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불교회화를 흔히 시각적인 경전이라고도 한다. 불교회화는 종교화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는 용도로 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거는 형식의 불화인 ‘탱화(幀畵)’ 외에도 넓은 의미로는 사찰 전각의 벽화와 단청까지도 불교회화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불교회화 제작과 관련한 기록을 담은 초기 경전에는 사원의 각 공간은 법식에 따라 정해진 내용의 그림이 그려졌고, 또한 채색으로 그려졌다고 전하며, 이는 현재의 사찰 공간에도 일정 부분 전승되고 있다. 그만큼 불교회화는 일정한 내용이 변함없이 그려지며 그 기법 역시 대체로 다채로운 채색으로 정묘하게 그려지는데, 이와 같이 일정한 주제와 채색화라는 측면에서 불화와 민화는 어느 정도 공통적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화와 민화라는 장르에서 공통으로 논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시각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불화와 민화의 제작자 간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으로 두 장르에 공통으로 보이는 장식 및 길상(吉祥) · 벽사(辟邪) · 기복(祈福) 등의 기능적 측면과 표현기법, 그리고 그 수요와 생산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제작자

근대기에는 불상이나 불화가 사찰 내 예배용뿐 아니라 본래 있어야 할 공간을 떠나 박람회 등의 전시에 출품되거나 소장과 수집 혹은 감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면서 ‘불교미술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근대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집무실을 찍은 사진(1880년대 촬영)이다. 사진 속 한쪽 벽면에는 조선의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걸려 있으며, 나머지 벽들에는 회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는 선교사였던 알렌이 〈지장시왕도〉를 종교화가 아닌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감상과 소장을 위해 벽에 걸어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기에는 불교회화 작품들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불교 미술품 제작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몇몇 불화 제작자들은 당대의 예술가로서 평가받기도 하였고, 자신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불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기 이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불화는 궁정화원들이 제작한 사례들도 있지만, 현전하는 조선시대의 불화들은 대체로 불화를 그리는 승려들, 즉 화승(畵僧)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불화를 제작한 인연을 적은 화기란(畵記欄)에는 이들 중 가장 우두머리를 주로 ‘금어(金魚)’ ‘용면(龍眠)’ ‘편수(片手)’ 등의 명칭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처럼 불화에 기재된 화기를 통해 불화의 제작자가 화승들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들이 불화를 제작하는 것이 개인적 성향을 드러내거나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개인적 예술성을 드러내는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개개인이 부각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측면은 민화 제작자들의 대부분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과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민화는 대체로 궁화(宮畵)에서 확산된 것으로 궁화가 주로 궁정 소속 기관인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들에 의해 그려진 반면, 민간의 수요는 속사(俗師), 향사(鄕師) 혹은 환쟁이패로 불렸던 화장(畵匠)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들 민화공은 조선 후기 민화 수요의 급증에 따라 등장하였는데, 고급 수요의 감상용이나 향유용 그림이 아니라 장식용, 혹은 일정한 기능에 따라 소비되는 유사한 내용의 그림을 그렸으므로, 개인의 창작물로서 민화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불화 제작자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불화와 민화는 그림의 내용이나 기법에서도 유사한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다. 현전하는 민화들이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의 것들이므로 이 시기 제작된 불화들을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민화와 그 내용과 표현기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찰의 각 전각에 그려진 벽화나 단청에서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소재와 기법이 쓰인 것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화의 제작자들이 민화도 그렸던 것일까?

화승 모두라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일부는 아마도 민화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짙다. 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몇몇 그 근거가 되는 자료들이 남아 있어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부터 1930년경까지 활동한 근대기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화승 문고산(文古山, 1850년경~1930년 이후)이 그린 민화 〈문자도(文字圖)〉와 1950년대까지 활동한 화승 김보응(金普應, 1867~ 1954)이 그린 민화풍의 봉황 그림이 흑백의 사진자료로 알려져 있다. 이 사진자료는 근대기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 선교사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998~1971)가 자신의 저서 《조선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1929)에 게재한 것이다. 문고산은 〈문자도〉에 민화의 백수백복도(白壽百福圖)와 같이 다양한 글자체를 사용하여 글씨를 썼는데, 혁필화(革筆畵, 가죽이나 천 조각에 먹이나 안료를 적셔 쓴 글씨)도 보인다. 또 김보응이 나무 판벽에 그린 봉황 그림은 오동나무 아래 둥지를 틀고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봉황들과 둥지로 날아드는 어미 봉황의 모습을 활달한 필치로 그렸다. 이 사진자료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사찰로 생각되는 곳의 벽화 자료로서도 매우 귀중하며, 더불어 민화풍으로 벽화를 그린 화승의 이름까지 밝혀져 있어 화승이 민화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확실하고 희귀한 자료이다.

