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여성과 폭력 그리고 불교

1. 들어가는 말: 여성 몸에 대한 억압 현상

국제미용성형수술협회(ISAPS)에 따르면 2016년 세계 미용성형 수술 집도 건수는 2,390만 건으로 전년 대비 10.1% 증가했다. 외과적 수술과 비외과적 수술로 나누면 각각 44.2%와 55.8%로 집계됐다. 분류별로 살펴보면 비외과적 성형수술인 보툴리눔 톡신이나 히알루론산 필러 등 주사를 통한 침습 방식의 미용성형이 35.6%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수술 부위별로는 얼굴(18.3%), 몸(13.3%), 가슴(12.9%) 순으로 수술 비중이 높았다. 이 협회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미용성형 시술 건수에서는 미국, 브라질에 이어 3위이다(2015년 기준). 한편 인구 대비 성형수술 횟수 비교에서는 인구 1천 명당 성형수술 횟수가 13건, 77명 중 1명꼴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2011년 기준). 특히 19~49세 도시 거주 한국 여성은 5명 중 1명꼴로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집계되었고 한국 여성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수술은 쌍꺼풀 수술로 드러났다.

이러한 성형수술이나 시술의 만연은 개인들의 자유 행동으로만 보기 어려운 사회문제로서의 특성이 있다. 임인숙은 2014년 고려대 한국 사회연구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하여 수행한 ‘제3차 한국인의 갈등의식조사’ 자료 연구를 통해 노화되는 몸으로 인한 불안감, 외모 차별 경험과 외모 차별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불안감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이 연구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들 중 62.9%는 ‘세상살이에 외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에 대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남녀 차이는 없다. 전체 응답자 중 26%가 외모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는데 이 또한 남녀 간의 통계적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외모 차별은 구체적으로 외모 때문에 놀림거리가 된 경험이 21.8%로 가장 많았고, 이성교제 시 손해 경험 17.4%, 구직 시 불이익 경험 12.8%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성들이 노화로 인한 외모 변화 때문에 불안과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는 기존 연구들이 있으나 이 연구는 성별에 따라 외모 불안감과 노화 불안감의 정도가 유의미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에 의하면 성별 변수보다는 외모 차별 경험 변수가 외모 불안감과 노화 불안감에 더 크고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임인숙은 이에 대해 이제 한국 사회에서 남성도 외모 불안감에서 더 이상 자유롭지 않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향후 한국 사회에서 외모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2014년 알바몬이 대학생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남학생의 66.2%, 여학생의 59.5%가 ‘자신의 외모 때문에 손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앞에 언급한, 임인숙의 연구에서 21.8%로 제시된 외모로 인한 차별 경험은 다양한 연령대의 조사 대상자들의 경험을 평균 낸 것이고, 알바몬의 조사는 대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수치다. 이 조사에서 외모 차별 경험은 약 3배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 연구에서 평균적인 외모 만족도는 3.45점(5점 만점 척도)으로 ‘보통’과 ‘대체로 만족’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외모에 만족(‘매우 만족’과 ‘대체로 만족’ 포함)하는 비율은 남성 48.5%, 여성 36.1%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만족 비율은 얼핏 보면 외모 불만족 문화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자기 외모가 보통이라고 생각하거나 만족해하는 심적 상태가 각 개인이 외모를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보이는 반응인지, 아니면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모종의 노력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나타나지 않는다. 즉 그 만족이 쌍꺼풀 수술을 하지 않고도 유지되고 있는 만족인지 쌍꺼풀 수술을 해서 얻은 만족인지 알 수 없다.

