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불교 집중 탐구

왜 동남아불교에 주목해야 하는가

1.
우리나라 불교에서 동남아불교에 관한 연구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 지금까지 출판된 동남아불교에 관한 도서도 한두 권에 불과하다. 이마저 일본의 학자들이 현장조사를 통해 확보한 정보를 번역한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이 지역의 불교에 관한 논문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논문들은 동남아시아 지역학에 대한 연구 과정을 통해 수확한 성과물들이다. 동남아 지역을 연구하다 보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확장과 쇠퇴를 거듭해온 불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한국사를 연구하다 보면 불교의 역할이나 성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불교학자에 의한 본격적인 이 동남아불교사 또는 교학 사상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동남아 지역의 불교사나 교리 사상에 대한 연구의 부족은 우리나라 불교학계의 관심이 아직은 대승불교에 집중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승불교를 표방해온 우리나라 불교는 교학과 신앙, 역사에 관한 연구도 대승불교에 한정돼 있다. 동남아불교는 여전히 상좌부불교 또는 소승불교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짙다. 연구 인력의 태부족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과거에 비해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군이 많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아직은 더 넓은 안목으로 그동안 주목하지 않은 새로운 영역으로 눈을 돌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학문적 편식과 관견은 우리나라 불교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 불교는 대체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상좌부불교, 동북아를 중심으로 하는 대승불교, 티베트를 중심으로 하는 밀교권 불교, 그리고 서양에 전래돼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서양불교 등 크게 4개 권역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우리가 속한 대승불교와, 인접한 밀교권 불교는 그런대로 조금씩 연구가 축적돼가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는 유학 등 활발한 교류를 통해 받아들이고 있는 서양의 불교 이론도 한국불교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이에 비해 유독 동남아불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2.
동남아 지역 불교에 대한 역사와 사상에 대한 연구를 확대해나갈 이유는 여러 가지다. 무엇보다 세계 불교에 대한 균형 잡힌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도 절대 필요하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으나 자동차의 네 바퀴 가운데 하나가 공기압이 충분하지 않으면 운행에 장애가 생기는 것과 같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수할 때 동남아불교를 중국불교, 인도불교와 함께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정립하지 않으면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불교학은 애꾸눈을 면치 못한다. 동남아불교는 불교학 연구의 외연 확대라는 목표를 위해서도 우리의 관심 영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둘째는 현실적 수요의 충족을 위해서도 시급하다. 최근 들어 한국불교에는 상좌부불교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북방불교 전통과는 다소 상이하지만 상좌부불교는 비교적 부처님의 원형적 가르침을 보전하고 있다는 것이 많은 불자의 생각이다. 학자들이 관념화된 대승불교에만 집착하고 있을 때 일반 불교도는 보다 쉬운 불교를 찾아 우리가 무시해온 소승불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니까야의 번역, 남방불교 명상센터 수행 체험, 유학승들에 의한 상좌부불교 신앙과 수행 도입 등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 된 지 오래다. 이들에게 동남아 상좌부불교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필수적인 상황이 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면 가중되는 신행상의 혼란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3.
이번에 다루는 특집 ‘동남아시아불교 집중 탐구’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제는 우리 학자들의 안목으로 동남아불교를 연구하고 이해해보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마땅한 전공학자도 없는 현실에서 이런 시도는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수준에서 우리의 동남아불교에 대한 이해와 인식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것도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 분야의 연구 또는 이해에 새로운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취지에 동의해서 부족한 자료를 모아 동남아 여러 지역 불교를 개괄적으로 소개해준 필자들에게 감사드린다.(편집실)

