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당시 스님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
사사키 시즈카 지음

1. 인연>

그래 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대승경전과 禪』(민족사, 2002)이라는 내 책이 있다. 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금강경』을 비롯한 대승경전 안에 이미 중국에서 완성된 선불교의 사상적 입각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추적한 글이다. 그 도입부로서 “과연 대승불교는 어떻게 일어났던가” 라는 점을 조금은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선사상 그 자체와 대승불교 흥기 문제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일종의 워밍 업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1995년 당시에 우리 학계의 형편은, 다음과 같은 대승불교 기원에 대한 히라카와 아키라(平川 彰)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平川 彰은 대승불교의 세 가지 원류를 말하고 있는데, 이를 도식화하면 “佛滅 後 재
가신자에 의한 사리 공양 → 부파교단과 병행하여 존재했던 불탑신앙집단의 讚佛信仰的 불교 → 초기의 대승불교”로 정리해서 이해할 수 있다.(『대승경전과 禪』, p.43.)

 

책이 나온 뒤, 2002년 가을 나는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일본에 가자마자 이내 내가 믿어왔던 히라카와 설이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었으며, 더 이상 정설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깨침 뒤에 바로 사사키 시즈카(佐?木 閑)교수가 있었다.

사사키 교수는 임제종 묘심사파가 세운 하나조노(花園)대학의 교수였으나, “불교대학” 대학원에 강의를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강의를 당시 불교대학 연구원이었던 강종원 선생으로부터 전해듣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이 책,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에서는 지나가는 말로 하고 있는데, 인용해 보자.

    불탑이 불교승단과 관계가 없다는 전제와, 후대가 되어 등장하는 대승보살운동의 거점이 불탑이라고 하는 사실을 연관지어 보면, 대승불교는 불탑을 중심으로 종래의 승단 출가자와는 무관하게 일반인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성립한다. 平川彰가 제창한 유명한 설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해 이 설의 타당성이 의문시되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빨리율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계통의 율에는 승단과 불탑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 다수 존재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출가수행자가 불탑신앙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p.165)

대승불교의 기원과 관련한 학계의 현단계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인도불교의 역사』(이호근 옮김, 민족사)보다도 훨씬 멀리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자신의 문제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다시 우리 학계에 대승불교의 기원이나 교단사에 대한 전문가가 존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공업(共業)이기도 하였다.〔그렇다고 해서 『대승경전과 禪』이나 『인도불교의 역사』의 전부가 의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분야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학자가 동경대학에서 공부한 이자랑(李慈郞) 박사이다. 그리고 이 박사의 학위논문 심사위원 중에 한 분이 바로 사사키 교수인데, 이 박사에 의해서 사사키 교수의 학문적 방법론이나 학문세계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인도불교 교단사에 관한 일본학계의 최근 연구동향」, 『불교학보』 제39집, pp.315∼316. 참조.)도 그러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도 이 간극을 좀 메우는 데 일조(一助)할 수 있기를 바랐다. 다행히 2004년 사사키 교수가 해인사 율원에 오시는 기회에 인도철학과 주최로 특강을 준비하여,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직접 사사키 교수로부터 당시 학계의 연구경향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지금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무렵 이 책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의 번역 문제를 민족사에 말한 일이 있었던 것같다.

또 이자랑 박사에게 부탁하여 사사키 교수의 주저인 『인도불교변이론』의 번역 출판 역시 도모하였던 것이다.(이 책 역시 동국대 출판부로부터 출판되었다.) 모두 『대승경전과 禪』에서 진 빚을 갚으려는 내 나름의 환채행(還債行)이었다. 2007년 2월 교토에서 나는 번역자 원영스님으로부터 이 책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교단사나 율장에 대한 교과서들이 이제 많이 갖추어진 셈이다.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이자랑 박사가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 선생의 『열반경의 연구』(춘추사, 1997)만 옮겨주면 좋겠다.

2. 승가, 사회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

나는 계율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내 “저서· 역서목록”에는 계율관계 책의 이름이 하나 보인다. 『초기불교교단과 계율』(사토우 미츠오/佐藤密雄 지음, 민족사, 1991)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승단은 어떻게 형성이 되었으며,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하는 점을 율장을 중심으로 잘 해설한 책이다. 16년 전에 나온 책인데, 초기불교교단에 대한 교과서적 역할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를 읽으면서 ‘세대교체’ 내지 ‘임무교대’인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제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초기불교교단과 계율』이 더 이상 읽힐 가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와 비교해 보더라도 중복되지 않는 특성을 『초기불교교단과 계율』은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특성은 승단 안에서 소송과 재판, 징벌, 사면, 복권 등 사법제도에 대해서는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에서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함께 읽을 필요가 있는 책들이다.

