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여성과 폭력 그리고 불교

-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를 중심으로

 

1. 들어가기

〈귀향(鬼鄕, Spirit’s Homecoming)〉은 일제 강점기하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낯선 나라에서 죽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넋을 기리며, 그 넋이라도 고향으로 불러온다는 제목의 영화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을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을 본 후 영화로 만들려고 했던 제작자는, 한참 동안 투자자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국민의 성금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필자 역시 성금을 냈기 때문에 일찍이 영화 초대권을 받았지만, 선뜻 영화를 보러 갈 수 없었다. 우리 누이들이 겪었을 그 슬픈 이야기를 홀로 볼 자신이 없어서 지인들과 함께 본 후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가 올해로 25주년을 맞아 세계 최장기간 집회의 기록을 세우고 있지만,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핫이슈이다. ‘위안부’인가 ‘성노예’인가, 그 용어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고, 한일 정부 간 비밀 합의 후 정부가 할머니들에게 1억 원 지원금으로 마무리하려다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는 일본 정부도 문제이지만, 무능한 한국 정부가 언제 소녀상을 철거할지 몰라 대학생들이 소녀상 옆에 천막을 치고 밤을 새우며 지키고 있다. 해외는 어떠한가? 미국 등에 건립된 소녀상을 철거해달라고 일본 정부가 소송까지 제기하고 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의 전쟁범죄 인정과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세계 여성들의 연대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에 극도의 불만을 표하며, ‘소녀상’이라는 명칭 대신 ‘위안부상’이라고 부르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까지도 위안부 문제는 전 지구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구 곳곳에서 종교나 인종, 영토 등 어떤 이유로 전쟁이 발발하면 여성의 피해는 심각하다. 그리하여 1949년 제네바협정에서 전시하 여성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2003년 문을 연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성범죄가 대량학살(genocide)과 함께 명백한 전쟁범죄임을 명시했다. 그럼에도, 전 지구적으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점령국이건 피점령국이건, 전선에서 가깝건 멀리 떨어졌건, 여성들의 성적 피해는 지속되고 있다. 예를 들면 구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세르비아계 병사들이 점령지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면서 인종청소를 외쳤는가 하면, 콩고민주공화국은 종교 분쟁으로 인해 매시간 48명이 성폭행당하기도 한다. 전쟁을 피해 들어간 난민 수용소에서마저 성폭행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전시하 여성들의 성착취로 인한 고통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구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국경을 넘어서 인권, 평등, 정의 등을 보편 가치로 공유하고 있지만, 왜 이처럼 오랜 기간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성들이 성범죄에 노출되는가? 이 글에서는 전시하 성범죄, 특히 전시하 여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성착취를 당하는가를 살펴볼 것인데, 이를 위하여 일본군 성노예와 미군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이 두 유형은 공간적, 정치적, 인종적 차이 등이 있지만, 전시에 외국 군대가 한국 정부의 묵인 혹은 협조하에 한국 여성을 대상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성범죄가 자행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한국 남성들은 외국 군대에 의해 자행된 이 범죄를 은폐하려고 했고, 한국의 피해 여성들은 자신이 당했던 엄청난 피해 사실을 오랜 세월 덮어두었으며, 가해자인 외국 남성들은 일말의 죄의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유사점도 있다.

이 글은 전시하 성범죄, 특히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기지촌 여성을 중심으로 실태를 분석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피해 여성들이 재현되는 방식과 국가와의 갈등 해결 과정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이 여성들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한국 정부의 역할을 살펴보고, 전시하 성범죄를 군사주의, 가부장제, 민족주의라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피해 여성들이 어떻게 생존자로 목소리를 내면서 여성 주체로 등장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2. 호명의 정치학: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1) 일본군 ‘위안부’의 이름 짓기

