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월정사에서 작은 소임을 하나 맡고 있다 보니 한가한 시간 없이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산중 생활이란 게 조금은 넉넉하고 여유가 있어야 묘미가 있는 건데, 소임을 맡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가끔 절 경내를 천천히 포행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절 아래 밭둑까지 걸어가 보곤 하지요.

요즘은 봄빛이 완연해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연둣빛 새순이 불쑥불쑥 머리를 쳐들어 온 천지 사방 산과 들에 생명력이 넘쳐흐릅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절로 환희심이 샘솟곤 합니다.

어쩌다 한 번씩 누리는 이 나들이가 더욱 즐거운 것은 밭둑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고소 나물 때문입니다. 고소 나물은 한번 움트면 여름에서 가을까지 먹을 수 있어 스님들의 공양 반찬으로는 이만한 나물이 없습니다. 성질이 차서 몸의 열을 내려주는 효과가 있는데 스님들의 수행에 도움이 된다 하여 절에서 많이 재배하여 먹는 나물입니다. 게다가 씨를 뿌린 후 별다른 손길이 가지 않아도 금세 새순이 올라와서 재배하기가 쉽습니다. 두통이나 고혈압에도 좋아 예전부터 절에서는 한방약으로도 쓰고 있습니다.

이 고소 나물이 다른 나물과 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해서 씨앗을 뿌린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봄이면 부처님오신날 전에, 그렇지 않으면 후에 뿌리는데, 그래서 부처님이 오시면서 머리 깎은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초여름에 고소 나물을 뿌리째 캐다가 바구니에 씻어 놓으면 고소한 냄새가 공양간을 휘돕니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고소 나물 한 가지에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지요.

고소 나물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냄새가 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언뜻 스치는 냄새가 꼭 빈대 냄새 비슷하여 빈대풀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나물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빈대 냄새 때문에 좋아하지 않지만, 자주 먹다 보면 어느새 고소한 맛을 알게 되고 덩달아 수행도 깊어집니다.
소승은 이 고소 나물만 보면 소승이 처음 출가하던 50여 년 전이 떠오릅니다. 그 가난하던 시절, 서울에서 걸어서 오대산까지 와 머리를 깎던 일이며 행자 때의 낯선 절 생활 같은 게 선연히 생각나지요. 그 시절 출가하신 분들이 모두 그러했겠습니다만, 마음은 사금파리처럼 파릇파릇하지만 실은 몸은 늘 고되던 때였지요.

출가 전에는 서울에서만 학교에 다니다가 마음으로만 염원하던 오대산에 출가하여 처음 행자 생활을 하려니 적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법당 안에 혼자 들어가 부처님께 기도를 드린 후 가만히 앉아 둘러보면 울긋불긋한 단청이며 탱화, 괘불 그림들이 괜히 무섭고 도깨비라도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절 음식은 일반식과 달라서 그 맛이 담백하고 은근하지만, 처음엔 쉽게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음식이 바로 고소 나물이었습니다. 처음 먹어 보니 빈대처럼 비린 냄새가 역해서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잘 먹지를 못하니 안 그래도 힘든 행자 생활이 더욱 고되었습니다. 어찌나 잠이 쏟아지던지 눈을 반쯤 감은 채 마지를 들고 걸어가다가 법당 기둥에 이마를 부딪치기 일쑤였습니다. 또 목탁을 치면서도 끄덕끄덕 졸기 일쑤였습니다. 하루는 하도 잠이 쏟아져 부처님 제단 밑에 들어가 몰래 10분만 자고 일어나야지 했다가 깨어 보니 3일이 지나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사이 절 안에서는 소승을 찾느라 큰 소동이 일어났지요.
그러자 소승의 은사이신 만화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수행이 깊어지면 빈대 나물이 고소 나물이 되고 법당의 부처님 품 안이 가장 편안하고 안온하다는 것을 알 때가 온다.”고 이르셨습니다.

은사 스님의 말씀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월정사 앞을 흐르는 금강연에 나가 큰스님들의 세숫물과 양칫물을 떠다 드리고, 제 방으로 들어와 기도드리고 공부하고 부처님 전에 마지를 올리는 일상이 거듭되면서 소승도 모르게 차츰차츰 고소 나물에서 빈대 냄새가 사라지고 고소한 맛이 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몸이 약해서 기력을 잃고 입맛이 없을 때 고소 나물 한 접시에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꽁보리밥을 비벼 먹으면, 번뇌도 사라지고 기력도 돌아오고 청아한 하늘만큼이나 맑은 마음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또 도깨비처럼 무서웠던 법당 안의 오방색과 단청의 문양도 섬세하게 붓놀림을 했을 장인들의 수고와 신심이 느껴져 마음이 찡하면서 눈물이 핑 돌고 감동과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되었지요.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법당 안의 불화나 탱화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저절로 신심이 장하게 일어났습니다. 무섭기만 하던 부처님 법당 안이 가장 편안한 곳이 되었지요. 그랬던 행자 시절도 벌써 50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 시절이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해 밭둑에 고소 나물의 씨를 뿌리는 때입니다. 여름철 공양 상에 올라올 고소 나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는 요즈음입니다.

월정사 부주지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