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여성과 폭력 그리고 불교

들어가는 말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아주 오래되고 일상화되어 있으며 중첩되어 있어, 어떤 것이 혐오이고 차별인지 분명하게 밝히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혐오와 차별을 반대한다고 하는 이들조차 폭력적이거나 차별적 언동을 드러낸다. 노골적으로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태도나 언동이 있어야 혐오와 차별이지, 희화화하거나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의 농담이나 미세하게 소외시키는 것 정도는 혐오나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루어진 여성운동의 가시적인 결과로 개별 여성의 권익증진만이 아니라 법적 · 제도적 체계를 통한 여성 보호와 보편적 인권으로서 권리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사소한 것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무시되어왔던 여성과 소수자들의 이슈는 견고한 남성 중심적 법체계와 집행 구조 안에서 주체적 권리자의 위치로 점차 이동 중이다. 하지만 여성이 고통받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대책보다는 단기적 처방책이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사회 불평등 문제는 여성차별과 폭력, 혐오 등 젠더 이슈와 분리되지 않은 채 여전히 성 불평등을 공고하게 한다. 남성성, 여성성에 따른 편견과 성역할 고정관념은 여전히 강하고 여성의 낮은 경제적 참여, 높은 성별 임금격차, 질 낮은 일자리와 이로 인한 낮은 경제적 권한, 가정폭력과 성폭력의 피해, 불안정 고용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 증대, 다양화되는 가족 개념 안에서의 소외, 성상품화, 외모 중심주의와 몸의 자본화 현상 등 젠더 불평등의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여성인권이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여성인권을 주장하거나 여성차별을 논의하는 것에 대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권을 요구하거나 가질 만큼 가지고도 과도한 욕심을 내는 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들은 여성인권이 이미 충분히 보장되고 있으므로 오히려 남성에 대한 역차별과 인권침해를 일으키고 심지어 여성혐오라는 폐해를 남긴다고 본다. 더 나아가 젠더 불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혐오스럽다며 ‘혐오’한다.

일상에서 표출되는 혐오와 차별은 그 대상이 된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침해하고 사회 구성원을 분열시킨다. 혐오와 차별은 그 자체가 폭력적인 경우가 많으며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등 젠더에 기반한 폭력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혐오와 차별은 개인적으로 자존감을 손상시키고 무력감과 위축, 소외감으로 고통스럽게 하며, 집단적으로는 사회적 낙인과 편견, 배제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또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혐오와 차별이 일어나는 동일한 맥락과 방식으로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가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페미니즘이다.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들인 페미니즘은 생존의 문제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 그리고 젠더 폭력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위험과 두려움을 공감해보는 일이다. 중층적이고 다양한 젠더 문제를 성급하게 ‘해결’하려 하거나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동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과연 그러한지 의문을 갖는 정도의 의미를 두는 정도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다른 이야기, 익숙하지만 늘 낯선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성혐오에 맞서다

