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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위기와 생태적 사회를 위한 제언 / 이철헌
특집 | 지속가능발전에 대한 불교의 지혜
[71호] 2017년 09월 01일 (금) 이철헌 cheadlee@hanmail.net

1. 들어가며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음식, 의복, 거주지, 그 밖의 생활용품을 자연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개발론자들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환경운동가에게 인간이 먼저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맞는 말이다. 굶어 죽어가면서 환경을 보호할 사람은 없다. 환경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최소한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문제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만족을 모르고 계속 탐욕을 부림으로써 함께 누려야 할 자연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현실이다. 지구촌 자원은 무한한 게 아니라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하뜨마 간디는 “지구의 자원은 모든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지만 인간의 탐욕까지 만족시켜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제 인간은 살기 위해서라도 자연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 중심의 서구문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문화를 낳았고 자연을 대상으로 한 개발행위를 지속함으로써 자연환경 파괴를 가져오고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서구에서는 자신들의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선과 악, 정신과 육체 등으로 분석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와 산업혁명에서 비롯한 물질문명이 자연 경시와 자연파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해결의 사상적 배경을 불교, 힌두교, 노장사상에서 찾고자 노력한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끝없는 탐욕에서 비롯한다. 인간이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순환하는 이치를 무시하고, 이분법적인 사고와 직선적인 세계관으로 탐욕을 채우고자 살아온 것이 원인이다.
붓다가 세상에 머물던 시대에 환경문제는 오늘날처럼 인간의 삶에 재앙을 가져다줄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기에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과 실천을 살펴보면 붓다는 누구보다도 환경보호론자였으며 환경운동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환경위기를 맞이한 오늘날 불교의 지혜와 실천으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2. 환경파괴 현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오며 지구환경의 적절한 조절 과정을 통해 일정한 에너지 총량을 유지한다. 밤과 낮이 있어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고, 산과 계곡이 있어 햇볕을 받는 양을 조절한다. 자연은 스스로 변화하면서 지구환경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은 현재까지 과학기술로는 지구에 유입되거나 유출되는 에너지의 총량을 대규모로 조절할 수 없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자연인 듯하지만, 실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다. 인간이 자연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자정 능력을 약화시키자 자연은 재앙으로 인간을 경고하는 현실이다.

자연환경의 가장 근원은 기후 곧 공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도의 차이 곧 지형에 따라 태양 에너지는 차이가 난다. 기후와 지형에 따라 물의 흐름이 일어난다. 물의 흐름은 중력에 의해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공간 이동시킨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물의 흐름은 토양을 이동시키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을 만든다. 식물이 있는 곳에 식물을 주된 에너지로 하는 동물이 살아가는 이러한 흐름이 자연환경을 구성하는 기본 틀이 된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구성하는 기본 틀을 따라 오늘날의 환경 현실을 살펴보자. 기후변화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를 변화시키므로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1992년 전 세계 192개국이 모여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기본협약(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UNFCCC)’을 맺었다.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 이행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매년 당사국 대표가 모여 당사국총회를 개최하고 있다.

지구의 에너지 총량을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기층인데 과도한 인간 활동으로 이미 조정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은 것으로 과학계는 판단하고 있다. 기후변화 곧 지구온난화의 핵심 물질은 온실가스로 이산화탄소(CO2)가 대표적이다. 이미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을 넘어서면서 지구온난화의 마지노선이 무너졌다는 우려 섞인 탄식이 커지고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은 석유나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의 소비가 원인이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던 아마존 열대 밀림마저 대규모 농장을 개발하면서 시간당 축구장 128개 넓이로 사라지고 있어 지구온난화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 빙하가 녹아내려 해수면이 매년 3.4㎜씩 상승하고 해수면의 온도도 높아지고 있다. 해수면 상승은 해류에 의한 지구의 기후조절 능력을 떨어뜨려 가뭄과 홍수 그리고 태풍과 해일 같은 재앙을 가져온다.

자동차나 화력발전소에서 화석연료를 연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과 중국의 급격한 산업화로 석탄 사용량이 많아지면서 발생하는 초미세먼지는 코나 구강에서 걸러지지 않고 몸에 쌓이고 혈관에까지 침투해 호흡기와 심장에 피해를 주고 있다.

