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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아무나 하나
- 얌폴스키의 돈황본 육조단경 영역에 나타난 무념이해를 중심으로
[26호] 2006년 03월 10일 (금) 박성배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불교학 교수

1. 머리말

번역은 아무나 하나!’ 유행가의 가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번역처럼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다. 공자의 『논어』나 노자의 『도덕경』이 헤아릴 수 없이 여러 차례 영어로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새로운 번역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말해준다. 특히 불경을 번역하는 경우는 더더욱 어려울 것 같다.

1960년대 초에, 『능엄경』의 우리말 번역을 마친 운허스님이 성철스님을 찾아가 ‘증의(證義)’를 부탁했다고 한다. ‘증의’는 불경을 번역할 때 흔히 생기는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역경상의 중요한 과정이다. 증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물론 불경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는 소위 경안(經眼)이 열린 사람임을 전제한다. 평생을 역경 사업에 바친 학승이 선승을 찾아가 자기가 번역한 원고의 증의를 부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1967년, 콜럼비아 대학교의 필립 얌폴스키(Philip Yampolsky) 교수는 『돈황본 육조단경』을 영역하여 출판했다.1) 이 책은 반세기가 다 되도록 지금도 여전히 많이 팔리고 있다. 학계가 요구하는 서지학적인 정밀성과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고증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얌폴스키의 번역은 한국불교가 중요시하는 ‘증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번역에는 단경공부를 철저히 하려는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대목들이 있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핵심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념장(無念章)을 보면 얌폴스키의 번역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문제의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가 보자.

2. 얌폴스키의 영역

얌폴스키는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2)

(1행) “Men of the world, separate yourselves from views; do not activate thoughts.
(2행) If there were no thinking, then no-thought would have no place to exist.

(3행) ‘No’ is the ‘no’ of what?
(4행) ‘Thought’ means ‘thinking’ of what?

(5행) ‘No’ is the seperation from the dualism that produces the passion.
(5a행) ‘Thought’ means thinking of the original nature of True Reality.
(6행) True Reality is the substance of thoughts;
(7행) thoughts are the function of True reality.

(8행) If you give rise to thoughts from your self-nature,
(9행) then, although you see, hear, perceive, and know,
(10행) you are not stained by the manifold environments, and are always free.

(11행) The Vimalakirti Sutra says:
(12행) ‘Externally, while distinguishing well all the forms of the various dharmas,
(13행) internally he stands firm within the First Principle.’

얌폴스키의 『돈황본 육조단경』 영역에서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바로 위의 “(4행) ‘Thought’ means ‘thinking’ of what?” 라는 문장과 “(5a행) ‘Thought’ means thinking of the original nature of True Reality.”라는 문장이다. 우선 위에 인용한 얌폴스키의 영역을 우리말로 옮겨 보자:

(1행) “세상 사람들이여, 자신을 여러 견해에서 해방시켜라.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2행) 만약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념(無念)이란 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3행) 무념의 ‘무(無)’는 무엇이 없다는 말이며
(4행) 무념의 ‘념(念)’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말인가?

(5행) ‘무’란 모든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이원론을 벗어난다는 말이며
(5a행) ‘념’이란 진여자성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6행)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7행) 생각은 진여의 몸짓이다.

(8행) 만약 당신들이 당신들의 자성으로부터 생각을 일으킨다면
(9행) 비록 당신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 할지라도
(10행) 삼라만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유로우리라.

(11행) 『유마경』은 말한다 :
(12행) ‘겉으로 여러 가지 것들의 온갖 모양들을 잘 분별하면서도
(13행) 그 사람은 안으로 제1의에 굳건하게 서있다.’

얌폴스키의 영역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돈황본 육조단경』의 원문에 익숙해져야 한다.