지난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등장한 위안부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나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은 이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 했다. 식민지하에서 있었던 치욕적인 역사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냐며 그냥 덮어두고자 했다. 피해 당사자들 역시 오랜 세월 숨죽여 지내왔지만, 위안부 문제가 공식 담론으로 등장하기까지는 한국 여성운동의 발전은 물론 세계 여성운동과의 연대 활동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 문제를 발화하고 싶지 않았는가는 위안부 할머니를 부르는 용어에서부터 드러난다. 당시는 위안부를 일제하 강제 징집된 여성을 통칭하는 개념인 ‘정신대’라고 부르기도 했고, 전쟁터를 따라다녔다는 의미로 ‘종군위안부’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군대를 따라갔다거나, 노동자로 일한 여성들과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 공식 문서에 등장하는 ‘위안부’라는 용어가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위안부’라는 표현은 일본 정부가 강제로 어린 소녀들을 끌고 가 성노예화했다는 범죄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기보다는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여성’이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여성계는 지속적으로 용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다. 한국에서는 ‘성노예’라는 용어에 대해 일반인들이나 당사자들의 불편함을 호소하며, ‘위안부’라는 용어로 그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해왔지만, 전시하 여/성범죄 추방을 위해 노력해 온 유엔(UN)은 1996년 2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부터 ‘위안부(comfort women)’ 대신 ‘강제적 성노예(enforced sex slave)’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유엔은 또한 ‘시민적 · 정치적 권리위원회(B규약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위안부’라는 명칭은 명확한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강제 성노예’라고 호명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가 전 지구적 이슈로 등장하면서 미 연방하원의원은 2007년 일본군 성노예 활동(sex slavery)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유엔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에서 여성들은 전시하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권고는 물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고, 위안부 피해자 지원에 관련된 입법이나 행정조치 정보도 부족하다”며 일본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독립적인 국제조사도 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표적인 여성단체인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일본 정부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담긴 ‘위안부’라는 용어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오다가, 드디어 올해부터 ‘성노예’라는 이 용어를 정식으로 사용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성노예’라는 정확한 명칭이 이제야 통용되게 되었을까? 한국이 일제 식민지하에서 겪어야 했던 성 수탈의 역사는 ‘일본군 성노예’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제국 군대의 한반도 진출이 기정사실이 되기도 전인 조선왕조 말부터인데, 조선의 개항 이후 일본은 자국의 공창제도를 조선 내의 일본인 거류지에 도입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공창화 정책을 실시했고, 가난과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인해 조선 여성이 공창에 유입되면서 공창이 확립되었다. 이 공창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매매춘 문화를 이식하면서 인종적 우월성과 지배권 강화를 위한 장치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공창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져, 피지배 민족으로서 성적, 인종적, 계급적 착취가 제도적으로 인정되는 장치로도 역할을 했다. 그러다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공창 지역이 국내에서 일본군 주둔지로 확대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 군인의 성병으로 인한 군대 전력 저하를 막기 위해 1930년 초부터 종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군이 주둔했던 거의 모든 곳에 일본군 성노예가 거주하는 위안소를 세웠다. 일본군 성노예는 피식민국에서 11세부터 27세까지의 미혼 처녀들을 강제로 끌고 갔는데, 특히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 표적이 된 이유는 성병이 걸리지 않은 깨끗한 몸에 상대적으로 순종적이라는 이유가 컸다고 한다. 한국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강제 연행하여 성적으로 수탈했는데, 그 숫자는 전체 일본군 성노예의 80%인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군은 강제 연행한 여성들을 군수품으로 취급하면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일본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보급하고 배치했다.

