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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우오가와 유지 저《깨달음의 재발견》/ 이상근
깨달음과 수행의 본래 목적은 무엇인가
[70호] 2017년 06월 01일 (목) 이상근 lsk530@hanmail.net

불교 수행, 애초의 목적을 혼동하지 않기

   

《깨달음의 재발견》
우오가와 유지 저 이광준 역
조계종출판사

‘행복에 이르는 길’ ‘인간으로서 바르게 사는 길’ ……
명상을 비롯해 불교 수행을 하는 이들의 목표를 물으면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적어도 불교의 개조(開祖)인 고타마 붓다에게는 그런 게 아니었다. 붓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수행 목적은 ‘해탈(解脫)’이며 또 그것을 달성한 경지인 ‘열반(涅槃)’이었다. 통상 ‘깨달음’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달리 명상의 ‘효과’들이 강조되면서 불교 수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달성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담론은 먼 나라 이야기다. 심지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불교는 자기계발이나 처세에 동원되기도 한다.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본래 목적인 깨달음이라는 목표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 애당초 ‘과학성’과 ‘합리성’을 바란다면 불교 관련 책보다는 자연과학 관련 책을 읽으면 되고, ‘처세술’을 알고 싶다면 2,500년 전의 인도인이 현대인의 상황에 딱 맞게 말하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게 훨씬 참고가 될 것이다. 속세의 처세가 불교의 문제였다면 수천 년의 시간과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넘어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왔을 리가 없으며, 과학성과 합리성이 불교의 특장(特長)이라고 한다면 그 점에 관해서는 근대과학 쪽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구태여 불교를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다시 질문한다. 불교 사상의 제로포인트인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해탈 · 열반을 증득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맹목적인 버릇을 멈추는 것

그런데 도대체 열반이란 무엇일까?
예컨대 입문서나 해설서에서 열반은 ‘한없는 평온함’이라든지, ‘더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묘사된다. 이런 일반적인 묘사 자체가 반드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과 생식(生殖)을 부정하고 갈애(渴愛)를 멸진하라고 설한 고타마 붓다가 말하는 ‘평온함’이나 ‘행복’이란 무엇인가? 또한 이는 일과를 마치고 편안히 쉬는 ‘평온함’이나 혹은 아주 좋아하는 이성과 함께 있을 때의 ‘행복’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해탈 · 열반의 경지가 애매한 형태로밖에 묘사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경지가 언어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탈 ・ 열반 자체에 대해서 언어로 완전하게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성질이나 그 경지를 달성한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해명이 이루어져도 좋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반문한다. 또한 언어로는 충분히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실천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로서 그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빨리어 경전과 아함경전 등 비교적 초기에 쓰였다고 전해지는 경전들에서 깨달음의 전제와 과정 그리고 그 경지에 대한 단초들을 찾아내고 또 현대 실천자들의 증언으로부터 유추해 그 대강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한마디로 “중생이 자신의 버릇 때문에 맹목적으로 계속하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마음에 번뇌가 있어서 더럽혀진 상태를 ‘유루(有漏)’라고 불러왔는데 이런 루(漏)의 영향 아래 있는 중생의 행동 양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쁜 버릇’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습관적이고 맹목적인 행위로서 ‘이건 나쁜 짓이다. 무의미한 일이다’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정신이 들면 어느새 또 저지르고 마는 행위이다. 불교에서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머리로는 제대로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도 습관적인 행위를 끊을 수가 없는 한,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게 ‘깨달음’이라는 것의 성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것을 현상의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행위, 즉 버릇(漏와 비슷한 것, 번뇌)을 영원히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설명하면 ‘중생이 버릇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행위를 계속하는 상태’가 ‘미혹[迷]’이고, ‘이것이 끊어진 상태’가 ‘깨달음’이다. 특히 남방불교에서 강조하고, 최근 대승의 승려들도 채용해서 흔히 사용하는 ‘마음챙김(sati)’이 이를 위한 실천이다.

왜 일본에서는 이 책 때문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나

이 책은 깨달음의 정의와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의 상태를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하나하나 설명한다. 특히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 무상, 고, 무아라는 테마에서 시작해 연기까지 이어지는 저자의 설명은 이의가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그 명징한 설명으로 이 책은 일본 불교학계에서 일가를 이뤘다는 수많은 학자로부터 추천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해 다양한 견지를 가진 일본 학계는 들썩였다. 논쟁은 물론 심지어 이 책을 비판하는 단행본까지 쏟아졌다. 저자가 던진 도발적인 질문 혹은 신선한 논쟁 중에 수행자와 학계가 가장 불편해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 붓다는 깨달은 다음에 왜 죽지 않았나?
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후 저자는 “진리를 체득한 다음에 하는 모든 ‘행위’는 순수한 ‘유희’임을 고려”해야 한다며 붓다의 이타행은 ‘선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제7장 〈지혜와 자비〉 부분)

