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원 신부 강연 정리

강연_서명원 신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정리_임동숙 (우리는선우 사무국장)
    서양인 불교학자 서명원 신부. 불교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또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소통을 위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을까? 불교평론 서명원 편집위원(서강대 종교학과 교수)은 2006년 6월 3일 서울 우리는함께회관에 위치한 우리는선우 법당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그 소통을 말하다’를 주제로 한 경연을 통해 한국 재가불자들과 의견을 나눴다. 푸른 눈의 서양 신부가 바라본 불교. 서 신부는 “불교는 서양종교인들에게 다른 수행체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불교가 서양문화권과 만남으로써 ‘내 믿음의 대상말고 다른 것이 있어, 결국 내 믿음을 상대화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즉 불교가 자신의 믿음을 붙잡으려하기 보다 놓아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강연내용이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활발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저의 입장에서 계속 떠들어대기보다는 여러분들의 질문을 듣고, 제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대답해드리며, 서로 호흡을 맞추어서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소개를 간단히 드리겠습니다. 한국에 온 지는 시간이 많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확실히 모릅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저에게 굉장히 잘 맞는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90년도부터 한국에서 살았는데, 처음엔 연세대학교 한국어학과에서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언어를 배우다보니까, 언어 이면의 문화를 모른다면 언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고, 한국의 종교적인 배경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명상방법들도 조금씩 익히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교수행법을 익히면서 상당한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상당한 위기를 느꼈습니다. ‘나의 가치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지금까지 전부라고 믿어 온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나의 우물을 벗어나서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정체성의 위기를 심하게 겪었습니다.

저는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그런데 저는 늘 궁금합니다. ‘내가 불교를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불교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인지’, ‘내가 생각하는 불교가 진정한 불교일까?’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교가 진정한 그리스도교일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참 어렵습니다. 아마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처님만큼 완전히 깨달아서 사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저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학생들이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서강대학교 학생들 중의 10% 정도가 불자들입니다. 개신교인들이 한 15%정도입니다. 저는 학생들이 불자이거나 개신교도이거나 가톨릭이거나 무교이거나,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불교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저는 그리스도교에서 의문스러운 점을 먼저 지적합니다. 남의 종교에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종교에 있어서도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즉시 지적해야합니다.

불교를 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다른 수행체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선우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선언문(결사문)을 함께 읽었는데, 서양문화권 말고도 다른 것이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서양 중심의 사고방식이 세계의 미래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양인들은 자기들의 세계이외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백인들의 우월의식이라고 할까. 이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 세계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하면, 미국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고 있으며, 미국이 세계경찰의 역할을 해야 된다 믿고 있고, 미국문화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식의 용기에서 나온 것이 전쟁입니다. 그리스도교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믿는 버릇이 강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들이 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아직도 서양문화권 전체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이런 사고의 틀이 약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엄청나게 강합니다.

저는 조화로운 세계,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함께 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 강하긴 하지만, 서양문화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불교가 서양문화권과 공존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서양문화권과 만남으로써 상당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수백년 혹은 수천년에 걸친 역사적 과정일지 모르지만, 인도에서 건너간 불교가 중국에 깊이 스며들면서 그 문명을 바꾸어놓았듯이 불교가 서양문화권을 바꿀 수 있는 상당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통해서 얻은 것을 말씀드리자면, 첫째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믿음의 대상 말고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의 믿음을 상대화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 말고도 다른 존재들이 있구나’, ‘그리스도인 말고 불자들도 있구나’.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발견입니다.