1. 지리 · 역사 · 문화적 개황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스리랑카의 공식 국명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이다. 스리랑카는 인도의 남단에 있는 섬나라이다. 국토의 면적은 65,610㎢이고, 인구는 20,966,000명이다. 법률상 수도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 코테(Sri Jayawardenepura Kotte)이고, 가장 큰 도시는 콜롬보(Colombo)이다.
스리랑카의 옛 국명은 땀바빤니(Tambapaṇṇi, 銅葉洲), 랑까디빠(Laṅkādīpa, 楞伽島), 싱할라(Siṁhala, 獅子國), 실론(Ceylon, 錫蘭) 등이다. 현재의 국명인 ‘스리랑카(Śrī Laṅkā)’는 1972년 6월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고대의 국명인 ‘랑까디빠(Laṅkādīpa)’에서 섬이라는 의미의 디빠(dīpa)를 빼고, 여기에 ‘번영’이라는 의미의 스리(Śrī)를 첨가한 것이다.
스리랑카는 지리적으로 인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양국 간의 오랜 유대로 인해 스리랑카는 인도와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했다. 기원전 3세기경 인도의 승려들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하면서 붓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불교인도(Buddhist India)’의 문화와 문명까지 이식시켰다.

2. 불교의 전래

싱할라(Siṁhaḷa) 왕조의 명단은 《디빠방사(Dīpavaṃsa, 島史)》 《마하방사(Mahāvaṃsa, 大史)》 《쭐라방사(Cūḷavaṃsa, 小史)》와 같은 스리랑카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연대기에는 싱할라족 통치자는 물론 외국인 통치자 명단도 포함되어 있다.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는 곧 싱할라 왕조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했다. 처음부터 싱할라 왕들은 불교를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아리안(Aryan) 싱할라 왕조는 기원전 543년 인도의 방가(Vaṅga, 현재의 Bengal) 왕국으로부터 추방된 위자야(Vijaya) 왕자와 700명의 추종자가 이 섬에 도착하여 ‘땀바빤니(Tambapaṇṇi)’라는 왕국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땀바빤니’ 왕국(B.C. 543~505)을 계승한 ‘우빠띳사 누와라(Upa-tissa Nuwara)’ 왕국(B.C. 505~377)을 종식시키고,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 왕국(B.C. 377~A.D. 1017)을 세운 사람은 빤두까바야(Paṇḍukābhaya, B.C. 377~307) 왕이다. 그는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옮겼는데, 이곳은 약 1,400년 동안 스리랑카의 수도로 남아 있었다.

빤두까바야 사후 그의 아들 무따시와(Muṭasīva, B.C. 307~247)가 왕위를 계승했다. 무따시와 왕은 60년 동안 재위했는데, 그의 둘째 아들 데와남삐야띳사(Devānampiyatissa, B.C. 247~207)가 왕위를 계승했다.

데와남삐야띳사 왕의 통치 기간에서 가장 큰 사건은 마힌다(Ma-hinda)의 스리랑카 도착이었다. 마힌다는 전도단을 이끌고 왕의 즉위 2년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사냥하던 왕을 만났다. 왕은 그를 대단히 명예롭게 맞이했고, 그가 전도한 새로운 종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왕은 마힌다가 설한 《상적유소경(象跡喩小經, Cūḷa-hatthipadopama-sutta)》(MN 27)을 듣고 개종하였다.

이와 같이 기원전 250년 인도 아쇼까(Asoka) 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스리랑카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되었다. 이것을 공인된 불교의 전래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관한 정보와 인도의 강력한 불교 황제의 위대한 활동에 관한 소식이 이 섬에 전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다는 것은 그가 최초로 스리랑카에 불교의 승가(僧伽, Saṅgha)를 성립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장에 의하면 변방에서 구족계(具足戒, upasampadā)를 수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섯 명의 장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마힌다는 다른 네 명의 장로들과 한 명의 사미와 함께 스리랑카로 건너와 최초로 불교의 승가를 성립시켰다.

스리랑카 연대기에 의하면, 마힌다와 데와남삐야띳사 왕과의 첫 만남에서 왕과 수행원들은 불교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였다. 다음 날 마힌다와 그의 동료들은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들어갔다. 그들은 왕이 마련해 준 왕궁에 머물렀다. 그러나 나중에 왕은 도시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인 ‘마하메가와나(Mahāmeghavana, 大雲林)’를 승가에 기증하였다. 마힌다는 이곳을 불교의 본부로 삼았다. 그 후 이곳은 유명한 ‘마하위하라(Mahāvihāra, 大寺)’가 되었다.