군인과 그 군속만을 위한 시설인 군위안소는 군이 지정한 의사에게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았고, 일부 민간에 의해 세워졌던 일부 위안소 역시 반드시 군의 허가를 받고 군으로부터 면허증을 교부받아야 했다. 일본군 성노예는 규정에 따라 매주 혹은 매달 성병 검진을 받았으며, 심할 때는 격리치료를 받거나 사살되기도 하는 등 일본 군대의 엄격한 관리 감독 및 통제를 당했다. 식민지 여성들은 국외에서는 일본군 전선의 최전방을 끌려다니며 성착취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여성들은 젊은 처녀들을 성노예로 내모는 데 일조했다. 또한 전선에 끌려가지 않은 여성들이라도 언제든지 끌려갈 수 있다는 공포심에 떨어야 했으니, 조선의 여성 전체가 일종의 집단강간을 겪은 것과 같은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었다. 식민지화로 무기력해진 조선의 기득권 세력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협력하거나 공모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일본군 성노예 현장으로 여성들을 몰아넣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청산의 대상이던 일제 부역자들이 다시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은 성노예로 징집했던 과거사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식민지 과거사를 빨리 잊어버리자거나, 조선의 딸들이 성노예였음은 창피한 역사이므로 덮어두자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은폐하고자 했다.

2) 주한 미군, 그리고 포주가 된 국가

‘미군 위안부(美軍 慰安婦)’는 ‘주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했던 여성들’을 말한다. 이들은 양공주, 양갈보, 유엔마담, 주스걸 등으로도 불렸는데,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기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 가운데서도 가장 천대받는 ‘불가촉천민’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군을 상대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이 여성들을 민간 외교관,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 달러벌이 역군이라고도 불렀다. 한편에서는 애국자로 추켜세우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가장 경멸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국가 차원에서 보인 것이다.

한국에 미군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 집결지인 기지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45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전쟁으로 한국 경제는 피폐해졌고 생활 능력을 잃은 수많은 피난민이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미군 부대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미군을 위한 성매매촌, 일명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동두천과 부평에는 미군이 직접 운영하는 ‘멍키 하우스’라고 불리는 성병 수용소도 있었는데, 이곳은 공중보건이란 명목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제 성병 검진을 시행했다. 미군 병사들은 아예 성병 검진에서 제외하고 성매매 여성만 검진했는데, 성병에 걸려 불합격판정이 난 여성들은 강제적으로 격리 수용을 당했다. 한국 정부는 월 2회 성병 검진을 하고 ‘OFF LIMIT(미군출입 금지)’로 클럽을 폐쇄하는 등 미군을 위한 매매춘에 직접 개입하고 또 관리하면서 이를 제도화했다.

1962년 자료에 의하면, 주한 미군은 약 6만5천 명인 데 비해 기지촌 여성은 약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윤락행위방지법’으로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미군이 주둔한 한국 땅에는 예외 없이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성매매를 위해 법과 제도적 장치를 국가가 마련하는 특수 지구인 기지촌은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기지촌 여성을 일반 성매매 여성과 구분하여 관리했는데, 예를 들면 1959년 9월 보사부의 〈성병보균 실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접대부(接待婦)의 15.6%, 사창(私娼)의 11.7%, 위안부(慰安婦)의 4.5%, 댄서의 4.4%가 성병에 걸렸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위안부’는 기지촌 여성을 말하는데, 이미 국가 차원에서 위안부가 관리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1969년 제정된 한국의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 제4조에는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라고 공식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1970년에 접어들면 한국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기지촌에 소위 ‘자치회’를 구성했는데, 이는 기지촌 여성들을 애국 시민으로 교육하고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정부 각 부처 차관이 참석하는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지촌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들을 연구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주한 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한 정치적 대비책 가운데 하나였다.

기지촌에 대한 국가 개입은 200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예를 들면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가출 · 접대 · 윤락 등 요보호여성 선도 사업 계획”에 “특정 지역(집결지, 기지촌) 중심의 정신 · 기술교육 프로그램 개발 시행”이라는 정책이 포함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66년 7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주한 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으로 미군 범죄는 한국 정부가 처리할 수 없었고, 특히 미군 성범죄는 은폐되거나 축소되기 일쑤였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기지촌 미군 위안부는 인신매매되어 온미성년자들이 많았고, 이들 중 다수는 인신매매나 취업을 미끼로 사기를 당해 기지촌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번 기지촌에 들어가게 되면 포주는 물론 한국 경찰들로부터도 감시를 당했기 때문에 탈출도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1980년대까지 100만이 넘는 기지촌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국민의 인권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자국의 여성들을 성착취로부터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조장하는 포주 역할을 한 것이다.