둘째로, 불교의 명상방법들을 익힌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명상방법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불교에서만큼 명상방법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느 종파든지에 명상방법을 엄청 많이 강조합니다. 가르침과 명상방법이 함께 맞물린 것으로 저는 불교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체험한 것으로 미루어 불교명상방법의 주된 특징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서양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서양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뭔가를 붙잡으려는 마음이 강합니다. 참선수행을 통해서, 위빠싸나 수행을 통해서, 염불선 수행을 통해서는, 붙잡으려고 하기보다는 놓아버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늘 뭔가를 붙들고, 이성이나 오성으로 정리하려기보다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매우 큰 가치관 전도입니다. 진리는 매우 역동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결국 언어도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가 아니라고 기성불교가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그리스도 신학은 늘 뭔가를 이성으로 자기화하려고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언어로써 진리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상대성을 인식하면서 언어를 많이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진리를 상대적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언가를 계속 나의 것으로 억지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진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관, 그리스도관이 엄청나게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사는 것은 물위를 걷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위를 걷는 사람은 왜 물을 걷는지 모릅니다. 물위를 어떻게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물위를 걷는 것과 똑같다고 봐야 됩니다. 다름이 없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어떤 명상방법을 택했는가하면, 저는 간화선 수행을 했습니다. 인가를 받게 되었고 선 수행을 지도하기 시작했지만, 저는 정말 옛날이나 지금이나 초보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선 수행을 통해서 얻는 것은 늘 놓아주는 것뿐입니다. 서양인들이 이성이나 오성으로 늘 붙잡으려고 하는 것을, 화두라면 깨져버립니다. 화두라면 이성이나 오성으로 뭔가를 풀 수는 없어요. 다 내놓아야 화두를 풀 수 있습니다.

저는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계속 말씀드리기보다 여러분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정인주 선우 : 신부님께서 쓰신 「불교와 그리스도의 만남」이란 글에 보면 ‘예수사건’이라는 표현을 쓰셨거든요? 그게 뭔지 잘 모르겠고요. 저는 성경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 신약을 읽었는데, 가르침에 비밀이 많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가르침을 자꾸 비밀로만 몰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비밀이 뭘까. 그것을 찾으려고 열심히 읽었는데, 구체적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불교 공부를 하면서, 그 비밀이 불교의 이것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혼자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요?

서명원 신부 : 제가 이해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종교학과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종교와 저 종교를 대비시킴으로써 종교적 사건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불교의 핵심이 ‘부처님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2500년 전 깨닫지 않으셨더라면 불교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뭔가를 깊이 깨달으셨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도 뭔가를 깊이 깨달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불교를 통해서 깨달음의 개념을 익히기 시작했기에, 예수그리스도께도 해당되는 개념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깨달아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깨달아서 사는 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밀스러운 것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해해야 비밀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비밀처럼 들어옵니다. 화두는 어느 정도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두를 풀면 더 이상 비밀이 없어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비밀스럽게 들어오는 이유는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서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인주 선우
: 그럼 자기 체험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서명원 신부
: 불교는 어려워요. 그리스도교도 지극히 어렵습니다. 저랑 친한 비구니스님이 있는데, 출가한 지 20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불교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수도사 생활한 지 이제 27년 되었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깨달아서 살고 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해요. 깨달아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굳건히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번뇌 망상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생사해탈을 여의었다고 말씀드리지도 못해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깨달은 척, 아는 척하기보다 모른다고 얘기하면 더 편안합니다. 이 정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정인주 선우
: 교회 다니는 저의 친구들은 세상에 고통이 가득한데, 부처님은 왜 웃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정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말입니다. 제 친구들은 그것이 두 종교간 교리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은 고통에 관한 해석이, 교통의 원인이나 그것을 푸는 방식이, 기독교와 불교가 참 많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신부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서명원 신부
: 저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똑같다고는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똑같길 원해요. 그런데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종교가 다 똑같다면, 저는 한국에 와서 얻었던 많은 것들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르기 때문에 저에게 부족한 것들을 여러 가지로 채워줍니다. 보충해줍니다. 저도 불교의 약점들을 알아요. 한국불교의 어려운 점들을 알아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불교의 보배로운 것들을 놓치고 싶진 않아요. 어느 종교나 맨 마지막에 가서 다 문제투성이예요. 가톨릭? 문제 많아요. 개신교도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그렇지만 가르침 그 자체가 그냥 좋고요, 저는 그걸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어와 영어가 다르듯이, 불교와 그리스도가 다릅니다. 그래도 서로의 언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언어를 배우면서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불교와 그리스도를 대비시킬 때, 어떤 사람들이 초점을 차이점에만 무조건적으로 맞추기 때문에 대립관계를 이루기 시작해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똑같다고 하기 때문에 초점을 비슷한 점에 맞추는 거죠. 저는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매우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중용을 지녀야 된다고 봅니다.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만남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갈구하는 것과 유사한 요소들이 없었더라면 저는 불교를 시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딘가에서 불교 안의 무언가가 내가 갈구하는 무언가와 유사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도 어떤 면에서 비슷하기 때문에 만남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지금 고통의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는, 그리고 죽음의 문제는 첫 번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보통 생로병사의 이치는 성서 맨 앞에 나오는 이치거든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타락해서 고통을 겪고 죽음을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옵니다. 어떻게 고통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느냐. 그리고 불교의 사성제의 맨 첫 번째는 고제입니다.