3. 불교의 전개 과정

1) 아누라다푸라 시대

데와남삐야띳사 왕의 통치기에 크고 작은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 새로운 종교는 빠른 속도로 국민에게 전파되었다. 이 시기는 왕의 다른 네 명의 형제들이 각각 여러 지방을 나누어 맡아 다스리고 있었으며, 불교의 영향으로 평화와 화합으로 나라가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원전 2세기 중엽, 남인도 촐라(Chola)의 왕자 엘라라(Eḷāla)가 스리랑카에 침입하여 왕을 체포한 뒤, 45년간 이 섬을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 섬의 북쪽 지역은 비록 외국인 통치자의 손에 넘어갔지만, 남쪽 지역인 로하나(Rohaṇa)는 여전히 독립된 상태로 있었다.

이 장기간의 외국인 통치 시기는 결과적으로 스리랑카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른바 국가와 불교에 헌신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로하나의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ī, B.C. 101~77)는 스리랑카의 초기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적 영웅이었다. 그는 ‘왕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를 위해서’ 적과 싸워야 한다고 외쳤다. 젊은 둣타가마니의 기치 아래 전 싱할라 민족이 하나로 뭉쳤다. 이것이 싱할라 민족주의의 시작이었다. 종교-국가주의의 일종인 싱할라 민족주의 영향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열광적으로 불교에 헌신했으며, 싱할라 민족 전체가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도가 아니면 인간으로 간주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싱할라 민족은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불교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전통의 종교적 견해는 ‘불교국가주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비구들이 공식적으로 정치 분야와 세속의 관심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둣타가마니는 자신의 창에 붓다의 사리를 넣어서 다니면서 싸웠다. 결국 둣타가마니는 외국의 통치자였던 엘라라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마하투빠(Mahāthūpa, Ruvanvālisāya)를 비롯한 많은 종교적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 뒤 왕위를 계승한 그의 동생 삿다띳사(Saddhā-tissa, B.C. 77~59) 왕도 닥키나기리 위하라(Dakkhiṇāgiri-vihāra, 南寺)를 비롯한 많은 사찰을 지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로하나의 띳사(Tissa)라는 바라문이 기원전 43년 왓따가마니아바야(Vaṭṭagāmaṇī-Abhaya, B.C. 43~29)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때 마침 남인도로부터 일곱 명의 타밀들이 마하띳타(Mahātittha)에 상륙하여 강한 무력으로 무장한 채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향해 진군해왔다. 남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였다. 기원전 43년부터 14년간 다섯 명의 타밀들이 번갈아 가면서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였다. 이 기간에 왓따가마니 왕은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지냈다.

그때 전례 없는 대기근이 들어 나라 전체가 황폐해졌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었는데, 그들이 존경하던 비구들의 시신까지 먹었다. 수천 명의 비구와 재가자들이 죽고, 많은 사찰이 황무지로 변했다. 마하위하라(大寺)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마하투빠(Mahāthūpa) 또한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다. 많은 비구들은 섬을 떠나 인도로 건너갔다. 국가는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대장로들과 싱할라의 지도자들은 불교의 미래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다. 불교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싱할라 왕들도 불교를 지원해 줄 수가 없었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져 온 삼장(三藏)의 구전(口傳) 전통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비극적인 시기에 승려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본 대장로들은 지역 족장들의 보호를 받아 마딸레(Mātale)의 알루위하라(Aluvihāra)에 모여 ‘진실한 교법을 유지하기 위해서(ciraṭṭhitatthaṃ dhammassa)’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삼장을 문자로 기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사에서 최초로 주석서를 포함한 삼장 전체를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현존하는 팔리 성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이 14년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타밀을 물리치고,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는 니간타(Nigaṇṭha, 자이나교)의 산사(山寺)를 파괴해 버리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앞에 붙인 거대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 無畏山寺)를 지었다. 왕은 이 절을 자신이 불행했던 시기에 자기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마하띳사(Mahātissa) 장로 개인에게 헌납하였다. 또한 왕의 신하였던 다섯 명의 대신들도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띳사 장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각자 사찰을 지어 띳사 장로에게 바쳤다. 이것이 개인에게 사찰을 헌납한 최초의 역사적 사례이다.

