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동남아시아불교 집중 탐구

1. 베트남의 개황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위치하는데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인접해 있다. 사회주의 공화국인 베트남의 국토 면적은 33만 1,690㎢로 한반도의 약 1.5배이며 인구는 8,580만 명(2009년 기준)이다. 베트남 민족은 베엣(Viet)족이 89%를 차지하며, 그 외 53개의 소수민족이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화교는 약 100만 명 정도이다. 베트남의 공용어는 베트남어이고, 4종류의 소수민족 언어를 법률로 허용하고 있다. 베트남 문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한자를 사용하였지만, 8~9세기경에는 한자의 뜻과 음을 차용해서 쯔놈(Chu Nom) 문자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그 후 17~18세기 말에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쯔놈으로 된 베트남어를 라틴 문자로 옮겨 적기 시작한 것이 현재 베트남 문자의 효시이다. 1878년 4월 6일에 프랑스 식민정부가 현재의 베트남어를 국어로 공인하였다.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대 중국에서 월(越)나라 남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사용한 이름이다. 기원전 4세기경 저장(浙江) 성에 있던 월나라가 멸망하자, 월나라의 여러 부족은 남방으로 이주했다. 그 가운데 일부가 베트남인이 되었다.

기원전 111년에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토벌되어 베트남은 일찍부터 한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10세기까지 천 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907년에 당(唐)나라가 멸망한 것을 계기로 베트남은 독립의 기회를 얻었다. 939년에 오조(吳朝, 응오, 939~968)가 성립하였고, 그 뒤로 정조(丁朝, 딩, 968~980)와 전여(前黎, 띠엔레, 980~1009) 왕조가 이어졌지만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공온(李公蘊)이 이조(李朝, 리, 1009~1225)를 개국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이조의 뒤를 이은 진조(陳朝, 쩐, 1225~1400)는 한층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진조(陳朝)는 세 차례에 걸쳐 몽골군의 침입을 받았지만, 모두 물리쳤다.

15세기 초에는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베트남을 정복했다. 하지만 여리(黎利)가 반란을 일으켜 10년에 걸친 항전 끝에 명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독립을 회복했다. 후여(後黎) 왕조가 18세기까지 지속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는 1세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고, 1773년에는 서산당(西山黨)이 군사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베트남 전역을 장악하였는데, 완복앙(阮福殃)이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서산당(西山黨)을 물리치고 1802년에 완조(阮朝, 응웬)를 세웠다. 1883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고, 1954년에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1975년에는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2. 불교의 전래와 수용

전통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은 《이혹론(理惑論)》의 저자 모자(牟子)가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중반 사이에 베트남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렇지만 모자 이전에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승려가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초기 베트남불교에서 활동한 3명의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모자(牟子)

모자는 중국 남부의 창오(蒼梧)에 머무르다가, 184년경 어머니와 함께 베트남의 교지(交趾, 交州)로 왔다. 당시 베트남의 교지는 태수 사섭(士燮, 137~226)의 통치 아래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모자는 전란(戰亂)을 피하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중국 산둥성 출신인 사섭은, 일남군(日南郡)의 태수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 정권에 가까운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권력자였던 사섭이 학문을 사랑하고 학자를 보호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피난을 온 학자가 많았다.

베트남 교지에 머무르고 있을 때 모자는 유교를 주로 연구했는데, 그가 저술한 《이혹론》은 유교의 입장에서 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不老長生] 술(術)을 행하는 도가(道家) 등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불교의 올바름을 말하는 한편, 당시 승려의 타락을 비판하고 있다. 《이혹론》에는 태자 수대나(須大拏)에 관한 기술이 들어 있는데, 이는 베트남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물이 모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수대나 태자에 관한 기술은 247년에 중국 오나라에 들어간 강승회(《육도집경》)의 번역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모자 이전에 이미 불교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중반의 중국 남부에는 아직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모자가 베트남의 교지에서 불교를 배우고 중국에 돌아가서 그 뒤에 불교에 집중했을 가능성도 있다. 모자가 중국 남부의 창오(蒼梧)에 일시적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와 베트남의 교지에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그가 베트남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것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출신의 승려가 모자 이전부터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한문 불교도 그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② 강승회(康僧會)