3.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장 원문

『돈황본 육조단경』은 무념사상을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3)

(1행) 世人離見 不起於念
(2행) 若無有念 無念亦不立

(3행) 無者無何事
(4행) 念者何物

(5행) 无者離二相諸塵勞
(6행) 眞如是念之體
(7행) 念是眞如之用

(8행) 性起念
(9행) 雖卽見聞覺之
(10행) 不染万鏡而常自在

(11행) 維摩經云
(12행) 外能善分別諸法相
(13행) 內於第一義而不動

우선 위의 인용문을 우리말로 옮겨보자:

(1행) “세상 사람들이여, 견해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지어다.
(2행) 만약 생각이 없다면, 무념(無念)이란 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3행) 무념의 ‘무(無)’는 무엇이 없다는 말이며,
(4행) 무념의 ‘념(念)’이란 무엇인가?

(5행) ‘무’란 두 가지의 모습에서 비롯한 여러 번뇌 망상을 여의었다는 말이며,
(6행) 진여는 생각의 몸이니,
(7행) 생각은 진여의 몸짓이다.

(8행) 자성의 일함이 생각인지라
(9행)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 할지라도
(10행) 자성은 온갖 경계에 더럽혀지지 않고 항상 자유롭다.

(11행) 『유마경』은 말한다:
(12행) ‘겉으로 여러 가지 것들의 온갖 모양들을 잘 분별하면서도
(13행) 안으로 제일의(第一義)에 굳건하게 서있다.’

그러면 우리는 위에 인용한 『돈황본 육조단경』의 원문과 얌폴스키의 해당부분 영역을 같은 줄 위에 병열적으로 올려놓고 양자를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대조해 보자.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돈황본 육조단경
(1행) 世人離見 不起於念
(2행) 若無有念 無念亦不立
(3행) 無者無何事
(4행) 念者何物
(5행) 无者離二相諸塵勞
(6행) 眞如是念之體
(7행) 念是眞如之用
(8행) 性起念
(9행) 雖卽見聞覺之
(10행) 不染万鏡而常自在
(11행) 維摩經云
(12행) 外能善分別諸法相
(13행) 內於第一義而不動

얌폴스키의 영역
(1행) “Men of the world, separate yourselves from views; do not activate thoughts.
(2행) If there were no thinking, then no-thought would have no place to exist.
(3행) ‘No’ is the ‘no’ of what?
(4행) ‘Thought’ means ‘thinking’ of what?
(5행) ‘No’ is the seperation from the dualism that produces the passion.
(5a행) ‘Thought’ means thinking of the original nature of True Reality.
(6행) True Reality is the substance of thoughts;
(7행) thoughts are the function of True reality.
(8행) If you give rise to thoughts from your self-nature,
(9행) then, although you see, hear, perceive, and know,
(10행) you are not stained by the manifold environments, and are always free.
(11행) The Vimalakirti Sutra says:
(12행) ‘Externally, while distinguishing well all the forms of the various dharmas,
(13행) internally he stands firm within the First Principle.’

 

돈황본의 제4행인 “念者何物”을 얌폴스키의 영역 스타일로 번역하자면 그것은 응당 “Thought means what?”라고 했어야 할터인데도 그는 그것을 ‘Thought’ means thinking of what? 라고 번역했다. 돈황본에 없는 “thinking of” 라는 말을 삽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얌폴스키의 제5a행인 ‘Thought’ means thinking of the original nature of True Reality.라는 문장도 돈황본에는 없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그래도 되는 건가? … 등등의 의문이 안 나올 수 없다. 문제는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장이 다루고 있는 무념론(無念論)에 대한 얌폴스키의 독특한 이해에 있는 것 같다. 그럼 지금부터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보자.

4.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각행의 첫머리에 보이는 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이다. 문제되는 대목을 따지기 위해서다. 얌폴스키의 4행(‘Thought’ means thinking of what?)이 돈황본의 4행(念者何物)과 다르다는 것은 이미 위해서 지적하였다. 돈황본은 <念者何物 : 생각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도 얌폴스키는 이를 <念者念何物 : 생각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냐?>고 번역했다. 돈황본 육조단경이 묻고 있는 질문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생각이 무엇이냐’는 질문과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서로 다른 질문이다. 돈황본 단경의 질문인 념자하물(念者何物)이란 말을 둘로 갈라놓고 그 가운데에 념(念)이란 글자 하나를 삽입함으로써 념(念)이란 글자는 타동사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하물’은 타동사의 목적어로 전락했다.