2016년 다이어트 관련 동영상, 의료 시술, 의류, 운동기구, 식품 등 다양한 다이어트 분야의 시장은 총 7조6천억 원이다. 이 중 다이어트 식품 및 기타 용품 시장 규모는 3조2천억 원으로 전체 다이어트 시장에서 약 42%를 차지하는 등 다이어트 식품 관련 산업이 다이어트 시장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최근에는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전문 트레이너가 아닌 일반인들이 다이어트 방법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고 피트니스, 만보계, 칼로리 정보, 다이어트 일기 등 다이어트 관련 모바일 앱이 다양화되는 추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위 임인숙의 연구에서 자기 외모에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들은 외모에 평정심을 지녀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각고의 노력을 수반하며 만족해하는 비율이 높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임인숙의 연구에서 측정된 외모 불안감 평균 2.10(5점 만점, 남녀 간의 유의미한 차이는 없음)은 각고의 외모 가꾸기 노력을 통해 자기 외모에 만족하게 된 사람들은 제외되고 나온 값이다. 이 사람들의 ‘만족할 만한 외모’를 위한 각고의 노력은 외모 불안감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인구를 포함하면 실제의 외모 불안감은 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인구 대비 성형수술 건수가 세계 1위라는 사실은 이러한 추론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외모에 대한 불안은 체형에 대한 불만족, 우울, 대인기피, 식이장애 등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 건강을 손상시킴을 국내외 연구들은 보여준다. 그 심각성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성형 부작용과 같은 문제도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몸에 대한 억압을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개인이 심신이 건강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공동 과제이기도 함을 말해준다.

그런데 앞에서 외모 차별의 경험, 외모 불안감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남녀 차이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여성 몸에 대한 억압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 불교윤리적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는 다이어트와 성형과 같은 몸에 대한 억압은 그 실행을 볼 때 보다 여성적 현상임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성이 하는 성형수술은 코와 쌍꺼풀 수술 정도인데, 보톡스 주사, 하이알유로닉산 주사, 제모, 자가 지방 주사, IPL 레이저 시술, 지방 성형수술, 유방확대 수술, 코성형 수술, 쌍꺼풀 수술, 복부 성형수술과 같은 성형 시술과 수술의 실행은 거의 모두 여성의 성형 실천이다. 앞 페이지의 도표는 여성은 미용 서비스나, 성형과 같은 외모 가꾸기에, 남성은 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여성 몸의 억압성에 대한 이론적 검토

억압이란 타인이나 사회적 제도나 권력이 개인의 행동이나 심신의 자유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여성의 ‘보기 좋은, 혹은 섹시한 외모 만들기’는 외관상으로는 여성의 자발적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사례는 외관상으로 자발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내막은 사실상 여성이 밖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신과 자기 몸을 스스로 도구화, 대상화하고 있는 억압적 현상임을 말해준다.

연세대 3학년에 재학 중인 A 씨는 이른바 ‘걸그룹 주사’라고 불리는 다리 지방분해 주사를 맞았다. 정상 몸무게였지만 마른 다리를 원하는 그는 걸그룹 주사 광고를 보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광고를 보고는 ‘무조건 나도 맞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말라질 수 있다는데 어떻게 안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약물 후유증으로 구토 증세와 함께 쓰러지는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게이오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B 씨는 의학적으로 정상 몸무게였지만 한 달 동안 하루에 토마토 하나만 먹으면서 10kg을 감량했다.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한 이유에 대해 그는 자기만족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날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어떻게 저 옷을 입지?’라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위축됐다. 그는 “외국에서는 전혀 그런 시선이 없다”며 “한국에서는 유난히 더 외모 기준이 높을 뿐 아니라 남에게도 이를 강요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여성 · 여성 몸의 도구화, 대상화를 직간접적으로 설명하는 이론들은 부르디외의 《취향의 사회학》이나 쉴링의 《몸의 사회학》과 같은 사회구조적 분석에서 진화론적 분석, 심리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 글에서는 수많은 이론을 모두 소개하며 풍부하게 여성 몸의 도구화에 대한 전방위적 분석을 시도할 수 없어서, 필자가 연구한 범위 내에서 여성 · 여성 몸의 도구화에 대해 이론적인 검토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1) 이원론적 세계관과 여성 몸의 도구화