△ 붓다는 인간으로서 바르게 사는 길을 설한 게 아니다.
저자는 붓다의 말씀은 오히려 사회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노동과 생식을 부정하고, 애초부터 그 전제가 되는 ‘인간’이라든가 ‘올바르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파괴하는 작용을 한다고 봤다. 그래서 불교는 반선악(反善惡)이 아니라 탈선악(脫善惡)이라는 주장이다.(제3장 〈‘탈선악’의 윤리〉)

반면 불교를 말하면서 아직도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논증(127쪽 이하 내용),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115쪽 이하 내용)는 논지와 증명은 불교를 더 불교답게 했다는 평가를 일본 최고의 불교학자들로부터 받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윤회를 부정하는 일부 학자들과 윤회의 주체가 없을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비판거리가 되기도 했다.

절대로 얼버무려서는 안 되는 것

저자는 현재 일본 불교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피’다. 아직 마흔도 안 된 젊은 나이라는 것 외에도 학계와 수행자 사이에 여전히 만연한 윤회 부정과 윤회의 주체를 설정하는 문제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한다. 이런 비판에는 일본 불교학계의 거장인 나카무라 하지메(비아설)나 와츠지 테츠로(윤회와 불교 세계관의 분리) 등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거장들의 불교 논지 전개가 경전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솎아내거나 때론 ‘절대로 얼버무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애써 무시하는 태도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명상으로 인격이 좋아지지 않는다’거나 ‘불교는 착하게 살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붓다가 깨달은 후 바로 열반에 들지 않고 법을 설했던 것은 유희다’라는 등의 도발적인 주장과 논지가 합쳐져 이 ‘젊은 피’는 논쟁의 한가운데 서고 말았다.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불교의 애초 목적을 찾아가는 그의 진지한 여정은 어쩌면 ‘(나의 가르침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얘기했던 붓다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게다가 이 책의 행간을 읽다 보면 이 책이 단순한 ‘학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종종 느끼게 된다. 저자 스스로 ‘불교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는 10여 년 넘게 태국, 미얀마 등지를 돌며 수행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명상을 해도 인격이 좋아지지 않는다’거나 ‘불교는 착하게 살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게 보이는 혹은 도발적으로 보이는 질문은 저자 스스로 ‘느낀 바’에 의해 우러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우리나라의 불교학자나 선승이 본다면

사족을 하나 달까 한다. 사실 이 책의 리뷰와는 별개로 이 책을 우리나라의 불교학자나 선승들이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가 내심 궁금했다.

근 50년 내로 한정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깨달음 논쟁이 세간에까지 오르내린 경우는 대략 두 번 정도다. 하나는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까지 큰 울림이 있었고 또 현재까지도 그 흔들림이 남아 있는 돈점논쟁이다. 또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화제가 된 현응 스님의 논지와 이에 대한 반론들이다.

우선 돈점논쟁은 이 책의 논지와는 그 심급이 다르기 때문에 무리하게 이 책의 내용을 덧씌워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저자는 아난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단박에 깨닫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긍정을 보내고 있다. “그(아난)는 해탈에 이르지 못하다가 새벽에 ‘좀 눕겠다’고 하고 몸을 누이려는 순간, ‘머리는 베개에 닿지 않고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은’ 바로 그 사이에 마음에서 번뇌를 여의고 해탈하였다”는 문장을 인용한다.

여기서 저자는 선에 대해 언급하며 붓다의 깨달음이 ‘선과 유사하다’고 긍정한다. 하지만 습관적이고 맹목적인 행위를 끊는 수행이 (계속해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돈수의 가능성은 이 책에서는 아예 열어두지 않는다.

두 번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다.

현응 스님은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고,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알아차리고 있다 하더라도 집착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해라면 저자의 주장은 현응 스님의 주장과도 그 결은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해탈지견을 얻은 수행자는 ‘나의 해탈은 부동(不動)이다’라든지, ‘더 이상 다시 태어날 일은 없다’ ‘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해 마쳤다’ 등과 같은 명백한 자각이 있으며 열반을 증득한 자가 실존하는 모습은 그 시점에서 결정적으로 전환된다는 것이고, 이는 이후에도 변함없는 행도(行道)의 완성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깨달음을 이해의 차원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나는 반댈세!’라고 말할 게 분명해 보인다.

여하튼 이 책은 정답을 찾기보다는 다양한 논의들을 비교해서 본다는 의미로 접근한다면 누구든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

 

이상근 
출판기획자. 동국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월간 《대중불교》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불교계 출판사에서 기획 · 편집자로 10여 년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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