미군 성범죄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된 계기는 1992년 기지촌 성매매 여성 ‘윤금이 살해사건’이었으니, 죽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났다. 2004년 한국 정부에서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 기지촌에서 다수의 한국 여성은 떠났다. 하지만 2005년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90%는 러시아 여성과 필리핀 여성이었다. 한국 땅에서 러시아 여성이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이 현실, 이는 한국 여성에서 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성들로 대체되었을 뿐이며, 기지촌은 여성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전 지구적인 성매매 실태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전쟁과 성범죄: 죽어야 사는 여자들

1) 군사주의와 성폭력

군사주의란 전쟁을 대비하여 국가가 군사조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조직과 조직 구성원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만으로는 한 사회 내에서 또는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군사적, 집단적 폭력을 설명할 수 없다. 전시든 평시든, 언제든지 군사적 대결로 치달을 수 있는 흐름과 동력이 내면화된 가치체계, 군사주의는 바로 그 내재한 가치체계가 일상적인 실천 속에 자리 잡은 이념을 의미한다.

여성정치학자 신시아 인로는 군사주의에 대한 개념을 집단적 폭력을 가능케 하고 그러한 집단이 유지되고 힘을 얻는 데 필요한, 소위 말하는 전사로서 남자다움, 그리고 그런 남자다움을 보조하고 보완하는 여자다움이 전제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집단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훈련과 단일적 위계질서, 역할분업들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여러 신념이나 제도적 장치들을 포함하는 개념이 군사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군사주의는 전시가 아닌 평화시대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작동하는데, 예를 들면 사회화 과정으로서 군사주의는 남성의 우월성과 폭력성을 강조하고 여성의 수동적 성을 중시하며 여성의 성적 도구화가 그 사회의 주요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군사화의 과정은 폭력적이고 전투력 향상을 목표로 훈련된 남성성 옹호, 철저한 명령과 통제에 의한 위계질서 중시, 전시 살상을 준비하는 국가 기관으로서 기존의 가부장적인 남성성 강화, 그리고 폭력적이며 남성 우월적인 남성성을 정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신념을 체계화하고 이를 강화하도록 법과 제도를 확립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고 희생하는 성적 도구이거나 전사(아들)를 출산 · 양육하는 어머니라는 이분법적인 여성상이 정당화된다. 전시하 여성들에 대한 강간이나 군대가 관여하는 성매매 집결지를 통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고 또 묵인하는 과정은 성별 정치학이 작동하는 공간이므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착취가 정당화되는 것은 군사주의의 당연한 결과이다.

일본군 ‘성노예’의 문제가 쟁점화되는 과정에서 여성주의자들은 이 문제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폭력, 즉 군위안부 제도를 군사주의에서 출발함으로써 성폭력의 범위를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으로 규정한다. 위안부를 ‘천황으로부터의 선물’로 호명하는 순간, 군사주의하에서 조선의 처녀들은 일본 군인의 성적 쾌락을 위한 존재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기지촌 여성의 몸을 국가가 관리하는 이유는 전쟁 억제를 위해 한국에 온 주한 미군들의 건강이 곧 안보를 위한 자산이 되기 때문이며, 이들에게 건강한 몸을 제공하는 것은 약소국 여성으로서는 당연한 서비스가 된다.

군사주의가 작동하는 공간은 지역과 국경을 초월하지만 언제든지 군사적 대결로 치달을 수 있는 흐름과 동력이 내면화된 가치체계로, 유사시에는 집단적 폭력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위험한 전제가 필요하다. 집단 폭력에 대한 내재한 가치체계와 일상적 실천 속에 이분법적 성 규범이 작동하고, 성별 관점을 강요함으로써 여성의 성억압이 발생한다. 군사주의는 한국 남성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흥분하면서도 왜 한국 군인들이 파병지 베트남에서 베트남 여성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지, 그리고 점령군이나 지배계급이라도 여성들은 왜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한다.