사회와 개인에 편재하는 남성중심적, 성차별적 요소는 정치 · 경제 제도는 물론 가족제도, 문화, 이데올로기, 개인의 정체감 등 사회의 전 차원과 개인에 편재한다. 여성주의(Feminism)는 이같이 사회와 개인에 편재하는 남성중심적, 성차별적 요소는 남성중심성 · 성차별성, 또는 남성지배/여성종속이라는 일관된 효과를 발휘하도록 기능하는 가부장제라는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여성주의는 남성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지향점을 공유하지만, 가부장제의 원인과 작동 방식 등을 설명하는 이론 틀은 서로 다른 다양한 여성주의들 이론들로 구성된다. 여러 여성주의 이론들 중에서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는 남성지배/여성종속의 뿌리는 자연지배의 논리이기도 한 인간(=남성)중심적인 위계적 이원론(hierarchical dualism)의 세계관이라고 본다. 이원론은 음양론과 같이 세계를 서로 반대되는 근본 원리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주자학이 이데올로기화하기 이전 원시 유교나 노장의 이원론은 음과 양을 서로 배제하고 의존하지 않는 본질적인 대립적 실체로 보지 않고 시간과 조건의 변화 속에서 음과 양은 상호 의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양은 음이 되고 음은 양이 되며 하나의 물(物)은 음과 양을 융화하고 있다고 보는 유기체적 이원론 혹은 전일적 이원론이다. 생태여성주의가 가부장제의 뿌리라고 보는 위계적 이원론은 이와는 다른 논리 구조를 갖는다.

플럼우드(Plumwood)는 위계적 이원론의 논리 구조에서는 평등과 상호성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 논리 구조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으로 설명한다. 첫째, 타자를 배경화(back-rounding)하고 부정(denial)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타자로부터 받는 혜택, 타자에 대한 의존을 부정한다. 타자는 부정되고 신비화된다.

둘째로 타자에 대한 근본적 부정(radical exclusion) 또는 초분리(hyperseparation)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주체와 타자와의 연속성을 부정하거나 최대한으로 최소화하는 논리이다. 예를 들면 성(聖)과 속(俗), 귀족과 노예, 남과 여, 본국인과 식민지인 간에는 어떤 연속성도 배제된다.

셋째로 이원론은 흡수(incorporation)의 특징을 나타낸다. 타자를 주체와의 관계에서 결여와 부정성으로 정의함으로써 타자를 주체에 흡수시킨다.

넷째로, 도구주의(instrumentalism)와 객체화(objectification)의 특징이다. 위의 세 가지 논리적 특징들의 결과 타자, 열등한 쪽은 자신의 목적, 필요를 갖지 않고 단순히 유용한 자원으로 이해되고, 정체감은 도구적으로 형성되며 ‘현모양처’ ‘좋은 식민지인’ ‘훌륭한 노동자’와 같은 도덕적 이원론이 수반된다. 다섯째로 동질화(homogenisation)와 고정관념화(streotyping)의 특징을 지닌다. 위 논리들의 결과, 열등화된 집단 내부의 차이, 다양성, 복수성은 무시되고 동질화된다.

이러한 이원론의 논리를 외모 문화에 대입해보자. 현재의 외모 중심 문화에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는 여성의 주체성은 부정된다. 여성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상실한다. 매력적 여성의 대명사가 된 ‘섹시한 여성’이란 말은 ‘남성이 보기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정립되기 전에 여아들은 남성 · 자본 중심 문화가 규정하는 여성미에 길들어 간다.

예를 들면 여아들은 한국인의 평균 여성 체형과 얼굴형에서는 벗어난 평균 키보다는 좀 더 크거나 8등신이고 체중도 평균 체중보다는 훨씬 덜 나가는 성형해서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힘든 아이돌 가수 등과 같은 성형미인들을 TV를 통해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외모적 특징을 아름다움으로 체득하면서 자라게 된다. 미를 스스로 정의할 수 없도록 자신의 주체적 얼을 부정당한 여아/여성과 여성의 미를 규정하는 남성이라는 이분법은 자연스럽게 이원론의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간다.