강승회(?~280)는 베트남의 교지에서 공부한 승려이다. 강승회의 선조는 서역의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대대로 인도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친이 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 교지로 이주하였다. 강승회는 10대 초에 부모를 여의었고, 출가한 뒤 그에게 불교를 가르쳐주던 스승도 입적했다. 그는 베트남의 교지에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회계(會稽)의 진혜(陳慧)이다. 그는 불교와 유교 이외에도 천문과 그 밖의 방술(方術)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강승회는 247년에 중국에 건너가서 오나라 수도의 건업(建業)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불교를 포교하였을 때, 출가한 승려를 처음 본 사람들이 그의 복장과 행동에 놀라서 관청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강승회는 일심으로 향을 사르고 예배를 되풀이해서 부처의 사리가 오나라에 나타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오나라 손권(孫權, 222~252 재위)이 이러한 기적에 감동해서 오나라 최초의 사찰 건초사(建初寺)를 세웠다고 한다.

강승회는 건초사에서 《아난염미경》 《경면왕경》 《찰미왕경》 《범황왕경》 《소품반야경》 《육도집경》(석가모니의 전생담을 집대성한 것) 《잡비유경》(교훈집) 등을 번역하고 《안반수의경》(禪經에 속함)에 주석을 달았다. 이 가운데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 《경면왕경(鏡面王經)》 《찰미왕경(察微王經)》 《범황왕경(梵皇王經)》은 《육도집경(六度集經)》의 일부이다. 강승회는 《아난염미경》 《경면왕경》 《찰미왕경》 《범황왕경》을 베트남에 있는 교지에서 번역하고, 중국에 갔을 때 이 4가지 경전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을 번역하고 편집해서 《육도집경》이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승회는 범패(梵唄)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③ 지강양접(支疆梁接)

지강양접은 중앙아시아 월지국(月支國) 출신이다. 255~265년 사이에 베트남에 있는 교주(交州)에서 《십이유경(十二遊經)》과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을 번역하였다. 《십이유경》은 266년에 중국 남부의 광주 번우(番禺)에서 강양루지(疆良婁至)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지강양접(支疆梁接)과 강양루지는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며 지강양(支疆良)도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따라서 앞의 경우처럼 베트남에 있는 교주에서 《십이유경》이 번역이 되었다면, 베트남에서 번역된 경전이 중국에서 유통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의 경우는 중국의 번우에서 《십이유경》이 번역이 되어 유통된 것이다.
또 《법화삼매경》의 번역자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이 있는데, 285년에 무외삼장(無畏三藏)이 베트남에 있는 교주에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화삼매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베트남불교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법화삼매경》에는 이행(利行)이라는 여성이 설법하였는데, 그것을 괴이하게 여긴 사리불(舍利佛)과 문답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유마경》에서 천녀(天女)와 불제자(佛弟子)의 문답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상당히 가까운 내용인데, 여인성불(女人成佛)의 설명이 필요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상층계급의 여성으로서 불교신자가 된 사람이 많으며, 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불교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3. 베트남불교의 전개

1) 6~14세기의 불교

6세기 후반에 들어서 남인도 바라문 출신 비니타루치가 베트남에 처음으로 선(禪)을 전했다. 그가 세운 종파를 비니타루치파(派)라고 한다. 9세기에는 무언통파(無言通派, 보곤통)가 생겨났다. 11세기 초에 이조(李朝)가 들어서고 제3대 황제 성종(聖宗)이 새로운 불교 종파를 열었는데 이를 초당파(草堂派)라고 한다. 13세기에 이조가 멸망하고 진조(陳朝)가 세워진 후 무언통파에서 죽림파(竹林派)가 성립되었다.

(1) 비니타루치파(派)

비니다류지(比尼多流支, ?~594)는 비니타루치파(派)의 개조(開祖)이다. 남인도 사람으로 브라만 계급 출신인 비니다류지는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을 품었다. 서인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부처의 심인(心印)을 구하였지만, 법(法)의 인연이 있지 않아서 주장자를 들고 동쪽으로 갔다. 574년에 먼저 장안에 도착하였는데, 북위의 태무제의 폐불 사태를 만나서 업(鄴)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때 폐불을 피해서 의발을 가지고 사공산(司空山)에 은거하고 있던 3조 승찬(僧璨)을 만났는데, 승찬의 행동거지가 비범함을 보고 마음속에서 공경함이 일어났다.

