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진 창원전문대 장례지도과 교수

1. 들어가면서

주지하듯이 고려 중엽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은 선교일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당시 불교계를 개혁하려 했다. 선종의 입장에서 선과 교를 넘나들었던 지눌은 말년에 간화선 수행법을 도입하고, 간화선이 화엄 교학의 궁극적 이치를 넘어서는 탁월한 수행법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이 점에서 지눌은, 그의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에 앞서 간화선의 가치를 최고로 부각시킨 인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조사로서의 활달한 선풍을 보이며 그 생생한 자료인 어록을 남긴, 혜심과는 차별된 특징을 갖는다. 지눌은 간화선을 중심에 두고 선풍을 전개한 조사라기보다는 교학과 그것을 비교하며 그 차별성을 냉철하게 관찰한 학자적 성격이 강하다. 반면, 조사다운 본분을 활발하게 펼쳐 보이면서 간화선을 실천적으로 구현한 인물은 혜심이다.

간화선이란 다시 말하여 ‘화두를 간하여 본래 성품자리를 바로 보는 선법’이다. 본래 성품자리는 모두가 지닌 자성(自性)이며, 이 성품을 보고 깨닫는다고 해서 견성성불이라 한다. 대혜종고선사가 체계화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조사선에서는 수행자들이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기 위해 선문답을 통해 깨닫는 증득의 과정을 거친다.

그에 비하여 간화선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화두라는 독특한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틀로 정형화하고 있다. 조사선과 간화선은 다만 이 점이 서로 다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은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스님들께서 마음의 본래면목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간화선은 육조 혜능선사가 정착시킨 조사선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조사선의 정맥이다.

지눌이 도입하고 혜심이 크게 선양한 이래 현재까지 1000년, 간화선은 우리나라 선종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선지식들이 간화선 수행법을 통하여 깨달음을 증득하였으며, 현재도 많은 눈 푸른 납자들이 제방에서 간화선 수행법으로 참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불자들의 경우,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 등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는 간화선 수행법 자체에 대하여 회의하거나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최근에 필자는 조계종 불학연구소가 펴낸 『간화선』(서울 : 조계종 출판사, 2006)을 필두로, 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의 『간화선입문』(서울 : 조계종 출판사, 2006), 정관 스님의 『간화선의 길』(서울 : 불교시대사, 2006) 그리고 월암 스님이 지은 『간화정로』(서울 : 현대북스, 2006) 같은 간화선에 관한 책을 몇 권 읽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필자에게 큰 충격으로 와 닿았다.

그 충격은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이 책들을 30여 년 전에 읽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랬더라면 그 허무하게 소비한 많은 에너지들을 좀더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들은 간화선 수행에 처음 들어서는 이에게 필자가 30여 년 전에 범했던 실수를 범하게 하지 않게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둘째, 이 책들은 이론 보다는 실참(實參), 방편보다는 법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실제 간화선 수행을 실참하여 온 스님들의 내공이 깃들여 있어서, 간화선에 처음 입문하려는 초심자들은 물론, 오랫동안 간화선에 정진해온 수행자들에게도 실제로 도움이 되도록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 길을 잘못 들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헤매게 된다. 헤매고 헤매다가 제대로 된 길을 찾고 난 이후 그 헤맴의 이유가 처음의 잘못 든 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이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올바른 지침서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 간화선 수행의 전제

간화선에 입문하고자 하는 수행자는 우선 연기적(緣起的) 중도정관(中道正觀)을 확립해야 한다. 즉 먼저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緣起), 무아(無我)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무아란 독립된 실체가 없이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연기의 이치로 모든 존재의 실상을 보면 ‘고정된 아(我)’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공(空)’이다. 선종의 근본종지는 바로 중도법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은 존재의 실상을 중도·연기·무아·공으로 표현했다. 간화선은 부처님께서 밝히신 이 진리를 당장 이 자리에서 몰록 체화(體化)하거나 환히 드러내 보이는 길이다.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바로 공에 바탕을 둔 반야행이며, 그 반야 또한 연기와 무아에 근거한다. 간화선이 탁월한 수행법인 이유는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데 있지 ‘깨침의 경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화선이란 연기법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여주고 그것을 체험하는 수행법이다.