‘용감한 남성’ ‘능력 있는 남성’이란 말은 자연스럽지만 ‘예쁜 남성’ ‘아름다운 남성’이란 말은 우리에게 형용 모순으로 들린다. 이러한 문화에서 남성성은 ‘예쁨’이나 ‘아름다움’의 특징을 지닐 수 없다. ‘예쁨’ ‘아름다움’은 주체가 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 되는 여성의 속성이며, 남성은 이 타자 또는 노예의 속성을 공유해서는 안 되는 주체 또는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원론의 세 번째 특징인 흡수로 연결된다. 스스로 미를 정의할 수 없으나 ‘예뻐야 하는 여성’은 예쁘기 위해 ‘예쁨’을 규정해주는 ‘주체=남성’이 말하는 ‘예쁨’을 ‘예쁨’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곧 남성의 ‘예쁨’의 규정에 흡수된 여성의 상태를 말해준다.

남성이 정의하는 미의 세계에 흡수된 여성과 남성이 미에서 도덕적 이원론이라는 이원론의 네 번째 특성을 드러내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마사지를 정기적으로 받고 보톡스를 정기적으로 맞는 여성은 자기 관리를 잘하는 ‘좋은 여성’이다. 이러한 외모 관리를 하지 않는 여성은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 게으른 여성이고 노골적으로 ‘나쁜 여성’으로 규정되지는 않더라도 ‘좋은 여성’이 아닌 건 분명하다. ‘동질화’와 ‘고정관념화’라는 이원론의 다섯 번째 특징도 자율적으로 미를 규정할 수 없음과 동시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어른들은 TV의 아이돌들을 보며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바비 인형을 표준으로 한 듯한 성형화된 얼굴들을 어른들은 구분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성형이 난무하는 시대에 어떤 틀에도 가둘 수 없는 개체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오뚝한 코’ ‘쌍꺼풀진 눈’ ‘가슴 큰 여자’ 등과 같은 천편일률적인, 즉 미에 대한 동질적 고정관념만이 남게 된다.

2) 대상화된 미적 실천을 자발적으로 행하게 하는 ‘성 장치’

앞에서 살펴본 위계적 이원론의 다섯 가지 특징은 위계적 이원론이 전개해가는 5가지 단계로도 이해해볼 수 있는데, 이 중 세 번째 흡수의 단계에 이르면 이미 타자의 종속성은 자발성의 외양을 띠고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억압은 강제로 자유에 제약을 가하는 것인데, 주체의 언어에 흡수당한 타자는 자발적으로 주체의 보이지 않은 명령을 자신의 자발적 욕구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한다.

푸코는 근현대 사회에서 과거 혼인 장치에서 우세하게 작동했던 억압적인 성(sexuality) 관행이 자발적으로 성적 욕망을 산출하는 관행으로 변하였다고 보고 그 기제를 ‘성 장치’라고 부른다. 성 장치는 ‘결혼, 친족 관계의 고정과 전개, 성씨 및 재산상속에 관련된 제도’인 혼인 장치가 더 이상 권력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서 새롭게 고안된다. 즉 열녀, 정조와 같은 혼인 장치의 기제만으로는 더 이상 남성의 권력이 보장받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혼인 장치에서는 성적 욕망의 통제가 문제였다면, 성 장치에서는 성적 욕망 자체의 산출이 문제가 된다. 성적 욕망은 더 이상 “파악하기 힘든 은밀한 현실이 아니라, 육체에 대한 자극 · 쾌락의 증대, 담론에의 선동, 지식의 형성 그리고 통제 및 저항의 강화가 앎과 권력의 몇몇 중요한 전략에 따라 서로 연관되는 거창한 표면 조직망이다.”

