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지속가능발전에 대한 불교의 지혜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졸저 《평화와 평화들》에서 평화를 추상적 단수 ‘평화(Pe-ace)’가 아닌 구체적 복수 ‘평화들(peaces)’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평화라는 말은 많지만 평화롭지 않은 현실을 극복하려면, 평화에 대한 이해, 의도, 목적조차 다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다양한 입장 간의 조화를 시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였다. 평화라는 말은 동일한 듯해도, 실제로는 다양하게 상상되고 추구되는 현실을 긍정하고, 서로에게 무엇이 평화인지,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대화하고 합의하며 더 큰 ‘우산’을 만들어가야 할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평화다원주의(pluralism of peace)’라는 말로 구체화하기도 했다.

아울러 평화보다 폭력에 더 노출된 인류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폭력이 없는 상태’라는 기존의 규정보다는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는 규정이 더 현실적이라는 제안을 한 바 있다. 모든 문장의 주어는 술어에 의해 지시되고 한정되듯이, 평화는 ‘주어’가 아니라 ‘술어’에 의해 지시되는 목적론적 세계라는 제안도 함께 했었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며 지향해가는 끝없는 추구의 대상이자 지속적 구체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작은 책이지만, 이런 식으로 필자 나름의 평화론을 담았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기존 입장을 디딤돌로 삼으면서, 평화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다른 각도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고자 한다. 특히 평화는 ‘비폭력(非暴力, non-violence)’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과 태도에 머물지 않고, ‘감폭력(減暴力, minus-violencing)’이라는 좀 더 현실적 개념과 표현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폭력이 없었던 적이 없던 인류에게 ‘비폭력’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자세이자, 논리적으로도 성립 불가능한 언어라는 의심 때문이다. ‘감폭력’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줄이는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보고, 이른바 지속가능한 평화가 가능하려면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다시 본래의 물음으로 돌아가 시작해 보자.


2. 평화의 방법이 다르다

많은 이들이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이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평화를 원하기는 하되, 그를 위한 실천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객관적으로 말하면, 평화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실천적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칸트(I. Kant)의 통찰에서처럼, 어떤 대상을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사변적인 ‘순수이성’과 도덕적 의지에 따라 행동을 규정하는 ‘실천이성’은 다르다. 평화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는 관념적 사유의 능력과, 그 생각이 실제로 도덕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실천하려는 의지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다. 나아가 그런 의지가 실제 실천으로 옮겨지기까지의 간격도 넓다. 이런 간격과 거리가 평화에 대한 말은 많아도 실제 평화로까지 이어지지 않게 한다.

더 나아가 원하는 대로 실천한다 해도 그 실천이 다른 실천과 부딪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실천과 부딪히는 이유는, 간단히 말하면, 평화 실천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이 다른 이유는 사실상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법은 목적을 구현하는 수단이거니와, 목적 자체가 자기중심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면, 실천도 자기중심적으로 하게 된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타자를 소외시키거나 후순위로 몰아낸다. 가령 평화를 심리적 안정 상태 정도로 상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태를 회피할 것이다. 평화의 사회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해도 사회적 흐름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기를 바랄 것이다. 국가도 이른바 국익을 기준으로 타국과 자기중심적 관계를 맺으려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개인과 국가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끼리도 부딪치고 국가 간에는 긴장하고 갈등한다. 나의 평화가 너의 평화와 부딪치고, ‘너희’ 평화는 ‘우리’에게 어색하다 느끼고, 자국의 평화가 타국에 대한 제한이나 압박으로 나타난다. 개인이나 집단, 나아가 국가의 평화구축 행위가 다른 개인, 집단, 국가의 구축 행위와 대립하는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종교도 다르지 않다. 평화를 추구하고 내세우는 종교인들 사이에 갈등도 있는 이유는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베소서》 2:14)라는 성서를 보자. 이것은 본래 그리스도를 만나 평화를 이뤄가는 이들의 공동체적 경험을 표현한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리스도를 말하거나 신앙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평화가 없거나 적다는 식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 대해 비슷한 기대를 가진 이들 안에만 평화가 임재하는 것처럼 상상한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대반열반경》)이라는 혁명적 가르침을 선포하고 있지만, 그 가르침을 실제로 깨달으려면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식에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비불교도에게도 불성이 있기는 하지만, 왠지 불자만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받는다.

