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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집단화, 언제 어떻게 이뤄졌나*
[70호] 2017년 06월 01일 (목) 한지연 ruralhen@hanmail.net

1. 문제 제기

대승과 소승에 대한 근대불교학 초기의 관점은 각각의 교단이 추구하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 계율, 재가자의 참여 등을 차별화시켜 바라보고, 결과적으로 두 교단의 차별화라는 이분법적 해석을 낳게 한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대승불교의 시작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불탑신앙과의 연관성을 주된 초점으로 삼아 대승불교의 흥기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최초의 근대적 연구성과를 제출하였다. 쇼펜(G. Schopen)은 인도에서 발견되는 비문 등을 토대로 히라카와 아키라와는 다른 관점에서 대승불교의 흥기 문제에 접근하였다. 쇼펜은 이러한 연구접근을 통해 ‘낡은 직선적 모델과 대승기원의 시기’라는 화두로 일률적인 시간 흐름에 따른 이해를 경계했다.

이후 사이토 아키라(斎藤明), 사사키 시즈카, 후지타 요시미치 등은 부파불교 교단 내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무리가 대승불교로 전환하는 데에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지면서 독립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들은 대승불교 경전을 주된 근거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시모다 마사히로의 경우에는 대승경전이 곧 대승불교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경전으로부터 비롯된 대승불교 교단의 실체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최근 카라시마 세이시 등은 대승불교가 부파불교 가운데서도 대중부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인식이 직선적인 이해를 통해 시간관념으로 대승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면, 최근에는 여러 현상의 집합으로서 대승이 존재했으며 발전 과정에서 단일화하는 움직임이 거듭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더욱 지배적이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 흥기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는 조금씩 진척이 있기는 하지만 다음의 세 가지 사항에 대해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첫째, 소승과 대승이라는 현대적 관점으로 이분화시켰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처음부터 집단화되어 독립된 형태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초기 대승불교 경전으로 분류되는 《법화경》 《반야경》 《정토경》 《화엄경》 등이 동일한 대승불교의 범주 속에서 탄생하고, 각 경전의 흐름이 당시에도 동일한 카테고리 속에서 발전하고 있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이는 소승과 대비되는 대승불교로서 이해하고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둘째, 불교의 ‘동전(東傳)’이란 지배적 관념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확장되는 과정에서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교단 내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교류의 배경하에 이루어진 불교 전파 문제를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교류’의 기본 의미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류 안에서 발생하는 사회, 경제, 민족, 문화의 다양한 요인들이 불교 확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셋째, 앞의 두 가지 사항이 간과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승불교의 흥기와 발전을 분리해 바라보는 관점이 강하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흥기 · 발전되는 시기는 동서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현 학계의 관점으로 분리해 논해본다면 흥기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없기 때문에 흥기 · 발전 가운데서도 발전 시기에 대한 점만 논의해본다면 이러한 주장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서교류를 배경으로 하는 발전과정을 연구함에서도 역시 교단의 계율, 문헌학적 용어, 사상사적 시각만을 수용하는 연구방법론을 고집하고 있다. 이에 논자는 ‘교류’의 측면을 염두에 두고 불교의 확장성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승불교의 흥기 또는 발전을 논하는 것은 대승불교라는 현상의 일부만 해명할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이때 불교의 확장성은 곧 대승불교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발전 및 확장을 ‘대승불교의 집단화’라는 용어로 집약해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2. 대승불교 집단화가 가능했던 외적 요인