‘살아남은 나는 한국 여자다.’
‘새벽 1시에 화장실 가는 게 죄인가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 그만하세요.’
‘너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다.’
‘약자라서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 책임 지키겠습니다.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2016년 5월,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20대의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검거된 피의자는 초기 진술에서 범행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왔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한 남성이 대도시 건물의 어느 화장실에서 여성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이례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애도를 표하였다. 살해된 20대 여성이 나일 수 있다고 공감해서인지 특히 젊은 여성들의 애도가 이어졌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여자라서_죽었다’ ‘#살아남았다’ 등 해시태그로 추모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강남역에 남겨진 추모 쪽지들에는 ‘살아남은 나는 한국 여자다.’ ‘새벽 1시에 화장실 가는 게 죄인가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 그만하세요.’ ‘너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다.’ ‘여자라 살해당했다’ 등 일상의 삶 속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폭력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는지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증오범죄인지, 여성혐오범죄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면서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에 대한 반감, 여성들의 행동규범에 대한 혐오 발언이 이어졌고, 퍼포먼스를 하러 온 남성들과 이에 반발한 추모객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해서도 반발이 이어졌다. “여성이 피해자인 범죄인데 ○○녀 타이틀을 왜 붙이나? ‘여자가 무시해서’라는 말은 은연중에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이는 가해자가 타당한 원인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라며 여성이기에 쉽게 분노의 표적이 되고 범죄대상이 되는 사회적 의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여혐 · 남혐 구도나 성별 갈등으로 몰아가는 보도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대전, 울산, 전주 등 전국적으로 추모가 이어지고 추모의 공간에는 추모의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이 붙여졌다. 수백 장씩 포개어져 붙여진 포스트잇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마치 강남역 살인사건의 상징물처럼 관심을 끌었다.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에서는 198일간 모인 3만5천여 장을 수거하여 이를 주제별로 분류 · 기록하여 발표하였다. ‘고인에 대한 명복’에 대한 메시지가 가장 많았지만 ‘여성혐오범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 ‘미안합니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그리고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안감’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두려움에 대한 공감’ 등의 내용 등이었다. 표현이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여성이기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에 대해 추모의 마음,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다. 추모 포스트잇은 ‘시민기억 존’에 보존되었고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3만5천여 개의 포스트잇을 써내려간 여성들’에게 2016년 ‘여성운동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성평등한 사회만이 여성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는 자각과 행동의 촉매가 됐다.” 라는 것이 선정 이유이다.

“약자라서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 책임을 지키겠습니다.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날, 새벽 1시에 귀가를 해서 살아남았습니다.” “어제 무사히 살아남아 오늘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내일도 올 수 있을까요?”

한국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를 느끼며 직접 겪으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경험이 포스트잇 한 장 한 장에 들어 있다. 이는 단지 강남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하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차별, 여성혐오와 그 대안에 대한 고민이었다.

성평등한 사회, 안전한 사회는 차별과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는 것 그리고 실천을 통해 실제적인 변화가 이뤄진다. 여성만이 아니라 수많은 시민이 현장에 모여 추모하고 포스트잇을 통해 불편하고 차별받았던 경험들을 공유하며 참여하고 연대했던 방식은 부당함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이를 ‘모른척하지 않겠다!’라는 실천 행동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여성차별 · 여성혐오에 반대했던 운동은 온 · 오프라인으로 확대되었다. 여성들은 일상에서의 차별과 폭력 경험을 공유하고 공론화했으며 연대했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 고용상의 불이익과 차별은 깊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경험한 차별과 혐오는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인식과 함께 사소하다는 이유로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고착시키는 관행은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다양한 주제의 여성연대가 만들어졌다. 2016년 9월 정부에서 입법 예고한 낙태죄에 대해 반대하는 ‘검은 시위’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해 왔던 각종 폭력의 경험을 쏟아냈던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노 라이트 노 섹스(No rights no sex)’라며 가임거부 시위와 임신중단 합법화 시위가 이어졌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SNS를 중심으로 관행으로 여겨져 은폐되어 왔던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피해를 드러내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성별을 부각하고 여성성을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 여성혐오 발언들과 시위 여성에 대한 성희롱 · 성추행에 대해 항의하며 ‘차별 없는 평등 집회’를 위한 ‘페미존’ 활동이 전개되었다. 국정농단과 퇴진이라는 큰 문제에 주력하지 못하고 혐오와 같은 작은 일에 매달린다는 비난이 가해지고 여성들은 ‘민주주의와 여성혐오는 같이 갈 수 없다’며 반박하기도 하였다. 광장과 온라인 공간에서 오가는 숱한 여성혐오 발언은 처벌도 주의도 받지 않았고 명백한 혐오표현마저 표현의 자유로 수용되었다. 국정을 농단한 여성들이니 ‘그 정도’의 혐오와 비하는 괜찮다는 식의 인식이 공유되었다.
국정농단을 초래한 정치인, 언론, 재벌들은 비판과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성혐오를 수단화하기도 했다. 여성혐오가 얼마나 내재화되어 있고 만연되어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여성과 소수의 목소리를 여전히 사소한 일이나 나중에 해결해도 될 일로 생각한다면 그 정권 또한 거부하겠다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2017년 세계 여성의 날의 주제로 이어졌다. 여성들은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슬로건으로 성평등한 민주주의만이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혐오, 여성혐오

혐오란 무엇인가? 위키백과에서 정의된 혐오의 의미는 이렇다. “혐오(嫌惡)는 어떠한 것을 증오,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으로 불쾌, 기피함, 싫어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강한 감정(사람이 느끼는 자극의 수준을 기준으로 함)을 의미한다.” 교육심리학 용어사전에는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정서를 말한다. 이때에는 그것을 배설하거나 토하고 싶은 행동을 보인다.”고 정의하고 있다.