산업과 생활의 오 · 폐수, 산성비로 인한 수질오염, 농축산 폐수, 잔류농약, 기름 유출 등으로 강과 바다는 심하게 오염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에 댐을 막아 물 흐름이 늦어지면서 강물이 썩어 냄새가 심하고 눈도 따가울 정도다. 심한 녹조현상이 일어나고 녹조물 속에 마이크로시스틴(Microcystin)이라는 맹독성 물질이 있어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대량생산을 위해 뿌려진 화학비료로 줄기가 약해진 식물은 병해충에 약하기에 화학물질을 뿌릴 수밖에 없고, 내성을 키운 병해충을 죽이기 위해 보다 강력한 화학물질을 뿌려야 하는 악순환을 하고 있다. 이제는 유전자를 변형한 콩과 옥수수, 유채, 사탕무 등으로 만든 제품이 식탁에 오르고 있다. 유전자변형 식품(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GMO)은 장기에 문제를 주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며, 변형식품의 내성으로 더 강력한 해충이 나올 수도 있어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원자력을 이용하고자 했지만 1979년 미국 스리마일 핵사고,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핵사고에 이어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4기가 폭발했다. 막대한 양의 방사성 물질이 일본뿐 아니라 태평양과 전 지구를 오염시켰으며 그 영향은 앞으로도 수백 년 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사용 후 핵원료(폐연료봉)를 해체할 능력이 없는 우리나라는 계속 늘어나는 사용 후 핵연료를 처리할 마땅한 방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소를 늘리고 있다. 폭탄 돌리기 게임을 하듯 현 정권에서는 생산만 하고 처리는 다음 정권으로 넘기고 있다.

주거환경을 돌이켜 보면 각종 산업폐기물을 섞어 만든 시멘트, 포름알데히드가 사용된 벽지와 장판과 가구 등으로 실내가 오염되어 있다. 이러한 유해가스는 눈과 코, 목 등을 자극하고 두통과 어지러움, 피로감을 느끼게 하며, 천식, 급성폐렴, 아토피 등을 유발하게 된다. 이를 새집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방향제의 메틸알코올과 이소프로판올 등의 화학물질도 유해하며, 가습기의 살균제 등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우리가 먹는 고기와 우유는 좁은 우리에서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가 든 사료로 키운 소 · 돼지 · 닭과 우유다. 채소와 과일 또한 성장촉진제와 농약으로 재배하고 있다. 종이컵, 플라스틱 용기와 식기 세척제도 몸속에 유해 화학물질을 쌓고 있다. 매일 입는 우리 옷은 화학섬유며 빨래하는 데 사용하는 세제 또한 화학물질이다.

이러한 환경문제는 일반적인 정책 문제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독특한 성격과 복잡한 인과 구조를 갖는다. 환경문제가 지닌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환경문제는 인간의 모든 활동 곧 개발 · 생산 · 소비 과정에서 다양하게 발생한다. 개발과정에서는 자연환경 훼손, 생태계 파괴 등이 따르,\고, 생산과정에서는 매연 · 폐수 · 폐기물 · 소음 · 진동 등의 공해를 유발하며, 소비과정에서는 생활하수 · 쓰레기 등 다양한 오염물질이 발생한다.

둘째, 환경은 개방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공간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오염물질은 대기와 수계의 이동과정을 통해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환경문제는 지역 문제가 아니라 전국 내지 지구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문제의 발생으로부터 영향의 발견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존재한다. 환경오염과 자연파괴의 영향이 오랜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관계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넷째, 상호작용하는 여러 요인에 의해 화학반응을 통한 시너지(synergy)효과를 일으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한다. 대기 오염물질인 아황산가스는 대기 중에서 질소산화물, 수증기, 분진 등과 혼합하여 산성비(acid rain)를 만들어 더욱 심각한 피해를 준다.

다섯째, 대기 · 물 · 토양 등 자연환경은 어느 정도 오염물질을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그 능력 이상으로 오염물질이 부하하면 자정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인간이 파괴하고 오염시켜 지구를 더럽힌 결과 지구는 더 이상 참을성을 잃고 인간에게 질병과 재난으로 되돌려주고 있다. 지구촌 공기와 물과 토양 어느 하나 성한 게 없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생활환경이 위협받고 있다.


3. 환경파괴의 원인

학자들은 오늘날 생태 위기를 가져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전통 그리스도교의 자연관이다. 유대 그리스도교는 자연물에도 혼이나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animism]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연을 비신격화하며 자연에 대한 신성한 감정과 신비한 의식을 소멸시켰고, 자연을 단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물로 간주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를 거쳐 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서양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만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라는 믿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린 화이트(Lynn White)는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28)”는 구절과 창세기 9장 1-2절의 내용을 근거로 생태 위기의 주범은 기독교의 인간 중심적 가치관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인간 위주의 인식론이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자연탐구에 응용될 때, 인식주체와 대상은 분리된다. 인식주체인 인간은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오직 이용물로만 간주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셋째, 진보신앙이다. 진보신앙은 산업화를 촉진시켰고 공리주의와 결탁했다. 자본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혁명은 공리주의를 받아들여 자연을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다. 공리주의는 자연을 오로지 유용성에 근거해서 다룬다. 공리주의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한마디로 유용성이다. 따라서 행동의 동기가 아니라 효과를 중시한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고전경제학자들은 자연을 상품으로만 본다.