1) 교류의 첫 번째 목적, 경제: 대승불교 집단화의 연관성

우리는 고대문명 및 문화가 교류하는 데에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고 교류 방식은 상당히 미개하거나 혹은 하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리고 고대에 이루어졌던 교류의 목적성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보다는 교류를 통한 결과물에 더욱 집착한다. 즉, 교류의 산물로만 교류의 과정을 추정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오류와도 같은 것이 시간과 방식에 대한 오해인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로 다른 문화에 소속된 사람들이 교류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풍요로운 먹고살기’에 기반한다. 교류의 결과물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먹고살기에 기반하여 교류는 시작된다. 특히 기원 전후의 동서교류는 이러한 범주의 대표주자 격이라 할 수 있다. 후대에 ‘실크로드’라는 교류 루트의 명명으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사치로부터 시작된 교류로 보일 수 있으나, 수요자 입장의 대변일 뿐 공급자와 중간 매개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먹고살기의 치열한 경제활동 가운데서 시작된 것이다. 또한 교류의 시간과 방식에서도 ‘먹고살기’ 목적에 부합될 수 있도록 최대한 합리적 방식으로 최단 시간을 사용했다. 이를 불교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본다면 경전의 유통과 사상의 흐름이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굳이 교류의 목적과 방식, 시간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기원 전후 불교의 확장성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당시 경제교류와 연관성이 있음을 기본 전제로 한다는 점을 밝히고 본 문제를 진행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윌 듀런트(Will Durant)가 주장한 바와 같이 금속을 대신하는 대용(代用) 통화가 국가가 보증하는 통화로 바뀐 것은 상업로를 마련해주는 동시에 문학과 예술 분야에 재정을 제공해주었다. 불교의 전파로가 곧 고대의 대표적인 무역로였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듀런트의 시각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원전 문명 전파가 인도와 중국 양 대륙 간에 이루어졌다는 근거는 대표적으로 청동기 문명, 철기 문명 외에도 민족의 이동으로 인한 농작물의 유입과 직조물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4000~3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청동기 야금술이 500~100년의 시차를 두고 이집트로, 200년의 간격을 두고 다시 인도로 전해졌다. 이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기원전 2000년경에 성립된 중국 삼성퇴(三聖[星]堆) 청동기문화이다. 철기문화 역시 현재 출토되고 있는 철제 물품 가운데 가장 이른 유물이 신장(新疆)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부분은 청동기와 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문명 전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 전파 과정에서 민족의 이동도 이루어졌다. 누란(Loulan)에서 발견된 미라인 ‘누란미녀’는 기원전 1800~1000년 사이의 여성 시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미라의 분석 결과뿐 아니라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한 외모는 당시 중국 서부지역까지 서방의 민족이 진출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미라의 소장품 가운데에는 밀알이 담긴 주머니가 함께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에서 밀이 경작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았을 때, 기원전의 문명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원후의 상황 역시 동일한 관점으로 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방향적인 경제교류의 시대는 기원전으로 끝이 났다. 듀런트가 제시한 ‘화폐’가 등장하면서부터 양방향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근거 역시 화폐에서 찾을 수 있다. 쿠샨왕조의 비마 카드피세스는 당시 로마에서 사용하던 중량표준 8g짜리 아우레우스(Aureus) 금화와 동일 중량으로 ‘시노-카로슈티(Sino-Kharosthi)를 제작하였다. 이는 로마와 서북인도 간의 교류 현황을 보여주는 것인데, 중국 신장의 호탄(Khotan)에서도 최근 ‘시노-카로슈티’가 발견되었다. 동일 중량의 이 금화는 곧 로마-쿠샨(서북인도)-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기준 화폐가 동일한 교역 경제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호탄에서 발견된 시노-카로슈티에는 특이할 만한 점이 있다. 화폐의 한쪽 면에는 말의 도안과 카로슈티 문자로 새겨진 왕의 이름이 있고, 다른 면에는 한자로 입사수(卄四銖) 또는 육수(六銖)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이 그동안 금, 전, 포(布), 백(帛)을 사용하다가 흉노 정벌과 서역 경영을 위한 출정과 관련해 봉록의 개념으로 도입하게 된 것이 바로 오수전이다. 전란 이후 보상하는 상금으로 오수전이 채택되었고, 이 외에 관직 개편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즉 고대 중국의 화폐 및 관직 개혁 등의 등장 배경에는 실크로드 경영권 확보라는 점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시노-카로슈티의 중량이 오수전을 기준으로 했을 때, 24수가 되거나 육수가 된다는 중국 측 중량 기준을 일정 부분 따랐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경제활동이 서북인도와 중국 사이의 중개무역을 실크로드 고대국가에서 전담했고, 중국의 시장이 광범위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화폐는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개무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호탄은 사막남도에 위치한 국가였는데, 이곳에서 로마 및 쿠샨왕조가 사용하는 동일 중량의 화폐이면서 동시에 중국 시장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입사수 또는 육수의 명칭으로 동일 화폐를 사용했다. 이는 곧 당시 호탄이 양측의 거대상권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을 했고, 충실한 역할 이행에 따라 인도문화 권역에서 점차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고 공존하는 형태로 국가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활발한 경제교류가 기반이 되어 나타나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교류 목적 달성의 결과물: 대승불교 집단화의 연관성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류의 목적이 ‘먹고살기’였고, 그에 따른 활동 양상이 기원전과 기원후로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기원후 양방향 경제교류로 인해 양 대륙의 문화가 중간 기점이라 할 수 있는 실크로드상에 공존하며 변화될 가능성이 있음은 이미 주지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교류를 통한 경제적 해결 이외에 어떤 요인들이 문화의 변화를 촉진시켰을까 하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긴 여정의 교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경제활동은 어떤 이에게는 부(富)를 축적할 수 있는 행운을, 어떤 이에게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행을 안겨주었다. 다시 말해 이 교류의 길은 그야말로 ‘운’에 따라 운명을 달리하는 얄궂은 길이었다. 이 때문에 고대의 다른 교류의 길도 그러했듯이 이곳에서도 행운을 바라는 상인들의 종교적 활동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때 상인들은 로마 및 페르시아, 쿠샨 제국 사람들이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도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이때 불교가 급성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역로의 주요 중간거점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쿠차, 호탄, 누란 등이 모두 불교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는 인도 풍습, 인도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서북인도의 민족이 이동한 경우도 있어 국가 건립 초기부터 불교가 국교화된 나라들이다. 이 때문에 이들 국가를 경유하거나 이 지점에서 다른 상인 집단에게 교역권을 넘기는 형식으로 교역에 참여했기 때문에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경제 교역단에 전법승들이 동참했기 때문에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교역단 특히 상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중간거점 지역에 불교사원이나 석굴을 조성하면서 신행활동으로 표출했다. 축적된 부를 이용한 이들의 신행활동은 문화적으로도 대변혁을 이루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활동은 곧 사후세계와 내세관이 뚜렷했던 인도와는 달리 현세구복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면서 이후 중국인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실크로드 각국에서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후한 시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서역경영에 참여한 중국에 사신과 조공을 보내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정치 · 경제적으로 기원전과는 다른 양방향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불교 역시 한 방향이 아닌 중국이 원하는 불교를 서북인도 측에 전달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된 것이다.