얌폴스키는 이러한 바꿔치기에 대해서 각주도 달지 않았고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았다. ‘념자하물(念者何物)’이라고 묻는 돈황본의 문제의식과 ‘념자념하물(念者念何物)’이라고 묻는 흥성사본의 문제의식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얌폴스키는 간과한 것 같다.

다음으로 얌폴스키의 제5a행: ‘Thought’ means thinking of the original nature of True Reality(‘념’이란 진여자성을 생각한다는 말이다)를 생각해 보자. 도대체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을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것인가? 왜 그는 원문에 없는 이런 말을 삽입했을까? 등등의 의문이 쏟아져 나온다.

얌폴스키는 그의 각주 72번4)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This passage is omitted in the Tun-huang version and has been supplied from Koshoji, p.22.” ‘이 문장이 돈황본에 빠져 있어서 흥성사본에 의거하여 보충해 넣었다’는 말이다. 얌폴스키는 이 대목(5a행)이 4행의 변질된 질문 때문에 억지로 삽입한 변질된 답변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이 삽입된 답변은 돈황본의 답변이 아니다.

이는 4행에서 바꿔친 문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돈황본에 없는 답변을 고의로 삽입한 것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얌폴스키는 왜 이렇게 질문을 바꿔치고 엉뚱한 답변을 삽입해야 했었을까? 이렇게 함으로써 단경이 말하고 싶은 무념의 뜻이 더 잘 드러났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5. 왜 얌폴스키를 비판하는가

첫째, 얌폴스키의 번역에 나타난 무념은 『돈황본 육조단경』 전체의 무념 사상과 조화가 되지 않는다. 필자가 이해하는 한,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장은 수미일관 논리정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글이다. 필자의 이러한 말을 『돈황본 육조단경』이 아무런 오자도 없고 탈락된 글자도 없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문헌학적 입장에서 볼 때, 얌폴스키의 학적 공로는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상적인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할 말이 많다는 말이다.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그 책제목에서부터 들고 나온 뚜렷한 기치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책의 저자가, 그가 누구든, 처음부터 돈적(頓的)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두철미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반야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불교수행에서 선정과 지혜 중의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두 파로 갈라져 싸우고 있을 때 『돈황본 육조단경』은 선정과 지혜는 말로는 둘이지만 사실은 둘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그 체(몸)는 하나임을 강조한다. 그러한 논리 전개의 마무리를 ‘등불과 그 불빛의 관계’로 설명한다. 다름 아닌 체용(體用)의 논리다. 이것은 철저한 불이(不二)의 논리요, 생명의 논리라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사람은 말에 얽매이지 말고 논리를 뛰어넘어 생명의 실상으로 되돌아가자고 역설한다. 이런 의도를 저변에 깔고 『돈황본 육조단경』의 저자는 계속 ‘무념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유독 ‘무념’뿐만이 아니다. 무상(無相)도 그렇고 무주(無住)도 그렇고 얽매임(계박 : 繫縛)과 얽매이지 않음(무박 : 無縛)의 논리 등등 그렇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얌폴스키의 번역은 문헌학적인 충실한 연구에 비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무념의 념이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허술한 대목이 없지 않았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사상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옥에 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얌폴스키가 말하는 그러한 무념에는 돈(頓)적인 메시지도 없고, 『금강경』의 반야사상도 없으며, 체용의 논리에도 무감각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얌폴스키의 번역은 ‘몸 소식’을 ‘몸짓 소식’으로 바꿔버렸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장은 체용의 논리를 동원하여 몸짓 문화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몸 소식을 알려 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얌폴스키는 이에 역행하여 단경의 몸 소식을 몸짓소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옛날 포광 김영수 교수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강의실에서 크게 한탄하였다고 한다: “체용을 바로 떼는 사람이 드물다”고. 체용의 논리가 일하고 있는 현장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훈련이 부족하다는 한탄이었던 것 같다. 『돈황본 육조단경』 중에 체용논리가 약여하게 일하고 있는 현장은 위에 인용한 무념장의 ‘질문과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그 현장을 재현시켜 보자 :

질문 無者無何事
답변 无者離二相諸塵勞
질문 念者何物
답변 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여기서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무념’의 ‘념(念)’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 『돈황본 육조단경』은 바로 답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흥성사본과 다른 점이다. 왜 바로 답변하지 않았을까? 체용논리로 답변하기 위해서다. 바로 답변하면 보통논리지만 보통논리로 안 될 때는 체용논리가 등장한다. 돈적 체용논리는 불이(不二)의 논리이어야 한다. 보통논리는 ‘불이의 논리’가 아니다.

