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구독신청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칼럼 > 사색과 성찰
     
[사색과 성찰]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 / 이우상
[70호] 2017년 06월 01일 (목) 이우상 asdfsang@hanmail.net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에 가면 곱게 단장된 잔디가 있습니다. 안내판을 읽고 느린 걸음으로 능역을 산책하면 역사가 살아납니다. 말없이 누워 있는 무덤의 주인들이 역사를 들려줍니다. 잔디에 앉아 타임머신을 타면 긴장된 역사의 현장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왕릉은 으스스한 묘지가 아닙니다. 세련되게 꾸며진 정원입니다. 낙락장송이 즐비한 고급 정원입니다. 삼림욕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왕릉은 사색과 성찰의 최적 공간입니다. 역사와 힐링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정원입니다.

저는 수시로 조선왕릉에 갑니다. 지난주엔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태릉(泰陵)에 다녀왔습니다. 조선 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입니다. 거기서 문정왕후를 알현하고, 그 시대 불교 중흥을 위해 애썼던 허응당 보우 스님을 만났습니다.

문정왕후에게는 별명이 많습니다. 문정왕후는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여인 등으로 불립니다. 보우 스님은? 요승(요사스러운 중) 보우라는 칭호가 귀에 익습니다. 그렇게 듣고 배웠지요. 수백 년 동안 전승된 것이라 진리로 여기며 비난을 당연시합니다. 길거리에 놓인 돌부리 차듯 불교를 폄훼하고 승려를 구박해도 예사로운 것이 조선시대의 풍경이었습니다.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불교의 위상이 변했습니다. 문정왕후가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습니다.

문정대비는 불교 중흥을 위하여 대임을 맡을 고승을 물색하여 양주 회암사에 있던 허응당 보우 스님을 맞아들였습니다. 명종 5년(1550) 12월, 선교 양종을 다시 일으키고 승과를 부활했습니다. 봉은사를 선종 본산으로, 봉선사를 교종 본산으로 삼았습니다. 명종 6년 6월에 보우 스님을 봉은사 주지로, 수진 스님을 봉선사 주지로 임명했습니다.

명종 7년, 양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를 실시했습니다. 다시 양종이 부활되고 교단은 활기를 띠고 인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고려 보조국사와 더불어 조선 불교 중흥의 대조사라 할 수 있는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도 이때 승과에 의해 등용되었습니다.

보우 스님은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으로 출가했습니다. 그 뒤 장안사, 표훈사에서 수행하고 학문을 닦았습니다. 6년 동안 정진 끝에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을 얻었고, 대장경을 섭렵하는 한편 《주역》도 공부했습니다. 재상 정만종이 보우 스님의 인품과 도량을 문정대비에게 알려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봉은사 주지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사찰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친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을 처벌했습니다. 봉은사와 봉선사에 방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해 유생들의 횡포를 막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조선시대에서 처음 있는 일로서 유생들이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끝내는 이 문제가 조정으로 비화되었습니다.

문정대비가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보우 스님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하여 1549년 9월 성균관 생원인 안사준 등이 요승 보우의 목을 베고 황언징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문정대비는 “이유 없이 승려들을 괴롭히고 법당에 난입하여 도둑질하는 행위를 처벌하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문정대비 · 보우 스님과 유생들 사이에 치열한 힘겨루기가 전개되었습니다.

유생들은 선교 양종과 도첩제 · 승과제의 폐지를 요구하고, 보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습니다.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사헌부 등에서 매일 번갈아 상소를 했고, 좌의정이 백관을 인솔하여 계를 올리는가 하면 성균관 학생들은 종묘에 고하고 성균관을 비우기까지 했습니다.

선교 양종을 부활하라는 문정대비의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건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우 스님은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명종 20년(1565) 4월, 문정대비가 승하했습니다. 숭불의 동력이 사라졌습니다. 대비의 장례를 마친 유생들은 곧바로 보우의 배척과 불교 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잇따른 상소에 명종은 보우의 승직을 박탈했습니다. 미온적인 조치에 만족할 수 없었던 유생들과 정승들까지 보우를 죽이라고 건의하자 보우는 한계산 설악사에 은거했습니다.

율곡 이이가 〈논요승보우소〉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명종은 보우 스님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습니다.

귀양지에서 보우 스님은 제주 목사 변협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보우 스님은 억불정책의 광풍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왕릉은 말이 없으나, 역사는 생생하게 교훈을 말해줍니다.


소설가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