쿠란에는 “우리(무슬림)의 하나님과 너희(유대-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분께 순종한다”(29:46)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무슬림이 실제로 생각하는 ‘그분’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이슬람의 하나님이다. 문장의 지향점은 ‘같은’ 하나님이라는 말에 있지만, 현실에서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의 하나님을 실제로는 ‘같게’ 여길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무슬림이 ‘우리’의 하나님과 ‘너희’의 하나님을 구분해서 말할 때, 그리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며 ‘우리’ 아닌 타자를 전제할 때,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곳에는 왠지 불성이 없거나 덜 활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차별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3. 목적과 수단이 분리된다

차별성은 자기중심성의 필연적 발로다.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 이미 타자 소외가 들어 있다. 평화의 이름으로 타자를 소외시키고, 사실상 자신의 내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평화에 대한 자기중심적 이해가 평화를 위한 수단도 자기중심화한다. 타자에 대해서는 사실상 폭력적이지만, 그럼에도, 평화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이들은 폭력의 실상은 잘 느끼지 못한다. 이것을 자기중심적 평화주의(ego-centric pacifism)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폭력이-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가피한 수단처럼 일상화되어 있을 때가 많다.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가 말하는 ‘절대전쟁’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인 전쟁에서마저 폭력은 피치 못할 수단으로 간주된다.

폭력이 그 자체로 목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목적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자신을 드러낼 때가 많다. 나치즘과 같은 가공할 전체주의 사회에서도 폭력은 전적인 국가주의와 혈통 중심의 게르만 민족주의를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로 목적이었던 적은 없다.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잘 제시한 바 있듯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적 정치 행위도 해방의 추구라는 목적을 부각시키며 자신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경우가 많다. 자본가의 억압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적 폭력을 정당하다고 보았던 마르크스주의가 그 전형적인 사례다.

민주주의라고 해도 과히 다르지는 않다.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정치권력이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라며 일방적으로 국민적 일치를 요청할 때가 많은데, 갈퉁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요청도 자유-민주주의적이기보다는 보수-봉건적 요구로 나타나곤 한다. 겉으로는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권력과 체제의 정당성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곤 한다. 그런 경우 이른바 민주정부조차도 위계에 의한 과거의 일방적 명령 체계를 은근히 기대한다. 그런 체계를 공고히 하려는 욕망도 꿈틀댄다. 이런 숨은 욕망 속에서 수단이 점차 폭력화하는 것이다. 지젝(Slavoj Zizek)이 ‘체계적 폭력(systematic violence)’이라는 말을 쓴 바 있는데, 이것은 체제가 공고하게 자리 잡아 굉장히 안정적으로 보이는 사회 시스템이 도리어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평화의 개념과 실천 방법이 다를 뿐만 아니라, 실천마저 자기중심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성 속에는 타자가 없거나 소외된다. 타자를 배제하거나 소외시킨 평화는 사실상 폭력으로 작동한다. 수단이 폭력적인 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폭력뿐이다.

평화를 지향한다면 실천을 위한 수단도 평화적이어야 한다. 고대 로마의 전략가 베게티우스(Flavius Vegetius Renatus)가 말한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에 반대하며 근대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는 말을 금언으로 삼고 있다. 갈퉁(Johan Galtung)의 주저인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Peace by Peaceful Means)》라는 말에서처럼, 수단과 목적은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 한국 최고의 실천적 사상가라 할 함석헌도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목적은 끄트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과정의 순간순간에 들어 있다. 수단이 곧 목적이다. 길이 곧 종점이다. 길 감이 곧 목적이다.” 수단도 평화적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수단이 목적에 어울려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이 평화롭지 않은 이유는 평화라는 목적과 그를 위한 수단이 어울리지 않거나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4. 개념이 다르고 목적이 충돌한다