그럼, 새롭게 등장한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가 제시하는 가장 큰 새로움은 무엇일까? 빨리율을 자료로 하면서 부처님 당시의 승단의 모습을 재구성해 간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승단의 운영원리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지를 밝혀놓은 점을 들 수 있다. 공자님께서 “내 도에는 일관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했는데, 이 책에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승단의 운영에 있어서 일관하는 원리를 읽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섬사회.”

이 말은 내가 일찍히 다른 책에서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말이다. 저자 사사키 교수의 신조어(新造語)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섬사회,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직접 사사키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룹을 지었을 때에만 가능한 또 하나의 선택이 있다. 특정 그룹만으로 별개의 독립사회를 이루어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일반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방법이다. / 균일한 세계 가운데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가 작은 섬처럼 우뚝 나타나는 것이다. 이 작은 섬은 저절로 형성된 천연물이 아니다. 그룹 멤버들이 자기들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인공사회이다. 인공물이기 때문에 그 형태는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사회형태이든간에, 속세라고 하는 천연의 바다에 둘러싸인 인공의 섬은 스스로 자활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반사회 속에 짜 넣어진 형태로 존속하고자 하는 길을 택한 이상 세속과 어느 정도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자기들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pp.16~17.)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승단은 섬과 같이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다. 그러나, 섬이 바다에 떠있는 것처럼, 출가의 승단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라는 이름의 바다 위에 떠있는 것이다. 실제로 속세를 떠난 집단이라고 해서 속세와 무관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섬 사회와 바다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을까? 바로 걸식(乞食)을 통해서이다. 경제적으로 ‘섬 사회’인 승단은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일반사회로부터의 시여(施與)에 의해서 생존을 유지해 가면서, 그들의 수행을 해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승단이 부단하게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한 모습이 율장의 기본정신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이다.

율장에는 수행자의 자리적 수행의 규칙이라 할 수 있는 계(戒)가 있으며, 생활규범이라 할 수 있는 율(律)이 함께 규정되어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율은 일반사회로부터 들려오는 여론의 향방에 따라서 제정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pp.135~136) 이는 반드시 미성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부모가 생존하는 한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규칙이다. 이 역시 속세와 승단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초래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규율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그렇게 율장의 규정 가운데에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부득이 세속사회의 여론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제정된 규정들이 다수 존재한다면, 지금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그 당시와 달라진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그 당시의 규정을 존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컨텍스트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달라진 것이다. 바다가 달라졌으므로 섬사회에서 통용되는 율 역시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관점이다. 이에 대해서 종래부터 우리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해오고 있다. 하나는 컨텍스트가 달라진 만큼 율은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사키 교수의 관점은 어떤 것일까? 좀 길지만 인용해 본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보면 차법이 결코 영원불변의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법은 그 당시 인도사회 속에서 불교 승단이 사회와의 알력을 피하기 위해 도입한 법규이다. 따라서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유효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하면 이미 그 기능을 잃게 된다. 그건 고사하고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불러 일으키는 중대한 오점이 되기도 한다. 불교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원점은 규칙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이 제정된 기본 이념, 곧 사회의 존경에 보답할 만한 집단답게 행동하고, 그 보답으로 존속이 허용된다고 하는 ‘걸식 이념’이야말로 불교 승단의 원점이 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회와의 알력을 막아주는 효력을 잃어버린 차법에 더 이상 그 존재 이유는 없다. 현대에는 현대에 맞는 법규가 요구되는 것이다.(p.149)

여기서 차법(遮法)이라는 말은 출가하려는 희망자 중에서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장애인이다. “신체 장애자는 출가할 수 없다”라고 하는 규정은 당시 인도사회가 신체 장애자에 대한 인권평등이 확립되기 이전의 일이었으며, 승단이 일반사회의 여론을 늘 의식해야 하는 섬사회였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신체 장애자에 대한 인권의식이 높이 확립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시각장애자나 청각장애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포교 역시 시급하다는 점에 있어서, 그러한 장애를 가진 스님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장애자에 대한 포교를 위하여서도 매우 긴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 일본의 근대에 있어서 점역(点譯) 불교성전의 성립 역시 시각장애자인 야마모토 교토쿠(山本曉得, 1886∼1932)스님이 정토진종에 출가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이에 대해서는 김호성 편, 『일본불교사 공부방』 제3호, 2006. pp.5∼41. 참조.)