복합적 감정과 그에 근거한 행동으로 규정되어 있듯 ‘여성혐오’에 대해 흔히 갖는 오해는 혐오가 감정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여성을 싫어하거나 꺼리는 것, 미워하는 감정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과 친하게 지내므로 여성혐오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혐오표현’을 ‘어떤 개인 · 집단에 대하여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차별 · 혐오하거나 차별 · 적의 ·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으로 규정하고, 그 유형을 ‘차별적 괴롭힘’ ‘차별 표시’ ‘공개적인 멸시 · 모욕 · 위협’ ‘증오 선동’의 네 가지로 구분했다. 혐오표현과 관련해 국내에서 최초로 실시된 조사에서 온라인상에서 혐오표현 피해 경험률은 성 소수자가 94.6%로 가장 높고 여성이 그다음(83.7%)으로 나타났다.

혐오와 미러링을 통한 혐오표현을 보면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피해자를 거듭 공격하는 것, 문란한 여자라며 망신을 주는 것, 신체에 대해 비하하는 것, 리벤지 포르노(동의 없이 촬영한 노골적이거나 성적인 영상)를 공유하는 것, 살인이나 강간하겠다며 잔인하게 성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 외모로 평가하거나 비하하는 것, 성정체성 또는 성역할에 대한 공격적인 언행, 이상한 칭찬을 하거나 농담을 하는 척하며 놀리거나 망신을 주는 것들이다. 특히 속어나 은어, 기호화된 언어 표현들은 혐오를 증폭시키고 모멸감과 수치심, 역량과 의견을 평가절하한다. 여성들이 약하다고 느끼게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하며 특정한 상황에 대해 참여를 제한하거나 입을 다물게 한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근거한 혐오 발언은 그 자체가 폭력적이며 실질적으로 사회적 차별이나 폭력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

우에노 치즈코(2012)는 ‘여성혐오(misogyny)’를 여성에 대한 멸시를 의미하는 말이며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생각하고 여성을 나타내는 기호에만 반응하는 것이라며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 즉 여성 멸시라고 정의하였다. 우에노 치즈코의 논의 핵심은 가부장제적 질서이다. 즉 단순히 개인이 개인에 대해 갖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성차별 구조와 질서를 뒷받침하는 집단적인 정서 구조라는 것이다. 성차별주의(sexism)와 함께 쓰이는 여성혐오는 단지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이 아니라 여성에 대해 깊게 내재화된 편견을 나타낸다.

누스바움(Nussbaum, 2012)은 미국의 사례를 들어 온라인상의 여성혐오가 ‘대상화’와 핵심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대상화’는 상대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여, 상대의 감정이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대상을 특정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 대상의 자율성을 부인하는 것, 대상의 활력을 부인하는 것, 대상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대상을 언제든지 무너뜨리거나 침해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사고팔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과 대상의 감정이나 주체성을 거부하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그는 포르노그래피적인 이미지를 가장 극적인 ‘대상화’의 형태로 보았으며 강간의 위협 역시 ‘대상화’와 관련된다고 하였다.

여성에 대한 비하, 차별을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 혐오의 표현은 온라인 공간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의 희롱과 학대는 익명성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인척 가장하면서 부정적이거나 해롭거나 잘못된 정보를 게시할 수 있다. 리벤지 포르노, 사진, 동영상을 게시하며 존재감을 갖거나 정보를 제공하여 공유하면서 우월감을 만끽한다. 익명이기에 범죄나 폭력을 부추길 수도 있다. 여성혐오 표현이 논란이 되면 논란 자체가 이슈의 중심에 서는 일이므로 인정과 연대의 의미가 있다. 대중문화 콘텐츠 소비자들에게는 혐오 콘텐츠가 전달되는 과정에 동조하거나 이를 즐길 기회가 된다.