2) 민족주의와 성노예

군사주의에 의해 이분화된 여성성과 남성성이 민족성과 만나게 되면, 남성은 민족의 수호자로서 자민족 여성을 보호하는 의무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군위안부 문제가 대중적 관심을 얻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조선 여성에 대한 침탈, 즉 국가 간의 범죄 중에서 우리 민족, 우리의 누이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범죄라는 것을 강조할 때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성차별성을 은폐하게 되는데, 현실에서 많은 내전 사례들을 보면 자민족 여성을 수호하는 남성이 타민족 여성을 강간하는 범죄자가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민족 내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수호자가 되지만, 민족의 경계를 넘어가면 타민족 여성에게 성폭력 가해자가 되고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 민족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남성이 민족의 수호자가 되면 자국민 여성에 대한 강간과 매매춘은 남성의 소유물을 타민족 남성이 훼손한 것으로 간주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조선의 딸’에 대한 범죄로 인식하지만, 성매매 여성에 대한 한국 남성의 성매매는 일종의 거래 행위일 뿐이다. 타민족 남성이 자민족 여성을 강간하고 성노예로 착취하는 것은 자민족 남성의 분노를 자극하며 민족주의적 동기를 불러일으키지만, 자민족 여성에 대한 성매매는 참을 수 없는 성욕을 지닌 남성성의 발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마리아 올루직이라는 크로아티아의 여성학자는, 여성의 몸이 ‘민족 명예의 상징적 저장소’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즉 전쟁 중에 자행되는 집단강간은 상대 민족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범죄 행위이며, 점령군에 의해서 강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피해자 여성 자신의 수치이기도 하지만 자기 민족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못했다는 것이 남성들에게 크나큰 치욕이며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기지촌 여성들이 미군에 의한 성폭력과 범죄 피해를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고통을 감수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해자가 강대국의 군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성매매 여성, 그 여성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계급이라고 취급받기 때문이다. 미군의 한국 여성에 대한 성범죄의 처리 과정에서도 젠더의 권력관계 문제가 아닌 민족주의가 작동하는데 즉,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사실은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민족’ 사이의 민족 문제이자 강대국 대 약소국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이 등장한다. 이때 남성에 의한 여성 착취라는 젠더 이슈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 여성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게 막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참아야 한다’며 여성의 희생을 강요한다. ‘여성’에게 저질러지는 범죄라는 젠더 모순이 민족 모순에 비해 사소한 것이라는 이 논리는, 결국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군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1992년 ‘윤금이 씨 살해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성 모순보다 민족 모순이 더욱 거대담론으로 인정받으며, 여성인권보다는 민족을 우선시하는 위계적인 사고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이었던 윤금이 씨는 1992년 콜라병이 자궁에 박히고 우산대가 항문에서 직장까지 꽂힌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너무나도 처참한 이 주검은 한국인의 미군에 대한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기지촌 여성, 양공주로 가장 멸시받던 여성이, 미군 처벌과 미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는 반미투쟁 현장에서는 “윤금이 누이, 순결한 민족의 딸”로 한국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녀의 주검은 ‘반미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현장에서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는 투쟁의 도구가 된 것이다.

개인보다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이 재조명되는 현실은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서도 환영받지 못한 현실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대신 ‘성노예’라고 부르지 못한 이유는 피해 당사자들이 자신의 몸이 더럽혀졌다는 죄책감과 창피함 때문에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가족과 연락도 못 하고 홀로 살았던 피해자, 그리고 일본군에 의한 성착취를 민족적인 수치로 받아들인 기득권 남성들은 5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를 은폐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거듭된 책임 회피와 사죄 거부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생존자들에게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보내면서 오래도록 수요집회를 할 수 있었던 동력 가운데 하나는 한국 여성에 가해진 일본 남성의 성폭력, 즉 여성 개개인의 삶보다는 ‘한국 여성’이라는 기표가 더 큰 힘을 발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 가부장제와 성매매