넷째, 도구적 가치관이다. 도구적 가치관은 사물들의 고유한 가치를 부정하고 단지 효용성만을 가치의 척도로 삼는다. 인간과 자연도 효용가치에 의해 평가한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인 하나 됨을 부정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다섯째, 과학의 몰가치화와 과학기술의 남용이다. 근대 이후 과학은 자기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치문제를 포함한 모든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했다. 과학은 감정보다도 비정한 수학적 논리를, 정서보다는 합리성을, 내재적 목적보다는 도구적 목표를, 질적 요소보다는 양적 요소를 선호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생태계 파괴를 가속화한다. 환경오염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시도는 또 다른 부작용을 유발하고 문제를 단순히 다른 상태로 바꾸어 놓는 데 불과하다.

생태 파괴의 원인을 불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세상의 원리에 대해 무지[無明]한 탓이요 끝없는 욕망[渴愛]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붓다는 모든 존재는 여러 요소가 화합되어 있을 뿐이므로 늘 변화하며[無常] 실체가 없다[無我]고 했다. 또한 어떠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겨나며[인과응보의 법칙]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의존하고 있다[상호의존성]고 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동물과 식물이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공기와 물과 흙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 게송이 말하듯 모든 것은 상호의존하면서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나아가 자연과 자연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쪽의 변화가 다른 한쪽의 변화를 가져온다.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일은 곧 내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일이고 자연환경을 해치면 인간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세상 모든 게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피드백이란 걸 모른다. 인과응보와 상호의존의 진리를 모르기에 이기적이 되고 도덕성을 잃게 된다.

인간 내면의 도덕성이 질적으로 낮아지면 자연환경도 나빠진다. 경전에는 따르면 방탕한 욕정, 고삐 풀린 탐욕, 잘못된 가치관이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고 이 사회의 도덕성이 무너져버리는 때가 되면, 비가 제때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도덕성이 계속 퇴화하면 지상의 모든 맛난 음식물은 자취를 감추고 가장 맛없고 조잡한 음식들이 맛있는 음식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초기경전들은 인간의 도덕성과 자연환경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주석서인 《승의소(勝義疏, Atthasālini)》에서 다섯 가지 자연의 법칙이라는 이론으로 체계화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다섯 가지 자연의 힘이 작동하고 있는데 물리적 법칙[utuniyāma, 계절의 우주적 질서], 생물학적 법칙[bījaniyāma, 종자의 질서], 심리적 법칙[cittaniyāma, 마음이 좌우하는 결정], 도덕적 법칙[kammaniyāma, 업에 의한 질서], 인과적 법칙[dhammaniyāma, 법에 의한 질서]을 말한다. 앞의 네 가지 법칙은 각자 자체 영역 안에서 작동하지만, 마지막 인과적 법칙은 위의 네 가지 법칙들 안에서는 물론 각 법칙 사이에도 작용한다.

어떤 특정 지역의 물리적 환경은 그 환경을 구성하는 생물학적 요소 곧 지역 내의 식물군과 동물군의 성장과 발육을 조절 · 규제하며 이들 동식물은 다시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들의 사고 유형에 영향을 끼친다. 사고 양식은 도덕 기준을 결정한다. 이런 관계는 반대 방향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도덕성은 사람들의 심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생물 및 물리적 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같이 다섯 가지 법칙은 인간과 자연이 상호 인과관계 속에서 묶여 있으며, 어느 한쪽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다른 한쪽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비도덕성이 세계를 지배할 때 사람과 자연은 퇴락하는 반면, 도덕성이 지배할 때 인간의 삶뿐 아니라 자연의 질도 개선된다. 탐욕 · 증오 · 어리석음은 안팎으로 오염을 일으키고, 베품 · 동정 · 지혜는 안팎으로 정화를 가져온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계는 마음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씀하신 근거 가운데 하나다.