마하띳사는 초기에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고, 외진 곳에 살았다. 그런데 나중에 왕이 특별히 초빙하여 아누라다푸라의 마하위하라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권력을 과도하게 휘둘러, 마하위하라 승려들의 명예와 권위를 훼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마하띳사가 속인과 교류했다는 죄목을 들어 빳바자니야깜마(pabbājaniya-kamma, 驅出羯磨)를 실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것은 왕과 대신들의 행위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하띳사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갈마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율장에 따라 욱케빠니야깜마(ukkhepaniya-kamma, 擧罪羯磨)를 부과하려고 하였다. 마하띳사의 제자들은 분노하여 많은 승려들을 데리고 아바야기리로 간 뒤, 마하위하라로 되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이것이 스리랑카 최초의 승가 분열(saṅgha-bheda)이었다. 이때부터 스리랑카의 불교는 마하위하라파(大寺派)와 아바야기리위하라파(無畏山寺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비록 무외산사의 승려들이 대사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초기에는 두 부파 사이에 교리나 실천적 측면에서 차이점이 없었다. 다만 무외산사파는 대사파가 율장에 따라 마하띳사를 징계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의 밧지뿌뜨라(Vajjiputra, 犢子部)에 속하는 담마루찌(Dhammaruci, 法喜部)가 스리랑카에 도착하자, 무외산사에서 그들을 받아들였다. 왕은 무외산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 혹은 그들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그 후 무외산사의 승려들은 인도에서 형성된 여러 부파들과 접촉하였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념들을 받아들여 비교적 진보적이었던 그들은 상좌부와 대승을 함께 공부하였다.

보하리까띳사(Vohārikatissa, 269~291) 왕의 치세 때 최초로 베뚤라와다(Vetullavāda, Skt. Vaitulyavāda, 方廣部)가 들어왔다. 이때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보하리까띳사 왕은 방광부를 탄압하였다. 그 후 무력을 써서 왕위에 오른 고타바야(Goṭhābhaya, 309~322) 왕은 불교도로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준 강력한 군주였다. 그의 통치 시기에 무외산사에서 방광부를 받아들였다. 또한 무외산사에 있던 승려들이 담마루찌(법희부)와 단절하고, 닥키나기리위하라(Dakkhiṇāgiri-vihāra, 南寺)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사갈리야(Sāgaliya, 海部)라는 새로운 부파가 생겨났다.

한편 고타바야 왕은 방광부를 탄압하기 위해 취조했는데, 그들의 책을 불사르고 60명의 승려를 국외로 추방했다. 섬에서 추방된 승려들은 남인도의 촐라(Chola)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도의 대승불교 승려였던 상가미뜨라(Saṅghamitra)와 접촉하였다. 나중에 상가미뜨라는 스리랑카로 건너와 대승불교를 전파했다. 고타바야 왕은 그의 두 아들의 교육을 상가미뜨라에게 맡겼다.

상가미뜨라는 두 왕자 중 형인 제타띳사(Jeṭṭha-tissa)는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생인 마하세나(Mahāsena)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왕의 사망 후 형인 제타띳사(Jeṭṭha-tissa, 323~333)가 왕위에 오르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리랑카를 떠났다. 그러나 나중에 동생인 마하세나(Mahāsena, 334~362)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왔다.

상가미뜨라는 무외산사에 머물면서 대사파의 승려들을 대승으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제자인 마하세나 왕을 설득시켜 대사파 승려들에게 공식적으로 공양을 베풀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대사파의 승려들은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로하나(Rohaṇa)와 말라야(Malaya)로 갔다. 그곳은 대사파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大寺)는 9년 동안 황무지로 방치되었다. 상가미뜨라는 왕의 승낙과 소나(Soṇa)라는 대신의 도움을 받아 대사의 7층 건물인 로하빠사다(Lohapāsāda)를 비롯한 많은 다른 건축물들을 파괴한 뒤, 그 자재들을 무외산사의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이용하였다. 한편 쩨띠야빱바따(Cetiya-pabbata, Mihintale)는 무외산사의 법희부들이 차지하였다.