그렇다면 또 물어야 한다. 목적과 수단은 왜 분리되는가. 이것은 수단의 불순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단의 문제이기 이전에 목적의 두 얼굴 때문이다. 평화라는 단일한 이름 속에 숨겨진 의도와 목적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인, 집단, 국가가 평화를 바라는 의도와 목적은 동일하지 않을 때가 많다. 가령 강자는 현 체제 및 질서의 안정을 통해 평화를 이루려 한다면, 약자는 강자에 의해 만들어진 불평등의 해소에서 평화를 느낀다. 그래서 강자는 구조적 혹은 체계적 폭력을 불가피하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하려 하고, 약자는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또 다른 폭력에 기대는 쪽으로 기운다. 폭력의 가치의 문제를 일단 논외로 한다면, 분명한 사실은 다른 기대와 내용을 자기중심적으로 충족시키는 과정에 갈등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평화에 대한 이해 자체의 상이성이다. 평화라는 ‘기표’와 ‘기의’ 간 차이도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 자체가 서로 다르다. 이것은 같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가령 북한에 대한 남한의 이해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 어느 진영에 있느냐에 따라 애당초 달리 설정된다. 남쪽의 보수는 대체로 북한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정복적 자세를, 진보는 대체로 포용적이거나 대화적 자세를 취한다. 북한의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고, 남한의 정체는 ‘민주공화국’(헌법 제1조)에 두고 있지만, 북한과 남한이 이해하는 ‘민주’나 ‘공화국’의 개념은 서로 다르다. 의도와 목적, 절차와 과정 등 거의 모든 것이 다르다.

더 나아가면 이것은 언어 자체에 내장된 문제이기도 하다. 언어는 그 언어가 지시하는 세계에 충분히 가 닿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선불교에서는 언어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指月]’에 비유한다. 언어와 언어가 지시하는 세계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언어적 대상의 순수한 재현은 불가능한 채 언어는 언제나 그 나머지를 만들어놓는다. 하지만 언어는 자신이 지시하는 세계를 강요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 본성상 폭력적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이것을 언어의 ‘원초적 폭력(originary violence)’이라 명명한 바 있다. 언어적 표현이나 어떤 언어적 규정을 절대시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의 사례라는 뜻이다.

평화 개념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남쪽이나 북쪽이나 평화에 대해 말하지만, 저마다 현 체제 중심적으로, 자기 정권에 유리하게 제시하고 사유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이 마당에 특정한 상황과 맥락 안에서 내려진 평화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최종적일 수 없다. 특정 평화 규정을 최종화하고 실천 방법을 단일화하려는 순간 그런 시도가 평화를 위한 다른 실천과 부딪히며 도리어 폭력의 동인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가능하겠는가. 평화를 정의한다는 것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불편한 사실을 의식하면서, 일단 기존의 평화 규정을 재검토해보자.

5. 폭력이 없던 적은 없다

평화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는 문장이다. 그런데 어떤 강력한 힘이 조직이나 체제를 조절 및 통제하고 있어서 외견상 폭력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제정치나 정책적 조율로 인해 서로 침범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평화는 정책이나 조약의 조절 대상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 삶의 전체 영역과 관련한 문제이다.