진리에 대한 무지와 함께 탐욕에 대한 끝없는 추구가 이 세상의 타락을 가져온다. 《세기경(世紀經, Aggañña Sutta)》에는 세상의 전개과정을 전하고 있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스스로 빛을 내고 기쁨을 음식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탐욕이 나타나면서 점차 능력을 잃게 되었다. 도덕성의 저하는 외부환경에도 영향을 미쳐 매우 향기롭고 풍미 있는 버터와 같은 대지도 차츰 거칠어지고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육신은 점차 거칠어지고 형상의 차이가 나타나 추한 자들을 얕보기 시작했다. 저절로 자라는 쌀이 땅 위에 자라났고, 매끼 쌀을 가져오는 게 귀찮아진 이들은 음식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쌓아놓는 버릇으로 식량의 성장 속도가 수요를 따라갈 수 없게 되고 마침내 땅이 사람마다 분배되었다. 사람들은 더욱 탐욕스럽고 게을러져서 다른 사람의 땅에서 훔쳐가기 시작했고 훔친 사람은 도둑질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억제하고 처벌하기 위해 왕을 선출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차 복잡하고 복합적인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탐욕과 도덕성의 저하와 게으름이 인간 세상을 파괴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이 세계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다투어 쌓아놓으려 하기에 자연은 파괴되고 자원은 고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말한다. 자기가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이루려 하기에 인간 세상은 범죄가 일어나고 복잡해진다고 했다.

경전에는 ‘우드애플을 흔드는 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드애플 가지를 흔들면 익은 열매와 함께 아직 익지 않은 것까지 떨어진다. 그러면 나무를 흔든 사람은 익은 과일만 줍고 나머지는 내버려 결국 썩고 만다. 익기를 기다려 익은 것만 따면 모든 과일을 다 딸 수 있는데도 이렇게 자기만의 욕심을 채우고 만다.

4. 불교에서 본 생태계

환경(環境, environment)이란 말은 ‘특정한 주체(인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란 말이다. 오늘날은 생태계(生態界, ecosystem)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적합한 삶의 터전을 이루고자 생물과 그 환경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체계라 규정할 수 있다.

불교는 자연을 인간에게 예속되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단순한 주변적 환경으로 보기보다는 주체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환경이라는 말보다는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성을 지닌 생태계로 보고 있다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생태를 의미하는 말로는 세간(世間, loka)이라는 표현이 알맞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의존하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세계를 법계(法界)로 표현한다.

세간으로 번역한 로까(loka)는 어원이 luj로 ‘깨지다, 부서지다’라는 의미다. 무너지고 부서지기 때문에 세간이라고 한다. 세상은 무너지고 부서지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불교는 자연을 고정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항상 변하고 움직이는 역동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자연은 절대자나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며, 그렇다고 우연에 따라 생긴 무질서한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법(法, dharma)에 따라 나타나는 질서를 가진 존재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된 존재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법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자연은 견고성[地] · 유동성[水] · 열성[火] · 운동성[風]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네 가지 성질은 항상 변화한다. 네 가지 원소로 모든 물질이 이루어지므로 생명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 토양 · 물 · 빛(광합성을 위한 에너지) · 공기가 필요하다. 동물 세계는 이러한 식물 세계 덕분에 살아간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연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은 서로 생태적으로 연결된 생명공동체다.

불교에서는 세간 곧 세계를 중생세간(衆生世間) · 기세간(器世間) · 오음세간(五陰世間)의 세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다. 첫째 중생세간이란 천(天) · 인간 · 아수라 · 아귀 · 축생 · 지옥으로 육도(六道) 중생이 살아가는 세계를 말한다. 중생을 유정(有情)이라고도 하는데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의미다. 이렇듯 불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윤회를 통해 형태를 달리하며 태어난다는 것이다. 동물도 전생에 인간이었을 수 있으며 인간도 동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드러난 일시적 모습이므로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인식을 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모든 존재의 생명을 존중하며 자비를 강조하는 사상을 가진다. 불교 신도들이 지키려고 다짐하는 오계 가운데 첫째가 ‘산목숨을 끊지 않겠습니다.’라는 불살생계다.

붓다 당시부터 비가 내리는 우기에는 돌아다니는 걸 삼가고 수행하는 안거를 했다. 이는 비가 내리는 우기에는 지렁이와 곤충들에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출가자들이 지켜야 할 율장에 따르면 출가수행자는 땅을 파지 못하고, 진흙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와 쇠똥을 모아 태우지 못하고, 집을 불로 그을리지 못하고, 물은 걸러서 마셔야 한다. 이는 흙과 나무와 물에 사는 작은 미물의 목숨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풀과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했으니 초목도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관에서 생명체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과 연민하는 마음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다.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에는 다음과 같이 중생들에 대해 자비심을 가질 것을 말한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어떤 것이든
하나도 예외 없이 약한 것이든 강한 것이든
길든 크든 아니면 중간치든
짧든 미세하든 거대하든
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든
멀리 살든 가까이 살든
태어났든 태어나려 하든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후에는 생명존중이 더욱 강조되어 출가자는 물론 신심을 가진 재가자에게도 육식(肉食)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잡혀 죽을 목숨을 놓아주는 방생(放生)의 공덕을 강조했다.