왕의 이러한 행동에 대사파를 지지하던 국민은 큰 충경을 받고 왕에게 등을 돌렸다.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신하였던 메가완나아바야(Meghavaṇṇa-Abhya)는 말라야(Malaya)로 달아나 그곳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마하세나 왕은 그때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사를 복구하기로 약속하고 양측은 서로 화해하였다.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이들에게 보복을 감행하였다. 왕이 총애하던 부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필경사의 딸은 비통한 심정으로 목수를 시켜 상가미뜨라를 죽여 버렸다. 상가미뜨라의 친구이자 대신이었던 소나(Soṇa)도 살해되었다. 대사는 특히 훌륭한 공직자였던 메가완나-아바야에 의해 복구되었다.

비록 왕이 메가완나아바야의 제안에 동의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대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사의 경계 내에 거대한 제따완나위하라(Jetavana-vihāra, 祇陀林寺)를 지었다.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세 번째 성립된 부파였다. 그리고 왕은 많은 사람의 강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갈리야(Sāgaliya, 海部)를 따르는 닥키나라마(Dakkhiṇārāma) 혹은 닥키나기리(Dakkhiṇāgiri, 南寺)의 띳사(Tissa)라는 장로에게 제따완나를 바쳤다. 이 때문에 대사파는 다시 한번 왕과의 관계를 9개월 동안 단절하였다. 제따완나위하라(祇陀林寺)를 접수한 띳사 장로는 승가회의에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다. 공정하고 공평하기로 이름난 사법부 장관은 왕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띳사를 환속시켰다.

마하세나 왕의 뒤를 이은 시리메가완나(Sirimeghavaṇṇa, 362~ 409) 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대사파의 비구들에게 사죄하였다. 그리고 파괴된 대사를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 왕의 통치기에 깔링가(Kāliṅga)로부터 불치사리(佛齒舍利)가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의 법현(法顯) 스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무외산사에 머물렀다. 법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무외산사에는 5,000명의 승려가 있었던 반면, 대사에는 3,000명만이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마하나마(Mahānāma, 409~431) 왕의 통치 시기에는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가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대사에 머무르면서 삼장에 대한 주석서를 팔리어로 옮겼다.

실라깔라(Silākāla, 524~537) 왕을 계승한 악가보디 1세(Agga-bodhi Ⅰ, 568~601) 왕 때에는 인도에서 온 ‘조띠빨라(Jotipāla)’라는 승려가 공개 토론에서 방광부를 패배시켰다. 그 이후 더 이상 방광부로 개종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무외산사와 기타림사 두 파의 승려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대사파에 복종하면서 살았다.

그다음 왕위에 오른 악가보디 2세(Aggabodhi Ⅱ, 601~611) 왕은 방광부의 공식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사보다도 무외산사와 기타림사를 더 좋아하였다. 왕비 역시 무외산사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후 약 50년 동안 정치와 종교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부터 왕들은 대개 오래된 종교의 건축물들을 수리하고 사찰을 확장하였으며, 대중적인 축제를 개최하고 불교를 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시기의 ‘승단 정화(Sāsana sodhanā)’는 율장의 규정에 따라 담마깜마(dhamma-kamma, 法羯磨)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정화는 왕의 명령에 따라 승가에서 실시하였다. 대부분의 승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였고,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것을 ‘타락’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때마다 왕들과 고승들은 정화를 시도했다.

실라메가완나(Silāmeghavaṇṇa, 617~626) 왕의 통치 시기에 무외산사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무외산사에 거주하던 ‘보디(Bodhi)’라는 장로가 그 절에 있던 많은 스님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왕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율장에 따라 담마깜마(法羯磨)를 실행하라고 왕에게 요청하였다. 왕은 장로에게 정화의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지 않았던 승려들이 동조하여 보디 장로를 죽여 버렸다. 왕은 격노하여 범죄에 가담한 자들의 손을 절단해 버리고, 족쇄를 채워 저수지 감시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왕은 100명의 승려를 국외로 추방하고 승단을 정화하였다. 그 후 왕은 두 부파 간의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사파의 승려들에게 무외산사파와 함께 우뽀사타(Uposatha, 布薩)를 실시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다토빠띳사 2세(Dāṭhopatissa Ⅱ, 650~658) 왕의 통치 시기에 다시 왕과 대사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왕이 대사파의 영역에 무외산사를 위해 빠리웨나(Pariveṇa, 講院)를 짓고자 하였다.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에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왕은 자신의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러자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의 공양을 거부하는 빳따닉꿋자나깜마(pattanikkujjana-kamma, 覆鉢羯磨)를 결행했다. 그러나 왕은 대사파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 후 마나밤마(Mānavamma, 676~711) 왕 때에는 분소의(糞掃衣, paṃsukūlika)를 입은 승려들이 유명해졌다. 세나 1세(Sena Ⅰ, 831~851) 왕 때에는 ‘바지리야(Vājiriya, 金剛部)’가 전해졌다. 이어서 세나 2세(Sena Ⅱ, 851~885) 왕 때에는 무외산사의 분소의를 착용한 승려들이 다른 부파를 형성하였다. 왕은 이단의 견해들이 섬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서 감시하도록 했으며, 세 부파를 정화하였다. 하지만 빠라끄라마 빤두(Parākrama Paṇḍu, 972~981) 왕의 통치 시기에 이르러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불교와 승가 역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2) 폴론나루와 시대