흥성사본처럼 ‘념자념진여본성(念者念眞如本性: 생각이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불이의 논리’가 아니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대상으로서의 진여본성’이 둘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불이의 논리’인 ‘체용의 논리’는 깨친 ‘부처님의 논리’이며 ‘생명자체(生命自體)의 논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이상제진로(離二相諸塵勞 : 이원에서 비롯한 모든 번뇌망상을 다 여읨)’이기 때문이다.

망상 없으면 부처님이다. 왜 부처님이 다시 부처님(眞如本性)을 생각하고 있겠는가? 그건 말이 안 된다. 이처럼 보통사람들의 이원적인 논리로는 의사전달이 잘 안 되는 사상 전개상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돈황본 육조단경』은 체용논리를 원용하고 있다.

체용의 논리가 『돈황본 육조단경』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가를 여실하게 보기 위해서, 우리는 『돈황본 육조단경』이 무념 사상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그 이론적인 구조부터 먼저 밝혀보자.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장은 4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단 :
1행과 2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종의 머리말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핵심은 그 이전의 정혜장(定慧章)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다.

제2단 :
3행으로부터 시작하여 7행까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질문은 무념을 파자(破字)하여 무념의 ‘무’는 무엇이며(3행), 무념의 ‘념’은 무엇이냐(4행)고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은 5행, 6행, 7행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첫 5행은 3행의 질문에 대한 직답이다. 그러나 4행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직답이 아니며 그 답변의 구조도 한 줄이 아니고 두 줄로 되어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6행과 7행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념의 ‘념’을 설명하는 일이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또한 왜 직답이 불가능하며 왜 한 줄의 답변으로는 불가능했는지 그 까닭을 밝혀내지 않을 수 없다. ‘념’이란 용(用)인데 누구의 ‘용’이냐 하면 다름 아닌 진여자성이라는 체(體)의 용이기 때문에 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체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얌폴스키는 이 점을 놓친 것이다. 그는 체용을 하나의 레토릭으로 본 것 같다. 그리니까, 5행에서 무념의 ‘무’는 잘 설명해놓고 무념의 ‘념’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고 본 것이다.

“This passage is omitted in the Tun-huang version”이라고 말하는 각주 72번의 말투가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흥성사본의 ‘념자념진여본성(念者念眞如本性)’이란 말이 여기에 들어와야 비로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6행과 7행이 함께 체용의 논리로 진여의 용인 무념의 ‘념’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래서 ‘일인전허 만인전진(一人傳虛 萬人傳眞)’이라는 따끔한 비판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것 같다.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니 그 뒤의 모든 사람이 그 거짓말을 참말로 전한다”는 뜻의 아픈 말이다.

제3단 :
8행에서부터 10행까지다. 이 부분은 무념장의 결론에 해당된다. “성기념(性起念 : 진여본성이 생각함)이라 이 세상의 별별 것을 다 보고 듣고 느낀다 할지라도…” 라고 되어있는 첫 문장은 진여자성의 ‘용(用)’을 말하고 있으며 그 다음의 “만경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는 대목은 그 ‘체(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을 깨우쳐준 대목으로도 유명하다.

