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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불교의 역사와 현황 / 송위지
특집 | 동남아시아불교 집중 탐구
[69호] 2017년 03월 02일 (목) 송위지 songwc55@naver.com

1. 캄보디아의 개황

   

송위지
성원불교대학장

캄보디아의 정식 명칭은 캄보디아왕국(Kingdom of Cambodia)이며 인도차이나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수도는 프놈펜(Phnom Penh)이다. 베트남, 라오스, 태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북위 10~14°, 동경 103~107°에 걸쳐 있다. 국토 면적은 18만 1,035㎢로 한반도의 약 85%, 남한의 약 1.8배로 동서 580Km, 남북 450Km의 길이에 광대한 평야와 길고 넓은 강, 거대한 호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토 전역에 원시림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몬순기후로 20~40°C의 기온 분포를 보이는데, 3, 4월이 가장 덥고 1월이 가장 서늘하며 5~10월은 대체로 우기이고 11~4월은 건기이다.

인구는 1975년부터 79년까지 소위 킬링필드라는 사건으로 50만 명 이상이 급감하여 1980년에 650만 명 정도로 줄기도 했으나, 그 이후 꾸준히 늘어 2016년 기준 약 1,545만 명에 달한다.

주요 종족은 크메르족이고 화교, 베트남인, 참(Cham)족, 카족, 타이족, 퓨논족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크메르족은 인도차이나반도의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분포된 종족으로, 오스트로아시아어계의 종족에 속하는 크메르어를 사용하며 메콩강 중류 지역인 캄보디아 평원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인도문화를 받아들여 힌두교와 불교문화를 꽃피웠는데,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는 앙코르와트가 있다. 참족은 주로 이슬람교도로 크메르-이슬람이라 불린다.

캄보디아의 정부 형태는 입헌군주국으로, 국가원수는 국왕선출위원회에서 선출되는 국왕이며 종신직이다. 행정수반은 총리이다. 입법부는 양원제로 임기 6년의 상원은 61석, 임기 5년의 하원은 123석으로 구성되며, 총리는 하원 총선거에서 최다 득표한 다수당에서 선출되는데 임기는 5년이다. 정부의 성향은 친서방 비동맹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사용하는 언어는 크메르(Khmer)어인데 지식층과 비즈니스계를 중심으로 불어, 영어가 통용되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영어 사용이 확산하고 있으며, 화교 사회를 중심으로 중국어가 통용되고 있다.

종교는 헌법에서 불교를 국교로 규정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전 국민의 약 95%가 불교(상좌부불교) 신자이고 이슬람교 3%, 기독교 2%로 구성되어 있다.

2. 불교의 전래와 수용

전설에 의하면 고대 캄보디아는 인도에서 건너온 왕이 이 지역의 여왕과 결혼하여 개국했다. 이는 캄보디아의 문화와 종교가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의미한다. 역사서에 의한 캄보디아에 관한 특징적인 설명 중 하나는 불교의 전래가 국가의 건국보다 앞선다는 점인데, 동남아의 많은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역사 서술이 고대로 올라갈수록 해당 지역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온전한 역사서에 의존하지 못하고 외부의 역사서나 기록 특히 빠알리어로 기록된 자료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캄보디아의 불교 역사를 서술함에서 빠알리어로 기록된 자료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양서(梁書)의 《부남전(扶南傳)》과 수서(隋書) 《진납전(眞臘傳)》 주달관(周達觀)의 《진납풍토기(眞臘風土記)》 등의 자료도 이 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빠알리어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 황제(B.C. 269~232)에 의해서 캄보디아에 불교가 전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전해진다. 아쇼까 황제는 칼링가와의 전쟁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보고 불교로 개종하여 불법(佛法, Buddha Dharma)에 따라 인도를 통치했다. 불법을 치세의 규범으로 삼은 아쇼까 황제는 불법의 세계화에도 기여했는데 그 일환으로 전개한 것이 전도사의 파견이다. 아쇼까 황제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나 아프리카까지 전도사를 파견했는데 그중 한 지역이 소나(Soṇa) 스님과 웃따라(Uttara) 스님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수완나부미 즉 ‘황금의 나라’라고 불렸던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이라고 추정되는 것이다. 수완나부미는 미얀마 · 타이 · 말레이반도 · 수마트라라는 이설도 있다. 주로 벼농사가 성행하는 지역으로 ‘황금의 나라’의 황금은 벼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리랑카의 빠알리어 연대기인 《마하왕사(Mahāvaṃsa, 大王統史)》에는 기원전 309년에 캄보디아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이 불법을 전할 때 이 지역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란 궁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바다에 있는 공포의 여신이 아이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에는 사내아이가 없었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저들은 필시 바다에 있는 공포의 여신이 보낸 사자들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죽이기 위해 무장을 하고 다가왔다. 이들을 본 스님들이 “무슨 일들입니까? 우리는 그 여신의 친구가 아니고 열심히 진리를 수행하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바다에서 공포의 여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두 스님은 신통력을 발휘하여 여신과 부하들의 두 배가 되는 숫자의 신을 만들었다. 이것을 본 여신은 ‘이 나라는 필시 사람들의 소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하늘로 날아갔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은 그 자리에서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utta)》을 설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귀의하여 오계를 수지 하였다.