군 가산점제, 징병제와 같은 오래된 성별 논쟁에서 이미 남성다움에 대한 박탈, 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의 결과가 남성에게 집중되는 것에 대해 분노가 있음이 드러난 바 있다. 이후 특정한 여성을 비하하는 된장녀, 김치녀 등 신조어 등을 통해 여성에 대한 비하와 멸시, 혐오가 드러났지만, 혐오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2015년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메갈리아 사이트(www.megalian.com)를 통해서이다. 메갈리언들은 ‘일간 베스트’와 같은 온라인사이트에서 김치녀, 된장녀, 똘페 등으로 불리며 여성혐오 발화들의 형태를 주어만 바꾸어 ‘미러링’이라는 되받아쓰기를 하였다. “여자가 어떻게 직접적으로 성기, 성적인 행위를 언급하고 성적인 욕을 할 수 있는가?”라며 기존의 여성성을 벗어나는 언어 사용과 표현은 충격적이었다. 한편으로 메갈리아의 가장 큰 공헌은 여성혐오라는 말을 대중화시켰다는 점, 여성 젠더에 부여된 여성적 행동을 뒤집은, 즉 젠더적 금기를 깬 점이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언론진흥재단(2016)의 조사에서 10명 중 7명꼴로 여성혐오 나아가 성별에 근거한 차별적 표현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혐오표현을 주로 접하는 경로로 신문, 방송 등 대중매체이다. 여성 응답자의 27.3%가 여성혐오 문제를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반면, 남성 응답자의 경우 9.8%만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응답하여 남녀 간 인식 차이가 크다. 여성에 대한 반감이 여성 대상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 남성은 63.7%, 여성은 92.1%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개똥녀, 패륜녀 등 ‘○○녀’라는 명칭을 붙이는 게 여성혐오와 연관 있다는 견해는 여성 82.7%, 남성 58.6%가 동의했다.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로 인해 발생한 범죄라는 주장에 여성 응답자의 78.2%가 동의했으나 남성 응답자는 48.1%만 동의했고, ‘매우 동의한다’는 응답은 10.4%에 불과했다. 최근 논란이 된 대학생들의 도촬, 성폭행 모의 등의 내용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에 대해 여성의 93.9%가 심각한 범죄라고 밝혔지만, 남성은 69.9%가 심각한 범죄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사건의 가해자들은 폭력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주장한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성역할을 했을 뿐이고 누군가에게 폭력적 행위로 규정된 것이다. 젠더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은 바로 내재화된 혐오와 차별, 젠더 감수성(사회적 성별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가지고 성차별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민감성)의 차이 때문이다. 이 정도의 행위가 무슨 폭력이고 차별이며 혐오적 발언인가 하고 부정하는 인식의 차이가 있고, 그 저변에 여성에 대한 비하, 차별, 낮은 젠더 감수성이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여성혐오의 반대말은 ‘남성혐오’가 아니다. ‘모든 여성은 성폭력의 잠재적 피해자다.’라는 말은 ‘모든 남성은 잠재적인 가해자’라는 말과 같지 않다. 전자는 여성이 일상에서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해 남성은 피해를 일으키는 가해 당사자,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받고 몰고 가는 것에 반감을 갖는다. 두렵다고 표현하는 데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은 여성이 처한 사회문화적인 조건과 환경이 안전하지 않으며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피해를 일으키는 왜곡된 통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젠더 감수성의 차이

혐오의 개념에 근거해서 보면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가 깊이 내재하여 있는 사건이다.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한 여성을 살해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범행동기와 그 범행의 동기가 전달되고 수용되는 전 과정, 피의자의 진술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언론의 보도 태도에 여성에 대한 편견과 멸시가 내포되어 있다. 초기 진술에서 당시 피의자는 ‘여성에게 무시를 당했다’라며 범행동기를 밝혔다. 이 발언은 ‘여성에게 무시를 당했으니 억울하지 않겠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나?’라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범행했다고 할 때 그 말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인식이 내재하여 있다.