제4단 :
마지막의 11행, 12행, 13행은 『유마경』의 말씀을 인용, 위의 제3단 결론을 입증하는 경증(經證)으로 삼고 있다. 12행의 “밖으로 모든 것을 잘 따지지만”이라는 말은 ‘용’이고 13행의 “안으로는 제일의(第一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돈황본 육조단경』이 무념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체용논리로 일관하는 것은 그것이 부처님의 무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무념은 보통사람의 눈엔 두 가지의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들, 가령 여기서 ‘견문(見聞 : 듣고 보는 것)’과 ‘자재(自在 : 자유로움)’의 관계나 또는 『유마경』의 ‘선분별(善分別: 잘 따지는 것)’과 ‘부동(不動 : 태산처럼 요지부동)’의 관계 등등이 모두 부처님의 일함에서는 둘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러한 불이(不二 : 둘 아님)사상을 전달하려고 할 때마다 『돈황본 육조단경』은 체용의 논리를 쓰고 있다. 제3단의 결론과 제4단의 결증이 서로서로 앞뒤가 딱 들어맞는 것은 둘 다 체용의 논리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용(用) 性起念 雖卽見聞覺之
체(體) 不染万鏡而常自在
용(用) 維摩經云 外能善分別諸法相
체(體) 內於第一義而不動

셋째, 얌폴스키의 번역은 불교의 수행논리를 외면하고 있다. 불교의 수행논리가 일하는 곳에서는 항상 혁명적인 전의(轉依)5) 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전의가 수행되기 전과 수행된 다음은 판이하다. 얌폴스키의 논리엔 이것이 빠져있다. 다시 『돈황본 육조단경』 무념장의 원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제2단의 3행과 4행에서 무념의 ‘무’는 무엇이며 무념의 ‘념’은 무엇이냐고 묻고 나서, 그 대답으로 5행에서 무념의 무는 이상(二相)에서 비롯한 모든 번뇌망상을 여읜 것이라 했다.

바로 이때가 혁명적인 전의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의 6행과 7행은 혁명적인 전의가 성공적으로 수행된 이후의 진여(眞如)가 일하고 있는 현장을 드러내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돈황본 육조단경』의 저자는 거기서 생명의 논리인 체용(體用)을 들고 나온 것이다. 여기서 어영구영 무념의 ‘념’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라 말하면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이라, 결국엔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다.

자기가 박아무개이면서 밖으로 박아무개를 찾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자기자신이 박아무개임을 깨달은 다음, 또다시 박아무개를 찾고 있는 격이다. 중생의 이런 현상이 안타까워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 부처와 부처는 서로 보지 않음)이라 말했을 것이다. 얌폴스키는 전의라는 혁명이후의 ‘정말 무념’과 ‘아직 무념이 되기 전의 무념’을 혼동한 것 같다.

『열반경』의 중도게(中道偈)는 불교의 수행논리가 일하는 현장을 잘 보여준다. 열반경의 중도게는 말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 …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역유역무(亦有亦無) … 유(有)이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하다.
유무상통(有無相通) … 유(有)와 무(無)는 서로 통한다.
시명중도(是名中道) ... 이를 이름하여 중도(中道)라 한다.

여기서 ‘비유비무’라는 제1구가 없다면 ‘역유역무’라는 제2구는 있을 수 없다. 양부정으로 나타난 제1구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혁명의 현장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때려 부숨이 없는 혁명은 없다. 물질세계에서의 때려 부숨은 파괴와 폐허만이 남지만 정신세계에서의 때려 부숨은 대사일번(大死一飜)이란 말이 알려 주듯이 다시 새롭게 살아남이다. 이것이 다름아닌 전의(轉依)다. ‘전의’는 밑바닥이 뿌리 채 완전히 뽑힌 상태다.

그래서 제1구 없는 2구는 없으며, 제1구가 있는 곳엔 반드시 제2구가 있기 마련이다. 양자는 말로 할 땐 선후가 있지만 실지는 동시일 것이다. 그러므로 역으로 제2구 없는 1구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화엄의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바로 그 말이다. 무자무하사(無者無何事)라는 물음에 대하여 무자이이상제진로(無者離二相諸塵勞)라고 답변한 것은 『열반경』의 제1구 소식이다.

그렇다면 제2구에 해당하는 ‘역유역무’의 소식이 『육조단경』에서 뒤따라 나와야 한다. 얌폴스키의 번역에는 그것이 없다. 없는 정도가 아니고 제1구를 무효화시키는 엉뚱한 질문을 한다. ‘염은 무엇을 염하는거냐’고. 이런 질문은 『돈황본 육조단경』에 없는 말이다. 얌폴스키는 『돈황본 육조단경』의 말이 ‘말이 되지 않아서’ 말이 되겠금 자기가 이를 삽입했다고 고백했다. 고백한 것까지는 좋다.

