환이 다름 아닌 효당사의 족보상의 이름이다)이 박열의 절친이자 핵심인물로 등장하고는 있었으나, 박열이 최영환에 의한 폭탄 입수 · 운반 사실은 끝까지 함구하였기에 화면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이 점 일제강점기 재일 한인 아나키즘 운동을 연구해온 김명섭 박사도 후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견 표시한 바와 같이 “(이 영화에서 최영환의 역할에 대하여) 간단하게 처리된 것이 아쉬웠다.”

이 영화를 보고 난 2, 3일 후 우연히 신문을 펼쳐드니, 7월 27일 만해학회가 ‘만해와 효당 최범술’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기사를 읽고 난 며칠 후 효당사상연구회 채정복 회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 세미나에 나와 축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떻든 나는 효당사가 선종하신 1979년 7월로부터 어언 38년이란 세월을 흘려보낸 2017년의 같은 7월, 효당사 관련 영화감상과 학술세미나에서의 축사를 통해 효당사에 대한 추억에 젖어드는 한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2.

1974년 무렵, 효당사는 〈독서신문〉에 〈한국의 차도〉를 연재하였다. 내 절친 고 김길홍(이화여대 미대학장 · 산업미술대학원장 역임)과 김차섭(이중섭미술상 수상 화가, 재미) 두 화백은 이를 읽고 이 글의 필자인 효당사를 경남 봉명산 기슭 다솔사(多率寺)로 찾아뵙고 막 돌아와 있었다.

이 절친들은 효당사로부터 길홍 화백은 ‘담거(曇居)’, 차섭 화백은 ‘금오(金鰲)’를 아호로 받고 아호 현액 휘호도 보여주며 서로를 아호로 불렀다. 커피 대신 다솔사에서 가져온 작설차를 내놓고, 효당사로부터 들은 제차법, 차기 완상법을 열변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근세 한국차의 중시조라는 차성 초의(草衣) 와 추사(秋史)의 붕우지교며, 원효(元曉) 대사의 화쟁(和諍)을 신명 나게 설하는 것이었다.

이 절친들은 본시 멋이 넘쳐나는 지성들이었지만, 효당사를 만난 후에 이에 더하여진 멋의 품격이라니! 이채롭다 못해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졸지에 나와 이 멋쟁이 절친들과 사이에 무슨 문화적 간극(?)이라도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들에 지평을 맞추지 않고서는 향후 이 절친들과의 통교에 심대한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생길지 모르겠다는 나름의 위기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여름휴가의 행선지를 다솔사로 정하고 장마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한낮의 무더위가 도회를 달구는 7월의 어느 날을 택해 다솔사를 찾아 기어이 효당사를 만나 뵙게 되었다. 마침 효당사는 경내 죽로지실(竹爐之室)에서 《원효대사 반야심경복원소(般若心經復元疏)》 강의를 하고 계셨다.
그해 여름은 무더웠고 한낮의 오수는 인정사정없이 찾아들 때이건만 멋쟁이 절친 화백들과의 교우 반열에 끼어볼 게라고 나는 그 강좌의 뒷자리를 슬그머니 꿰어차고 앉았다.

그리고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불상을 중심으로 왼쪽 벽에는 행커치프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는 예수의 두상을 그린 성화가 걸려있었다. 도대체 부처님상을 모셔놓은 산사의 방실에 다른 종교 창시자의 성화를 천연덕스럽게 걸어놓을 수 있다니…… 종교 간의 대화가 도외시되던 당시를 살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스님의 마음 경계는 과연 어디에서 끝 다함일까? 이는 힌두의 간디가 일생 성경을 지녔던 그런 심정일까? 성화는 나 같은 사람도 끼어들 여지가 있을 것 같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이때 본 이 성화는 나와 무슨 각별한 인연이 있었나 보다. 이 영상과 상견례를 나눈 지 근 40년이 지난 어느 날 채정복 회주의 손에 그 복사본이 들려져 지금 내 서초동 사무실에 걸리게 되었다.

나는 졸음 반 맨정신 반이었지만 용케도 마지막 날까지 청강을 완주하였다. 이 고행(?)을 감수한 덕으로 저자 효당사가 손수 서명을 한 《한국의 차도》 초판 간행본을 소장하는 호사도 입었고, 당신이 제차하여 낸 작설차를 연일 얻어 마시고 차례법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수(以水)라는 아호도 물론 휘호로 써 받음으로써 절친 화백들과 최소한의 격을 맞추게도 된 터였다.

그때 함께 강의를 들은 도반 중에는 효당사상연구회 채정복 회주, 연세대학교 교목 윤병상 교수(윤 교수는 원효와 루터에서 한 자씩을 합성하여 曉婁라는 아호를 받았다), 훗날 원효 연구의 석학이 된 김상현 동국대 교수 등 제씨가 기억난다.

3.

나는 종강 후 일행 도반이 하는 봉명산 산행에도 따라붙었다. 한여름의 땡볕은 우거진 송림을 뚫고 온몸을 후비고 전신에 땀범벅을 강요하였고, 도반 모두가 진땀을 흘리건만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70 노옹 효당사는 밀짚모자의 무게만 지니셨는가 바람결같이 가볍게 훨훨 앞서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효당사와 도반 일행은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다솔사 경내 공터에서 모닥불을 켜놓고 모두가 빙 둘러앉아 캠프파이어를 하게 되었다. 그 밤 청푸른 여름 밤하늘에선 별들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유성이 연이어 영롱하게 긴 꼬리를 늘어트리며 흐르고 있었다.