개인이나 국가의 안정과 생명이 보장되고 억압이 전혀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며 활동의 결과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을 때 평화롭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평화란 생명이 보장받고, 자유와 존엄성이 확보된 상태라는 일반적인 정의도 가능하다. 갈퉁이 말한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가 대체로 여기에 해당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행하는 《인간개발보고서》(1994)의 표현으로 하면,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를 넘어 ‘인간 안보(human security)’가 보장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국제정치에서 평화가 ‘국가 안보’ 이상을 넘어선 적은 거의 없다. 국가 안보를 확보하는 과정에 인간 개인은 국가라는 틀에 포획되어 있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구조화된 폭력 속에 놓인다. 전체나 다수가 아닌 소수에게 더 혜택이 돌아가는 불평등한 관행이나 정책도 지속된다. 독재자의 폭압 정치로 인해 그 영향력 안에 있는 이들이 숨죽이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상대적 빈곤감도 커진다. 한국의 경우 산업화의 주역인 장년층이 여전히 경제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어서 청년층이 경제적 주체로 자리 잡기 힘든 구조이기도 하다. 성차별은 이른바 문화적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다. 많이 바뀌어오기는 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아직도 여성이 여러 면에서 주도적일 수 없는 문화다. 남자 고등학생은 그냥 ‘고교생’이지만, 여자 고등학생은 ‘여고생’이라 불린다. 남자 배우는 그냥 ‘배우’지만, 여자 배우는 ‘여배우’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남성의 사회적 진출에 비해 열악하며, 여성 노동자의 평균 임금도 남성 노동자 평균 임금의 54%~63% 수준에 머문다. 개인 안에 내면화한 문화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나아가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갈퉁은 이런 식의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마저 없어야 적극적인 평화라고 했지만, 문제는 인류가 이러한 적극적 평화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성소수자 혐오나 성차별과 같은 것을 포함해, 일체의 문화적 폭력마저 사라진 상태, 이른바 ‘인간 안보’가 실현된 적이 없다. ‘인간 안보’라는 용어조차 인간이 그 어떤 힘에 의해 보호받는 상태라는 수동성을 면하기 어려울뿐더러, 그나마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이상적인 지향일 뿐이다. 평화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전쟁이 멈춘 이후 느낄 수 있을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안정감 수준에 머물러 있다. 특히 한반도와 같은 곳에서는 전쟁이 일시 중지되고 국토가 분단된 상태를 잘 관리하기만 해도 평화롭다고 말한다. 분단 상태를 잘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유용한 평화의 실천이라는 생각이 많다.
물론 ‘분단폭력’을 잘 관리하는 행위도 한반도와 같은 전쟁 중단 상황에서는 대단히 현실적인 과제다. 하지만 ‘분단’이라는 말 자체가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상황을 의미하며, 무력적이든 평화적이든 극복되어야 할 어떤 일시적 장벽으로 여겨진다. 분단 과정에 겪는 갈등과 긴장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마당에 독재정치나 경제적 종속에 의한 구조적인 폭력도 없고, 구조적 폭력을 보이지 않게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도 없는 상태라는 기존 평화 규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상적이다. 이러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각종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류는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는 사실이 더 실감 나는 현실이다.

6. 평화유지와 평화조성

물론 거시적으로 보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분명히 축소되어 왔다. 평화를 더 큰 힘이 지켜줄 때의 안정 상태 정도로 상상하다 보니, 더 큰 힘을 갖추기 위해 무력을 확대하거나, 더 큰 힘에 기대어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했다. 더 큰 힘에 기대어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행위를 평화학에서는 ‘평화유지(peace keeping)’라고 하는데, 인류는 분명히 좁은 의미의 평화 유지를 위한 구심력을 발휘해왔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극복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정 국가, 특히 강대국의 보호나 감시로 인해 군소 국가들이 서로를 침범하지 못한 채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 사례다. 성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비유적 표현은 이천 년 전에도 평화를 더 큰 힘에 의한 보호받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자기 궁전을 지키는 동안 그의 소유는 ‘평화 안에 있습니다’(엔 에이레네)(《누가복음》 11:21).”

이런 상황을 의식하고서 어떤 힘에 의해 보호받는 데서 오는 안정감을 더 확보하기 위해 상호 간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을 맺어 더 큰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를 ‘평화조성(peace making)’이라 한다. 더 큰 힘과 그보다 작은 힘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이들 힘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협정을 맺어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행위다. ‘평화조성’이 ‘평화유지’보다 더 평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력적 힘을 조약이나 협정이라는 문자적 혹은 언어적 정신으로 대체한다는 데 있다. 각종 조약이나 협상은 현실 너머에서 공통의 영역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언어적 구체화다. 이 언어적 표현에 상대방도 비슷한 무게중심을 둘 줄 아는 행위는 진화론적으로 보건대로 분명히 평화를 향한 일보 전진이다. 신예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인류의 거시사를 다룬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 인류는 평등의 길을 걸어왔다는 작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허구’를 공유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데 따른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국가 간 합의 내지 조약의 빈도수도 많아졌다. 칸트가 국가 간 힘들에 의한 전쟁과 폭력을 극복하려면 일종의 세계정부가 필요하다고 제시한 이래 유럽의 사상가들은 이에 대한 상상을 지속해왔고, 그 배경 속에서 ‘유엔’이 성립된 것이 대표적인 평화조성 행위다. 인류는 분명히 평화조성을 위한 걸음을 차근차근 내디뎌왔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방대한 책에서 인류는 폭력을 줄이고 평화로 좀 더 나아갔다고 분석한 것은 평화유지와 평화조성에 어울리는 평화, 다소 좁은 의미의 평화 개념을 염두에 둔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7. 폭력의 내면화와 평화구축

인류가 평화로 나아갔다면 폭력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폭력은 줄어들었는지 좀 더 세심하게 물어야 한다. 분명히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축소되어 왔다. 한편에서는 다행스러운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폭력의 양상이 변화하며 인간의 내면에 침투해왔다는 사실도 보아야 한다. 폭력의 양은 줄어들었지만, 폭력의 양상이 변화되었고, 질은 강화되어 왔다. 무슨 뜻인가.