위자야바후 1세(Vijayabāhu Ⅰ, 1059~1114) 왕의 통치 시기에 수도를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옮겼다. 이때 승가의 단절된 계맥도 되살렸다. 미얀마로부터 승려들이 들어왔고, 대사의 본부도 폴론나루와로 옮겨 고대 사원의 전통을 다시 되살렸다. 위끄라마바후 2세(Vikramabāhu Ⅱ, 1116~1137) 왕의 통치 시기에는 사찰이 황폐해졌고, 승려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그러나 빠라끄라마바후 1세(Parakramabāhu Ⅰ, 1153~1186) 왕의 통치 시기에 승가를 정화하여, 세 개의 부파를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가마와사(Gāmavāsa, 마을 거주자)와 아란냐와사(Araññavāsa, 산림 거주자)를 재건하였다. 또한 복주서(ṭīkā)들을 체계적으로 편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남인도의 상좌부불교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때 승가의 성직 계급제도의 조직이 형성되었다.

닛상까 말라(Nissaṅka Malla, 1187~1196) 왕은 승려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세 개의 승가 단체를 하나로 통일하도록 칙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승가에 누가 되는 행동을 삼가라고 승려들에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 뒤 깔링가(Kāliṅga)의 막가(Māgha, 1214~1235) 왕의 통치 시기에 불교는 완전히 멸망하여 승가의 계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와 함께 폴론나루와 왕국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3) 폴론나루와 시대 이후

위자야바후 3세(Vijayabāhu Ⅲ, 1232~1236) 왕의 통치 시기에 담바데니야(Dambadeniya) 왕국이 시작되었다. 그때 작은 규모로나마 불교와 승가의 명맥을 되살렸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빠라끄라마바후 2세(Parākramabāhu Ⅱ, 1236~1271) 왕의 통치 시기에 본격적으로 승가를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승가를 정화하여 승가에서 추방된 자들이 다시 승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등, 승가 내부의 성직 계급제도의 조직이 절정에 달하였다.

부와나이까바후 4세(Bhuvanaikabāhu Ⅳ, 1302~1346) 왕의 통치 시기에는 수도를 강가시리뿌라(Gangasiripura, 현재의 Gampola)로 옮겼다. 아란냐와사(Araññavāsa) 승려들이 가달라데니야(Ga-dalādeniya)에 불교의 본부를 세우고,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대승정의 지도 아래 세 개의 부파를 정화하였다. 이와 함께 아란냐와사 승려들은 씨암(Siam, 지금의 태국)에 싱할라 승가를 설립하였다.

꼿떼(Kotte)의 빠라끄라마바후 6세(Parākramabāhu Ⅵ, 1410~1468) 왕의 통치 기간은 불교와 승가가 마지막 영광을 누린 시기였다. 왕은 승가를 정화하고 규정을 제정하였으며, 꼿떼 주변과 섬의 남쪽 사찰은 학문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 뒤 부와나이까바후 6세(Bhuvanaikabāhu Ⅵ, 1473~1480) 왕의 통치 시기에 미얀마의 담마쩨띠(Dhammaceti) 왕이 미얀마 승려들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이 승려들은 껠라니야(Kelaniya)에서 구족계를 받고 미얀마로 돌아가 깔라니시마(Kalyāni sīmā)를 설립하였다.