이에 따라 상인 및 사신과 동행한 전법승들의 전방위적 활동은 중국이 원하는 불교를 서북인도로 전달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 이전의 전법 승려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당시까지 서북인도에서 유행하던 소승을 전하고 있었다. 특히 간다라 근접지역인 카슈미르 출신의 승가발징(381), 승가제바(376~401) 등은 주로 아비달마와 관련된 경서를 역경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내에서 대 · 소승에 대한 구분을 뚜렷이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구마라집 이후 대승에 대한 갈증은 증폭되고 있다. 이는 불타야사(佛陀耶舍)에 대한 《고승전》의 기록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410년 불타야사가 자신의 고향인 계빈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그는 주로 소승경전에 치중하여 번역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귀국한 이후 《허공장경》을 구해 양주의 여러 승려에게 전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뒤이어 나오고 있다. 이는 불타야사가 귀국할 무렵, 중국에서는 대승경전 및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서북인도 지역에서는 이미 대승경전이 유통되기 시작했고, 이를 중국으로 보낼 정도로 중국 측의 대승불교 경전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음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단순히 서북인도 내부에서 대승불교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중국 측 요구에 의해 활동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서북인도 내부에도 분명 대승불교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일례로 2005년 발굴된 바달푸르 사원지에서는 탑의 기단부에서 동전이 출토되거나, 1830년 발굴된 소승계 사원 내부에 있던 마니키알라 스투파에서도 불탑 기단부에서 카니슈카 왕 때 사용되던 금화와 은화가 대량 발견되고, 스투파 기단부에도 동전이 놓여 있던 흔적이 있다. 이는 기존 주류 불교에서 제시하지 못했던, 재가자 스스로가 ‘공덕’에 의미를 두고 불탑을 중심으로 한 신앙 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원 전후로 이루어졌던 이러한 활동이 대승불교의 흥기와 관련이 있다고 보더라도, 이것이 대승경전을 집중적으로 편집하거나 대승교단이 성립되어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 이유는 인도 왕조의 흥망성쇠와 존립 국가의 경제활동 성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상업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던 쿠샨왕조가 망한 뒤에 성립된 굽타왕조는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건립된 전형적인 농업국가였다. 이에 따라 불교는 점차 쇠퇴하면서 오히려 밀교가 우세한 형국이었다. 때문에 서북인도에 존재하던 당시 주류 불교의 교단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동일 경제권역에서 큰 시장으로 자리 잡은 중국 측에서 대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북인도 내부의 불교교단 상황으로도, 중국 측 요구에 대한 답변으로도 대승불교가 집단화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3. 대승불교 집단화의 불교 내적 요소