둘째 기세간은 국토세간이라고도 하는데 중생들이 머물고 있는 하늘과 땅, 강과 바다 등의 자연 · 물질의 세계를 말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을 뜻한다.

셋째 오음세간이란 모든 현상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를 말한다. 오온은 물질세계인 색과 정신세계인 수 · 상 · 행 · 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색은 땅 · 물 · 불 · 바람의 네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세간을 바라보는 불교의 시각은 인간을 비롯하여 동물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중생과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천 · 아수라 · 아귀 · 지옥 중생이 있고, 하늘 · 땅 · 강 · 바다와 같은 자연이 있고, 중생과 자연을 이루는 물질과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세간은 서로 연관하여 의지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법을 매개로 한 연기적 관계에 있다. 현상으로 보면 다르지만 본질로 보면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러한 연기론을 바탕으로 성립해 있다고 하여 법계(法界, dharma-dhātu)라고 한다. 법(dharma)은 유 · 무형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의미하고 계(dhātu)는 종류나 영역의 뜻이므로 법계는 모든 존재의 종류나 영역을 의미한다. 화엄사상에서는 네 가지 법계로 설명한다. 첫째 사법계(事法界)란 사물 · 현상의 세계를 말하며, 둘째 이법계(理法界)란 진리의 세계를 말하며, 셋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란 진리와 사물 · 현상이 교류 · 융합하는 세계를 말하며, 넷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란 사물 · 현상이 서로 교류 · 융합하는 세계를 말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질뿐만 아니라 사물과 현상들끼리도 서로 교류하고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름이 모여 공기의 물질을 담아 비가 내리고, 비는 흐르며 흙을 담아 물길을 만들고, 물길 따라 흙이 쌓인다. 공기와 물과 흙과 같은 무정물도 기후의 온도 차이에 따라 움직이는 이 지구촌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라 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이 종이 안에 구름이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름이 없이는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나무가 없이는 종이를 만들 수 없다. ……종이 안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햇빛을 보게 된다. 햇빛이 없다면 숲은 성장할 수 없다. 그리고 나무를 베어 제재소로 운반하는 나무꾼을 보고, 나무꾼이 먹는 빵을 보고, 빵을 만드는 밀가루를 보게 된다. 이 모두가 없이는 이 한 장의 종이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법계를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Indrajāla)으로 비유한다. 인드라(제석천)에 거대한 그물이 쳐 있는데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그물코에 보배구슬이 달려 있다. 맑고 투명한 구슬에는 전체 구슬이 비치고, 전체 모든 구슬에는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친다. 하나 속에 모두가 있고 모두 속에 하나가 있어[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모두고 모두가 하나다[一卽一切多卽一]. 이렇듯 세상은 서로 막힘이 없이 거듭거듭 얽히고설켜 있다[重重無盡], 마치 모든 PC가 인터넷망으로 연결되듯 각 개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연기의 법칙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인간과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나아가 자연끼리도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 바라본 세상은 오늘날 생태학자들이 주장하는 생태계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5. 지속가능한 발전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걸 진단한 사람들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62년 레이철 카슨이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출판해 유독성 화학물질들로 인한 야생 생태계의 광범위한 파괴를 밝혔다. 봄이 왔는데도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는 현실을 고발했다. 그로부터 세계는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연환경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하나뿐인 지구’라는 주제로 유엔인간환경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 UNCHE)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인간환경선언과 행동계획을 채택하고 유엔환경계획(United Nations Environment Plan, UNEP)을 유엔소속으로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유엔환경계획은 생태적발전(eco-development)이라는 이념을 제창했다. 이 이념은 1980년 자연과 천연자원을 위한 국제연맹에 의해 살아 있는 자원의 보전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려는 전반적인 목적을 가진 범세계적인 자연환경 보전전략으로 대치되었다. 이어 1987년에 환경과 발전에 관한 세계위원회(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이하 WCED)가 발간한 《우리의 미래》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이념을 제시했다.