1505년 포르투갈이 스리랑카에 침입하였다. 그때부터 불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Vima-ladharmasūriya Ⅰ, 1592~1604) 왕의 통치 시기에 락캉가(Rakkhaṅ-ga, 현재의 Arakan)로부터 구족계의 계맥을 되살렸다. 아라칸(Arakan)은 지금의 미얀마에 있던 나라였다. 그리고 위말라다르마수리야 2세(Vimaladharmasūriya Ⅱ, 1687~1707) 왕의 통치 시기에 또다시 아라칸으로부터 구족계의 계맥을 되살렸으나 이러한 복구도 오래가지 못하고 곧 단절되었다.

그 후 끼르띠스리라자싱하(Kīrti Śrī Rājasiṅgha, 1747~1782) 왕의 통치 시기인 1753년 태국의 우빨리(Upāli) 장로가 스리랑카의 캔디를 방문하여 다시 한번 승가를 복구시켰다. 이때 복구한 부파를 우빨리 장로는 자기 모국의 이름을 따서 ‘씨암모빨리 마하니까야(Syāmopāli Mahānikāya)’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 이름은 ‘씨암 우빨리 계보(Siam Upāli lineage)’라는 뜻이다. 줄여서 ‘씨암 니까야(Siam Nikāya)’라고 불렀는데, 이는 스리랑카에서 전승해 오던 대사파의 전통이 단절되었음을 의미했다. 씨암 니까야는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watta) 사원에 각각 아란냐와사(산림 거주자)와 가마와사(마을 거주자)의 전통과 예전의 성직 계급제도를 재건했다. 태국의 우빨리 장로의 초청을 주도했던 웰리위따사라낭까라(Veliviṭa Saraṇaṅkara, 1698~1778) 장로는 승왕(Saṅgharāja)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끼르띠스리라자싱하 왕의 통치 기간에 다시 한번 상좌부 전통의 계맥을 되살렸는데, 왕은 동생 라자디라자싱하(Rājadhi Rājasiṅgha, 1782~1798)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라자디라자싱하 왕은 그의 조카였던 스리 위끄라마라자싱하(Śrī Vikrama Rājasi-ṅgha, 1798~1815)에게 왕위를 인계하였다. 이 왕이 비운의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

싱할라 왕조는 그 이전에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략을 받았지만, 왕조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15년 영국의 군대가 수도 캔디를 공격했을 때, 싱할라 왕이 체포되었다. 1815년 3월 2일 캔디 왕조의 대표자들과 스님들로 구성된 식민지 의회에서 왕은 통치권을 영국 왕실로 넘긴다는 식민조약(일명 캔디협약)에 서명하고 폐위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486년 위자야(Vijaya)가 왕위에 오른 이래 2,301년 동안 이어져 왔던 영광스러운 스리랑카의 불교 왕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4) 식민지 시대

캔디 왕조와 영국 간에 조약을 체결할 때, 왕권을 영국에 넘겨주되 영국은 불교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즉 불교의 관습과 의례를 존중하여 그에 대해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불교를 박해하였다.

그 반발로 싱할라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자각은 ‘불교부흥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873년 모홋띠왔떼 구나난다(Mohoṭṭivattē Guṇānanda, 1823~1890) 장로가 빠나둘라(Panadula) 토론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자신감과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그 무렵 우연히 스리랑카를 방문했던 미국인이 이 토론에서 크게 감명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 토론의 진행 상황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을 접한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 1907) 대령은, 1880년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 1831~ 1891) 여사와 함께 직접 스리랑카로 건너왔다. 그는 불교를 공부하여 확신을 얻게 되자 불교에 귀의했고, 스리랑카 불교도들의 정신 앙양을 위해 헌신하였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올코트의 영향을 받아 불교민족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한편 1880년 올코트 대령과 블라바츠키 여사가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1933)는 16세였다. 그는 친분이 있던 구나난다 장로를 통해 두 외국인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그는 20세에 출가하여 스리랑카와 인도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의 스리랑카 승가는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가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현재의 불교 현황과 전망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는 대사파와 무외산사파의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던 무외산사파는 스리랑카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현재의 스리랑카불교는 상좌부(Theravāda)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상좌부의 관점에서 보면 법난을 잘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통치하에 들어갔다. 1505년부터 1658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658년부터 1796년까지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으며, 1815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48년 독립했다. 이처럼 스리랑카는 440년간 식민지 통치를 받으면서 과거의 찬란했던 불교문화와 전통이 무참히 파괴되고 짓밟혔다.