서구에서는 성 장치는, 우리는 조선 말 열녀제도 강화로 혼인 장치가 한창 정착하고 있을 즈음인 18세기 이후 네 가지 전략을 갖고 발전해 왔다. 첫째, 여성 육체의 히스테리화, 둘째, 어린이의 성에 대한 교육화-위험에 처해 있는 성의 싹을 부모, 가족, 교사, 의사, 심리학자가 떠맡기, 셋째, 생식 행동의 정치적 · 의학적 측면에서의 사회관리화, 넷째, 도착적 쾌락의 정신 의학으로의 편입이 그 네 가지 전략이었다.

서구와는 달리 정신과 의사를 찾기보다는 점쟁이를 찾고 동네 마실, 계, 동창회와 같은 공동체 수다라는 집단치료요법을 갖고 있는 우리 문화에서, ‘도착적 쾌락의 정신 의학으로의 편입’은 비중 있게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나타난 근대적인 성 장치는 생식 행동의 정치적, 의학적 측면에서 사회관리화였다. 1960년대 이후 국가가 가장 중점적으로 실시한 여성 정책은 가족계획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와 전후로 여성 육체의 히스테리화라는 성 장치의 전략 또한 모습을 드러낸다. 푸코는 “여성의 육체는 ……온통 성적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몸뚱어리로 분석되었고 자격을 얻거나 박탈당했다”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1950년대 말에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자유 부인〉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1960년대에는 경찰이 길 가는 여성을 붙들어 자로 치마 길이가 무릎 위 몇 센티미터쯤 올라갔는지 재는 미니스커트 소동이 있었다. 정경자의 분석에 따르면, 1960~70년대에 국가는 광고심의규정을 통해 국가의 가족계획 정책 의지를 광고에 강하게 반영했다. 1960~70년대 피임 광고는 피임과 가정의 행복, 소자녀관을 연상시키는 담론이다. 여성잡지의 성 관련 기사 또한 1970년대에는 ‘사랑받는 정숙한 아내’가 중심이 되었다. 혼인 장치의 ‘정숙’의 담론과 성적 욕망을 암시하는 ‘사랑’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는 1970년대까지 성담론은 부부관계, 가족 중심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성 장치가 혼인 장치의 우세하에, 그에 의존하면서 태동한 모습을 보여준다.

1980년대, 1990년대는 부부간의 아름다운 성을 주제로 하면서 섹스 어필을 위한 다양한 전략을 소개하는 여성잡지의 성 관련 기사, 전라(全裸)의 섹시한 여성을 앞세운 포르노 영화 산업과 뒤이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컴퓨터의 포르노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이같이 섹스 어필한 몸의 이상화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섹스 어필한 몸을 갖기 위한 노력을 하게 한다. 억압은 더 이상 강제가 아니라 자발성의 외피를 입게 된 것이다. 자발적인 노력의 단적인 예는 다이어트이다. 1980년대 초에 등장한 다이어트 시장은 1990년대 다이어트 식품만 약 2천억 시장이었고 해마다 50%의 성장을 보여주었다. 이 다이어트 식품 시장이 2016년에는 3조 2천억으로 성장해 20년 동안 16배 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가부장제의 성 통제는 끊임없이 투자할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자본주의의 투자 욕구와 맞아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여성학에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라 칭한다.

최근에는 다이어트는 단순히 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2007년 여성 헌혈 지원자 83만 402명 가운데 부적격자는 34만 7,589명(42%)에 이르렀다. 이들이 부적격 판정을 받은 가장 큰 원인은 저비중(69.5%)으로, 무리한 다이어트 등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는 남성 지원자 178만 6,313명 가운데 부적격자가 24만 442명(13%)에 그쳤고, 부적격 사유 중 영양소가 부족한 저비중 비율이 6.3%에 머물렀던 것과는 대조된다. 다이어트로 인한 사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위 밴드 수술로 살을 뺀 다이어트 성공 사례로 TV에 소개된 여성은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성형수술의 경우도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노화에 대한 방어로 잘못된 성형, 성형 중독으로 더 안 좋은 얼굴이 되어 시청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탤런트의 사례도 있다. 유방 확대를 위해 가슴에 보형물을 넣는 성형수술을 했다가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터지거나 딱딱해지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최근 인기 성형 시술로 부상하고 있는 필러 시술은 부작용으로 오히려 팔자 주름을 생기게 하거나 피부가 썩거나 실명한 사례조차 나오고 있다.