1) 구법승 기록의 특이점

인도와 실크로드상에 존립했던 국가들은 안타깝게도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역사 기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 확장과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 역시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이 지역의 지리, 민족, 문화를 비롯해 국가 관계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중국 구법승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살펴야 한다. 구법승의 활동은 3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기록은 법현(法顯)의 기록이 효시를 이룬다. 이후 현장(玄奘)으로 이어지는 구법 기록은 당시 인도 및 실크로드의 여러 국가가 중국과 어떤 관계인지도 가늠해볼 수 있다. 또한 이 기록들에는 당시 각국의 불교 성격까지 규명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본격적인 구법 활동 이전에 ‘방등(方等)’의 뜻을 구하고자 경전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양고승전》의 저자인 혜교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이미 ‘대승’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활동했던 고승의 구법행에는 ‘방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승전과 목록에서 경전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기본 자료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중국 초기에 중국 내에서 활동했던 승려들이 대승이라는 용어보다는 방등이란 용어를 더 자연스럽게 사용했다는 반증이다. 이에 비해 399년 구법을 떠난 법현의 기록 이후부터는 대승과 소승의 용어가 명확하게 사용된다.

여기서 잠시 법현이 남긴 간다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400년 무렵에 간다라에 도착했다고 가정한다면, 당시 간다라불교는 ‘대부분이 소승’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고 있다. 법현은 간다라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해 대 · 소승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소승의 경우 ‘모두 소승’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에 비해 특이하게도 간다라 지역에 대해서는 ‘대부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법현의 표현은 4세기 말엽, 간다라에 순수하게 소승교단만 존재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추정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은 비단 4세기 말로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역경 활동으로 불교를 전한 시발자로 평가되는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懺)의 활동을 통해서도 법현의 방문 이전부터 간다라에 대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법현 이후 북위 시대 양현지가 남긴 《낙양가람기》의 간다라불교 교단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국가 및 민족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양현지는 대승경전을 소홀히 취급하는 간다라 왕에 관해 다른 이유를 들어 ‘오랑캐인’으로 취급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간다라에 대한 묘사에서만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승불교가 우세한 국가의 민족을 ‘예의 없는 민중’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우전국은 대승이라 기록하면서 그 민족성에 관해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간다라는 전통적으로 설일체유부 강세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부파 가운데서도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설일체유부 강세 지역이 구마라집의 역경 활동 시기와 비슷한 무렵에는 대 · 소승이 공존하는 형태로 교단이 바뀌고 있다. 앞서 살펴본 법현의 기록이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면, 양현지의 기록은 북위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내부에서 대승과 소승에 대한 관념이 어떠했는가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에서 상세히 논의되겠지만 축법호 활동 무렵부터 중국 내부에서 대승과 소승에 대한 편 가르기가 시작되었고, 당시 중국인들은 우리가 ‘대승’으로 분류하는 경전들을 좀 더 선호하는 성향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 위에 사상적 · 신앙적 측면에서도 대승과의 어우러짐이 더욱 활발했던 중국인들로서는 성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승 우월의식이 강해지게 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배경 속에서 양현지의 간다라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을 구하기 위해 간다라 지역에 도달했다는 점은, 이와 같은 중국 내부의 사정뿐만 아니라 당시 서북인도에 변화의 바람이 있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유의점을 밝히기에 앞서 당나라 때의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간다라의 중심부인 탁실라에 대해 ‘승도는 적으나 모두 대승을 학습하고 있다’는 기록을 함께 고민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시작한다. 전통적인 설일체유부 지역에 대해 법현은 대부분이 소승이었다고 밝혔으나, 100여 년 후에는 대승경전을 입수할 수 있는 지역으로 변화했으며, 또다시 100여 년 후에는 모두 대승을 학습하는 지역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를 단순히 불교교단 내부의 변화로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문제는 이 100년 단위의 기간이 중국불교사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축법호로 인한 대승에 대한 인식의 시작, 구마라집에 의한 대승사상의 이해는 중국 내에서 대승 우월의식이 싹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를 수용하는 초기에는 호흡관을 중심으로 하는 명상수행의 전통이 강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에 중국 전통사상과의 차이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비로소 이해가 도모될 수 있는 배경이 생긴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점차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면서 전란의 노곤함을 느끼던 중국인들에게 신앙적 안식처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불교 내부에서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소승보다는 한층 강렬한 신앙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던 대승불교가 중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벤자민 롤랜드의 주장처럼 인도는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어 입구가 육지로는 서북쪽으로만 뚫려 있기 때문에 인도 외부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지형적 특성과 그리스계, 페르시아계, 쿠샨족, 훈족, 돌궐 등의 지배가 어우러진 역사를 가진 서북인도는 당시 중국에서 추구하는 불교 성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서 논의의 대상으로 명시했던 외적 요인들과 결부시켜 본다면 좀 더 명료해진다.