이에 비니다류지는 앞으로 나아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세 번이나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승찬은 말없이 좌선을 하였다. 비니다류지는 우두커니 있다가 활연히 깨달음을 얻고 승찬에게 엎드려 삼배를 하였다. 승찬은 다만 세 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비니다류지가 세 걸음 물러나서 말하였다. “제자가 찾아왔지만, 적절한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화상께서는 대자비를 베풀어서 제자가 화상의 주변에서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승찬이 말하였다. “그대는 속히 남쪽으로 내려가서 제자를 가르치도록 하라.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비니다류지는 승찬과 헤어져서 광주 제지사(制旨寺)에 주석하였다. 6년 동안 머무르면서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 《보업차별경(報業差別經)》을 번역하였다. 580년, 비니다류지는 베트남의 법운사(法雲寺)에 와서 머물렀고 《총지경(摠持經)》을 번역하였다. 비니다류지가 입적하자, 제자였던 법현은 다비를 하고 오색의 사리를 수습하고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다. 비니타루치파(派)는 제1세 제자인 법현을 시작으로, 제12세까지 이어졌다.

(2) 무언통파(無言通派)

무언통(無言通, ?~826)은 광주(廣州) 사람으로 성은 정(鄭)씨이다. 어려서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무주(婺州) 쌍림사(雙林寺)에서 수행을 시작하였다.

무언통이 어느 날 예불하고 있을 때 어떤 선자(禪者)가 물었다. “좌주(座主)는 누구에게 예배하는가?” 무언통은 답했다. “부처에게 예배합니다.” 선자가 불상(佛像)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것이 무엇인가?” 무언통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날 밤, 무언통은 위의를 갖추고 선자에게 예배하고 물었다. “선자가 앞에 물었던 질문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자가 말하였다. “좌주는 출가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무언통이 말하였다. “10년이 되었습니다.” 좌주가 말하였다. “그대가 출가하기는 한 것이요?” 무언통은 할 말이 없었다. 선자가 말하였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출가한 지 100년이 된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자는 무언통과 함께 마조(馬祖, 709~788)를 만나러 갔지만, 마조가 입적하였기 때문에 무언통은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어느 때에 어떤 승려가 백장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의 돈오법문(頓悟法門)입니까?” 백장이 답하였다. “마음이 공(空)하면, 지혜의 해가 스스로 비출 것이다.” 무언통은 이 문답을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광주로 돌아와서 화안사(和安寺)에서 주지가 되었다.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이 사미였을 때에 무언통은 앙산을 부르며 “나를 위해서 침상을 가지고 오너라”라고 하였다. 앙산이 침상을 가지고 왔다. 무언통은 말하였다. “본래 있던 곳에 갖다 놓아라.” 앙산이 그대로 하였다. 또 무언통이 물었다. “앙산아! 저쪽에 무엇이 있는가?” 앙산이 답하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언통이 물었다. “이쪽에는 무엇이 있는가?” 앙산이 답하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언통이 또 말하였다. “앙산아?” 앙산이 “예” 하고 답하였다. 무언통이 말하였다. “가라.”

820년, 무언통은 베트남 북령(北寧)의 건초사(建初寺)에 와서 머물렀다. 죽을 먹는 것 이외에는 선열(禪悅)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늘 앉아서 면벽을 하였고, 묵언을 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무언통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감성(感誠)만이 더욱 예배드리고 공경하며 주위에서 모셨다. 감성은 무언통에게 은밀히 현묘한 이치를 물었고 마침내 그 요점을 모두 얻었다.

이처럼, 무언통은 백장회해에게서 깨달음을 얻었고, 앙산혜적이 사미였을 때 가르침을 베푼 적도 있다. 그의 제자 감성을 제1세로 하여 제15세까지 무언통파가 이어졌다.