이때 불교를 믿기 시작한 이가 6만 명이었고 3,500명에 달하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야의 아들과 그들의 딸 중 1,500명이 출가했다. 이것이 캄보디아 지역에 역사보다 먼저 전해졌다고 하는 불교의 전래 내용이다.


3. 캄보디아불교의 역사

캄보디아불교는 대체로 역사적 시기를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① 후난(扶南) 왕조 시기(A.D. 86~550)
② 첸라(眞臘) 왕조 시기(550년~802)
③ 앙코르 왕조 시기(802~1431)
④ 암흑기와 프랑스 식민지배기(1431~1953)

1) 후난(扶南) 왕조(A.D. 86~550)
이 시대 구분은 빠알리어 연대기에 의한 불교의 전래설이 아니라 중국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캄보디아를 ‘산(山)의 나라’라는 뜻으로 후난(扶南)이라고 불렀다.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550년까지 존재했던 후난 왕조가 캄보디아의 첫 번째 왕조로 나중에는 발남국(跋南國)이라고 불렸다. 인도에서 건너온 혼전(混塡)이 캄보디아로 와서 그곳의 여왕 유엽(柳葉)과 싸워 승리하여 세운 나라가 후난이다. 후난 왕조에 관한 역사적 사료는 찾기 어렵지만,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각각 두 곳씩 네 곳에 남아 있는 각문(刻文)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각문에 의하면 당시의 캄보디아는 불교와 브라만교 즉 인도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베트남의 보창에서 발견된 각문에 의하면 후난국의 왕가인 카운디나가의 후계자 중 범사만(范師蔓)이 이웃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후난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그는 열렬한 불교도였다. 3세기 전반 열렬한 불교 신도였던 범전왕(范栴王) 시절에는 많은 불사를 일으키고 승려를 존경하는 등, 불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썼으며 중국의 오나라와도 교류했다.

후난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와도 교류했으며, 중국과 인도의 교역에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서기 484년에는 나가세나(Nāgasena)라는 인도의 승려가 후난의 자야와르만(Jayavarman, 闍那跋摩)의 지시로 중국 남제의 무제에게 상아로 만든 탑과 금화, 용왕상(龍王像) 등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후난에서는 브라만교를 국교로 신봉하여 시바 신을 모시고 있으나 불교 역시 활발하여 신도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5세기 초에는 카운디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상가팔라(Saṅghapala, 460~524) 같은 고승도 배출하였다. 그는 512년 《아육왕경》 10권 등 많은 불전을 가지고 들어가 중국 양무제(梁武帝)의 명을 받아 역경에 종사했음이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3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기록되어 있다.

6세기 초인 503년 자야와르만은 또다시 중국으로 신하를 파견하여 산호로 만든 불상과 보살상과 백단향으로 만든 상(像) 등을 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양서(梁書)와 《불조통기(佛祖統記)》에 전한다. 이때 중국과 교학적인 교류도 활발하여 6세기 초 만드라세나(Mandrasena)는 《문수반야경》 2권을 크메르어로 번역했으며 자야와르만의 왕위를 강탈한 루드라와르만(留陀跋摩)은 519년 중국의 황제에게 전단향으로 만든 불상을 보냈다. 그때 사절 중 한 명이 ‘후난에는 3m의 크기에 달하는 부처님의 모발사리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자 중국의 황제는 승려 석운보를 후난으로 보내 모발사리를 모셔 오도록 했다.