범행동기를 들은 경찰 역시 ‘감히 여성이 남성을 무시하다니, 남자로서 여성에게 무시를 당했다면 원한을 가질 만도 하겠다’라고 피의자의 범행동기를 수용하는 인식을 갖고 있다. 경찰의 조사발표를 듣고 이를 그대로 보도한 언론 역시 ‘범행동기가 이해된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으며 발표된 범행동기를 받아들이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이 있다. 즉 범행동기가 받아들여지는 각각의 인식에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 그리고 혐오가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여성은 열등한 존재이며 ‘아무리 남성이 못났다 하더라도 감히 남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라는 고정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 가장 견고한 성역할 고정관념 중의 하나는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며 남성보다 우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남성은 강해야 하고 여성보다 열등한 위치에 자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젠더적 여성성이란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 여성적 태도, 마음가짐, 언행과 같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사회적으로 여성화되는 것, 여성 젠더를 갖게 되는 것이다. 열등과 우월의 가치로 배열되는 이원화된 성역할 고정관념은 성차별을 공고히 하고 차별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스웨덴의 최대 노조인 ‘우니오넨(Unionen)’에서는 직장 내 맨스플레인과 성차별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구체적 조언을 얻도록 젠더 전문가와의 전화상담 창구를 개설한 바 있다.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성(man)이 여성에게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ex-plain)하려 드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과잉 확신과 무지함이 결합돼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였다.

늘 가르치려는 남성들의 저변에는 ‘여자가 뭘 알아?’ ‘그래도 역시 남자가 더 잘 알지’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직장 내의 맨스플레인은 불평등한 젠더 권력관계를 나타낸다. 여성의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저평가되는 문제, 의사결정권자나 여성 리더의 부족과 같은 문제와 연결돼 있다. “남성에게 정상성이라고 여겨지는 공격성이나 폭력성은 ‘(주로 웹에서) 몰려다니며 여성(주의)을 공격하고 성대결을 벌이는 바로 그 행동이 오늘날 한국 남성성의 주요 형식이자 내용 그 자체라는 점’이 문제이다. 일베 · 남초 웹사이트 등의 ‘하위적 남성 동성사회’와 기업인, 관료, 의사, 검찰, 교수, 목사, 정치인들의 ‘상위적 남성 동성사회’로 나눠 양자 모두 여성혐오 문화와 언어를 공유한다.”(천정환, 2016)

차별이나 폭력은 내재화된 젠더 고정관념을 통해 실현된다. 통상적인 젠더 규범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정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구분된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정상성을 벗어나는 것이며 이때 혐오나 폭력의 대상이 된다. 다른 모든 규범이 그렇듯이 젠더 규범 역시 완벽하지 않다. 어떤 남성도 사회가 규정한 남성적인 것들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으며 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남성은 감성적이거나 의존적이며 즉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된 모습을 보이며 어떤 여성은 적극적이며 목표 중심적 즉 ‘남성적인 것’으로 규정된 모습을 보인다. 여성이 남성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남성이 여성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보다 매우 빠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남성성은 여성성에 비해 우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게이에 대한 비난 중에 ‘여자처럼 말한다’라는 것은 동성애자 남성의 성적 수행 속에서 여성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비정상의 낙인을 찍고 혐오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열등한 개념인 여성성을 수용한 남성, 정상성을 벗어난 남성에 대한 비난이나 저항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훨씬 엄격하다. 혐오는 젠더 규범의 혼란을 막기 위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혐오에 대응하는 여성운동이 ‘여자 일베, 미러링이라는 또 다른 혐오’로 폄하되고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즘은 여성특권주의, 여성우월주의이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성평등’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양성평등이 성별 관계의 재편이 아닌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으로 명명해버린 것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양성평등(gender equality)은 가부장제 비판과 남녀차별 극복의 바탕이 되는 개념으로, 여성주의의 주요 전략이었다. 하지만 최근 양성평등 개념은 이분법적인 성별 규범 안에서 남성을 중심으로 여성이 위계적 존재로 정의되고 손쉽게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되면서 남성-이성애 중심적 사회 체제가 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비판이다. 양성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에게만 지워지는 이중구속의 현실을 들춰내고 ‘비정상’ 혹은 ‘소수자’라 불리는 젠더 규범 외부의 존재들을 억압하는 권력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젠더 기반 폭력