이같이 외모 만들기 실천은 사망에까지 이를 정도로 치명적이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는 다이어트와 성형이 여성이 성공하는 혹은 잘 사는 삶을 위해 필수적임을 끊임없이 암시하는 성 장치의 수많은 기제의 홍수 속에서 묻혀버리고 만다. 다만 분명한 것은 외모 만들기의 외관적 자발성은 이러한 성 장치 작동기제의 유도 효과일 뿐, 근원적 의미의 자발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3. 불교윤리적 대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 장치의 기제들이 막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피학적인 외모 만들기 문화에 대한 불교윤리적 대안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병고에 시달리는 노인에게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 된다고 배워야 한다”라고 법문했다. 아래의 법문에서는 안으로 여성의 치장, 밖으로 남성의 치장에 정신 활동을 기울이는 여성과 안으로 남성의 치장, 밖으로 여성의 치장에 정신 활동을 기울이는 남성은 둘 다 여성성, 남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여인이 안으로 여인의 본성 · 여인의 행동 · 여인의 외관 · 여인의 교만 · 여인의 욕망 · 여인의 소리 · 여인의 치장에 정신 활동을 기울인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녀가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남자의 본성 · 남자의 치장에 정신 활동을 기울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인은 여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남자가 안으로 남자의 본성 · 남자의 행동 · 남자의 외관 · 남자의 교만 · 남자의 욕망 · 남자의 소리 · 남자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그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가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여인의 본성 · 여인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남자는 남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러한 법문은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에서는 상대 성의 이목을 받기 위한 치장이든 스스로의 욕망에 의한 치장이든, 치장에 몰두하는 한 여성이든, 남성이든 수행하는 삶에서는 벗어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생의 근기 차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대종사는 근기 차이를 부처님 설법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느 날 불경(佛經)을 보니 이러한 이야기가 있더라.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저 해가 동녘 하늘에 오름에 제일 높은 수미산(須彌山) 상봉에 먼저 비치고, 그다음에 고원(高原)에 비치고, 그러한 후에야 일체 대지 평야에까지 비치나니, 태양이 차별심이 있어서 높은 산은 먼저 비치고 평야는 나중에 비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은 다만 무심히 비치건마는 땅의 고하를 따라 그와 같이 선후의 차별이 있게 되나니라. 여래의 설법도 그와 같아서 무량한 지혜의 광명은 차별 없이 나투건마는 각자의 근기에 따라서 그 법을 먼저 알기도 하고 뒤에 알기도 하나니 한 자리에서 같은 법문을 들을지라도 보살(菩薩)들이 먼저 알아듣고, 그다음에 연각(緣覺), 성문(聲聞), 결정선근자(決定善根者)가 알아듣고, 그다음에야 무연(無緣) 중생까지라도 점진적으로 그 혜광을 받게 되나니라. 그런데, 미한 중생들이 부처의 혜광을 받아 살면서도 불법을 비방하는 것은 마치 소경이 해의 혜택을 입어 살면서도 해를 보지 못하므로 해의 혜택이 없다 하는 것과 같나니라. 그런즉, 너는 너의 할 일이나 잘할 것이요, 결코 그러한 어리석은 중생들을 미워하지 말며, 또는 낙심하거나 퇴굴심을 내지도 말라. 그 어찌 인지의 차등이 없으리요” 하셨다 하였더라.
— 《원불교 교서》 대종경 ‘전망품(展望品)’ 15장