(3) 초당파(草堂派)

초당(草堂)은 노복(奴僕)으로 있다가 국사(國師)가 된 인물이다. 이조의 성종(聖宗, 1054~1072 재위)이 1069년에 참파[占城]를 공격했을 때, 스승을 따라 참파에 왔던 초당은 포로가 되어 하노이[昇龍]에 연행되었다. 초당은 승록(僧錄: 승직의 하나)을 맡은 승려의 노복이 되었다. 이 승려가 어록을 쓰다가 잠시 외출했을 때, 초당이 문장을 수정하였다. 승려가 돌아와 수정된 문장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이 승려는 성종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했고, 그 결과 초당은 국사가 되어 존중을 받았다. 초당은 개국사(開國寺)에서 활약하며 승려와 재가불자를 교화하였다.

제자로는 성종(聖宗), 반야(般若) 선사, 우사(祐赦) 거사 등 3명이 있는데 이들이 초당파의 1세이다. 2세 제자 가운데 오익(吳益)은 성종에게 법을 이은 사람 중 하나인데, 그는 참정(參政)이라는 요직에 있었다. 제3세로는 영종(英宗), 두무(杜武) 등이 있는데, 두무는 황제를 교육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제5세 제자에는 고종(高宗)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초당파는 황족과 고급관리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4) 죽림파(竹林派)

진조의 인종(仁宗) 시대는 베트남의 민족의식이 강렬하던 때였다. 베트남은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냈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쳐흘렀으며, 아울러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베트남에서는 한자를 이용해서 쯔놈(Chu Nom, 字湳)이라는 문자를 만들었고, 민족문학이 싹을 틔웠다. 이러한 풍조는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간화선을 실천해서 자신의 면모를 철저하게 추구하는 개성적인 선풍(禪風)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임제선이 일어나고 죽림파(竹林派)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죽림파는 무언통파의 선과 임제선을 합한 것인데, 임제선이 베트남불교로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림파의 개조는 죽림대사(竹林大師)로 불렸던 인종인데, 그는 임제선을 그의 스승 혜충(慧忠)에게서 공부하였다. 이 임제선은 인종이 영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해서 와운암(臥雲庵)에 머물 때 베트남불교계에 선풍적으로 퍼져 나갔다. 왜냐하면,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국란이었던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친 인종의 뛰어난 지도력이 불교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죽림파는 죽림대사(인종)를 뒤이어 법라(法螺, 1284~1330), 현광(玄光)이 이어받았다.

2) 15~20세기 초반의 불교

진조(陳朝) 중기 이후 왕조의 쇠퇴와 함께 불교 역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15세기에 후여(後黎)가 성립되어 유교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불교의 세력은 점차 쇠퇴했다. 그 결과 불교는 권력에 밀착한 종교에서 대중의 종교로 전환하게 되었고, 반권력적 세력이 되었다.

후여(後黎) 말기에서 완조의 시대까지 불교는 융합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불교가 도교와 유교와 융합한 후, 거기에다 민간신앙 곧 정령신앙, 조선(祖先, 祖上)신앙과 습합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사원에는 여러 형태의 불보살상이 추가되었고, 공자상(孔子像)을 비롯한 유교의 성인의 상(像), 옥황상제와 같은 도교의 여러 신의 상(像), 민간신앙 대상인 여신과 토지신 등에까지 제사를 드렸다. 또한 승려가 불교에 영향을 받은 도교의 경전을 독송하고, 도교의 행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불교와 도교가 뒤섞이는 이와 같은 혼효(混淆)의 경향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1) 연종(蓮宗)

연종은 죽림파의 선(禪)과 정토교 사상이 결합한 종파이다. 중국 송대 백련종(白蓮宗)의 흐름을 이어받은 뒤에 죽림파의 사상과 정토종의 염불, 밀교의 의례, 베트남 고유의 민간신앙까지 혼합한 것이다. 이 연종은 인각(麟覺, 1696~1733)이 처음 열었다.
죽림파에서 분파하여 독립한 연종은, 하노이[昇龍]성 밖에 있는 사찰(파다사)에서 창립되었다. 이후 북방 북령(北寧)의 함용사(含龍寺), 월광사(月光寺), 연종사(蓮宗寺) 등에서 연종의 교의를 주장하였다. 17~18세기의 베트남 남북분열 시대에는 북방의 정씨 영토에서 발전했다. 그 이후 베트남불교계에서 교단 외형적으로는 임제정종(臨濟正宗)을 주장하면서도, 신앙 내용에서는 정토종의 염불을 중심으로 한 것은 대체로 연종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1945년 8월 혁명 이전에는 북베트남 불교도의 80%가 연종 신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산(西山, 타이송) 동란을 거쳐 19세기 초기 전국을 통일한 완조(阮祖, 구엔조)는 전국적으로 불교를 경시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북방의 연종을 억압하였다. 완조의 이러한 정책은 불교의 민중종교적 특성을 강화하였고, 베트남불교의 절충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켰다.