조선의 불교미술에 관심이 지대했던 이 외국인 선교사가 화승인 문고산과 김보응의 민화풍 그림에 대한 사진과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현전하는 대부분의 민화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들 역시 제작자를 모른 채 사진만 남았거나 아예 그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화승들이 불화 이외에도 산수화나 초상화, 그리고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그린 사실은 이 사진자료 외에도 기록이나 작품으로도 전해지고 있어 화승들의 민화 제작 가능성 역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또 고암 이응로(李應魯, 1904~1989)와 통도사(通度寺) 방장 성파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사찰의 화승들이 곁일 삼아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까치, 호랑이 그림이 가장 많았으며, 화승들이 민가의 민화들을 그려 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 역시 사찰에 걸린 불화와 사찰 벽화나 단청에 보이는 민화적 요소들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2. 기능: 장식, 길상과 벽사, 기복

불화는 예배용으로 기능함과 동시에 부처가 계신 공간인 전각을 화려하게 장엄하는 기능도 겸하는데, 이러한 장식의 기능은 민화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1900년대를 전후해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남긴 기행문 등의 기록에는 도배지와 함께 집안의 벽을 장식하는 데 쓰였던 민화의 용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민화는 장식적 기능 외에 그려진 내용에 의해 길상과 벽사 혹은 액막이, 그리고 복을 기원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그림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불화에도 나타나고 있어 흥미롭다.

