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갑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한문 고전을 번역하다 보면 자신이 마치 영화 〈다빈치 코드〉의 랭던 교수가 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수수께끼와도 같은 시나 문자를 손에 들고 진실을 찾아가는 기호학자 말이다. 하기야 한자야말로 가장 뚜렷한 기호일 테니, 한문 번역가는 퍼즐을 맞춰나가는 기호학자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면 〈레이더스〉? 옛날 무덤이나 파헤치는?

男子之身具髮鬚  
신체발부 온전한 남자로 태어났으면
只宜端坐學程朱  
다만 정좌하고 정주학 배움이 마땅하거늘
參過爾法空無二  
그대 불법 참구하여 진속불이한 공을 깨달은들
昧却吾儒德不孤  
우리 유학의 이웃과 함께하는 덕성만 못하거늘
太極究來眞道體  
태극을 궁구하라 참 도체러니
三乘透破妄工夫  
삼승을 파한들 망녕된 공부러니
問渠言下回頭否  
그대에게 묻는데 말 끝났다고 고개 돌리는가
迷悟兩端判智愚  
미혹과 깨달음의 양단에 지혜와 어리석음이 나뉘거늘

조선 후기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백헌의 시에 맞춰 지어 흥 장로에게 주다[和白軒韵 贈興長老]〉란 시이다. 얼핏 보면 매우 교조적인 유학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 같은데…….

이하곤은 숙종 3년에 태어나 영조 즉위년에 죽었으니 거의 대부분 삶을 숙종과 함께했던 셈이다. 그는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손자이며 대제학 이인엽(李寅燁)의 맏아들로 태어나, 이조판서 송상기(宋相琦)의 사위가 되었다. 당대 서인 가문의 적통으로 노 · 소론을 아우를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관직에 오르지 않고 시(詩) · 서(書) · 화(畵)와 유람, 그리고 독서로 평생을 보냈다. 충북 진천의 완위각(宛委閣)에 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시인 이병연(李秉淵), 화가 정선(鄭敾), 문인화가 윤두서(尹斗緖) 등과 교유하였다. 이 중 윤두서는 대표적인 남인이다.

숙종 재위 기간은 이른바 환국(換局)이라 하여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하던 때였다. 서인과 남인이 싸우고, 노론과 소론이 갈렸다. 하지만 이하곤은 당색을 전혀 따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도 구별하지 않았다. 서출이든 천민이든, 그의 사귐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다.

이 시는 1703년(숙종 29)에 속리산을 유람하며 쓴 것이다. 그의 나이 26세, 한창 혈기방장할 때 속리산에서 한 노승과 대화하며 쓴 시로 보인다. 흥 장로(長老)가 누군지는 고증하지 못하고 있으나, 장로라는 명칭에는 이미 젊은 유학자의 존경심이 스며 있다. 하여튼 법랍 지긋한 이분이 이하곤의 심기를 어지간히 긁은 것 같은데……

아무리 젊은이라도 당대 최고 권력자의 적장자이다.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 꽤나 뜨거운 설전이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승 또한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말 상대를 만났다 싶었을 것이다. 젊은이는 유(儒) · 불(佛) · 도(道) 삼교에 능통함은 물론, 역학(易學)에서부터 고금의 문학작품, 심지어 풍속소설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은 게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 나이에 이미 시인이며 화가로, 특히 평론가로 명성이 자자했을 터이다. 나이와 신분을 넘고, 학문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는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젊은 유학자와 노승의 대화라! 흔한 건 아니어도 드문 일도 아니다. 금강산에서 19세의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한 노스님의 훌륭한 말 상대가 되지 않았던가. 이하곤은 누구보다도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시문집 《두타초(頭陀草)》엔 승려들과 주고받은 시나 편지 등이 많이 실려 있어 그가 얼마나 불교를 아끼고 좋아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니 이 시는 조금 장난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한 노승과의 설전 끝에 튀어나오는 젊은 유학자의 격정을 싣고, 그 공격성만큼의 장난기도 섞어서 읽어야 한다. 고전번역가로서 그런 치기와 농담을 살려 번역해 보고자 했는데…….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속리산 유람 내내 비가 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방안에서 승려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많았을 것이다. 흥 장로와 헤어지고  난 다음날쯤 본속리(本俗離)라는 절에 머물며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본속리에서 묵다[宿本俗離]

靜夜寥寥獨炷香  
외로운 향불 적막한 밤
陰森花木宿禪房  
꽃나무 울창한 선방에 묵었다
齋廚粥熟晨泉滴  
부엌엔 죽 익어가고 새벽 샘물 톰방톰방
佛殿燈昏春雨長  
불전엔 등 희미한데 봄비 그치지 않네
爐火還同僧一笑  
화롯가에 둘러앉아 스님과 함께 웃으니
鍾聲自與世相忘  
종소리와 더불어 세상만사 절로 잊는다
年來漸覺諸緣盡  
근래에 점점 여러 인연 다해감을 느끼며
看水看山興更狂  
물 보고 산 보는 흥취 더욱 고조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던가.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설파한 이는 공자였다. 단 한 명의 지음(知音)을 위해 백아(伯牙)는 산과 물을 연주했고……

그렇다면 이하곤이 산을 보고 물을 보는 흥취라고 했던, 미치도록 빠져들어 갔던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어제의 권력자가 오늘은 사약을 받던 때를 살아봐야 알 수 있을까? 모든 인연이 부질없음을 깨달을 때쯤 알 수 있을까?

퍼즐 같은 인생, 죽어라 싸워보고 죽어라 사랑하다가 죽어서 산과 물에 뿌려져도 알지 못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김문갑 /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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