부장제하에서 남녀의 성은 이중적인 잣대로 해석된다. 남성의 성적 욕구는 생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본능이고 배출해야 하지만, 여성은 무성적인 존재이다. 여성을 순결한 여성과 순결하지 못한 여성으로 나누는 이중적인 성 규범 아래서 남성의 성 욕구를 해결해줄 성매매 여성의 존재는 불가피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은 여성의 소중한 덕목으로 간주된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순결 여부로 그 가치를 결정하는데, 순결치 못한 여자는 성폭행을 ‘당해도 싼’ 여자이므로 외면당한다.

가부장제하 남성의 성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성매매는 필수적인데, 성매매를 호명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성 규범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성매매를 표현하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어왔는데, 1920~30년 사이에 일본의 공창제가 한국에 뿌리내리면서부터 성매매는 매음(賣淫), 즉 ‘음란함을 팔다’라는, 태생적으로 부도덕성을 가진 단어로 불렸다. ‘갈(전갈)’은 벌레가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 종국에는 그 사람을 망치게 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인데, 성매매 여성을 ‘갈보’라고도 불렀던 이유는 이 여성들이 남성을 유혹하여 돈을 뺏고 결국에는 인생을 망치게 하는 존재로 본 것이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윤락행위방지법’을 제정하면서, 성매매는 ‘윤락’행위로 불렸다. ‘윤락(淪落)’의 사전적 의미는 ‘여자가 타락하여 몸을 망치게 되는 상태에 빠짐’을 말하는 것으로 여성 스스로 성적 쾌락을 위해 타락한다는 함축적인 의미와 ‘악의 꽃’이라는 낙인을 통해 성매매 문제를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적 문제로 환원시킨 용어이다. 당시 윤락여성은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선도의 대상이었고, 성매매는 사회악으로 귀결시키면서도 성 구매 남성은 처벌하지 않고 성매매 여성과 성매매를 알선한 행위자에 대해서만 처벌했다.

성매매의 또 다른 용어인 ‘매춘(賣春)’은 성을 파는 행위에 초점을 두고, ‘매매춘(賣買春)’은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말한다. ‘매춘’이란 성을 파는 행위에만 초점을 두어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성을 파는 여성에게 두는 것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성을 사는 사람의 책임 소재도 함께 논할 수 있는 ‘매매춘’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매매춘’에서 ‘춘(春)’이라는 단어는 여성을 봄으로 비유하거나 남성에게 인생의 봄날을 되돌려준다는 의미로도 비유되었다. 성매매는 성을 판매하는 경제적 행위, 즉 성을 불특정 상대에게 금품을 대가로 판매하는 행위라는 맥락을 강조하면서 성의 상품화를 드러낼 수 있는 유용성을 지닌 용어로 사용된다.

일본군 위안부나 기지촌 여성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여성의 대표적 가치로 통용되는 처녀성을 상실한 순결하지 못한 여성이라는 성적 규범에 기인한다. 어떤 이유로건 순결을 잃은 것은 여성의 잘못이며, 순결을 상실했다는 낙인은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했다. 기지촌 성매매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들은 지역의 풍기문란을 이유로 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점령한 군인에 의한 성폭력을 예방하는 수단이므로 이를 필요악이라고 인정한다. 즉 위안부나 기지촌의 존재는 순결한 처녀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하므로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부장제사회에서 이들이 공식적인 영역에서 드러날 때는 철저하게 미화된다. 예를 들면 일본군 위안부는 조선의 ‘딸들’로 명명되는데, 이는 가부장제사회에서 아버지나 오빠 등 남성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재현된 것이다. ‘윤금이 살해사건’ 이후 그녀는 ‘순결한 누이’ 즉 여성 최고의 덕목인 ‘순결’로 포장되고 남성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연약한 ‘누이’로 재현된다. 이처럼 가부장제하 이중적인 성 규범은 성폭력이 난무하는 전시는 물론 일상에서도 여성에게 동일하게 작동되는 프레임이 된다.