비록 왕위를 강탈했지만 루드라와르만은 크메르 각문에 ‘그는 삼보에 귀의하고 스스로 매우 신앙이 깊어 모든 부정(不淨)을 깨끗이 씻었다’라고 되어 있어 불교에 귀의한 후 청정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카운디냐의 자야와르만과 그의 후계자의 모습이 앙코르 보레이에 있는 프놈다 지역을 중심으로 석상, 청동상, 목상으로 조성되었다. 이 영향은 해외에도 파급되어 현재 베트남 트리빈 주 남쪽에 있는 앙코르 보레이와 트라페앙밴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석상 조각의 중심지이다.

불교 3대 여행서의 하나인 의정(義淨, 635~713)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권1에는 후난국과 다음 왕조인 첸라 왕조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환주(驩州)의 남쪽으로 걸어서 보름, 배를 타면 5, 6일 만에 인도의 첨파, 즉 임피국에 이른다. 이 나라는 정량부(正量部)와 유부(有部)를 숭앙하고 있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한 달간 가면 발남국(跋南國)에 이른다. 옛날에는 부남 또는 나국(裸國)이라 불리었던 나라다. 이곳 사람들은 천신을 모셨는데 뒤에 불교가 왕성해졌다. 현재는 나쁜 왕이 나와 불교도 멸망시키고 승려도 없다. 불교 이외에도 여러 가지 종교가 성행하고 있다.

이때는 이미 불교가 쇠하던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나국(裸國)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에서는 옷을 아주 간단히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나쁜 왕이 나와”의 나쁜 왕은 후난국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후난국 다음 왕조인 첸라 왕조의 바바바르만 1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첸라 왕조(550~802)
동남아의 중심 국기로 흥성했던 후난은 속국이었던 첸라(眞臘)의 사나바르만 왕에게 멸망하였다. 사나바르만 시대의 특징은 대승불교가 이입되었다는 것이다. 첸라 시절의 불교는 많이 쇠퇴하였으나 626년에 조성된 삼보르 프레이 쿡(Sambor Prei Kuk) 명문과 캄보디아 북부의 앙코르 인근의 도시인 씨엠레아프(Siem Reap)에 관세음보살상 등이 남아 있다. 당시 메콩삼각주 지역에는 산스끄리뜨에 기초한 설일체유부 불교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서기 600년부터 800년 사이에는 크메르 스타일의 불상과 많은 대승 보살상들, 시바와 비슈누 같은 힌두 신상들의 흔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서기 62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씨엠레아프 지역의 사원 타프롬(Ta Prohm)의 명문에는 불법과 승단이 번성했음이 새겨져 있다.

첸라는 처음에는 후난의 지배를 받았으나 양(梁)의 대동(大同) 연간(535~545) 독립하였으며, 후난에서 이주해온 후난 왕실의 후예 바바바르만 1세에 의해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바바바르만 1세는 왕위에 올라 후난과 싸움을 계속했으며 수나라와 교류하기도 했다. 바바바르만 2세 역시 후난과 싸움을 지속하였으며 그 후 자야와르만 1세가 첸라를 통일했다.

후난의 역사는 중국의 사서에 의한 것이 많았으나 첸라 왕조의 역사는 각문을 통해 알려진 것도 많다. 중국의 수서(隋書)에 의하면 첸라에서는 대승불교가 융성하면서 상좌부불교와 공존하였으며 이들 부파의 흥성으로 많은 승려가 있었다. 특히 바바바르만 1세는 왓 쁘레이비에르(Wat Prey Vier)와 왓 쁘라삿(Wat Prasat)에 이 시절에 관한 기록은 물론 불타를 지킨 용(Naga)에 관한 기록 등을 남기기도 했으며, 또 다른 각문에서는 관세음보살상이 조성된 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7세기 초인 이샤나와르만 1세(611~635) 시절에 불교는 쇠퇴하여 사원이나 승단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불교 건축, 조각, 비문 등은 많이 남아 있지만, 쇠퇴의 원인은 밝혀지지는 않았다. 바바바르만 1세 이후 첸라는 왕위 계승문제가 원인이 되어 북부 산지의 ‘육지 첸라(陸眞臘)’와 남부 저지대의 ‘물 첸라(水眞臘)’로 나뉘었다. 이후 9세기 초에 자야와르만 2세가 재통일하여 앙코르 왕조를 열었다.