다만, 율장 그 자체는 불교의 역사이므로 그대로 두면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서 그 위에 덧붙이는 방법이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조문의 대체가 아니라, 조문의 축적이라는 인도법의 방식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3. 승단이 없는 일본불교에의 반성

저자의 입장이 “계불변, 율가변(戒不變, 律可變)”이라고 하니까, 그러한 유연한 입장이 혹시 계가 없는(無戒)의 일본불교의 영향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빨리율을 기본으로 하여 부처님 당시의 교단을 살피면 살펴갈수록 그것은 일본불교에 대한 하나의 반성이라는 의미가 있게 된다.

    불교승단이 독자적 생활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이 없어져 그 승단은 일반사회 속에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누가 스님이며, 누가 일반인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 신도는 있더라도 승단은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일본불교가 이에 가까운 상태이다.)(p.20)

메이지 유신 5년(1872) 메이지 정부는 「태정관포고 제133호」를 통하여 승려들도 일반인처럼 결혼을 해도 좋고, 머리를 길러도 좋으며,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공포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은 참으로 자율적인 종교교단이 스스로 정해야 할 규범에 관한 문제인데, 정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이다. 정히 법난(法難)이라 불러야 할 사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포고를 철회하라고 요구한 복전행계(福田行誡, ? ∼ 1888)와 같은 승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교단은 그 체제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의식을 할 때를 제외하고서는 양복을 입고서, 일반 세속적인 직업 속으로 들어가서 노동을 한다. 일본의 도시에 있는 절들이 대개 낮에 문을 닿아놓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님들이 양복을 입고 출근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사키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이라는 ‘섬 사회’의 경영원리인 걸식에 의한 생활이라는 원리는 잊혀지게 된다.

즉 일본의 일반사회의 입장에서 스님들에 대한 관념은 초기불교 당시나 우리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과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성스러움의 인정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똑같은 사회인일 뿐이다. 가끔 장례절차를 위탁하는 정도일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불교의 그림자이다. 지금 저자는 이러한 측면을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도 보완이 필요함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 5년에 이르러서 비롯된 문제는 아니는 것이다. 불교승단에는 반드시 어떠한 율을 사용하고 있어야 하는데, 일본불교의 승단은 “어느 것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p.58)고 지적한다. 여기에는 일본불교사의 특수성이 개재되어 있다.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교수가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김호성 옮김, 동국대 출판부, 2005)에서 자세히 논하는 것처럼, 고대에 일본불교의 승려는 자율적 기구로서의 승단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관승(官僧)으로서 국가에 소속된 일종의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pp.58∼59)의 설명은 바로 이러한 관승체제였다는 점을 밑바탕에 갈고서 이해되어야 하는 맥락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관승 역시 스님인 이상 수계라고 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수계제도에서 율장에 의지하는 일본불교 승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사사키 교수에 의하면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형식화되고 있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경우에는 율장에 따른 출가생활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거부되어 왔다. 물론 감진화상 등의 노력에 의해 출가의식만큼은 전해지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국가공무원으로서의 비구, 비구니를 생산하기 위한 서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율장을 엄격히 지키는 자야말로 진정한 출가자라고 하는 원칙은 무시되었던 것이다.(p.59)

감진(鑑眞, 688∼763)은 당나라 스님인데, 일본의 수계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초빙되어서 내일(來日)한 분이다. 수차례의 실패 끝에 일본에 도착하셨으나, 그 사이에 스님은 빛마저 잃고 만다. 그런 시련을 거치면서 애써 확립한 국립 계단의 수계 역시 형식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평가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국립 계단의 수계제도 자체가 ‘섬사회’보다는 ‘바다’의 일이 되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계율의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와의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일본불교에서 불교교단의 기본적 시스템인 걸식에 의한 섬사회의 유지라고 하는 시스템이 붕괴되고 만다.(여기서 주의할 것은 일본불교의 스님들 중에는 이러한 계율부재를 한탄하면서, 계율부흥운동을 펼친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松尾剛次 편, 『계의 책』, 춘추사, 2006, pp.7∼58.참조) 이렇게 되면 위험 역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사사키 교수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걸식이라고 하는 생화방식은 불교승단에 있어 반사회적인 활동을 용납하지 않는다”(p.357)라고 전제하면서, 제국주의 아래에서 일본불교가 전쟁에 참여/협력하게 된 것도 이러한 교단의 왜곡된 존재양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읽어낸다.