5. 나가기

지난 1월, 한국의 법정은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 책임을 일부 인정해 원고 120명 중 57명에게 청구액 절반인 500만 원을 위자료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국가가 처음으로 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함은 물론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다. “국가가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했고, 성병에 감염됐다는 진단을 받거나 미군에게 지목된 위안부들을 ‘낙검자 수용소’에 강제로 격리 수용해 치료한 정부의 조치가 위법했다”고 판결문에서는 명시했다. 또한 기지촌은 매우 중대한 인권침해이므로 국가배상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도 판결했다.

이 재판 결과로 인해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며, 동시에 생존자가 주체적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여성 주체로 등장했다. 물론 ‘주한 미군 기지촌 성매매 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은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지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라는 요구나 한국 정부가 기지촌을 관리하다가 버렸으니 국가가 책임을 지라는 기지촌 여성들의 국가 책임 인정 주장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려할 것은, 이처럼 군사주의, 남성중심주의, 민족주의라는 세 겹의 굴레에 의한 여성 억압은 여전히 전시하 성범죄를 겪은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2004년, 여성계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을 기억하고 전쟁과 여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를 기원하며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2015년 겨우 개관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서울시가 서대문구 독립공원 내 기부한 부지에 대해 독립유공자 단체들이 나서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독립군들을 모신 구역에 망신스럽게 위안부가 웬 말이냐며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 성미산 자락으로 장소를 옮겼지만 건립 기금이 부족했다. 기업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일은 ‘기업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며 후원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강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처녀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어렵게 살아 돌아왔지만 ‘더럽혀진 여자’라며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집안에서 내쳐졌다. 서글픈 이 여성들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재현되었지만, 모금을 통해 박물관이 문을 열 수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의 문제는 국가의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가의 법과 제도는 결코 성 중립적이지 않으며, 젠더 간의 역학관계에서도 결코 여성에게 우호적이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에 따라 국가가 여성 친화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여성들에게 희망적이다. 기지촌 여성들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인해 한국 정부는 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25년 동안의 끈질긴 수요시위 덕분에 유엔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명시했고 전 지구적 여성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한 국가의 성 문제는 남성 중심의 젠더 권력의 문제일 수 있지만, 군사주의로 무장한 전쟁터에서는 여성의 몸이 인종과 계급 착취의 영토일 수 있으며, 또한 타민족과의 무력 충돌에서 민족주의가 작동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군사주의, 남성 중심주의, 민족주의라는 삼중의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전시하 성 문제는 오늘날 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성들에 의한 전 지구적 성매매가 되어 여성의 성적 착취가 가중되고 있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여성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고 ‘밧지족의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로 가르치셨다.즉 아자따삿뚜 왕이 밧지족을 정복하려 하자, 붓다께서는 밧지족이 자주 모이고, 화합하고, 법을 존중하고, 노인을 공경하고, 의례를 준수하고, 거룩한 님을 존중하며, “어떠한 훌륭한 가문의 여인들과 훌륭한 가문의 소녀들이라도 그녀들을 끌어내어 폭력으로 제압하지 않는다면” 결코 정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여인들과 소녀들을 폭력으로 제압하면 번영할 수 없으므로 여성 보호는 국가 발전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전쟁과 성범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가르침처럼 국가가 앞장서 성평등한 법 · 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관습이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남녀 차별적인 가치관을 하루빨리 평등하게 고치는 다양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노력은 일상에서 자행되는 성폭력에도 민감하게 대응하며 우리 안의 성차별을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


옥복연
종교와 젠더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문학박사(여성학 전공). 서울대 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민대 강사 등 역임. 저서로 《불교와 섹슈얼리티》(공저),《붓다의 길을 걷는 여성》(공저)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한국불교 조계종단 종법의 성차별성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 〈붓다의 십대 재가여성 제자에 대한 불교여성주의적 분석〉 〈불교 경전에 나타난 여성혐오적 교리의 재해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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