2) 초기 중국불교의 변화

대승불교라는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현재의 관점으로는 마치 대승불교 흥기 시점부터 ‘대승’을 자처하는 일군의 무리가 존재했고, 전파 과정에서도 여전히 대승이라는 기치 아래 활동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굳이 착각이라는 무리한 표현을 한 까닭은 대승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시작된 시점이 생각보다 늦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불교 내부에서 ‘대승’의 용어가 사용된 시점부터 생각해보자. 카라시마 세이시는 그의 논문에서 간다리어를 포함, 쁘라끄리뜨어와 비문법적인 산스끄리뜨어 문헌 등을 통해 대승이란 용어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밝혔다. 특히 주목한 것은 vevulla, vaitu-lya/vaipulya와 Mahāyāna의 용례 확인, 그 번역어 문제이다. 이들 번역 용어가 순차적으로 마하연, 방등, 대승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축법호 활동 시기까지는 방등, 구마라집 이후부터 비로소 대승이라는 용어로 정립되었다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교단 내에서조차 대승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 사회에서는 대승이라는 인식을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을까? 중국 사서를 통틀어 살펴보았을 때, 대승을 언급한 최초의 시기는 북위 시대라 할 수 있다. 《위서》에 “영평 4년(511) 6월 사문 법경이 무리를 이끌고 기주에 왔는데, 자칭 대승이라 칭한다”는 기사가 대승 용어 사용의 첫 번째 사례이다. 또한 대승보다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방등’은 사서에 등장하는 예를 찾을 수 없다. 불교교단 내부에서는 사상에 대한 이해가 점점 높아졌지만, 중국 일반 사회에서는 불교사상을 분류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사회에서 대승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고, 더불어 불교교단 내부에서는 사회적으로 ‘대승’을 내세웠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이용할 수 있는 배경이 조성되었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대승에 대한 인식도, 용어 사용도 5~6세기 무렵이기는 하지만, 흔히 ‘대승불교도’라 일컬어지는 이들의 특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 내부에서 대승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노력을 변용이라는 용어로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사상적인 변화에만 초점이 맞추어 연구되고 있고, 인도와 비교한 문헌, 용어 등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 대사회적 관계 속에서 불교를 보는 관점은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 내부에 국한되어 변용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인도와는 다른 중국 사회에 불교 측에서 불교를 확장시키기 위해 사상이 아닌 다른 어떤 측면으로 적응해나갔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물론 전자가 우선이겠지만, 후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논자는 중국 내부에서 대승 우월주의가 생성된 배경에 대해서는 중국 내 기득권 사상 · 사회와 불교가 충돌하면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변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상적으로는 중국 전통사상에 근거한 해석 방식으로 불교가 이해되었던 격의불교가 있었다면, 사회적으로는 중국 기득권 세력에 맞추어 불교를 이해시키고자 다변화시킨 노력이 불교 내부에서 있었다고 본다. 후자에 대해 논자는 ‘사회구조에서의 격의불교 현상’이라 이해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충효사상에 대한 합의점을 찾는 모습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도불교에서 충과 효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윤리적 관점 정도로만 표명된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이상 이 부분에 방점을 둘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에 남북조 시대 직전부터 중국의 도가와 결합해 효를 강조하는 북량탑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 시기 둔황 막고굴 등에서는 승천성선(昇天成仙) 의식과 효의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중국 특유의 상장문화에 사용되던 화상석의 주요 소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북위 시대의 조상비는 그 형식과 내용이 당시 민간층에 불교가 이질적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북위 조상비는 불교의 조상 형식과 발원문 형식에 도교의 소재를 결합하여 망부모에 대한 효를 드러냄으로써 사회 전 계층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형상화한 대표적 사례이다.