폭력이 폭력인 이유는 그 힘이 주는 피해와 고통 때문이다. 폭력(violence)의 라틴어 어원의 의미는 ‘힘(vis)’의 ‘위반(violo)’이며, 의역하면 ‘지나친 힘’이다. 한자어 폭력(暴力)의 의미는 ‘사나운 힘’이다. 이때 지나치고 사나운 정도를 판단하는 주체는 폭력이 향하는 대상자 혹은 피해자다. 힘의 대상자가 그 힘을 부당하다고 판단할 때, 그 힘은 폭력이 된다. 반대로 대상자가 그 힘을 정당하다고 판단하면 그 힘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니다.

그런데 가령 자유경쟁에 따라 성과의 축적을 찬양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이기도록 요구하는 외부적 강제력을 당연시한다. 개인과 집단 안팎으로 가해오는 사나운 자본의 힘은 오늘날 거대한 폭력의 원천이지만, 개인이나 집단이 그 폭력을 기꺼이 감내할뿐더러 적극적으로 추구하기까지 한다. 이 힘을 폭력으로 판단하는 주체가 사라져, 폭력이 더 이상 폭력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폭력을 개인 안에 내면화시켜 자발적으로 감당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면화하는 바람에 폭력을 해결하기가 도리어 더 힘들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구조적 폭력’의 극복과 ‘적극적 평화’의 실현은 인류의 여전한 과제이며, 전술한 ‘평화유지’와 ‘평화조성’ 그 이상의 차원, 즉 ‘평화구축(peace building)’이 요청되는 것은 이런 맥락 때문이다.

평화구축은 개인의 내면, 문화적 차원에서까지 폭력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한 행위다. 리사 셔크(Lisa Schirch)의 정리를 빌면, 평화구축은 “모든 형태의 폭력을 예방하고 감소시키고 변화시키며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다. 적극적 평화를 세우기 위해 국제 질서는 물론 인간과 자연 간 관계까지 염두에 둔 폭넓은 규정이다.

평화조성 행위에서도 보았듯이, 평화를 위해서는 법과 법에 기반한 질서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평화를 위한 법을 만들고 나아가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아래로부터 요청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다. 이것이 평화구축의 근간이다. 평화구축은 하나의 완결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 평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구축(構築, building)이라는 한자어에 들어 있듯이, 평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은 건축 행위에 비유되곤 한다. 김병로에 의하면 평화는 ‘아키텍처’와 같다.

평화는 마치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과 같다. 단순한 건조기술을 구사하여 만든 건물이나 건설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을 감기 위한 기술 · 구조와 기능을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공간예술로서의 건축, 즉 ‘아키텍처(architecture)’에 비유할 수 있다. 아키텍처는 건축이라는 말로 다 전달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의미를 띤다. 즉, 공간을 이루는 작가의 조형 의지가 담긴 건축의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하고 복잡한 공정이 요구되며 편리함과 조형미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키텍처는 쾌적하고도 안전한 생활의 영위를 위한 기술적인 전개와 함께 공간 자체가 예술적인 감흥을 가진 창조적 행위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어로 ‘건축’을 의미하는 ‘아키텍처’는 질서, 배열, 비례, 분배, 균형 등의 의미를 지닌다. 어원적으로 기원, 원리, 원형을 의미하는 ‘아르케(arche)’와 기술을 의미하는 ‘테크네(techne)’의 조합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키텍처는 ‘이상적 원형을 추구해나가는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성을 지향해가는 삶의 모든 행위라고 폭넓게 말할 수도 있다. 평화 역시 이상적인 상태를 꿈꾸며 균형감 있게 세워가는 인류의 총체적 생활 방식 및 과정과 연결된다.