삶이 고통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예수님과 고통의 무상성을 대비하기 시작한다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시겠지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대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갈래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봅니다. 말씀하시는 친구들은 부처님의 고통에 대한, 고통의 무상성에 대한 가르침을 지적하면서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좀 더 고차적인 차원에서 비교가 된다면, 그리 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결론이 완전히 다르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표현방법이 아주 다릅니다. 그런데 표현방법이 의미하는 것을 올바르게 보기 시작할수록 표현방법을 넘어서서 만나기 시작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전 한국 사람들과 친해요. 제 인생의 21년 동안 한국을 깊이 사귀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제가 대화를 나눌 때, ‘저 사람은 한국 사람이다’, ‘나와 다르다’, ‘피부색 다르다’, ‘코가 작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냥 편안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국적이나 핏줄을 따지면서 사귀는 것이 아니거든요. 불자들과 친해질수록, 다르면서도 얼마나 가깝던지.

그리고 당연히 다릅니다. 그래서 만남이 더욱 더 풍요롭죠. 고통에 대한 불교관과 그리스도관을 대비할 만하겠지요. 비슷한 점이 있을 것이고 차이점도 있을 것입니다. 똑같지는 않아요. 제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불교의 최고상징이 연화, 연꽃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스도교의 최고상징이 십자가가 아닌가 싶어요. 연화와 십자가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르다고는 이야기 할 수도 없어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베풀어주셔요. 고통에 걸리지 않으셔요. 고통을 죽도록 당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원망하지 않으셔요. 그것은 더러운 곳에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물든 데가 전혀 없는 연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연화와 십자가가 똑같지는 않지만.

정인주 선우
: 저는 십자가의 고통이 가학적이라고 할까요? 스스로 너무 고통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스스로에게 일부러 고통을 가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집니다. 불교는 고통을 보았을 때, 고통의 원인을 보고 그게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소멸된다는 것인데, 기독교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이런 느낌을 받거든요?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요?

서명원 신부
: 저는 오늘 여기에 와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가르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불자들이 저를 간첩이라 하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건네기 위해서 이용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웃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님께서 의미하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인간이 거절한다는 것이 십자가가 의미하는 거예요. 거절을 당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얘기예요.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선천적으로 깨달을 수 없는 존재라고 규정한 일천제까지도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승불교는 아무도 배격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인생관, 인간관은 매우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깨달음의 길을 무시한다 해도, 온갖 죄업을 지어도,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겉으로 보면 불교의 교리와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너무나 상반적으로 보이지만, 제대로 보신다면 저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정토신앙에서는 아미타의 자비,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엄청나게 강조하지 않습니까? 불교는 자력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100%로 자력적이지도 않고 100%로 타력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양쪽이 있습니다. 원효 스님이 살았던 불교의 황금시대였던 신라에서도 불교는 타력적이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충분히 답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동민 선우
: 천주교 성직자 중에서도 환생을 믿는 분들이 있습니까?

서명원 신부
: 법정 스님께서 천주교의 관세음보살은 성모님이라고 말씀하셔요. 무슨 소리냐면, 불교에서 관세음보살님이 하시는 역할을 그리스도교에서 성모님께서 하신다는 얘기예요.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문명은 에센 민족의 문명이거든요?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부터,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문명인데, 그것은 윤회의 개념이 없는 문명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고대인도는, 윤회사상이 매우 강한 곳이었습니다. 가톨릭 사제가 윤회를 믿는다 그러면, 그것은 한국 사람으로서 불교적인 뿌리가 있어서 윤회를 믿는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똑같다고는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제가 보니까, 윤회개념이 삶의 바탕의 일부예요. 1600년 전부터 불교와 함께 살아오셨잖아요. 그래서 윤회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다들 가지고 계세요. 그래서 사제가 불자로서 그냥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시겠지요. 그런데 그게 불자의 수행체계에서 의미하는 윤회로서 받아들이지는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윤회를 하는 이유는 아집(아상)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잖아요. 고통의 원인을 깨닫지 못해서 윤회하는 거잖아요. 번뇌 망상을 벗어나야 됩니다.