대관절 효당사란 어떤 분이신가?

효당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 소년 시절 박열을 만나 ‘불령선인사’를 함께하고, 청장년기를 거치면서는 만해 한용운과의 인연으로 비밀결사 ‘만당(卍黨)’에 참여하고 옥살이를 치르면서도 만해로부터 대학 졸업 시에 받은 휘호 “마저절위(磨杵絶韋, 쇠로 만든 다듬잇방망이를 갈아서 침을 만들고 대나무에 글자를 써서 만든 책을 엮어 놓은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단 뜻으로, 노력하면 아무리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음을 뜻함)”의 정신으로 항일운동에 일로매진한 애국지사이다.

한편 일제강점기 다솔사 주지로 주석하면서 불교전문강원과 광명학원, 서울에 서울명성여자학교를 설립하고, 해방공간에서는 국민대학 · 해인대학 등을 설립하여 후학을 가르친 교육자이다. 그리고 신생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현실 정치인이기도 하다. 13세에 다솔사로 출가하고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거쳐 광복 후 불교총무원 중앙총무부장,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선승이다. 또한 원효교학을 복원한 구도적 학승이기도 하다.

내가 효당사를 찾을 무렵의 효당사는 노경을 집중적으로 원효교학의 복원에 매진하는 일방(1971.3. 연대 동방학지 제12권 《원효대사 반야심경복원소》 수정본 발표), 만해에 관하여 글을 쓰고(1971.4. 나라사랑 제2집 《철창철학》) 《만해 한용운 전집》(전 6권)의 출판 간행위원장으로 만해 연보를 정리하고 전집 출판을 주도했다(1973.7. 신구문화사). 또한 한국의 차도 보급에 앞장서는 등(1973.8. 《한국의 차도》 초판 간행) 종교 · 문화 · 차도 등 전방위적으로 정진을 계속하고 계셨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에 이은 6 · 25동란과 한국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질곡을 온몸을 던진 불문수양으로 고스란히 견디며 살아낸 끝에 생사초탈로 우뚝 서신 효당사!

그런 당신이 붙인 자전 에세이의 제목이 이 모든 환난 얼룩을 담거나 극복하는 상징 언어를 다 물리치고 끝내 헤르만 헤세의 자전소설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차용한 이유를 나는 당신이 연출한 이 한여름밤의 황홀한 꿈의 향연을 함께하면서 비로소 조금은 눈치를 챌 수가 있었다.

다솔사 경내 만해가 식목한 황금공작 편백이 마주한 섬돌 밑에서는 때 이른 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어 우는데, 다솔에서 만해를 해후하고 소신공양의 〈등신불〉을 구상했다는 김동리가 거쳐 간 대양루 기와 위에는 어김없이 밤이슬이 새록새록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그 밤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이들을 데려갈까“라고 양희은의 〈아름다운 것들〉을 노래 불러 헤세적 별리를 예감하며, 어쩌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효당사의 〈청춘은 아름다워라〉에 애정을 담아 화답을 하였음이었다.

4.

여하튼 나로서는 차를 얻으려 다솔사를 향한 차마고도(茶馬古道)에 나섰다가 현대 한국 차도의 중흥조 선차수행(禪茶修行)의 차선삼매인(茶禪三昧人) 효당사를 만나는 청복(淸福, 차를 마시며 사는 삶을 차인들은 淸福을 누린다고 한다든가?)의 극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이 길에서 나는 차인으로만 한계 지어질 수 없는 분, 원효를 온전히 득도하여 원효를 당대에서 당신의 몸으로 훨훨 살아내신 어른, 고착화된 삶의 정형에 얽매이지 않는 사색인으로 행동하고 항시 담대한 용기를 잃지 않는 행동인으로 사색해온 동서남북 사통팔달한 지행합일의 대자유인이자 휴머니스트 문화 지성 효당사를 만나는 비단길(Silk Road)에 들어 청복 이상의 홍복(洪福)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효당사를 휴가를 이용하여 몇 차례 다솔사로 더 찾아뵈었었고, 토우 김종희(土偶 金種禧) 대구 도예전 때에는 당시 내 근무지가 대구여서 효당사를 내 집에 모실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서울의 제헌회관, 청량리 청사(晴斯 安光碩)의 거처, 의제(毅齊 許百鍊)가 서울에서 머물 때면 경기여고 입구의 여관, 연정(燕亭 林允洙)을 동반해 방문하곤 했던 김길홍 · 김차섭의 아파트, 효당사 차도전시가 이루어졌던 명동의 화랑, 창신동의 걸레 중광(重光)의 거소, 말년을 보내신 북촌의 거처 등지에서 뵈었고, 효당사의 소개로 청남(菁南 吳濟峰)은 부산 동대신동 서실로 찾아뵙기도 했었다. 그런 연고로 나는 ‘다도무문(茶道無門)’을 비롯한 효당사의 친필을 소장하는 영광도 누리고 있다.

그리고 1979년 여름 정릉의 자그만 암자에서 스님의 마지막 임종을 지키는 몇 안 되는 인연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가끔 사인을 할 계제가 있으면 “Schoen ist die Jugend! 以水”라고 적어 다솔에서 효당사와의 그 청푸르렀던 한여름 밤 꿈의 추억을 상선약수(上善若水)에 실어 달래곤 한다.
아아, 이 여름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여해와 같나이다. 효당사시여!

오윤덕
변호사, 서울법대 장학재단 이사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