(2) 원소선파(原紹禪派)

중국인 승려 원소(原紹)에 의해 세워진 종파인데, 원소는 1718년 중국 청나라에서 베트남의 광남국(廣南國)에 와서 임제정종(臨濟正宗)이라고 불리는 원소선파(原紹禪派)를 세웠다.
베트남 분열기의 남부지방에서는 광남국이 성립하였고, 이 광남국은 완씨(阮, 구엔)의 지배 아래 있었다. 완씨 정권은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참(Cham)인의 문화를 없애기 위해 많은 불교 사찰을 세웠는데, 부춘(富春)의 천모사(天姥寺)가 그 중심이었다. 완씨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원소를 비롯한 여러 승려를 초청하였다. 원소는 참파(Champa, 占婆, 192~1832) 왕국의 옛 도시 비자야에서 10개의 탑을 세우고, 원소선파를 세웠다. 이 종파는 나무아미타불을 선(禪)의 공안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선과 정토사상의 합일을 주장하는 것이다. 원소선파는 현재 베트남 남부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3) 요관파(了觀派)

임제정종에 속하는 종파인 요관파(了觀派)는 원소 이후에 광남국에서 활동한 임제정종의 요관(了觀, ?~1743)에 의해 형성되었다. 광남국의 완씨 정권은 ‘후에’에 200개의 개인 사찰을 세우고 승강제(僧綱制: 승려를 통솔하는 관직제도)를 도입해서 많은 승려를 통제했는데, 임제정종을 보호하고 승강(僧綱)에는 임제정종의 승려만 임명하였다. 그래서 요관파는 베트남 중남부에서 세력이 강하다.

(4) 졸공파(拙公派)

졸공파도 임제정종에 속한다. 졸공(拙公, 1590~1644)은 중국의 복건성 출신이고 임제종의 승려이다. 그는 처음에는 캄보디아에서 16년 동안 불교를 가르쳤고, 만년에는 베트남 중부와 북부에서 20년 동안 불교를 가르쳤다. 젊었을 때 임금과 백성을 위해서 유학을 연구하고 여러 가지 학문에 통달하였던 졸공은, 영복선사(寧福禪寺)에서 활동하면서 황제, 황족, 고관을 비롯해서 상류사회의 남녀 불자들에게 설법하였다. 그는 설법 중에 유교와 도교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졸공은 불교의 오계(五戒)와 유교의 오상(五常)이 같은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유교는 별, 도교는 달, 불교는 태양이라고 비유하면서 불교우월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졸공은 지재(持齋)와 염불을 중시하였고, 무명(無明)을 제거하면 그때그때의 장소가 그대로 안락국(安樂國)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 재가생활을 하면서도 그 생활 그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선종과 정토신앙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졸공이 입적한 뒤에는 불적사(佛跡寺)에서 졸공의 유체(遺體)에 옻칠하여 육체상을 안치하였는데 불자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졸공어록(拙公語錄)》이라는 책이 남아 있다.

(5) 수월파(水月派)

임제정종의 한 종파로, 졸공의 제자 명행(明行, 1595~1659) 계열을 일컫는다. 중국 강서성(江西省) 출신인 명행은 베트남에 와서 졸공을 만나, 불이(不二)의 마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633년에 명행은 졸공과 함께 수도[都]로 갔고, 졸공의 지시를 받아서 중국에 다시 돌아가서 경전을 가지고 와서 불적사(佛跡寺)에 보관하고 경전 일부는 불적사에서 판각했다. 명행은 황제를 수행하는 행렬에 속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황제에게 벼슬을 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복선사(寧福禪寺)에서는 황후도 명행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였다. 영복선사에는 황제가 세운 비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명행을 등각(等覺)을 이룬 대선사이자 화신보살(成等覺大禪師化身菩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현재까지 부처를 모시는 봉청(奉請)의 의식을 하기 전에서 졸공과 명행에게 받들어 청한다. 베트남불교에는 인도와 중국 출신의 승려가 많지만, 이렇게까지 대접을 받는 승려는 졸공과 명행뿐이다. 베트남 북부의 불교계에 졸공과 명행이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화성(淸化省) 택림사(澤林寺)에는 명행의 동상(銅像)이 있는데, 베트남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제작된 동상으로 유명하다.