8. 폭력을 어떻게 줄일까, 비폭력의 모호함

평화는 폭력 없는 상태를 지향하며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이다. 평화를 세운다는 것은 폭력을 줄인다는 것이다. 폭력을 줄여나가는 만큼 평화가 세워지며, 따라서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이 평화의 과정이다. 평화는 폭력에 반비례한다. 이와 관련하여 갈퉁의 아래와 같은 평화 도식은 유의미하다.

평화(Peace)=공평(Equity)×조화(Harmony)/상처(Trauma)×갈등(Conflict)

평화는 공평과 조화의 곱에 비례하고, 상처와 갈등의 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공평과 조화의 역량을 키우는 방식으로,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상처와 갈등을 줄이는 방식으로 평화를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명쾌한 도식이다.

이때 좀 더 중시해야 할 것은 분자보다는 분모 부분이다. 인류가 평화에 대한 경험보다는 폭력의 경험이 더 클뿐더러, 실제로 폭력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평화를 폭력 줄이기로 이해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상처가 없고 갈등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의사에게도 병이 있고, 상담사에게도 고민이 있다. 신부도 다른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언제나 폭력 속에서 그 너머를 지향해왔다. 상처의 치유와 갈등 해소의 길에 나선다는 것은 현재까지의 상처와 갈등의 경험으로 더 큰 상처와 갈등을 예방할뿐더러 지금의 상처와 갈등을 더 줄이자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폭력으로 폭력을 줄이는 것이다. 작은 상처로 큰 상처를 보듬고, 작은 갈등으로 큰 갈등을 예방 및 치유하는 것이다.

물론 폭력으로 폭력을 줄일 수 있겠느냐는 비판적 목소리들이 많다. 주지하다시피 간디, 톨스토이, 함석헌 같은 이들은 폭력적 저항을 거부하며 비폭력에 대해 강조했다. 폭력을 없애는 최상의 길은 비폭력(非暴力, non-violence)이라고 가르쳐왔다. 가령 간디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비폭력은 우리 인간의 법칙이다. …… 이 세상의 모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려면 한쪽에는 진리, 또 한쪽에는 비폭력이라 쓰인 깃발을 하늘 높이 치켜들어야 한다.” 이러한 간디의 비폭력 저항은 두루 칭송받고 있다.

그런데 다시 물을 필요가 있다. 비폭력이란 무엇이며, 비폭력은 과연 가능한가. 인류가 폭력을 떠나본 적이 없고 더욱이 폭력이 내면화해가고 있는 마당에 ‘폭력 아님’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 말일까.

비폭력이라는 말은 본래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 전통에 반대하며 생명의 희생 없이 해탈을 추구하던 인도의 종교 전통에서 나온 말이다. 비폭력의 원뜻은 ‘불살생(不殺生, ahiṃsā)’이다. 그런데 간디가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1849) 등에 영향을 받으며 부당한 권력에 대한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면서 ‘아힘사’는 ‘비폭력’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종교적 성향의 ‘불살생’ 이념이 다소 정치 · 사회적 언어인 ‘비폭력’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폭력을 무력적 싸움이나 전쟁처럼 소극적으로만 이해하던 저간의 경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물리적 폭력은 약해지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폭력이 더 깊게 내면화하고 더 넓게 구조화되는 과정을 실감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폭력 아님’이라는 말이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벤야민, 데리다, 들뢰즈 등이 법의 폭력성, 힘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폭력성 등에 대해 분석했듯이, 나아가 동물 등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존활동 자체가 폭력적이듯이, ‘비폭력’이라는 말은 폭력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곳에서만, 즉 물리적 폭력으로 이해하는 곳에서만 유의미하다. 무력에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무력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전략은 한편에서 의미가 적지 않지만, 사회와 국가적 구성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인식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에는 제한적 효과만을 가져온다. 저마다의 욕망을 긍정하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칭찬할 만큼 사실상 폭력이 일상화해가는 ‘탈폭력적 폭력’의 현실에서 비폭력의 위치는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게다가 비폭력이라는 말이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도 갖게 된다. 언어 자체가 폭력이기에 폭력에 외부가 있을 수 없다는 데리다의 폭력론에 함축되어 있듯,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를 온전히 비폭력적으로 맺는 길은 없다. 다소 광범위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언어와 행동은 본성적으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폭력 안에 있어 왔고, 폭력을 떠나는 행동을 해본 적이 없다.