현전하는 불화 중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주제의 불화는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를 비롯해 신중도(神衆圖, 불법과 전각을 보호하는 신들의 무리)와 하늘의 북극성을 여래화해 그린 치성광여래도(熾盛光如來圖, 七星圖), 석가모니의 열반 후 모든 중생의 복덕을 위해 출현한 독성을 그린 독성도(獨聖圖), 산신도(山神圖) 등이다. 이들 모두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고 인기 있었던 대상들로 아미타여래는 서방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호법신중에게는 안위와 보호를, 치성광여래와 독성, 산신에게는 무병장수와 복덕, 자손 번창을 기원했다.
특히 치성광여래와 독성, 산신은 삼성각(三聖閣)이라는 전각에 함께 모시거나 각기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을 따로 두어 모시기도 하였는데, 전국의 사찰마다 세워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대중에게 널리 신앙되었다. 그런데, 이들 삼성각에 봉안되는 치성광여래도와 독성도, 산신도에는 민화에 보이는 모티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장수나 자손의 번창을 의미하는 공양물들이 불화에 함께 등장하여 대중이 기원하는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부각해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그림 외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여섯 제자를 그린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와 영가천도와 관련된 그림인 감로왕도(甘露王圖)에도 민화풍의 십장생도나 신선문자도, 책거리 그림 등에 보이는 모티프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불보살도에 비해 산신도 등 삼성각에 봉안되는 불화나 십육나한도에 민화의 모티프들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그림의 주인공인 십육나한이나 산신, 독성이 산수를 배경으로 하였으며, 마치 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듯 주변의 다양한 기물과 동식물들을 표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일정한 규범이 있는 불보살도와는 달리 산신도나 십육나한도와 같은 불화들은 도상, 즉 밑그림의 운용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불화들에 그려져 봉안되는 존상들이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었던 대상들이었던 만큼 복을 비는 신도들에게도 익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들이 표현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몇몇 대표적 작품들을 예로 들어 살펴보겠다. 먼저 서울 창신동 안양암(安養庵) 금륜전(金輪殿)에 봉안된 두 점의 치성광여래도는 모두 2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하늘에서 강림하는 모습의 치성광여래와 여러 별을 의인화한 치성광여래의 권속들을 표현하였다. 두 점 중 1914년에 제작된 작품의 경우, 화면 양쪽에서 마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듯 가장 앞서 나온 동자들이 양손으로 분재를 받쳐 들고 있는데, 분재의 나뭇가지가 각기 ‘수(壽)’ ‘복(福)’의 형태를 하고 있어 민화풍의 신선문자도를 차용하여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치성광여래도는 1924년에 제작되었는데, 이 작품의 경우는 화면 상단의 양 끝에 마찬가지로 ‘수’ ‘복’ 모양의 분재를 든 동자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분재에는 신선문자도와 마찬가지로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불로장생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모티프들이 치성광여래에 등장함으로써 치성광여래의 수명장수와 길흉화복과 관련된 성격을 더욱 강조하고 부각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선문자도의 도상은 치성광여래도 외에 십육나한도 등 다른 불화에서도 간혹 그려졌다. 다음으로 살펴볼 산신도는 민간 신앙이 불교에 습합된 사례로 이미 제재에서부터 민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산신도의 산신은 대체로 수염이 긴 신선상으로 호랑이가 함께 등장한다. 산신도의 호랑이는 마치 산신에게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처럼 산신의 몸을 감싸고 있거나 산신이 몸을 편하게 의지할 수 있도록 등을 내어주고 있다. 혹은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산신의 주위에는 공양물이나 각종 기물이 함께 표현되기도 하였는데,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산신도〉(19세기 중엽)나 경북 금릉 청암사(靑巖寺) 수도암(修道庵) 〈산신도〉(1864)와 같이 몇몇 산신도에는 민화 책거리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들이 등장한다. 동화사와 청암사의 경우 공양물로 입이 넓은 대접에 수박, 가지, 석류, 불수감 등이 담겨 있는데, 수박은 윗부분을 잘라 단면의 씨가 다량 보인다. 이들 과일과 채소는 씨가 많아 다산(多産)과 득남(得男)의 의미를 지니는 열매로 민화 책거리 그림에 특히 자주 등장하며, 이들 산신도와 민화에서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산신에게 간절히 염원했던 소망이 그림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독성도나 신중도, 십육나한도 그리고 스님들의 초상인 진영(眞影)과 영가천도용 그림인 감로왕도(甘露王圖) 등 다양한 주제의 불화에 민화에 보이는 여러 모티프가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불화는 불교 경전의 내용을 시각화하여 표현하고 불교의 존상들을 그린 종교화이면서, 또한 전각을 장엄하는 기능을 지닌다. 더불어 이들 불화 중에는 대중의 간절한 바람들, 즉 수명장수와 기복, 다산과 풍요의 염원을 담은 민화 소재들이 묘사되고 있어, 불화를 보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보다 친근하게 여기는 데 일조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3. 표현기법

한편, 불화와 민화는 모티프뿐 아니라 표현기법에서도 유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두 장르 모두 대체로 채색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표현기법에서도 민화와 유사한 점이 많은 불화들은 위계가 가장 높고 도상의 전승이 비교적 엄격한 불보살도보다는, 주로 대중과 더욱 친숙한 삼성각의 불화들이나 십육나한도, 감로왕도 등이다. 이처럼 민화와 표현기법을 공유하고 있는 불화들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예로 들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특히 산신도에서 산신과 함께 항상 등장하는 호랑이는 무섭고 용맹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민화 까치 · 호랑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귀엽고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고창 선운사(禪雲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1847년 제작된 〈산신도〉는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되었는데, 산신의 청아한 모습도 눈길을 끌지만, 호랑이의 천진하고 귀여운 모습이 두드러진다. 특히 솜뭉치 같은 눈썹과 빳빳하게 펼쳐진 수염, 동그랗게 뜬 눈, 삐져나온 이빨은 백수의 왕인 위엄 있고 두려움을 주는 호랑이의 모습이 아니라 애완동물처럼 친근하다. 이러한 호랑이의 모습은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전반 일본 화풍의 호랑이 모습에 영향을 받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호랑이로 묘사되는 몇몇 산신도를 제외하고 현전하는 대부분의 산신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신도와 더불어 삼성각의 불화 중 하나인 독성도에도 민화의 표현기법이 공유되고 있다. 불교의식집의 독성청(獨聖請)에는 “층층대 위에 조용히 머물러 참선을 하거나 낙락장송(落落長松)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눈처럼 흰 눈썹이 눈을 덮고 있다”고 하여 독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독성은 항상 긴 눈썹이 턱까지 내려오는 노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기이하게 생긴 층층 암석과 함께 웅장한 소나무가 배경으로 항상 그려진다. 1874년에 제작된 남원 실상사(實相寺) 〈독성도〉는 독성의 주변에 표현된 층층 암석과 뒤편의 소나무가 민화풍으로 제작되었다. 암석은 바깥쪽을 청색으로 하고 안쪽으로 갈수록 밝은 황토색이 되도록 바림하였는데, 입체감이 전혀 없는 평면적 표현으로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이다. 소나무는 나뭇잎을 반달형으로 단순화하여 평면적인 느낌을 주며 문양과 같이 표현하였는데, 바람 혹은 구름을 나타내는 몇 개의 느린 속도로 그은 흰 선과 어우러져 민화적 흥취를 자아낸다.