(6) 보산기향파(寶山奇香派)

1848년에 성립한 정토교의 신흥교단으로 단명의(段明誼)에 의해 세워졌다. 지역적으로는 베트남 남부의 메콩 강 삼각주에서 성립되어 삼각주 농민들 사이에 그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단명의는 메콩 강 삼각주와 캄보디아의 경계에 위치하는 칠산(七山)의 산림과 사찰에서 수행한 뒤, 1849년에 사이공 남쪽의 서안사(西安寺)를 거점으로 하여 포교를 시작했다. 그는 4가지 은혜 곧 부모의 은혜, 나라(국왕과 조상)의 은혜, 삼보(三寶)의 은혜, 인류 동포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부적을 사용해서 병자를 치료하였다. 또한 단명의는 자신이 살아 있는 부처[活佛]라고 하면서 신자를 모았다.

보산기향파가 제시하는 이상적(理想的) 세계는 여러 가지를 혼합한 것이다. 중국 고대의 성스러운 황제인 요순(堯舜)의 시대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極樂淨土), 미륵의 도솔천의 정토, 신선의 봉래산의 경계[蓬萊境] 등의 이미지를 혼효(混淆)한 것이다.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한 거사불교인 보산기향파에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사랑할 것[忠君愛國]을 말하고, 이상적 세계가 도래할 때에는 베트남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메콩 강 삼각주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보산기향파는 프랑스에 저항하는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 때문에 보산기향파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7) 화호교(和好敎, 화하오)

화호교는 20세기에 들어서 황부수(黃富數)가 보산기향파를 계승해서 세운 종파이다. 황부수는 보산기향파 제4대 교주를 자처하는 인물인데, 캄보디아 국경과 가까운 화호촌(和好村)에서 태어났다. 병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칠산(七山)에 올라가서 승려의 도움으로 치유된 그는 1939년에 화호촌에 돌아가서 화호교를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황부수는 물과 부적을 활용해서 치병(治病)하였는데, 현재는 하원(下元)의 시대로서 말법이고, 곧 상원(上元)이라고 불리는 이상세계가 온다고 말하고, 그것을 용화회(龍華會)라고 했다.

화호교에는 불교와 도교 등의 가르침이 섞여 있다. 사성제(四聖諦), 12인연, 팔정도 등의 불교의 기본이념과 아미타불 신앙, 미륵신앙, 도교, 조선(祖先)숭배 등이 서로 섞인 것이다. 그리고 4가지 은혜를 말하는데, 이는 보산기향파의 주장과 같다. 화호교에서는 사찰을 짓지 않고 제단에서 여러 신앙 대상, 곧 석가모니, 여러 부처, 조선(祖先), 하늘[天] 등에 제사 드린다. 제2차 대전 말기에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는 군사 집단으로서 활동하며, 프랑스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현재도 메콩 강 삼각주 농민들이 화호교를 주로 신앙하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 지배 아래서 베트남불교(보향기향파, 화호교)는 반권력적이고 반식민지주의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로 가톨릭이 사회의 상층부에 침투하였다면, 불교는 고통받는 민중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8) 까오다이교(高台敎)

1917년에 오문소(吳文昭)가 창립한 종교이다. 오문소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하급관리였다. 당시에는 남베트남의 지식인 사이에서 강신술회(降神術會)가 유행하였다. 칸토 시(市) 부근의 사찰에서 열린 강신술회에 참석한 오문소는 자신이 고태(高台)의 영(靈)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고태(高台)는 지상(至上)의 궁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고태상제(高台上帝)를 지상신(至上神)으로 신앙하는 종교적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자신의 지인들에게 하나의 큰 눈[巨眼]을 신(神)의 상징으로 예배하도록 하였다. 까오다이교에서는 신(神)이 인간세계에 보여준 제3의 눈[三番目]의 제도(濟度)를 믿으라고 한다.
1926년에 여문충(黎文忠)이 신자들을 교단으로 조직한 뒤에 까오다이교는 서녕성(西寧省)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도교, 불교, 기독교, 전통적 민간신앙, 유교, 그리스철학을 융합하였다. 1935년 범옥석(范玉石)이 제2대 교주가 되면서부터 신자의 수효가 늘어났고, 이 신자들을 로마 가톨릭의 조직과 유사하게 편성하였다.