중생이 불법을 비방해도 미워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중생이 하근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모 만들기, 치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외모를 위한 일체의 노력은 수행에 근본적인 방해물일 뿐이라는 근본적인 불교윤리를 주장하기만 하는 것은, 성 장치가 막강하게 작동하는 현대사회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불교적 방식이 될 수 없다. 중생의 근기가 다르다는 것 외에도 현실 사태에 대한 불교적 접근의 특징은 어느 한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외모가 취업 면접 점수에서 실제로 의미 있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고 취업은 자기 삶을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필수 조건인데, 이런 풍토 속에서 좀 자신 없는 부분을 성형했다고 비방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현실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뚫고 나가야 하는 처지의 젊은이들이 선택하는 성형을 어리석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몸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주거나 죽음을 결과하는 것까지 다 관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도를 지키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강’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노쇠해지는 몸에도 불구하고 불자는 마음은 병들지 않는 상록수 같은 마음을 유지해야 하겠지만, 인간이 몸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죽는 순간까지 가능한 한 병고에 시달리지 않거나 덜 시달리며 늙어가기 위해 자기를 과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번뇌가 아니라 몸 가진 존재로서 마땅한 의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을 위한 실천도 과하면 집착이고 업이 된다.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 시술이나 수술을 할 때 건강상, 신체상 부작용이나 후유증의 가능성은 없는가를 면밀하게 헤아려보는 행위성만 살아 있어도, 이것이 몸 받아 태어난 중생으로서 의무라는 자각만 있어도 극단적인 외모 만들기 행위로 치닫는 것은 피할 수 있다. 또한 건강보다는 돈 버는 것이 목적으로 굴러가는 뷰티 산업과 성 장치의 온갖 현란하거나 은밀한 유혹에도 끌리지 않고 각자의 근기 수준에서 중심성을 가진다면 건강을 담보하면서 외모 만들기 행위도 취사선택할 수 있다. 이같이 하근기, 중근기 중생들까지도 포용하는 외모 담론과 실천을 불교계가 수행할 의지만 있다면 의외로 불교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위생과 식생활 수준의 발달로 이제 인류는 100세 시대에 도래했다. UN은 2015년 인류의 체질과 평균수명 등을 고려해 생애주기를 5단계로 나눈 새로운 연령 기준을 제안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이다. 실제로 70세까지는 공식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정년퇴직 나이도 늦추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같이 70대 이후까지의 사회활동이 자유로워지는 추세이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은 보통 50대에 나기 시작하고 빠르면 40대 늦어도 60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기 시작한다. 곧 60을 바라보는 필자에게도 속에만 나서 보이지 않던 흰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사회활동을 계속해야 하니, 이제는 머리 염색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흰 머리카락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두 가지로 갈렸다. ‘이제 머리카락을 염색하냐 마냐를 고민할 만큼, 나도 늙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참에, 요가 워크숍을 가게 되었다.

요가 워크숍에는 아프거나 건강 챙기는 걸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이 워크숍에서는 연령대나 흰 머리카락이 났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헤나(Henna)’에 천연오일, 달걀노른자, 요거트를 섞어 만든 천연염색제로 머리 염색을 하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었다. 헤나는 머리 염색이나 일시적 문신에 쓰는 염료이다. 인도에서 자생하는 로소니아 알바(Lawsonia alba)라는 식물의 잎과 잎꼭지에서 추출한 염료는 치매 방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워크숍에서는 가정에서도 헤나 염색을 주기적으로 해줄 것을 건강관리 요법으로 제안하였다. 겉에서 보이기 시작했던 내 흰 머리카락을 헤나 염색을 하고 나니 갈색이 되었고, 모두 보기 좋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치매는 지식인들에게서 더 높은 발병 비율을 보인다고 한다. 흰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라 치매 방지라는 말이 내게는 더 솔깃하게 들어왔고 흰 머리카락 염색은 덤으로 얻은 부수입이었다. 108배 수행정진에 참여하는 많은 여성 불자들도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필경은 눈과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화학 염색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108배 수행정진을 하면서 천연염색을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절이나 포교원이 불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보시가 아닐까?