   
앙코르와트

3) 앙코르 왕조(802~1431)
9세기 들어 자바 즉 말레이, 자바, 수마트라를 지배하던 스리비자야로부터 돌아온 자야와르만 2세(802~850)가 이 지역을 통일하고 크메르 왕국을 세웠다. 요즘도 캄보디아를 부르는 다른 이름은 크메르이다. 크메르는 산(山)이라는 뜻으로 이는 프놈펜의 프놈과 같으며 첸라 시절의 북부 산지의 육지 첸라와 관계가 있는데, 9세기에 시작하여 13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룬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야와르만 2세는 802년 자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임을 내세우기 위해 스스로 신으로부터 왕권을 전수했다는 데와라자(Deva Rāja) 의식을 거행했다. 데와라자 의식의 거행은 대승불교의 최고 이상 중 하나인 보살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상을 내포하는 것으로, 주변 강대국에 대하여 크메르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의미와 함께, 데와라자 사상을 구체화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민중을 결집시키는 데 용이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야와르만 2세의 통치는 캄보디아의 큰 호수 톤레사프 북쪽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왕조를 차례로 복속시켜 나갔다.

당시의 수도는 불교 유적으로 유명한 앙코르톰이다. 본시 앙코르라는 말은 캄보디아 방언인 ‘노코르(nokhor)’에서 온 말로 산스끄리뜨의 ‘국가(國家)’나 ‘도읍(都邑)’을 의미하는 ‘나가라까(nāga-raka)’에서 온 말이다. 크메르 왕조의 터전을 다진 자야와르만 2세는 불교와 함께 힌두교도 동시에 숭상해 두 종교가 공존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크메르에서 캄보디아로 국호를 바꾼 인드라바르반(877~889)은 ‘대왕도(大王都)에 있는 사원’이라는 뜻을 지닌 앙코르와트(Ankor Wat)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왕들이 앙코르와트의 건설을 시작한 것은 그들의 정령숭배 신앙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즉 그들은 왕 자신이나 그들의 가족인 왕족이 죽으면 그들이 믿던 신과 죽은 이가 합일한다는 신앙을 가졌으며 그 결과 앙코르와트의 건설이라는 역사(役事)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의 왕들은 개인적으로는 주로 힌두교를 신앙하였으나 제상을 비롯한 여러 신하에 불교도를 기용하였으며 각종 불사를 후원하기도 했다. 왕실의 이런 이중적 신앙 형태는 힌두교의 시바 신과 불교를 함께 신봉하는 캄보디아 특유의 종교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드라바르만의 아들 야쇼와르만 1세(889~900)는 수도를 하리하라에서 앙코르톰으로 옮기고 수도의 이름을 ‘야소다라의 도시’라는 뜻의 야소다라푸라라고 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때 캄보디아는 동쪽으로는 지금의 베트남 남부인 참파와 서쪽으로는 타이족을 누르고 버마와 경계를 접하며 인도차이나반도의 대제국이 되었다. 특히 라젠드라와르만 2세(944~966)의 경우 열렬한 브라민 계통의 신자였으나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열심히 불경 공부를 하였다. 후에 왕이 되어 불교의 초석을 다지고 보살폈던 카윈드라아리마타나는 라젠드라와르만 2세의 신하였다. 이 시기에 스리랑카의 폴론나루와 왕조의 도움으로 세워진 사찰인 랑카위하라는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상좌부불교 사원이다.

1002년에 왕위에 오른 수리야와르만 1세(1002~1050)는 그동안 계속 신봉하던 혼합 신앙 형태를 버리고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상좌부불교의 전통만을 채택하였다. 전제군주의 통치기에 왕의 종교 성향은 한 종교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캄보디아의 불교 역시 수리야와르만 1세의 종교 성향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수리야와르만 1세는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 당시 주변에 살던 몬족들도 상좌부불교를 신봉했다.