제2차 대전 말기에 까오다이교는 민주사회당을 창설하고, 베트남독립연맹, 곧 베트민전선의 남부행정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그 이후에 남베트남에서 중요한 정치집단으로 자리 잡은 까오다이교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와 제네바 협정 이후 응오딘지엠의 독재정권 시대에 권력을 반대하는 대표적 정치세력이 되었다. 까오다이교는 앞에 소개한 화호교보다 더 혼합종교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불교의 분파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9) 걸사파(乞士派)

민단콴(明灯光)이 1944년에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기초해서 세운 종파이다. 캄보디아에서 상좌부불교를 배운 민단콴은 상좌부불교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대승불교를 융합할 것을 지향하였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베트남불교는 대부분 국가의 보호를 잃고 대중의 종교가 되었고, 그에 따라 복합적인 성격이 강화되었으며 종종 반권력적 정치집단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남부의 메콩 삼각주 지역에는 크메르 계열 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캄보디아불교의 영향을 받아 상좌부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3) 현대의 베트남불교: 20세기 중반 이후

1945년 8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트남 남부는 영국이 제국주의 청산을 맡았고, 베트남 북부는 중국이 제국주의 청산을 맡았지만, 1946년 11월 프랑스가 관세를 문제 삼아 프랑스-베트남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마지막 국면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베트민(북부의 베트남독립연맹)이 프랑스 군대에 승리하면서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 제네바 협정에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임시로 분단하고, 호찌민(Ho Chi Minh)의 정부군은 북위 17도선의 이북으로 옮겨가고, 프랑스군은 남부로 이동하였다.

제네바 협상이 진행되던 때인 1954년 6월에 바오다이(Bao Dai)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수상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지엠은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바오다이를 퇴위시키고, 1955년 10월 베트남공화국(사이공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11월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지엠과 그의 동생 누(Nhu)가 사망하였다.

지엠 정권은 가톨릭을 보호하고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에 임제종의 종장(宗長) 틱꽝득은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비폭력 항쟁에 참여하였고, 정부에 여러 번 간곡한 편지를 보내서 불교탄압을 중지해 달라고 촉구하였지만, 지엠 정권의 불교탄압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에 틱꽝득은 1963년 6월 11일 판딘퐁(Phan Dinh Phung) 거리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몸에 기름을 붓고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분신하였다.
이와 같은 틱꽝득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은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와 함께 선(禪)의 자유를 실천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남베트남의 대중을 위해서 대수고(代受苦)의 자비행, 곧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서 중생을 대신해서 고통을 받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의 ‘깨달음의 자유’와 ‘사회제도의 자유’를 접목한 것으로, 몸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에서 나오는 자유와 불교탄압에 대한 자유를 동시에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틱낫한(Thich Nhat Hanh, 1926~ )

 

틱낫한(Thich Nhat Hanh, 1926~ )은 1965년 미국에 가서 평화안을 제시한 뒤, 미국과 프랑스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틱낫한은 참여불교를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교의 가르침을 이용하거나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불교를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의 평화를 발견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자신의 평화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명상을 강조한다. 여기서 명상을 한다는 것은 사물을 깊게 보는 것이고, 어떻게 자신이 바뀔 수 있고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는지 밝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4. 베트남불교의 현황과 전망

베트남 인구는 8,580만 명(2009년 기준) 가운데 불교를 믿는 사람은 베트남 국민의 3분의 2가 될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등록된 신자는 약 1천만 명(전체 인구의 약 11.7%)이다. 전국적으로 도시와 지방에 사찰이 많이 있다. 가톨릭은 16세기경부터 포르투갈이나 프랑스 사제에 의해 전파되었는데, 신자는 약 550만 명(전체 인구의 6.5%)이다. 개신교는 17세기경부터 전해졌는데 신자는 약 100만 명(전체 인구의 약 1.1%)이다. 그리고 까오다이교 신자는 약 240만 명(전체 인구의 약 2.8%)이고, 화하오교 신자는 130만 명(전체 인구의 1.5%)이다.