성형수술을 부추긴다는 비난 속에서 폐지된 TV 프로그램 〈렛미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 프로그램은 외관상으로 봐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장해를 받을 것이 분명해 보일 정도로 심한 얼굴 기형이나 체형 기형을 지녔으나, 가난해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선택해서 성형외과 의사들 여러 명이 진단하고 직접 수술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기형 교정이라는 좋은 효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전체 방향은 ‘성형을 하면 아무리 미운 여성도 미스코리아 같은 미인이 된다’는 암시를 계속 줌으로써 여성계로부터 성형을 부추기는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폐지되고 말았다. 기형 수술이 누가 봐도 부인하기 힘든, 수술 이전의 여성과는 백팔십도 다른 ‘성형미인’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문제가 있었다. 수술받는 여성의 수술 전 얼굴형이나 체형을 자연스럽게 살리면서 기형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으로만 지속될 수 있었다면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만약 이런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불교 여성계 조직이나 담론 형성 능력이 있어, 프로그램의 폐지보다는 프로그램의 방향 수정을 유도해낼 수 있었다면, 이런 것이 외모 만들기 문화에 대한 불교계의 중도적 대응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헤르미온느 역할로 인기를 끈 엠마 왓슨(Emma Watson)은 지난 2014년 최연소 유엔 여성 친선대사로 임명됐으며, 성평등을 지지하는 여권 신장 캠페인인 ‘히포쉬(HeForShe)’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올해 1월 21일에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성차별적 발언과 정책에 반대해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시위인 ‘위민스 마치(여성들의 행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상체를 드러낸 《배니티 페어》 4월호 표지 사진이 평소의 페미니즘 강조 행보와 배치된다는 비판을 받자 그녀는 “페미니즘은 여성을 때리는 무기가 아니다”라고 항변하였다.

여남 불자들은 엠마 왓슨의 상체를 드러낸 사진을 어떻게 볼까? 필자는 이 사진을 보며 이 사진이 우리의 성 고정관념을 스스로 테스트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재라고 생각했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보디빌더 사진이나 영상을 보며 어떤 이들은 ‘멋있다’ ‘훌륭한 몸이다’라거나 ‘나는 저런 근육이 아름다운지 모르겠어’라고 각자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보디빌더 남녀가 자기 몸을 돈을 벌기 위해 대상화하거나 수단화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엠마 왓슨의 벗은 상체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보디빌더와 같이 다양할 수 있다. ‘역시 엠마 왓슨이네, 자기 몸에 대한 저 당당함, 얼마나 멋져’라고 느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혹 당신은 ‘결국 엠마 왓슨도 돈 앞에서는 벗는구나’라거나 ‘오, 엠마 왓슨이 왜 저럴까’라는 탄식을 하지는 않을까? 후자의 경우는 스스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문화에 길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몇 사례를 중도로써 이해하면 불교계가 하려고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뷰티 산업 체제, 성 장치의 실행들과는 다른,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을 닮아가는 듯한 보기 좋은 건강한 외모에 청정심이 깃들인 심신 문화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불교도인 성형외과 의사들을 위시한 양 · 한방 의사들, 사회복지사, 상담사, 교사 등이 함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가 외모지상주의에 길들어가는 지금이야말로 불교계가 여성의 몸, 인간의 몸을 중도적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



김정희 
(사)가배울 대표. 여성학 박사로 토종 농사문화를 살리기 위한 조사연구, 문화답사, 토종식품 회원 공동구매 일 등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생명여성정치의 현재와 전망》 《풀뿌리 여성정치와 초록 리더십의 가능성》 《불교, 여성, 살림》 등과 《불교와 섹슈얼리티》 등 다수의 공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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