또 다른 독성도인 하동 쌍계사(雙溪寺) 국사암(國師庵)의 작품은 1890년에 제작되었는데, 이 그림은 그야말로 민화의 소재들과 표현기법을 고루 모아둔 듯하다. 화면에는 층층대 위에 앉은 독성을 중심으로 하여 배경으로 산과 기암절벽, 낙락장송을 표현하였고, 그 앞에 계곡물이 굽이치고 있다. 독성의 주위에는 각종 기물과 공양물, 그리고 괴석(怪石)과 화조(花鳥)를 배치하였다. 먼저 뒤쪽의 산수 배경은 일반적으로 불화에서 이상적 산수 공간을 표현한 청록의 산수가 아니라 거의 바탕색을 살려 먹선으로 산의 윤곽선을 그리고 주름을 간략하면서도 무심한 듯 소탈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는 수묵담채로 그린 민화 금강산도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이다. 또 독성이 앉은 층층대의 평면적 처리와 돌이끼의 표현 역시 민화풍으로 그려졌다. 주변의 사자형의 향로를 비롯한 기물들과 괴석의 독특한 형태와 색감, 그리고 평면적인 채색기법, 모란과 더불어 목각인형과 같이 표현된 새의 표현도 민화 책거리 그림이나 모란병풍의 표현들과 유사하다. 또 화면 향우측 아래에는 앞서 산신도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입이 넓은 청화백자 대접에 윗부분을 잘라 씨가 드러나 보이는 수박과 오이 등이 담겨 있어 역시 다산과 득남의 염원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공양물 접시가 목제 서랍 위에 올려져 있으며, 그 위로 괴석과 모란이 이어져 민화 책거리 그림에처럼 좁은 공간에 첩첩이 위로 쌓아 올라가는 구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맨 아래 있는 목제 서랍은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역원근법을 취하고 있어 〈독성도〉의 향우측 아래쪽 부분만 잘라보면 한 폭의 민화 책거리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음으로 대구 동화사의 〈십육나한도〉(1905)는 앞서 제작자 관련 장에서 언급했던 근대기 화승 문고산이 그린 불화이다. 문고산이 제작한 불화는 알려진 것만 80여 점이며 그중 50여 점이 현전하는데, 민화의 모티프와 표현기법을 적용하여 그린 불화들이 종종 있다. 동화사의 〈십육나한도〉는 나한들의 친근한 표정과 표현들을 비롯해 다양한 기물과 산수의 표현이 민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시자(侍子)들이 들고 있는 공양물이나 불탁과 기물, 그리고 원근법의 무시는 책거리 그림을 연상시키며, 평면적이고 참신한 산수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또한 눈에 띄는 코발트블루의 다용(多用)은 당시 불화 제작의 시기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화 책거리 그림의 소재는 물론 구도와 기법을 도입한 또 다른 불화로 스님의 초상화인 진영 한 점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암사(佛巖寺) 〈송운당대선사진영(松雲堂大禪師眞影)〉은 진영 중에서도 독특한 편에 속한다. 전형적인 사명당 송운 대사의 진영과 달리 정면향을 하고 수염이 비교적 덜 강조되어 있으며, 시동이 불자(拂子)를 대신 들고 있다. 또한 배경에는 양쪽으로 장막을 커튼처럼 ‘八’ 자 모양으로 걷어 묶어 두었고, 그 사이로 탁자 위에 놓인 각종 기물과 책갑(冊匣)이 놓여 있다. 여기서도 책갑을 불규칙하게 세로로 쌓아놓은 모습이나 세 개의 다리가 달린 향로의 모습, 그리고 색색의 두루마리를 꽂아놓은 중국 가요(哥窯) 스타일의 균열 있는 도자기의 표현 등은 민화 책거리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와 표현이다. 또 이 진영과 같이 드리워진 장막의 표현은 몇몇 책가도에서 보이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엿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밖에도 영가천도와 관련된 그림인 감로왕도의 경우 화면 하단에 풍속 장면이 대거 등장해 민화와 유사한 모티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 예로 여주 신륵사(神勒寺) 〈감로왕도〉에서는 시식단 위에 놓인 화분과 기물이 민화에 보이는 표현과 상당히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불화는 불세계를 장엄하고 불교 존상을 그리기 때문에 성격상 기본적으로 매우 정세하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감로왕도에 그려진 꽃화분들은 다소 거칠지만 자유롭고 활달하게 그려졌다. 먹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수묵담채화처럼 간단히 붉은색이나 흰색으로 꽃잎만 엷게 칠하거나 아예 꽃도 먹선으로 윤곽선 처리만 하고 마무리하여 담백한 느낌을 준다. 이들 화분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역시 민화 꽃그림을 보는 듯하다. 감로왕도 하단에는 거의 호랑이에 물려 죽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호랑이의 표현이 또한 민화풍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불화 중에서도 일월오봉병이나 십장생도, 요지연도 등에서 보이는 궁정회화의 표현기법을 볼 수 있는 작품도 있지만, 이처럼 정밀하고 세련됨 대신 민화와 같이 의외성을 가지고 에너지 넘치는 표현기법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상당수 현전하고 있다.