9. 감폭력(減暴力, minus-violencing)

‘비폭력’이 불가능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유의미하다면, 평화를 위해 폭력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폭력으로 폭력을 줄이는 길만이 가능하다.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줄이는 것이다. 간디나 톨스토이 같은 이들이 실제로 ‘시민의 불복종’ 운동을 실천한 데 영향을 받으며 비폭력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전승되어 왔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의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차원까지 극복하려면, 폭력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폭력 안으로 들어가야 할 도리밖에 없다. 폭력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저항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더 작은 힘들을 사용하며 폭력의 극복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평화는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재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 축소 과정을 ‘감폭력(減暴力, minus-violencing)’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적이기(violencing)’로부터 멀어져가는(minus) 과정이다.

‘비폭력’이 명사이고 낱말이라면, ‘감폭력’은 동사이고 문장이다. 비폭력이 폭력적이지 않은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면, 감폭력은 폭력을 감소시켜가는 ‘과정’이다. 그러면서 이전보다 더 감소된 다음 단계를 꿈꾼다는 점에서 ‘목적’이기도 하다. 폭력을 더 줄여 온전한 탈폭력적 세상으로 수렴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감폭력은 과정이자 목적이다. 복잡한 힘들의 부정적 역학 관계 때문에 어디서 누군가 더 큰 폭력에 의해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서 폭력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나갈 뿐이다.

데리다가 “모든 철학은 폭력의 경륜(economy of violence) 속에서 더 작은 폭력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은 큰 힘을 축소시키고 힘들 간 조화를 찾는 과정을 평화로 해석하는 이 글의 입장과 통한다. 작은 힘들이 다양한 곳에서 여러 방식으로 큰 힘에 저항하면서 평화는 구축되어간다. 작은 폭력들의 연대가 큰 폭력을 줄여 그만큼 평화를 가시화시키는 동력인 것이다.

아울러 폭력이 여러 힘들 간 불균형에서 비롯된다면, 평화는 작은 힘의 의미와 가치를 열어 보여서, 힘이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밝히는 과정이다. 힘의 진정한 본질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고 상생을 이루는 데 있음을 드러내는 저항이 기존의 폭력을 줄인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더 작은 폭력을 선택하고, 그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감소시켜야 한다. 타자를 향한 폭력의 벡터(크기와 방향)를 흐릿하게 하는 그러한 폭력의 감소가 감폭력이다.

10. 반폭력과 공업(共業)

발리바르가 일차원적 대항폭력과 소극적 비폭력을 넘어, 구조화된 폭력 안에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anti-violence)의 정치’를 제안한 바 있다. 반폭력은 구조화된 폭력 속에서도 타자에게 배타적이지 않은 정치적 주체세력으로서 ‘시민다움(civilite)’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반폭력의 정치는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에 저항해 큰 폭력을 줄이는 감폭력의 과정과 비슷한 구조를 한다.

이때 작은 폭력은 단순히 폭력의 ‘크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크기는 작되, 폭력적 현실을 주체적이고 반성적으로 각성한 이가 자발적으로 기존의 큰 폭력에서 한 걸음 혹은 몇 걸음 물러나는 행위라는 점에서 폭력의 ‘질’이 다르다. 기존의 폭력이 타자를 부정하는 자기 욕망의 확장으로 강화된다면, 감폭력은 자신의 내적 욕망을 절제하며 타자를 인정하고 살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아렌트(Hannah Arendt)가 공화주의적 삶을 위해서는 일종의 ‘연기(action)’를 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괄호를 치고 차이를 수용하며 공적인 영역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행위에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하는 공감(compassion)이 뒷받침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의 근간이라고 아렌트는 본다.

이런 자세 및 세계관은 불교의 ‘공업(共業)’ 개념에서 절정에 달한다. 세상만사는 상호 관계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은 폭력을 줄여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된다. 모든 생명에게서 불성을 보는 대승적 생명관으로 보면 더욱이나 그렇다. 모든 것은 관계성 속에 있으니, 폭력으로 인한 누군가의 아픔에는 크든 작든 나의 책임도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폭력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개인적이기 이전에 사회적이고, 결국 모두의 문제다. 폭력으로 인한 누군가의 아픔에는 사회적 책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유마 거사의 일성은 감폭력의 불교적 원리를 잘 보여준다. 《유마경》 〈불도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소겁 동안에는 그를 위하여 자비심을 일으켜 저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싸움이 없는 땅에 살도록 한다네. 만약 커다란 싸움터가 있다면, 병력을 고르게 나누고 나서 보살은 위세를 나타내 항복받아 화평하게 편안하게 한다네.”