1992년 5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는 생물다양성협약(生物多樣性協約, 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을 채택했다. 생태계 다양성(ecosystem diversity)은 한 생태계에 속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상호작용에 관한 다양성을 말한다. 1900년대 이후 생물종의 멸종 속도가 이전에 비해 50~100배 빨라지자 생물 다양성 감소에 대한 위기의식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아울러 식품, 의약품 등 생물자원을 기반으로 한 산업이 발전하면서 생물 다양성 보전의 필요성과 생물자원의 이용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1992년 6월 2,000년대를 대비하여 국제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브라질 리우에서 유엔환경발전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UNCED)를 열었다. 리우환경회의는 WCED가 제시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재확인하고 더욱 강화하는 의미에서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 ESSD)’이라는 이념을 채택했다. 리우환경회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지침으로 ‘의제 21(Agenda 21)’을 채택하고 국가 차원의 ‘의제 21’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의제 21’의 기본 내용은 지구환경 문제의 원인이 되는 각종 사회경제적인 요인에 대한 해결방안, 대기 · 해양 · 폐기물 · 토지 등의 오염에 대한 해결방안,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재정, 기술이전 및 제도 등의 문제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도 2006년 9월에 종교계에서는 가장 먼저 ‘불교환경 의제 21’을 만들어 선포하여 실천하고 있다.

리우환경회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자연환경의 보전과 사회경제발전이라는 두 측면에서 동시에 접근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고, 생물종의 다양성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공동의 활동이 필요하고, 사회발전 및 경제발전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지속적인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을 위해 자원을 어떻게 보전하고 관리할 것이며, 정부 · 기업가 · 시민 등 각종 주요 집단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지속적인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리우환경회의는 WCED와는 달리 ‘지속가능한’의 의미를 자연환경의 보전뿐만 아니라 사회발전 및 경제발전에 모두 적용하고 있다. 자연이 오염, 파괴되지 않고 자기조절 체계를 유지하면서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유지해야 하고, 사회와 경제도 또한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우환경회의의 이러한 입장은 곧 자연의 생태체계를 유지시키는 환경 용량의 범위 안에서 인간의 물질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논리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97년 12월 교토에서 개최된 유엔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총회에서는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를 채택했다. 교토의정서에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구체적으로 정해지고 온실가스를 효율적으로 감축하기 위해 배출권거래 제도와 공동이행 제도, 청정개발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선진국들이 감축 의무를 부담스러워하면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경제성장의 논리와 충돌하면 환경문제는 뒷전으로 내몰리는 것이 현실이다.

2015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는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을 세계 195개 참가국의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파리협정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신(新)기후체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사회와 경제의 발전이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자연 생태체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다.

세계 2위 이산화탄소 배출국인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9월에 파리기후협정에 비준하고, “지구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날로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고 하며 환영했다. 그러나 불과 9개월 만인 2017년 6월 2일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 인도에는 엄격하지 않고 미국에 불공평하며 미국인에게 불이익을 준다.”며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미국의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에서 보듯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와 도덕성 저하는 자연환경파괴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 각국은 미국의 탈퇴가 오히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많은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책임 · 의무 · 권한은 삼면등가의 법칙이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권한 또한 사라진다는 걸 모르는 자는 결국 모든 걸 잃게 된다.

환경오염의 해결을 위한 방안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환경오염 물질을 처리하는 기술적 해결방안이다. 둘째는 법과 행정체계 등을 통해 환경오염을 규제하는 제도적 해결방안이다. 셋째는 환경오염의 원인자인 인간의 의식전환을 통해 환경오염원을 줄이는 가치론적 해결방안이다.
과학기술과 법률 규제로써 환경오염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환경파괴의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一切唯心造]. 스스로 다짐하지 않고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행동은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생명에너지를 얻기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인간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려면 자연 또한 지속이 가능해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것이 가장 먼저다.


6. 불교의 지혜와 대안

환경파괴의 원인이 무지와 탐욕에 있다면 생태사회의 대안은 바로 불교의 지혜와 자비라 할 수 있다. 지혜는 세상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생긴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여러 원인과 조건이 화합[因緣和合]해 존재하고 있으며, 원인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하고 사라진다[無常]. ‘나’ 또한 인연에 따라 존재하고 있을 뿐 영원불멸하는 실체가 없다[無我]. 그럼에도 나와 내 것에 애착하고 영원불변하기를 바라기에 고통스러울 뿐이다. 탐욕은 고통을 가져오므로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했다. 이 연기법은 곧 ‘공존(共存)의 원리’요 ‘조화(調和)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동식물과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고 있으며, 동식물은 물과 흙과 공기와 햇볕과 같은 무생물과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는다. 결국 인간은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환경과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

불교는 종(種)을 달리하며 죽고 사는 윤회를 주장한다. 인간은 죽으면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으며 동물 또한 전생에 인간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업을 짓고 윤회하는 존재를 사뜨와(sattva)라고 했는데 이를 중생(衆生)이라고 번역했으며,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유정(有情)이라고도 번역했다. 불교는 윤회를 주장하고 동물도 윤회하는 중생이므로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다. 그리고 율장에서는 초목도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함부로 벌채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식물을 윤회하는 존재는 아니나 성장하는 생명체로는 보았다. 이는 오늘날 생물학에서 식물을 생물로 보는 시각과 같다. 불교는 자연을 인간에게 예속되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단순한 주변 환경으로 보지 않고 어느 정도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한다.