아뢰야식이 완전히 씻겨져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굵은 번뇌 말고도 미세번뇌까지도 다 사라져 버려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지복직관을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자기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면(다시 말해 아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연옥에 빠진다고 해요.

살아있던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마치기 위해서죠.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연옥과 불교의 윤회는 겉으로는 너무나 달라요. 그러나 목적은 여러 가지로 유사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재대로 이해했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성태용 선우
: 서명원 신부님은 예수회의 신부님이시니까 역시 성직자입니다. 천주교에서도 성직자와 재가자간의 역할과 위상, 그런 것이 조금 문제가 될 것이고, 아시다시피 여기는 재가불자들이 모인 단체인데, 불교 안에서도 성직자(출자가)와 재가자의 위상과 역할, 그런 것이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성직자이시기 때문에 그만큼 수행에 몰두할 수도 있었고, 학문에 몰두할 수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재가자라면 그렇게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거든요? 천주교에서 느끼신 성직자와 일반신도, 불교 안에서의 성직자와 일반신도가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될 지, 어떤 게 바람직한지 얘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서명원 신부
: 성태 교수님,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저는 떠오르는 대로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최고의 수행은 세속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완벽한, 완전한 수행은 세속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어려운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 들어가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쉬는 날이 없어요. 지극히 어렵습니다. 교육자로서, 양심이 살아있는 교육자로서 사는 것은 엄청나게 까다롭습니다. 이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해요. 입산해서 어떤 암자에서 사는 것은 (죄송합니다만) 안락해요. 저는 비판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때가 되면 입산해야 되겠다, 결재해야 되겠다, 하루에 스물 몇 시간씩 앉아서 명상만 해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그래야만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부로서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출가해서 사는 것과 뭐가 뒤떨어지겠습니까? 뒤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전 더 힘들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출가해야만 된다는 사고방식은 틀려요.

저는 수도자로서 독신생활을 택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역시 학문에 더 많이 집중할 수 있었고, 그리고 수행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지만 그만큼 착각 속에 빠져서 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해주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유혹입니다. 일반인들이 겪어야 하는 힘든 현실을 모르면서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도회에서 상당한 혜택을 받았지만,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남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더욱 더 착각 속에 빠져 지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자는 남을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얻은 것만큼 천배만큼 돌려 드려야 됩니다.

저는 세속에서 살고요, 입산을 할려고 하는 유혹을 더 이상 겪지는 않습니다. 입산은 여기 이 곳입니다. 저는 그것을 굳건히 믿습니다. 한참동안 저는 저쪽에 가서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겠지, 더 깊은 관상을 해야만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겠지 했습니다. 진짜 관상은 일상생활의 관상, 활동 속의 관상입니다.

저는 가장 싫어하는 것이 업무예요. 대학교에서 제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알아듣기 상당히 어려운 ‘엽…, 협…, 쪼… 공문’, 그런 것이 많아요. 그걸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나의 현실이다, 다른 현실을 꿈꾸지 말고 너는 지금 여기 있어야한다, 너는 지금 그걸 배워야 한다, 어려운 한국말이라도, 너는 적응해낼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요. 이게 수행입니다. 그리고 저는 인정하면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완 선우
: 종교 간의 대화를 매우 강조하신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한국의 양대 종교, 불교와 그리스도교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어느 측에 문제가 더 있는지, 어떻게 해야 종교 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될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서명원 신부
: 지난 수요일에 아랍계통 나라에서 몇몇 교수들이 와서, 서강대 종교학과와 관계를 맺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시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부시대통령이 중ㆍ고등학교 때 아랍어도 배우고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배웠었더라면,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을 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의 문제를 적극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행동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식’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모든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 때문에 미국의 멸망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란이나 아프카니스탄을 친다면 미국은 더욱 더 침체의 늪에 빠질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리고 미국 민족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역사상 특별한 역할을 해야 하는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로를 모르니까, 서로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전쟁까지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왜 이웃종교와의 대화를 해야되느냐 하면, 선입견을 벗어내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선입견을 벗어내서 그 종교의 보배들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최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힘이 소모되는 것인지 아세요? 남의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얼마나 피곤해지는지 아세요? 나의 종교는 세계종교 중의 하나구나, 그걸 의식하기 시작한다면 한숨을 돌리기 시작할 수 있어요. ‘늘 최고다’ 라고 믿으면 그걸 다 합리화해야 되요. 다른 종교를 만남으로써 그것도 진리구나,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사는 게 쉬워지기 시작합니다.

