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매주 한 번씩 몇 사람이 모여 명상 시간을 갖는다. 명상을 먼저 시작한 인연으로, 명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 안내를 맡고 있다. 그분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요즘 사람들은 정신적 행복감에 많이들 목말라 하는 것 같다. 이는 명상 인구가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상을 한다’는 것만으로 이들의 바람이 다 채워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명상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만병통치약인가? 명상수행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명상수행을 오래 하면 정신적 행복감도 비례하여 높아지는가? 명상수행이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마음과 의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동기나 사연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명상으로 인한 효과를 기대한다. 이 사람은 즉 마음이 편안해졌다, 또는 불면증이 사라졌다든가 하는 효과를 맛보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그 효과를 즉시 또는 본인이 정한 기간에 맛보지 못하면 명상수행을 해나갈 힘을 잃고 만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명상을 몇 년쯤 했는지가 관심사이다. 그래서 본인보다 기간이 짧은지, 긴지를 비교한다. 본인보다 기간이 긴 사람에게는 무조건 경의를 표하고 본인은 기간이 짧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다고 자탄한다. 반대로 자신보다 명상수행 기간이 짧은 사람에게는 우월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명상을 신비체험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명상을 통해 밝은 빛을 보았다든가,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 속에 있는 느낌을 느꼈다든가, 몸의 뚜렷한 변화를 보았다든가 하는 등의 말을 듣고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이 사람은 신비체험이 일어나면 성취를 이룬 듯 기뻐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자기는 체질이 아니거나, 명상과 맞지 않는다며 그만둔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적당히 부도 이루었고 적당한 교양과 명예도 갖추었고, 가족도 잘 이루었으니 이제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만 이루면 내 인생 완벽해진다고 생각하며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명상으로 무언가를 하나 더 만들어서 인생에 얹어 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지독한 인생의 괴로움을 안고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명상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명상을 대할 때는 지나친 세속적 목적보다는 명상수행이 지향하는 목적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본다. 혹 실용적 목적으로 명상을 하려는 분이 있다면 내가 명상을 시작할 때의 경험이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시쳇말로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고 나서, 그래서 별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어느 해였다. 돌아보니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외국으로 떠났다. 그들이 가는 곳은 주로 미얀마였다. 한 달씩, 두 달씩 긴 일정을 잡아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을 간다고 이야기를 하곤 몇 달씩 보이지 않다가 까무잡잡하고 비쩍 마른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어떤 이는 아예 거기서 출가를 해서 법명도 미얀마어로 쓰고 비자 문제로 한국에 잠깐씩 들른다고 했다. 그런 이들을 여럿 본 후에야 그들의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굳이 말한다면 얼굴이 선해짐, 사람이 편하게 보임, 말이 차분해짐, 남 탓이 없어짐, 눈빛이 맑아짐…… 등등이었다. 종합하면 ‘사람이 변했다! 아주 선하게, 그리고 멋지게’였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무엇이 그들을 바꿨을까? 그들이 갔던 미얀마라는 곳에 정말 그 비결이 있을까? 그래서 한 달 반을 일정으로 정하고 찾아갔다. 한국의 지인들이 추천해 준 명상센터에서 약 45일을 지냈다. 그곳에서는 오전 3시에 일어나면 오후 10시까지 식사시간과 약간의 휴식시간 빼고는 종일 명상수행을 한다. 저녁 시간에 법문 1시간, 그리고 이틀에 한 번꼴로 사야도와 인터뷰, 그런 정도가 일정이다.

의식주에 관련된 모든 일은 센터에서 다 해결해준다. 개인적인 빨래나 세면, 본인이 사용하는 꾸띠(오두막) 안쪽 청소만 하면 된다. 필요한 것은 요청(묵언이어서 글로 써 놓는다)하면 바로 해결해준다. 오로지 명상수행만 하면 된다.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정신적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한국에서의 일들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더니 그 이후론 옛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되어 가며 의식이 또렷해졌다. 돌아보면 뭐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았다. 단지 내 생활이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일정이 끝날 즈음, 돌아간다는 생각이 구체화되자 다시 현실의 계획과 할 일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미얀마 명상센터에서 배운 건 마음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것’.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저버리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괴로움(번뇌)을 만드는 것이다. 관계를 끊고 살지 못할 거면 태도를 바꾸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명상은 태도(습관)를 바꾸는 것이다. 내게로 무언가가 다가와 부닥칠 때 그것에 대응하는 마음과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다음은 우리 안에 다 준비되어 있다. 그게 태도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는 걸로 객관화된다.

본인 스스로가 명상을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본인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안다고 도반들에게 종종 말한다. 본인이 변하면 그걸 주변 사람들이 알고 평가해 준다, 스스로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분명 욕탐에 근거한 명상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얀마에서 내 안의 괴로움을 살펴보고 돌아온 이후 미얀마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긍정적으로 하게 됐다. 그러자 서로 간에 농담 삼아서라도 명상을 강권하기도 한다. 즐거움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렇다. 나의 작은 변화가 주변을 변화시킨다. 세상의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변화된 세상은 내게 평화를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명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지하철 ‘풍경소리’ 대표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