폭력이 있는 곳에는 자비의 마음으로 폭력을 줄이고, 전쟁이 벌어지면 힘의 불균형을 바로 잡아 화평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폭력을 줄여 평화를 이루는 보살도는 공업의 원리에 따른 공감력을 근간으로 한다. 이런 공감력이 폭력을 줄이기 위한 실천적 동력이다. 아렌트의 공감도 이러한 자세의 현대 정치철학적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 공감, 감폭력, 평화다원주의

공감은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다시 보는 것이다. 외부의 눈으로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부에만 있으면 내부가 안 보인다. 그런 점에서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본 뒤 다시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행위가 공감이다. 그리고 다시 그 타자의 눈을 가지고 자신으로 돌아오는 순환 과정을 통해 타자와 자아, 내부와 외부가 모두 바뀐다. 이른바 희생양 시스템에 입각한 인류 문명의 폭력적 구조를 밝힌 지라르(René Girard)도 밖으로부터의 관점을 융합해낼 때 폭력적 희생양 시스템이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체제의 안에서 보면, 차이들밖에 없다. 반대로 밖에서 보면 동질성밖에 없다. 안으로부터는 동질성이 보이지 않으며, 밖으로부터는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두 관점이 대등한 것은 아니다. 안으로부터의 관점은 언제나 밖으로부터의 관점에 통합될 수 있지만, 밖으로부터의 관점은 안으로부터의 관점에 통합될 수 없다. 이 체제에 대한 설명은 안으로부터와 밖으로부터라는 두 관점의 화해 위에 근거해야 한다.

지라르가 말하는 두 관점의 화해는 공감의 구성 원리를 잘 보여준다. 안으로부터의 관점은 타자 배제적으로 드러나지만, 밖으로부터의 관점은 타자 수용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공감은 타자와 함께하면서 그 배제적 가치를 극복하려는 행동으로 드러난다.

폭력을 감소시켜 그만큼의 평화를 세우려면, 주어지는 수동적 평화가 아니라 세워가는 능동적 평화여야 한다. 평화구축(peace building)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체적 성찰 없는 감폭력도 없다. 감폭력은 타자를 배제하는 자기중심적 체제에 주체적으로 저항하는 과정이고 끝없는 목표다. 이것이 갈퉁이 말하는 평화 도식의 분자(공평×조화)를 키우고, 분모(트라우마×갈등)를 줄인다. 그렇게 적극적 평화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들 간 공감대를 확보해 나가면서, 다양성이 갈등이 아닌 조화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평화는 어느 순간 특정 입장에 의해 완성될 정적 상태가 아니다. 이른바 자기중심적 여러 ‘평화들’의 동적 조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평화들의 조화로서의 평화’를 세워가야 한다. 그렇게 폭력을 축소시켜 가려는 입장과 자세가 ‘평화다원주의(pluralism of peace)’이다.

평화다원주의적 시각과 자세로 여러 평화 간의 공감적 합의 과정을 통해 ‘평화’라는 단수형 이상에 다가선다. 그 단수형 이상은 자기 완결적이지 않다. 진행형이다. 상호 이해를 통한 갈등의 지양이고, 그를 통한 다양성의 조화이며, 너와 나 사이의 차이가 상생적 조화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평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 실천 방법 등이 달라서 서로 부딪히더라도, 공감의 지점을 향해 다시 대화하고 합의하고 수용해 나가야 할 도리밖에 없다. “대화와 논쟁은 상반된 성향에도 불구하고 공공영역의 활성화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제대로 말하면, 그것이 감폭력적 평화구축의 근간인 것이다. ■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불교와 기독교 비교로 박사학위 취득. 강남대 교수, 일본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등 역임. 주요 저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평화와 평화들》과 공저서로 《폭력이란 무엇인가》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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