더군다나 뒤에 나오긴 했지만 흥성사본에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걸 따왔다는 것이다. ‘이이상제진로(離二相諸塵勞)’면 제1차 혁명이 끝난 것이다. 혁명이 끝났는데도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는 꼴이다. 얌폴스키는 이이상(離二相)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질문을 바꾼 것이다. 질문을 바꾸었으니 그는 답변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렸다. ‘염자염진여본성’(念者念眞如本性)이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는 『돈황본 육조단경』에 없는 말을 하나 만들어 집어 넣었다. 그의 변명은 흥성사본이 그렇게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질문을 바꾼 죄, 답변을 바꾼 죄를 모두 흥성사본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얌폴스키냐 흥성사본이냐가 문제 아니다. 누가 했건 그건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베꼈든 만들었든 죄는 마찬가지다.

6. 육조단경의 한국말 번역들

한국에서 나온 우리말 『육조단경』은 모두가 얌폴스키의 잘못을 묵인하고 있다. 1959년, 삼척 영은사에서 출판한 탄허스님의 우리말 『육조단경』은 13세기 말엽(1290년경)에 나온 덕이본(德異本)을 대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돈황본 육조단경』과의 차이에 도전하는 문제의식이 없었다.6) 1975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출판된 광덕스님의 『법보단경』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니었으며7), 1995년에 나온 법성스님의 『육조법보단경 해의』도 마찬가지였다.8)

물론 이들에겐 모두 돈황본 육조단경을 대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1987년에 나온 성철스님의 번역은 돈황본을 대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얌폴스키처럼 책이름부터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이라 명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스님은 얌폴스키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얌폴스키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했다.9) 그러나 성철스님은 그의 책 55쪽, 둘째 줄에서 단경의 무념에 대해서 중요한 지침을 내렸다. “육조의 무념은 망상이 다 없어진 불지무념(佛地無念 부처님 지위의 무념)이다”라고.10) 이 지침이 옳다면, 성철스님은 우리들이 지금 문제를 삼고 있는 무념장(131쪽) 번역에서 얌폴스키의 오류를 지적했어야 한다. 무슨 편집상의 착오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성철스님과 법성스님은 단경의 ‘무념’을 간혹 ‘생각 없음’이라 번역했다. ‘생각 없음’이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번역자에겐 그 뜻이 분명할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단경의 무념을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것’으로 잘못 알 수도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무념은 『돈황본 육조단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무념과 천양지판으로 다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돈황본 육조단경』 전편에 흐르는 메시지가 행여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을 불교의 ‘무념’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인데 어찌하여 무념을 ‘생각 없음’으로 번역한단 말인가. 필자는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을 ‘생각 없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꼭 번역해야 한다면 ‘생각 없음’ 보다는 좀 생경한 표현일지라도 차라리 ‘없음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이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사상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삼장법사 현장(玄, 622~664)은 말했다. 저 나라에는 있지만 이 나라엔 없는 경우엔 번역하지 말라고. 서양에서 선(禪)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선(禪)이란 선정(禪定)이니 ‘meditation’이라고 번역하자 느니, 또는 선(禪)은 기독교 수도원의 기도와 그 성격이 비슷하니까 ‘prayer’로 번역하자 느니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의 선객, D.T. Suzuki의 슬기로 번역하지 않고 음만을 그대로 표기하기로 낙착됐다. 그것이 오늘날의 ‘zen’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오늘날 ‘무념’을 영어로 번역할 때, 얌폴스키처럼 ‘no-thought’라고 번역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밖에도 W.T. Chan처럼 ‘absence-of-thought’11) 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Thoman Cleary처럼 ‘freedom from thought’12) 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경우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Zen’의 경우처럼 ‘munyum’이라 음역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7. 맺는 말