    때때로 외부사회의 통념이 불교의 기본이념에 어긋나는 사태도 발생한다. 예를 들면 사회가 교단에 살인을 강요한 적도 있었다. 그 비참한 예를 일본불교는 체험하였다. 보시를 받아 일반사회 속에서 존속을 인정받는 대가로 승단은 전쟁에 참가할 것을 요구 받았던 것이다. 일본불교에 율장이 존중되고 있었더라면 사태가 다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승단의 멸망과 전쟁협력을 저울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상황 은 같았을 것이다. 걸식집단이 지고 있는 숙명인 것이다.(p.358)

이러한 서술은 우리에게 무거운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지만, 하여튼 저자가 이렇게 초기불교교단의 기본정신을 탐색하면서 가끔씩 일본불교의 교단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나는 평가한다. 그 책의 제1차적 독자가 일본의 불교인들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계율부흥을 위한 문제제기를 한다고 하는 적극적인 의미까지 부여할 수 있을지는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말이다.

4. 홀로결사(結社)와 파승(破僧)의 문제

여기서 글을 그만두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면도 다 썼다. 하지만, 나는 마성스님께서 내 책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정우서적, 2007)에 대한 서평 「한국 불교학자가 본 일본불교, 일본불교의 렌즈에 비친 한국불교」(『불교평론』 30호, pp.255∼265.)에서 언급한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기로 한다.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마성스님께서는 사실 나의 글에 대해서 과분한 평가를 해주셨다. 감사드린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을 언급하셨다.

    김교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을 “연대하지 않는 각성”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즉 “그러니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성을 하되, 그 각성된 개인이 연대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79쪽)라고 주장하였다. 〔----〕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교단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파승(破僧)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주고 있다. 〔----〕필자는 출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또 승단의 전통을 계승해 가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미래에까지 불교 승가가 존속할 것인가를 늘 걱정하고 있다. 필자가 학문하는 것도 불교 승가의 발전과 법이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다.(『불교 평론』 제30호, pp.263∼264.)

왜 나는 ‘홀로결사’를 주장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과연 파승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였을까? 내 글「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글을 읽어보면, 그 중심에는 ‘권력’이라는 단어가 놓여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 나 역시 마성스님과 똑같이 “불교 승가의 발전과 법이 오래 머물게 하기”를 원한다. 그런 이유로 불교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불교 승가의 발전과 정법의 구주(久住)를 현저히 장애하는 것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권력에의 지향이다. 쉽게 말하면, 교단 구성원이 권력욕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권력은 세속적인 정치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비단 정치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니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푸코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특히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말하고 있지 않던가.

승단 안에서도 정치는 존재한다. 이는 현실에 대한 사실판단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승단으로부터 권력지향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승단이 정치화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민에 대한 대답이 ‘홀로결사’였던 것이다. “연대하지 않는 각성”이었다. 이는 마성스님이 받은 인상과는 달리, 나는 그것이야말로 파승을 막는 최선의 길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는 이유는, 마성스님의 문제제기를 읽으면서 “정말 부처님 당시에는 어떠했던가?” 라고 하는 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를 읽으면서 그 점을 주의하여 읽으려고 하였다. 뭔가 해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공간적으로나 집합적인 개념에서 대중에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율장은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율은 비구가 승단을 떠나 단독행동을 하고 있는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승단에서 승단으로 이동할 때라든지 어쩔 수 없이 단독행동이 강조되는 경우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율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을 고려하여 특례의 형태로 독거생활자의 생활규칙을 담고 있다.“(p.66)

“반드시 행해야만 할 행사만 공동으로 행한다면 평소 혼자서 생활하는 것도 인정된 다.”(p.70)

그러니까, 승단의 일원으로서 부여되는 의무를 성실히 한다면 홀로결사 역시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말하는 ‘홀로결사’는 공간적이나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독살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방승가에 소속된 일원이라는 점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그러나 한 스님이라는 존재를 분석할 때, 그 의미성분(意味成分)이 적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지금 A와 B라는 스님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각기 그 스님들을 의미하는 의미성분이 다음과 같다고 해보자.