베트남승가회는 2006년 현재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였다. 이 단체는 무료진료를 해주는 병원 700여 개를 설립하였고, 165개의 학교, 16개의 유치원, 장애어린이 보육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원활동은 베트남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쿠바나 러시아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피해자들 같은 다른 국가의 불우한 이웃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2006년 현재 인도주의 활동기금으로 4,000억 VND(미화 2,480만 달러)의 후원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베트남 VNA통신에 따르면, 베트남승가회에는 2006년 현재 3만 9,371명의 비구와 비구니가 있고, 사찰은 1만 3,775개가 소속되어 있다. 베트남승가회에는 4개의 불교협회를 두고 있는데, 특히 하노이, 호치민, 후에에 있는 3개 협회에서는 2006년에만 1,900명의 비구와 비구니가 교육을 마쳤고, 1,200명의 승려가 공부하고 있다. 또한 베트남승가회는 8개의 대학 수준 훈련과정을 운영하고 있고, 31개의 고등학교, 100여 개의 불교초등학교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매년 우수한 비구와 비구니를 인도, 미얀마, 미국, 호주, 중국, 스리랑카, 프랑스 등의 나라에 유학을 보내고 있다.

베트남불교 중앙승가위는 1980년 10개 종파가 연합하여 만든 베트남불교의 최고협의기관이다. 그 이전에는 지역별로, 곧 남부, 중부, 북부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앙승가위는 1989년 이전까지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1989년 재정비된 이후에는 확고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부기관이나 당에는 종교를 담당하는 부서가 없기 때문에 중앙승가위에서 자율적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한다.

이처럼 베트남불교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베트남불교가 중생, 곧 인민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정권과 독립투쟁을 할 때는 불교사원은 독립투사들의 양성소이자 피난처 역할을 했다.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분열되었을 때에는 북베트남 승려들은 자진해서 군인이 되었고, 북베트남의 불교도는 남베트남의 승려 및 불교도와 신앙적인 측면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는 나라는 분열되었지만, 불교의 신앙에서는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만큼 불교가 베트남 통일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또 베트남 통일 이후에는 국민의 재교육이 필요했는데, 베트남 남부의 사찰은 저녁때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재교육 장소로 크게 활용되었다.

베트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이웃 나라 캄보디아에서처럼 대량학살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의 하나도 불교의 자비에서 찾을 수 있다. 베트남 통일에 기여한 남부와 북부의 승려와 신도들이 살생을 반대하였고, 그에 따라 베트남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공민부적격자’라고 판정받은 사람들이 선박을 이용해서 베트남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교의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다. 1976년 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된 뒤 일부 승려들이 여러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서구로 망명을 떠났지만, 베트남에 남아 있던 저항세력들은 베트남불교연합(UBCV) 등의 반정부 단체를 만들고 지하운동에 들어갔다. 베트남불교연합은 1981년에 베트남 정권에 의해 반정부단체로 규정되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무실을 강제로 철거당했다. 베트남불교연합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 인터넷을 통해 베트남 사회의 인권탄압과 종교탄압을 세계여론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 단체의 요구는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베트남에서의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고, 둘째 베트남불교연합의 정치적 활동을 허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체에서는 2005년 1월 틱낫한의 베트남 방문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베트남 정권이 틱낫한의 방문을 정치적으로 악용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와 교류

한국불교와 베트남불교의 교류는 1990년대 후반에야 물꼬를 텄다. 1996년 4월 16일 당시 〈법보신문〉의 대표 설조 스님, 조계종 포교원장 이성타 스님, 〈법보신문〉 박경훈 주필 등 8명의 일행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한 것이다. 한국불교 방문단은 도무오이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베트남불교 최고지도자인 불교연구원장 킴퀑투 스님을 예방하고, 베트남 정부 종교위원회 부쟈탐 위원장과 만나서 한국과 베트남 불교계의 공식교류 추진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

 

이병욱 
고려대 강사.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술로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등이 있다. 현재 중앙승가대, 동국대 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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