『돈황본 육조단경』의 무념은,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망상이 다 없어진 불지무념(佛地無念 : 부처님 지위의 무념)”13)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얌폴스키의 번역이나 흥승사본처럼 ‘진여자성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앞뒤가 맞질 않는다. 이것이 오늘 필자가 발표한 논문의 요점이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든가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말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돈황본 육조단경』 밖으로 나가서 가톨릭 수도원의 경우나 불교의 염불수행(念佛修行) 같은 경우 등등 인간세계에 진여자성을 생각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돈황본 육조단경』을 두고 말하는 이상,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놓지 않으면 우리는 경을 제대로 읽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Hu Shih(胡適)14), 일본의 우이 하꾸주(宇井伯壽)15),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16) 등등 현대에 들어와서 불교학계엔 『육조단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오늘날의 단경공부는 이러한 학자들의 서지학적 노고 덕택으로 그동안의 짙은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제까지의 단경연구가들의 관심사는 항상 문헌비판학을 무기로 ‘역사 왜곡 바로잡기’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이란 그 속에 미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로 잡는 일은 곧 미래를 창조하는 일이어야 한다.

양자의 갈등은 일시적으로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극복되어야 할 과도기임엔 틀림없다. 오늘날 단경을 읽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양하다. ‘천차만별 중중무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관심사를 획일화하려 할 때 무리가 생긴다. 가령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믿음과 닦음의 문제와 씨름하다가 얌폴스키의 번역처럼 체용논리가 제 할 일을 못하고 하나의 레토릭(rhetoric)으로 전락해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종교적인 서적의 성공적인 번역을 이야기할 때,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의 쇼펜하워(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인도의 『우파니샤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단다. 그래서 그의 철학에는 『우파니샤드』의 철학사상이 깊숙이 스며들어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쇼펜하워가 읽은 『우파니샤드』는 오역 투성이의 초기 라틴어 번역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진실로 찾고 있으면 오역의 장애도 넘어서기 마련이란 말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이른바 학문적인 안전장치가 제법 잘 되어 있는 학계에서 엉뚱한 오역과 곡해 등등이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학자들의 마음이 ‘장삿속(利害打算)과 말장난(戱論)’ 때문에 엉뚱한 방향으로 쏠려 있으면 오해나 오역을 면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Hu Shih나 야나기다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들이 훌륭한 학자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기에 결국 얌폴스키와 같은 번역을 내놓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런 번역이 나온 뒤로 반세기가 다 되도록 사람들은 그 번역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문제는 심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문헌비판학도 중요하고 서지학도 중요하다.

과학적인 접근을 생명으로 아는 현대의 실증주의적인 역사학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얌폴스키의 번역처럼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는 번역을 제일 잘된 번역이라 떠들어대며 그 결과로 그 번역이 50년이 다 되도록 베스트 셀러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심각하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든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은 막아야 한다.

흥성사본에서 시작하여 성철스님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는 오류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막을 것인가? ‘증의(證義)’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경을 보는 눈이 열리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경을 번역할 때, 그 마음이 딴 데로 가있지 않고… 그러한 ‘증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

참고서적
1. Philip B. Yampolsky, The Platform Sutra of the Sixth Patriarch.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7.
2. Wing-tsit Chan, The Platform Scripture. New York: St. John's University, 1963.
3. Thomas Cleary, The Sutra of Hui-neng Grand Master of Zen. Boston & London: Shambhala, 1998.
4. John R. McRae, Seeing Through Ze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5. 胡適, 『胡適禪學案』. 臺北: 正中書局, 1975.
6. 宇井伯壽, 『第二禪宗史』. 東京: 岩波書店, 1941.
7. 柳田聖山, 『初期禪宗史書硏究』. 京都: 法藏館, 1967
8. 柳田聖山 編, 『六祖壇經 諸本集成』. 京都: 中文出版社, 1976.
9. 駒澤大學禪宗史硏究會 編著, 『慧能硏究』. 東京: 大修館書店, 1986.
10. 탄허스님 현토번역,『육조단경』. 강원도 삼척: 영은사, 1959.
11. 광덕스님 역주, 『육조단경』. 서울: 불광출판부, 1775.
12. 성철스님 현토편역, 『돈황본 단경』. 해인사 백련암: 장경각, 1987.
13. 법성스님 해의, 『육조법보단경 해의』. 서울: 큰수레, 1995.
14. 김지견 편, 『육조단경의 세계』. 서울: 민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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