수리야와르만 2세(1113~1145)는 참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북쪽으로는 중부 라오스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메남 강 하류와 베트남 통킹의 이조(李朝)까지 공격하여 캄보디아 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또한 이 시기에 앙코르와트를 완성하여 캄보디아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초에 건립되었으며 앙코르는 왕도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과 합일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야와르만 2세가 브라만교의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브라만교의 신상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나 건물 · 장식 · 부조 등 여러 면에서 브라만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 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건물의 형태나 석조 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 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자야와르만 5세의 신하 키르티판디타는 불교 신도로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전래해온 불교 문학과 철학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이후 캄보디아는 세력이 약해져서 1177년에는 참파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었으나 캄보디아의 아쇼까 왕 또는 전륜성왕이라고 불리는 자야와르만 7세(1181~1220)가 즉위하면서 캄보디아는 다시 흥기하여 참족을 몰아내고 참파를 다시 17년간 지배하는 등 마지막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자야와르만 7세는 수도를 재건하여 앙코르톰(Ankor tom)이라 불렀다. 그는 관세음보살을 숭배하여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일컬었으며, 오늘날 ‘앙코르의 미소’ 또는 ‘크메르의 미소’라고 알려진 독특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과 눈을 반쯤 뜬 채 아래로 향한 선정에 든 형태의 눈, 많은 머리를 가진 기념상들을 각지에 세웠다. 이 조각들은 크메르 불교미술의 대표작으로 크메르인들은 자신들을 불행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온 보살이라고 믿었다.

자야와르만 7세가 세운 또 다른 사원으로는 1186년에 세워진 타프롬 사원이 있다. 이 사원에는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칭했던 자야와르만 7세의 어머니(황태후) 즉 보살의 어머니상이 세워져 있으며, 자야와르만 7세의 전지전능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진 비문이 있다. 모계를 찬양하는 타프롬 사원 외에도 자야와르만 7세는 부계를 찬양하는 사원인 프레아칸(Preah Khan)을 지어 보살에게 헌공하였다. 이런 불교적 치세와 함께 자야와르만 7세는 백성들의 국리민복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주요 도로를 만들고 병원을 지었다. 한편 왕은 외국과의 불교 교류에도 힘써 아들 타말린다를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스리랑카의 마하비라 사원에서 승려로서 득도하고 빠알리 경전을 수학하고 정통 상좌부불교를 공부하게 하였다. 특히 자야와르만 7세의 왕비였던 자신의 여동생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인드라데위는 타이에서 도입된 상좌부불교를 깊이 수행하였다. 그녀는 계급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아서 낮은 계급 출신의 나젠드라퉁가, 틸락그다라, 나렌드라슈라마를 비구니로 득도시켜 공경하였다. 이들 비구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설화를 담은 《자타카》를 연극화하기도 했다.

14세기에 상좌부불교가 완전히 정착한 캄보디아는 불교를 통해 이웃 국가와 선린외교를 펼쳤는데 특히 라오스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 라오스의 왕 화농과 캄보디아의 공주가 결혼하였는데 캄보디아에서 상좌부불교를 교육받은 공주의 영향으로 라오스 왕실은 물론 라오스 전국에 걸쳐 상좌부불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불기 1967년(서기 1423년)에는 마하나나시디를 좌장으로 하는 8명의 캄보디아 승려가 스리랑카의 승려를 은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3차에 걸친 타이족의 앙코르톰 공격으로 앙코르와트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캄보디아의 서쪽 즉 지금의 태국에서 아유타야 왕조(1350~1569)가 강해지자, 캄보디아인들은 1431년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기게 되면서, 마침내 전성기를 구가하던 앙코르와트 시절을 마감하게 되었다.