젠더 폭력은 젠더와 관련한 태도, 고정관념 및 문화적 규범에서 일어난다. 젠더 폭력은 가부장제 사회문화와 남녀가 불평등한 관계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발생하는 신체적 · 정신적 · 성적 폭력을 말한다.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가 대표적 형태이다. 유엔은 젠더 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 명명하고 1993년 ‘여성에 대한 폭력 철폐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녀 간 불평등한 힘의 관계에서 발생해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고착시키고, 여성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차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부터 젠더 폭력을 방지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특별법을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정폭력은 1년간 배우자로부터의 폭력 피해율은 12.1%(2013년 29.8%)로, 여성의 배우자 폭력 가해율은 9.1%였다(2013년 30.2%).

2016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1년간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82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05명이었다. 피해 여성의 자녀나 부모, 친구 등 주변인이 중상을 입거나 생명을 잃은 경우도 최소 51명으로 나타났다.

2014년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민우회가 스토킹 피해 상담 240건을 분석한 결과, 상해, 살인미수, 감금, 납치 등 강력범죄에 해당하는 사례가 51건(2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젠더에 기반한 폭력은 대부분 피해자가 여성이며 피해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여기서는 성폭력의 발생 · 정의 · 관련 통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여성가족부)’에서 여성 피해율(1.5%)은 남성(0.1%)에 비해 현저히 높다. 몰래카메라에 의한 피해는 여성만이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고, 최근에는 리벤지 포르노, 몰래카메라 등의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 유형 중 가장 많은 피해 유형인 PC, 핸드폰, 일반 전화 등을 통해 원치 않는 성적 메시지 혹은 음란물을 받는 등의 피해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다. 최근 대학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의 특징은 모바일 메신저 단체대화방에서 일어나는 언어적, 시각적 폭력이 많다. “술집 가서 X나 먹이고 자취방 데려와” “첫 만남에 XX해버려” 등의 대화나 지하철에서 여성들을 도촬(도둑 촬영)한 사진을 공유하는 등 범죄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2016년, ‘#오타쿠_내_성폭력’으로 시작된 성폭력 고발의 목소리는 ‘해시태그 문화예술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웹툰을 비롯해 문단, 미술,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 전 분야에서 드러난 폭력의 양상은 비슷했다. 가해자는 유명 시인, 존경받는 작가, 업계에서 인정받는 큐레이터, 권위 있는 평론가 등 문화예술계에서 권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피해자들은 다른 성폭력 사건에서처럼 고립되거나 비난을 받을까 봐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성폭력과 관련된 가장 강한 통념은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이며 ‘여자들이 조심하면 성폭력은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낮은 성 인권의식과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비난받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은 피해 이후에도 2차 피해로 나타나고 있다. 2차 피해는 사회적 강간(social rape)이라고 해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피해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형사 사법절차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의 말을 성 통념에 의거해 불신하거나 가족 등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소외나 배제를 경험하는 일, 진술을 계속 반복시키는 일, 법정에서 판사가 가해자의 미래를 걱정하고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는 일 등이다. 또한 의료 조치를 받을 때 적절한 배려와 설명을 듣지 못하는 일, 언론이 사건을 재현해서 피해자가 꽃뱀 취급을 받게 하는 일 등도 2차 피해로 들 수 있다. 실제 피해자에 대한 조사에서 피해자를 비난하고 화간을 의심하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난 것으로 연구된 바 있다.