불교윤리는 자비한 마음이 기초가 된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연민, 비폭력, 타인의 의견 존중, 감정의 조절, 이 모든 것이 자비에 뿌리를 둔다. 자(慈, maitrī)는 ‘우인(友人)’에서 비롯한 말로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려는 열망을 의미한다. 비(悲, karuṇā)는 ‘동정(同情)’ ‘애린(愛隣)’의 의미로 모든 존재를 불이익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열망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비란 불이익과 고통을 제거하고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려는 의도와 행동[발고여락(拔苦與樂)]을 말한다. 이는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공감하여 자신의 마음이 타인이 겪는 마음 상태 속으로 들어가 감정을 함께 나누는 곧 한 몸이 되는 것[동체자비(同體慈悲)]을 의미한다.

이러한 진리와 자비를 붓다는 몸소 실천했으며 이러한 붓다의 삶을 따르는 게 바로 생태계 사회를 위한 불교의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머물러 있고[法住] 우리가 사는 세계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세계[法界]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교단의 생활지침은 네 가지에 의지한[四依] 삶이었다. 버린 천을 빨아 지은 옷[糞掃衣]을 입고, 걸식(乞食)을 하며, 나무 아래 머물고,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약[腐爛藥]을 쓰는 것이었다. 이처럼 의식주를 가장 청빈하게 하여 살아가면서 오직 수행에만 몰두했다. 우리 불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생태적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의복에서 생태적 삶을 생각해 보자. 초기불교 출가자들은 분소의를 입었으며 속옷, 겉옷, 가사의 세 가지 옷으로 생활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이 아닌 생활에 편리하고 활동에 편한 옷을 입는다. 겨울철엔 내복을 입고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여름철엔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보온에 도움이 되고 통풍에 도움이 된다. 모피나 가죽 제품, 오리털 제품보다는 천연소재의 옷을 입는다. 밍크코트 한 벌에 자그마치 200마리 정도의 밍크가 필요하다. 털의 질을 위해 산 채로 때리거나 전기충격을 가해 기절시킨 뒤 가죽을 벗기는데, 정신 차린 동물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죽는다. 모피나 오리털과 가죽은 모두 동물을 사육해서 만든 제품이다. 세탁기를 이용할 때는 빨래를 한꺼번에 모아서 세탁한다.

둘째, 식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것을 생각해 보자.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실천한다. 육식은 수많은 살생을 불러오며 전생의 내 부모 · 형제를 죽이는 일일 수도 있다. 경전에도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고기를 먹는 자/ 이러한 사람은 자비를 만족하게 행하지 못하여/ 언제나 단명하고 병 많은 몸을 받고/ 생사에 빠져 부처를 이루지 못하리라.”라고 했다.

평생 날개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로 고통받으며 살다가 죽어가는 닭들, 근육이 생기면 질기다고 평생 좁은 우리에서 성장촉진제와 지방을 만드는 수입 배합사료를 먹다 잔인하게 도살당하는 소와 돼지들을 생각하면 생명의 존엄성 같은 것은 논할 여지도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길러지다 죽어가는 가축들은 상상을 초월한 분노와 원한을 몸속에 축적하게 되고, 이것을 먹는 인간의 몸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육식 증가로 대규모 집단사육을 하면서 구제역과 조류독감(AI)과 같은 질병이 생겨난다. 지난해 11월 조류독감이 발생한 후 올 4월까지 전국에서 살처분된 가금류는 3,800만 마리를 넘어섰다. 2011년 구제역에는 300만 마리 이상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 처리되었다. 경제적 이유로 밀집사육을 하고 동물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이러한 살처분은 생명윤리를 경시하고 있다.

대규모 사육으로 생겨나는 악취와 축산 오 · 폐수는 환경을 오염한다. 되새김질하는 동물들이 내뿜는 트림과 방귀는 전 세계 메탄가스 배출량의 37%를 차지하며 이는 지구온난화의 주범 1순위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축산업이 18%, 산업 부문이 16%, 교통수단이 13.6%로 각각 2위와 3위가 된다. 채식은 불교의 기본계율인 불살생계를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적극적인 운동이다. 채식만으로도 자비를 실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찰의 발우공양을 실천하여, 먹을 만큼만 덜어서 먹어 음식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에코붓다에서 펼친 ‘빈 그릇 운동’은 음식쓰레기를 줄여 지구환경을 깨끗이 하는 데 기여했다.