4. 수요와 재생산

불화, 특히 탱화는 근대기 이전에는 순수 감상이나 재산으로서 소유가 목적이 아니었고, 오로지 종교화로서 기능했다. 사찰 전각을 새로 짓거나 불화가 낡으면 불화를 새로 제작하였다. 또한 촛농이 튀어 오염되거나 변색,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화가 훼손되었을 경우, 보통 낡은 불화는 보관하지 않고 태워 없앤 후, 새로 제작된 불화를 봉안하였다. 현전하는 불화들 중 특히 서울 · 경기 지역은 시대가 올라가는 불화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의 증언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才操 있는 몇몇 佛母들은 西洋畵의 遠近法과 濃淡法을 導入하여 전통을 무시한 似而非佛畵를 그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불화의 本質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 佛畵界에 새로운 변화가 왔다. 즉 인기에 迎合한 佛母들로 인하여 우수한 古幀畵는 낡았다는 이유로 燒盡되고 새로운 탱화를 모시는 것을 자랑으로 알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재정이 풍부하거나 도시 근처의 사찰에는 古幀畵가 거의 없고……

……그것은 모다 이따위 비젓한 行爲로 幀畵가 조곰만 검으면 火德眞君릐 祭物로 封하고 울긋불긋하게 彩色칠한 새 幀畵로 밧구어 걸고 不面에는 몬지만 조곰 안저도 새로 鍍金하고 거대한 建築에 一椽一柱만 傷하여도 허러버리고 새로 짓고 鐘鼎古器에 때만 조곰 끼이든지 태만 조곰 가드래도 때려부세서 새로 鑄造하는 等 얼는 보아서는 金光이 燦爛하고 彩色이 輝煌하야 嶄新한 氣分이 잇고 信仰하는 成績이 잇는 것 갓지마는 기실로는 十分之七八은 名譽를 사기 爲하는 檀家나 私益을 圖謀하는 化主들의 線外加線하고 彩上加彩하야 노은 것이오.