즉, 남북조 시대를 기점으로 중국 효사상과 불교와의 결합이 시작되고, 이는 전파 초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소승불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완전한 대승불교로의 전향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채용한 여러 문화는 현재 동아시아 대승불교만이 지닌 고유성으로 인식될 수 있을 만큼 불교가 확장성의 도구로 적극 활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4. 남은 과제들

대승불교는 분명 인도 지역에서 흥기하였다. 그러나 교단이 형성되고, 별행경(別行經)의 형태에서 방대한 각각의 대승경전이 편집되는 과정은 흥기 시점에 이루어진 것이 절대 아니다. 대승경전의 편집이 단순히 한두 명의 인물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질 수 없고, 여러 대승경전을 집대성하는 데에는 각고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경전의 편집, 교단의 완성과 전파 등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우리가 이해하는 대승불교가 완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집단화 과정이라 상정해본다면 시기적으로는 이르면 2세기부터 시작해 4세기 무렵에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집단화 과정이 발생하게 된 주된 원인 중의 하나는 불교교단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외부적 요인이란 인도 불교교단 내부의 자각을 통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전통적인 설일체유부 강세 지역이었던 서북인도 지역에서 일정 기간 차츰 대승불교 경전이 편집되고, 각 경전의 주요 스토리가 문화에 접목되면서 대승불교 신앙과 수행이 탄생하는-현대 사회에서 일컫는 문화콘텐츠가 제공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동서 교류를 통한 동일 경제권역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흥기된 대승불교의 흔적은 서북인도 지역 곳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단성을 이루며 교단으로서 세를 확장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대승불교의 주요 논지들이 중국 사회에 전해질 수 있었고, 중국 사회에 빠르게 발맞추며 불교의 확장성을 고려했던 대승불교는 당시 중국인들이 정신적으로 갈망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었고,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서 우위를 점했던 중국은 지속적으로 대승불교를 요구하였다. 실크로드 각국에서는 중국이 요구하는 정치 ·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고, 불교에 관한 부분 역시 중국이 요구하는 ‘대승불교’를 서북인도에 전달하고, 이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더불어 굽타왕조의 출현과 함께 현저하게 교세가 약화되어 가던 불교교단으로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로서 중국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집단화 문제는 당시 불교교단 내부의 문제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복잡다단한 여러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논자가 언급한 여러 요인 외에도 아직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간다라 지역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는 한자가 혼용된 비문의 내용이 어떻게 생산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도 해명되어야 한다. 또한 민족 간 대이동이 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민족 간의 활동과 그들이 대승불교를 어떻게 대했으며, 실제 신앙 활동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문제 또한 해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초기 대승경전-법화, 반야, 정토, 화엄 등-에 나타난 용어, 사상 등에 대한 전개 문제를 비롯해 별행경과 집대성된 대승경전 간의 차이 등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논의에 많은 문제를 올려놓고 짧은 글 안에서 최대한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문제들이 더 많다. 이는 그만큼 수많은 문제를 풀어야만 대승불교가 어디서 기원하였고, 어떻게 확장해 나아갔는지의 퍼즐을 맞출 수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서구 학계나 일본의 학계처럼 집단을 이루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이 열렸으면 하고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

한지연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주요 논문으로 〈동아시아적 전환 시발점으로서의 돈황 불교에 대한 고찰〉 〈서역에서의 법화신앙 전개-천산남로와 양주를 중심으로〉 〈중국 효사상과 불교의 중국적 변용의 연관성-중국 초기불교 시대구분론 문제에 유의하며〉 등과 저서로 《서역불교교류사》 공저로 《동아시아 법화경 세계의 구축》 《동아시아 불교에서 대립과 논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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