수입산을 줄이고 지역에서 생산된 식재료(local food)를 구입한다. 운송과 관련한 에너지를 줄이고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다. 유전자변형 식품을 멀리하고 유기농 식품을 이용한다. 온실재배 식재료가 아닌 제철 음식을 먹는다.

셋째, 주거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것을 살펴보자.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이 중요하다. 사찰에서는 전통적으로 밤 9시에 취침하여 새벽 3시에 일어난다. 모든 동식물은 해와 함께 살아가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생태적인 삶이다. 밤늦도록 전구를 밝히지 않고 거리에 광고판을 밝히지 않아 전력을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전력소비를 줄이면 곧 방사능 피해를 가져오는 원자력발전소나 미세먼지를 만드는 화력발전소를 없앨 수 있다. 밤 문화가 조장하는 과소비와 탐욕이 사라지고 건전하고 화목한 가족문화를 즐길 수 있다.

적정 실내온도를 유지한다. 여름철은 26도, 겨울철은 20도로 온도를 설정한다. 인간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몸은 자연환경에 적응한다. 지나친 냉방과 난방은 우리 몸이 점점 더 더위와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게 한다. 보다 쾌적해지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기구보다는 온도변화에 적응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설치하고 차양을 설치한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함께 사용한다. 석유 보일러나 가스 보일러보다는 태양열 온수를 사용한다.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다. 조명기기를 비롯한 전기제품은 에너지 소비효율이 높은 제품을 사용한다.
넷째, 작은 것으로 만족하며 산다. 필요한 것만 가진다는 무소유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석주 스님께서는 붓글씨를 쓰다 잘못 쓰면 그 부분을 찢어 ‘오유지족(吾唯知足, 나는 만족할 줄 안다).’을 써 주시곤 했다.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 만족하면 행복하다. 지나친 소비성향은 과잉생산을 불러오고, 낭비와 허비를 가져와 각종 쓰레기를 양산한다.

E.F. 슈마허는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 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고 했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세뇌된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많아도 너무 많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많은 걸 가지면 행복한 게 아니라 많을수록 걱정거리도 늘어난다. 버리고 비우면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불교에서 ‘놓아버려라[放下著]’라고 말한 뜻을 새길 필요가 있다. 과소비는 지구 자원의 낭비를 낳고 환경오염과 파괴를 가져온다.

다섯째, 몸이 조금 불편함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붓다는 탐욕과 나태함을 버리기 위해 힘들게 생활했다[捨欲苦行]. 억지로 육신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자기 건강과 환경오염을 생각하며 몸을 움직인다.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시간도 비용도 아낄 수 있다. 그리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을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와 승강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면 전력소비를 줄이고 자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밥하기 귀찮아 외식하고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 비만과 영양결핍을 불러온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재활용품을 사용한다. 종이컵 대신 개인용 머그잔을 이용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종이컵은 120억 개나 되며 이 종이컵을 만들기 위해 1,500만 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다. 잠들기 전에 집을 나서기 전에 사용하지 않는 전기제품의 플러그를 뽑자. 사용하지 않는 전기 코드를 꽂아두어 낭비되는 전력이 1년에 4,160억 원이라고 한다. 개개인이 탐욕을 절제하고 소비를 줄이는 생활방식을 실천할 때 전체 인류가 환경을 오염시키는 걸 그만둘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은 ‘더불어 삶’을 말한다. 모든 생태계가 서로 의존하고 생존하므로 조화로운 삶을 통해 상호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시갈로와다경(Sigālovāda Sutta)》에는 재산을 모을 때는 벌이 꽃에서 꽃가루를 모으듯 해야 한다고 했다. 벌은 꽃의 향기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꽃가루를 모아 달콤한 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꽃을 수정해 열매를 맺게 한다. 사람도 다른 생물을 도우면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우리는 집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집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자비라기보다는 걱정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구는 우리의 집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아이들과 친구들 그리고 거대한 집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유정물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그 집을 정리하고 보살펴야 한다. ……우리는 능력이 있고 책임이 있다. 너무 늦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깨닫고 생태적 사회를 위해 불교의 지혜를 모으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만 한다. ■

 

이철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철학박사).주요 논문으로 〈나옹혜근의 연구〉(박사학위 논문)와 저서로 《붓다의 근본 가르침》 《대승불교의 가르침》 《갈등치유론》(공저)와 역서로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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