A 스님 : OO종 승려, 어느 절 스님, C스님의 문도, D승가대학 동창회 회원, OO회 회원, XX회 회원.
B 스님 : OO종 승려, 어느 절 스님

A스님과 같이 의미성분이 다양해지면 다양해질수록 불교승단의 안정은 어려워지며, 파승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나는 보고 있다. 즉 내가 말하는 홀로결사의 의미에는 공간적으로 독살이라는 의미보다는 조직/결사(어떤 결사든지 모두 어느 정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에 동참하는 것을 삼가하자는 의미이다. 승가 내에 동일한 장소에서 모여서 수행하는 집단으로서의 현전승가 외에, 소속하는/포용되는 조직이나 결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들이 모두 서로서로 상치되면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에 놓이기 쉽게 되고, 따라서 승단의 분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까지 하기로 용기를 낸다. 여기서 나의 심각한 고민은 우리 스님들이 모두 B스님과 같은 의미성분만을 가질 수 없겠는가 하는 점이다. A스님과 B스님을 대비해 보면, B스님은 특정한 스님의 문도라는 표지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B스님에게는 우리 한국불교의 파승사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동인이 되고 있는 문중이 없게 된다. 아, 문중 없는 스님이 있을 수 있을까?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에 의하면, 불가능하다.

부처님 당시부터 승단의 교육제도는 화상(은사스님)에 의하여 출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문중의식이 온전히 불교적인 것만이라 하기는 어렵다. 유교적 문중의식이나 선종적 법통의식 역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 사사키 교수 역시 화상이나 아사리와 같은 존재/직무자의 등장이 “승단 내에 권력자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p.281), 또한 “절대권위자의 존재를 허용하게 되는 상황이 나타날 가능성도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p.300)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스님들이 특정한 스님을 화상으로 의지하여 출가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부터의 율이다. 하지만, 이 역시 불변의 계는 아니지 않을까. 만약 가변의 율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역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정한 스님의 제자로서 출가하지 않고, 예컨대 조계종에 출가한다고 할 때 그 출가자를 어떻게 지도할 수 있을까? 이러한 부분을 연구하는 것이 문중제도의 아름다움을 찾으면서(없는 것은 아니다. 있음이 인정된다.) 문중제도의 폐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보다 교단발전을 위해서는 더욱 실효성이 있으리라 본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일이 언제 실현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관적이다. 그래서 그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이야기를 글로 썼을 뿐이다. 이제는 스님 한 개인 개인의 깨어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그러한 깨어난 스님들이 뭉치는 것은 위험하다. 정치세력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가 아니라,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그러나, 그렇게 흩어져도 우리의 스님들은 한국불교, 더 좁게는 본인이 소속하고 있는 종단, 그리고 현전승가로 참여하고 있는 도량에 소속하고 있는 스님들이 아니겠는가.

이제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를 덮는다. 마지막으로 하나, 역자가 보이지 않는다. 필요한 부분은 역자주가 있어야 했다. 예컨대, 감진스님에 대해서 우리 독자들은 대개 알지 못한다. 소개해 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또 당연히 역자 해설이나 후기가 있어야 한다. 스승의 책을 번역하면서 조심스러운 태도라고 생각되지만, 독자들을 위해서 역자가 보는 관점을 이야기했어야 한다.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를 낳아야 한다. 이야기의 멈춤이 곧 죽음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제목의 문제이다. 이 부분은 역자와 출판사 모두의 책임이겠지만, 제목이 책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이 책에는 출가하신 스님이 어떻게 세속의 번뇌를 놓는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우리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류이다.

참으로 “부처님 당시 스님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원저의 제목 『출가란 무엇인가』에서 ‘출가’는 출가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출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p.360에 암시되어 있는 그대로이다. 제목이 그랬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는 옥의 티일 뿐이다. 원저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한다. 이런 책을 우리 힘으로 쓸 수 있는 학자들이 어서 나오기를 바라면서 삼가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김호성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이며, 이론 불교대학 객권교수를 역임하였다. 논저서로 《대승경전과 선》《천수경이야기》《책 안의 불교, 책 밖의 불교》《어린이천수경》《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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