4) 암흑기와 프랑스 식민지배기(1431년~1953년)
씨암 즉 지금의 태국에서 지속적으로 압박해오는 외환을 겪던 앙코르 왕조는 법왕이라고 불리는 앙창 1세(1505~1555)가 이들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하지만 씨암과 라오스의 압박이 지속되어 1593년 앙창 1세가 세웠던 로베크가 함락되고, 씨암의 영향으로 인하여 대승불교보다는 상좌부불교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숭배되던 브라만 사원은 탑으로 바뀌었으며 시바 신의 표상인 링가는 불상으로 대체되었는데, 이것이 상좌부불교 속에 대승불교의 요소와 힌두교의 요소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이다. 또한 17세기 초에는 체이치타 2세(1618~1628)가 재기를 도모했으나 씨암과의 싸움에서 패했으며 이후에는 베트남 완조의 공격도 받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베트남 왕가와 씨암 왕가가 번갈아 공격을 가해 와, 캄보디아는 혼돈에 빠졌다. 이후 씨암의 점진적인 서북지방 지배와 베트남 완조 이민의 메콩 강 지배로 인해 결국 19세기에 들어서서 캄보디아는 두 국가에 분할 복속되고 말았다.

캄보디아에는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일본인들이 진출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메콩 강 하류를 영유한 뒤 베트남의 완조를 대신해서 캄보디아를 놓고 씨암과 다투다가 1860년에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863년부터 프랑스는 가톨릭 중심의 정책을 펴서 캄보디아인들을 개종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캄보디아인들은 상좌부불교를 중심으로 잘 대처해서 프랑스의 식민지배 동안 종교적 갈등이 많이 빚어졌다. 1953년까지 캄보디아를 지배했던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대대적으로 불교 탄압을 자행하기도 했으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앙코르와트의 보존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하지만 외국의 지배 아래서도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캄보디아인들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젊은이와 어린 학생들을 위한 일요법회의 활성화 등 이교도 특히 가톨릭의 공격을 슬기롭게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캄보디아인들의 불교 신앙은 열렬했다. 황의를 입은 승려들은 승복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외국인들은 캄보디아를 ‘승려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로 인해 태국과 같은 강제성은 없지만 캄보디아의 불교는 민중의 의식에 완전히 뿌리 내리는 데 성공하여 웬만한 정치적 격동기에도 종교적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캄보디아왕국(1953~1970)과 크메르공화국(1970~1975)으로 역사를 이어오던 캄보디아는 론 놀 정부를 무너뜨린 크메르 루주의 폴포트(Pol Pot)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시아누크를 가택에 연금하고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를 세운 뒤에 모택동주의에 기초한 극단적인 정책을 펼쳤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모두 부정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관개공사와 토목공사에 강제 노역을 시행하고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처형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폴포트 정권이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 사이의 기간에 200만 명에 이르는 국민과 6만여 승려가 학살당했는데, 이 대규모 학살은 이른바 ‘킬링필드(Killing Fields)’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4. 캄보디아의 불교 현황

캄보디아불교의 승단

1991년 캄보디아 국민당 정부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캄보디아불교의 기반은 비구승들과 사원인데, 사원은 캄보디아인들의 영혼의 안식처이자 생활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불교의 승단은 1855년 이후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마하니까야(MahaNikaya, 大宗師派)와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는 담마유티카니까야 2개의 종파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외양적으로는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승복을 입는 방법이라든가 공양을 하는 방법 등은 거의 유사하다.

이들 승단은 전통적으로 왕이 임명해온 상가 나야까 스님(僧正)의 지도로 통솔되고 있다. 각 종단에는 나야까 스님 아래로 상좌라고 불리는 장로(thera) 스님들이 있다. 승정은 각 사원의 운영을 책임지는 책임자를 임명하며 사원의 책임자는 사원의 운영만 할 뿐 소유권을 갖지는 않는다. 특히 사원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인 문제는 승려들이 관여할 수 없고 신도들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관장하기 때문에 경제적 풍요로 인하여 승려가 타락하는 일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승려들은 식생활을 위해 탁발하며 참선보다는 주로 교리 중심의 공부를 한다. 그 때문에 이웃 미얀마나 스리랑카, 태국 등에서 활발히 수행되는 위빠사나(vipassana)는 승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고, 신도들이 더 참선을 더 즐겨 하는 편이다. 특히 신도들은 집에서도 위빠사나 명상을 하며, 부처님의 전생담인 《자타카》 등, 주로 윤회, 업을 중심으로 한 교리를 배운다. 특히 현세에 공덕을 쌓는 것은 내세는 물론 현세에도 좋은 과보로 돌아오기 때문에 항상 선호하며,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살생을 피한다든가 하는 계율 중심적인 신행과 이웃과 사원을 위한 보시행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강해 매년 우안거를 마친 후 조상을 위한 대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물의 축제도 함께 지낸다.