한국은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그리스도인과 불자들이 활발하게 만날 수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만큼 서로를 적대시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문제는 불교에서 오는 것보다 기독교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신앙, 그리고 돈 문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매력적이에요. 한국 사람들이 불교를 좋아해요. 몸에 베어있습니다. 지금 제가 건방지게 말씀드리게 되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우리 신자들이 저쪽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이 돼서 차단. 격리시켜 버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윤세원 선우
: 한국에 와서 불교를 공부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으로 변화되었다고 하는데, 그 변화된 입장에 혹시 과거에 가지고 있던 신관(神觀)에 대한 변화가 수반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체로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종교라는 부분을 굉장히 강조를 하셨거든요? 그렇다면 신관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런 부분이 있으셨으면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서명원 신부
: 저는 상대주의로 넘어갔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고 있는 신앙의 고백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게 절대적일 수밖에 없어요.

저한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이에요. 절대적이지만 저는 그 절대성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요. 제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요. 물 위를 걸어가되 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걸 알게 되면 더 이상 물 위를 걸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우리는선우의 선언문을 시작할 때 함께 읽었잖아요? 여러분의 선언문이 여러분에게 절대적이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여러분에게 불교를 신봉하는 것이 절대적이듯이, 저는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불교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저의 신앙이 왜 절대적인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나의 신앙 대상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여러분 신앙 대상의 절대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절대성을 인정해주는 것은 대화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상대주의에 빠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절대적인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상대주의에 빠지기 시작해요.

저의 신앙은 저에게는 절대적이지만, 인류종교사에서는 상대적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나의 신앙에 돌이켜볼 때는 절대적이자 상대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 대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점검, 보임의 기간이 있으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똑같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여겨져 왔지만, 믿음의 종교일 뿐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신(神이 아니라 信)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엄청나게 강해요. 믿음의 요소가 매우 강함을 인정하셔야 되요.

권연희 선우
: 신부님께서 선 수행을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 수행을 하시는 목적이 있으실 것 같아요.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해탈을 위해서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신부님께서 믿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위해서 하시는지….

서명원 신부
: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선 수행을 한다고 하면 좀 이상하겠죠? 시작할 때, 제가 왜 한국에 왔는지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끌리는 게 있어서 그렇거든요. 하나의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한국에 왔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나라에 가야 된다는 확신만 있었습니다. 선 수행에 목적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야만 된다는 확신, 그 수준입니다. 간화선 수행을 하다 보니까 하나님 개념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궁금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개념인 것은 아닌지. 그래서 목적 그 자체에 대해서 말씀드리리가 좀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박광서 선우
: 강남대학교 이찬수 교수님이 신학자로 불상 앞에서 절한 것이 EBS에 나와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 한국사회에서 골수기독교인들과 보다 다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인데, 법적으로도 결론이 안날 것 같고, 학교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은 독특한 위치에 계시니까, 혹시나 이런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도움을 주실 의향은 있으신지요?

서명원 신부
: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해는 잘 가지 않습니다만, 한 가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이 아니라 종교학과에서 가르치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훨씬 자유롭게 살 수도 있고 활동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서양에서도 한국에서도. 저의 힘이 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명확하게 대답해드릴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성태용 선우
: 조금 알아듣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오히려 우리보다 더 재미있게 한국어를 구사해주시고, 그 열린 자세를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다시 한번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일동박수) 세계의 많은 인구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불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사실은 반성해야 됩니다.

기독교의 좀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불교가 늘 방어적인 입장에만 있고, 불자니까 성경의 구절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독교에 감동 받는다고 해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자들도 기독교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는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불자들의 모임에 와주셔서 소탈하게 말씀해주신 서명원 신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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