현재의 스리랑카 불교는 세 개의 니까야(Nikāya, 部派)로 이루어져 있다. 이른바 씨암 니까야(Siam-Nikāya), 아마라푸라 니까야(Amarapura-Nikāya), 라만냐 니까야(Rāmañña-Nikāya)이다. 이 세 니까야에는 다시 수많은 다른 분파(分派)가 있으며, 어떤 분파는 카스트(caste, 신분제도)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어느 부파든 교리적 차이는 별로 없다.

먼저, 씨암 니까야(Siyam Nikāya)는 끼르띠스리라자싱하(Kīrti Śrī Rājasiṅgha, 1747~1782) 왕의 초청을 받은 태국의 우빨리(Upāli) 장로에 의해 1753년 7월 19일 설립되었다. 이 부파의 이름은 태국의 옛 국명 ‘씨암 왕국(Kingdom of Siam)’에서 유래한 것이다. 씨암 니까야는 스리랑카 승려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싱할라족이며, 고위가마(goyigama, 농부) 계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씨암 니까야는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vatta)로 나뉜다.

다음으로 아마라푸라 니까야(Amarapura Nikāya)는 버마(Burma, 지금의 미얀마)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스리랑카의 승려들에 의해 1802년에 설립되었다. 이 부파의 이름은 미얀마(당시는 버마) 왕국의 옛 수도였던 아마라푸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니까야에는 약 1만 2,000명의 승려가 소속되어 있다. 아마라푸라 니까야는 빠르게 성장하였으나, 이후 지리와 계층(카스트)의 정체성 및 다른 분쟁들로 인해 많은 부파로 나뉘었다.
1940년대에는 자체 마하나야까(대승정)를 가진 30개 이상의 부파로 나뉘었다. 그 후 분열된 부파를 통일시키기 위한 작업이 계속되어, 1969년 이들 하위 분파들을 결합하려는 노력이 성공하였다. 아마라푸라 니까야의 대승정 중 한 명인 마디헤빤냐시하(Maḍihē Paññāsīha, 1913~2003) 비구는 승단통일 운동을 전개한 선도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다시 구심점을 잃고 중앙집권적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라만냐 니까야(Rāmañña Nikāya)는 1864년 버마의 라뜨나뿐냐위하라(Ratnapunna-vihāra)에서 네이야담마무니와라(Ñeyyadhamma Munivara) 상가라자(Saṅgharāja, 僧王)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스리랑카로 귀국한 암바가하왓떼사라낭까라(Amba-gahawatte Saraṇaṅkara)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부파는 태국의 탐마윳 니까야(Thammayut Nikāya)와 유사하다.

라만냐 니까야는 세 부파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다. 이 부파에 소속된 승려는 약 6,000명에서 8,000명으로 추정된다. 다른 두 부파와는 달리 라만냐 니까야는 구조적으로 단일 부파로 한 명의 대승정만 있으며 지역 단위로 조직되어 있다. 이 부파는 특정 카스트와 유대가 없지만, 재가 신자 중 많은 사람이 까라와(karāva, 어부) 카스트 출신이다.

스리랑카의 승려들은 교육과 같은 목적으로 자신의 부파가 아닌 다른 부파 소속의 사찰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부파 간의 갈등은 많이 약화된 편이다.

현재의 스리랑카는 다종교국가이다. 불교는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부분 싱할라족이다. 스리랑카에는 약 6,000개의 사찰과 1만 5,000여 명의 승려가 있다. 스리랑카는 동남아 상좌부불교의 종주국(宗主國)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제는 영향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

현재의 스리랑카불교는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안으로는 승가 내부에 물질주의가 침투해 들어와 점차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밖으로는 물질을 앞세운 타 종교의 공격적 선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변화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기존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 이로 미루어 스리랑카불교의 미래는 낙관하기 어렵다. ■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석사, M.Phil.).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