승려의 수는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마하니까야가 5만 3,200명, 담마유티카니까야가 1,300명 등 5만 4,500명이었다. 사찰 수는 마하니카야가 2,980개, 담마유티카니까야가 110개로 캄보디아 전체로는 3,090개다. 캄보디아의 승단은 상가라자라고 불리는 수장(法王)에 의해 통솔되는데, 서로 독립되어 각자의 교단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정권과 항상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캄보디아불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승단의 사회 교육적 기능이다. 사찰이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며 민중에게 교육하는 기본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은 물론, 대중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사회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재가자의 경우 ‘담마 위나야 빠살(法 · 律學校)’이 개설되어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불교 교리를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자연스러운 종교 교육도 병행한다. 승려가 되는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12세경에 사원에 들어가 사미승이 되고, 만 20세가 되면 구족계(upasampada)를 받아 비구승이 된다. 승려에 대해서는 빠알리어 삼장을 주로 교육하며 외전에 대한 교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비구승이 되면 일반적으로 황색 승복을 입으며 황색 승복은 승려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원에서 시행하는 교육 내용은 상좌부불교 교리에 근거하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내용을 교육하기 때문에 이들 교육을 받은 이들은 기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또한 이들은 비교적 자비롭고 선량하다. 또한 이 나라의 민간 설화 등도 상좌부불교의 영향을 받아 신화적 요소보다는 현실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1970년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불교사원에서 운영하는 초등 빠알리어 학교는 529개, 학생 수 1만 983명, 불교고등학교는 2개, 학생 수 500명, 불교대학은 1개로 112명이다. 1975년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로 승단의 힘이 약해지고 특히 폴포트에 의해 수십만 명이 학살되면서 캄보디아불교도 매우 위축되었으나 헴 삼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몇 군데의 사원이 복구되었다. 복구 초기에는 교세가 미약했지만, 차츰 회복세를 보여 현재는 비교적 활발히 승단이 유지되고 있으며 출가자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캄보디아불교의 특징

“우리는 염려 없다. 불교라는 보물을 잃지 않는 한……” 캄보디아불교의 특징을 말해주는 이 말처럼,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 대부분의 상좌부불교 국가가 그러하듯이 캄보디아인들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사후에도 불교 안에서 살아간다. 태국처럼 모든 남자가 일생에 한 번은 승려 생활을 하며 결혼 등의 풍습이나 축제도 역시 불교식 의례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생활양식은 프랑스의 힘을 등에 업은 가톨릭의 지배에서도 캄보디아인들이 불교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의 방생의식과 유사한 의식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상좌부불교 국가에서는 불살생계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동물을 잘 잡지 않기 때문에 동물을 살려주는 방생의식이 그리 발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인들은 불교의 대표적인 보살행의 하나인 방생을 생활화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물고기나 자라를 사서 방생하지는 않는다. 덫에 걸린 새를 놓아주거나 새장에 갇혀 있는 새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면서 서원을 비는 것이 캄보디아의 불교도들의 방생의식이다.

한국과의 불교교류

2013년의 기록에 의하면 캄보디아에 진출한 우리나라의 교민은 약 5,000명으로 대부분 프놈펜에 거주한다. 씨엠레아프에 1,000명이 있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와 한국불교의 교류는 빈곤 아동에 대한 지원이 로터스월드에 의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또한 한국에 와 있는 캄보디아 이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한국의 사찰이 있으나 그 역시 소수에 불과하다. ■


송위지
성원불교대학장.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켈레니야 대학 대학원 팔리불교학과 졸업(철학박사 학위 취득). 을지대학 교수 역임. 논문으로 〈빠알리 장부 마하 숫티파파나 숫타와 중아함 염처경의 비교 연구〉 〈상좌부불교 국가의 민족 분쟁〉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교집합적 접근〉 외 다수와 역서로 《불교 선수행의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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