문화예술계 등에서 최근 드러나는 성폭력은 여성혐오와 관련이 깊다. 즉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로, 문화예술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통념 중 남성의 성적 자유로움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성범죄를 묵인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풍토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성폭력이 술이나 음란물, 게임중독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처럼 설명한다든지, 성적 욕망을 조절하지 못해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묘사하는 언론보도는 또 다른 왜곡된 통념을 갖게 하며 사회적인 해결방법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만든다. 성폭력은 일상적인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 타인에 대한 존엄성과 낮은 인권의식에 기인한다. 아동과 장애여성 피해자가 많은 것은 성폭력이 성욕이 아니라 힘의 차이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며 또한 사회적 안전망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는 권력관계에 의해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을 ‘정상적인 성행동’이라고 수용하는 통념을 믿거나 그러한 통념이 허용된다는 문화적 지지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규정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각 개인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 등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독자적으로 성적 관(觀)을 확립하고, 이에 따라 사생활의 영역에서 자기 스스로 내린 성적 결정에 따라 자기 책임하에 상대방을 선택하고 성관계를 가질 권리’로서 헌법에서 보장한 인격권,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에서 나온다고 하였다(2002. 10. 31. 선고 등).

현행 성폭력특별법 등에서는 성폭력 성립 여부 판단근거로 폭행이나 협박, 위계 · 위력을 전제하고 있는데 자발적 동의권을 강조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운동과 여성학계에서 사용되어 온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은 남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규정된 것으로 여성들의 성폭력 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에 여성들이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되는 고통에 의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여성들이 구성하는 성폭력 개념은 원하지 않는 성적 언동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뿐만 아니라, 삶의 맥락에서 다양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뿐 아니라 여성됨이 부정되고 파괴될 때의 고통까지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반(反)성폭력 운동은 성별 권력을 문제화하는 법제화에 중점을 두었으나, 여성들이 역동적으로 행위하고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욕망과 남성 욕망의 충돌이 어떻게 고통으로 의미화되는지, 맥락에 따라 어떻게 사유하고 그것을 어떤 법적 판단의 기준으로 채택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특히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몇 판례에서 동의권이 행사되는 맥락을 이해하거나 소통 방식에 대한 훈련이 거의 없는 청소년에게 단지 언어적으로 동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것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무엇이 성폭력으로 구성되는지 경험을 반영하고 가시화시키기 위한 작업은 아직 진행 중이다.


맺음말을 대신하여

여성들에게 일어난 일은 너무 특수하여 보편적이지 않거나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특정할 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고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여성적일 수 없거나 또는 너무나도 여성적이어서 인간적일 수 없든지 어느 하나를 뜻한다(C.MacKinnon)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인권의 개념을 단순하게 영역을 넓히듯이 여성에게 확대 적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 자체가 인권임을 천명한 것이다. 즉 여성이 경험하는 인권침해나 인권유린을 인권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권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취업이나 교육, 정책 결정 등 모든 분야에서 여성도 평등하게 참여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하지만, 평등하게 참여할 권리가 주어져도 전통적인 여성 직종에 몰려 있어 동일임금이나 최저임금의 의미가 없다든지, 가사와 육아부담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주어진다면 실제적인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과 같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억압과 성별분업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함께 보장되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성역할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는 일종의 성역할이자 성역할의 연속선에 있는 일이다. 많은 국가에서 가족 내 폭력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고 따라서 개입하지 않았다.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인신매매 등은 구금, 고문, 노예제에 해당하는 인권침해임에도 오랫동안 인권의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다. 공사(公私)를 이분화하여 가족과 여성 영역은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여성을 사적 영역에 귀속시키고 시민이나 공적영역의 범주에서 배제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여성의 권리 역시 동등하게 보장받아야 한다는 평등권에 입각하여 사적 영역의 여성인권 침해도 인권에 포함되고 있다. 이제 가족, 사적 영역은 국가의 주요한 관심사이며 결혼과 섹슈얼리티에 관련한 인권, 재생산과 신체의 자율권까지 고려되고 있다.

여성인권의 역사는 여성도 인간으로서 인격의 존엄과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으며 가정과 사회의 모든 부문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소장.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동 대학원 졸업. 성폭력전문상담원, 사회복지사, 내러티브상담사, 반(反)성폭력 활동가 등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학교에서의 성인권 교육교재 연구 활동으로 《학교폭력 위기개입의 이론과 실제》(공저)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만화책 《사춘기》 《채연이의 일기》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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