먼저 첫 번째 석정 스님의 증언은 근대기 불화의 새로운 경향들을 언급하고 있다. 서양화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도입하여 그린 불화들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불화 제작 경향에 변화를 불러옴에 따라, 재정이 풍부한 사찰의 경우 불화가 조금만 오래되어도 태워버리고 새로운 불화를 봉안하기를 자랑으로 여기는 현상들을 다소 비판적인 시각으로 언급하였다. 실제로 서울 · 경기 지역의 현전하는 불화들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과 비교해 19세기 말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서울 · 경기 지역의 경우 여기에 더해 19세기 후반의 왕실 후원의 건축불사가 빈번해짐에 따라 새로 조성되는 불화들도 많았다. 새로운 불화를 조성하였을 때 원래 존재하던 불화를 태워버리는 것은 훼손된 ‘부처님’ 그림이 보존해야 할 문화재나 미술품, 혹은 재화 가치가 있는 골동품이라는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수리하지 않은 채 보관한다는 것이 부처님께 누가 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증언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적 경향으로 얘기하고 있다. 지일은 불화뿐만이 아니라 불상과 불구(佛具), 그리고 사찰 전각에 이르기까지 조금만 먼지가 앉거나 훼손되어도 불화는 태워버리고, 금속제의 불교의식구 등은 부수어 새로 주조하고, 불상은 도금하고 건물은 새로 짓는 등의 행태를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이 종교적 신심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명예를 얻기 위한 후원자들과 사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화주(化主)들의 목적에 의한 것임을 비판하고 있다. 이 내용에서도 훼손된 불화를 태우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두 증언 모두에서 보이는 비판적인 내용은 우선 새로운 불화를 조성할 당시 오래된 불화는 태워버리는 관행에 대해 알려주고 있으며, 더불어 역으로 근대기 불사가 얼마나 빈번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화 역시 문화재 혹은 미술품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근대기 이전에는 보존과 수집,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거나 장식하는 그림이었다. 정초의 문배(門排) 그림 등은 두고두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해 새로 제작해 사용하였다. 현전하는 민화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원류는 섣달그믐 혹은 정월 초에 사용하는 ‘양흉영길(禳凶迎吉)’의 제액초복적인 문배 그림 또는 세화(歲畵)에서 전승, 확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해마다 새로 붙이는 길상류의 세화나 문배 그림 같은 경우 조선 시대의 여러 기록을 통해 계층을 망라해 수요가 지속적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기복호사(祈福豪奢) 풍조가 만연함에 따라 수요가 급증하게 되어 이들 그림이 판화로도 제작되기에 이른다. 문배나 세화류 그림은 매해 새로 제작했기 때문에 시기가 올라가는 유물이 적고 제작 시기도 내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른 종류의 민화 역시 불화와 마찬가지로 훼손되면 다시 장만하였으므로 대부분이 19세기 말 이후의 것들이다.

정리하자면, 종교화인 불화가 감상이나 소장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오래된 불화들을 태워버리고 다시 봉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빈도수나 의미는 좀 다르지만 이러한 측면에서는 소비물로서 확실한 목적성 아래 제작되었던 민화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바 불화와 민화는 제작자와 그림의 내용, 그리고 표현기법에서 공유되는 부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화에 민화의 소재와 표현기법들이 차용된 것은 아마도 여러 길상적인 소재를 그린 민화의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시각 이미지로 복을 구하는 대중의 염원에 호응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민화의 길상적인 모티프들은 각 불화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도 하였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불화 중에서도 치성광여래도는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주제인데, 복숭아나 수복(壽福)과 같은 특정 문자들은 수명장수의 의미가 있는 모티프들로 불화에 표현되어 치성광여래의 성격을 더욱 부각시킴과 동시에 그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수명장수나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십장생과 모란,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 수박, 참외, 가지 등도 마찬가지로 산신도나 독성도 등의 불화에 표현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불화에 이처럼 민화적 요소가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던 것에는 아무래도 불화와 민화의 제작자들이 서로 간에 밑그림이나 표현기법을 공유했거나 혹은 불화의 제작자들이 민화도 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그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자료들을 살펴보았지만 그 사례가 아직은 매우 적어 추후라도 불화와 민화의 제작자에 관련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길 기대해 본다.

불화와 민화는 전혀 다른 분야이면서도 부분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러 가지 복을 바라고 재액을 막길 바라는 기원을 나타냈다는 것, 즉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담아냈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공통점이 아닐까 한다. ■

 

최엽
동국대 대학원 강사. 이화여대 미술학과,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석사). 동국대 미술사학과 문학박사(불교회화사 전공). 이화여대박물관, 화정박물관, 동국대박물관 근무. 주요 논문으로 〈近代 畵僧 古山堂 竺演의 佛畵 硏究〉 〈마곡사 화승 약효와 동시대 활동했던 화승들의 근대기 불화〉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대학원, 한국외대, 가천대 등에서 미술사 관련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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