간화선은 비록 송나라 때 대혜종고에 의해서 체계화된 수행법이긴 하지만 그 방법론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의 구조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 연기의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조주 스님은 “없다(無)”고 대답했다. 이 “없다”라는 대답은 ① 있다 ② 없다 ③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④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등의 4가지 사유방식으로 이해해서는 모두 어긋난다. 간화선에서 “무(無)”라는 화두는 이 사구(四句) 가운데 그 어떤 사유방식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유 그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간화선 수행자는 이렇게 사구적 분별의 출구를 모두 막고 은산철벽과 같은 화두를 대면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연기의 이치는 중도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중도는 이것과 저것을 여읜 자리에서 이것과 저것을 그대로 보는 우주와 삶에 대한 바른 관점이다. 그렇다고 중도는 이것과 저것의 한가운데를 뜻하는 개념은 더욱 아니다. 이래도 틀리고 저래도 틀린다. 우리는 그것을 말이나 글로 설명해 낼 수 없다. 이때 우리의 생각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지경에 빠져버린다. 칠통 속의 쥐와 같이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 연기와 구조와 내용이 같다. 이 모두는 우리의 분별적 사유를 차단함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그 목적이 일치한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법에 대한 정견(正見)과 발심(發心)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화두를 들고 애쓴다 해도 무위에 그치고 만다. 그러므로 초심자들은 화두를 들기 전에 불법에 대한 바른 가치관(正見), 즉 중도 연기에서 바라보는 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수립하여야 한다. 정견의 확립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중도·연기·무아·공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연기와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추면 그것을 자기 삶을 통해 실천해 나가야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생긴다. 그래서 연기와 무아와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여 이것이 인격화되는 길을 열어간다. 간화선 수행은 이렇게 연기법을 인격화하고 내면화하기 위한 길이다.

불법에 바탕한 세계관이 정립되지 않은 선수행은 자칫하면 신비주의, 기능주의, 선정주의, 나아가 단순한 양생술로 전락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질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선은 깨달음 지상주의로 떨어져 깨달음 자체를 도구화하거나 대상화할 위험도 있다. 중도·연기·무아·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무조건 앉아만 있다고 간화선 수행자인 것은 아니다. 중도적 사고와 중도적 인생관 그리고 중도적 세계관의 정립을 확고히 하고 난 뒤에, 화두 참구를 통해 이 중도·연기·무아·공의 법칙을 증득하는 것이 간화선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간화선 수행을 하기에 앞서 교(敎), 즉 문자로 된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여야 한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은 경교(經敎)의 가르침을 버리고 폐기처분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교를 배우고 교를 의지하여 선을 깨닫되, 언어문자의 공능을 과신하거나 집착하여 교조화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선종의 종지로 표방된 불립문자는 한편으로 언어문자를 신비화하고 교조화하는 교가에 대한 집착을 깨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교란 비유하자면 산에 오르는 지도와 같고, 선은 정상에 올라서는 일과 같다. 만약 교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없이 선 수행에 들어가게 되면 지도가 없이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사람처럼 위험한 결과가 올 수도 있다. 교는 정견을 세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르침이다. 그러나 말없는 경지는 궁극적으로 자기 성품을 체득한 경지이다. 그러므로 말을 떠나서는 안 되지만 말에 걸려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학은 이해하고 난 뒤, 모두 버리고, 바로 선 수행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도만 보고 산을 올랐다고 할 수 없듯이 교학에만 집착하다 보면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쳐다보기 십상이다.

무엇보다도 간화선 수행자는 먼저 계정혜 삼학을 고르게 닦을 것을 다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계·정·혜 삼학은 불교 수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계는 성불하는 데 필요한 사다리와 같다. 사다리가 없이는 부처의 보전에 오를 수 없으며, 또한 그 기봉이 험난한 조사의 관문을 뚫고 나갈 수가 없다. 계를 지키는 것과 선정을 닦는 것과 지혜를 얻는 것은 하나이자 셋이요, 셋이자 하나인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들이 계를 지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의 살림살이와 같다. 참선 수행자 뿐 아니라 재가수행자도 계를 잘 지켜야 한다. 정견을 세우고 수행을 하게 되면 계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수행과 삶이 따로 가는 것은 수행자의 참모습이 아니다. 수행과 삶이 일치되는 것이 수행자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진정한 수행자의 계행은 굳이 지키려고 해서 지켜지는 계행이 아니라 꽃이 피듯 풀잎이 돋듯 자연스럽고 활발한 삶의 참된 모습이다. 다른 한편 선 수행이 철저해질 때 계행 또한 철저해지고 수행이 완성되면 계행도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나 중도 정견을 철저히 갖춘 사람만이 계를 지키고 범하고 열고 닫는 행위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의 전제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막상 화두참구의 수행에 들어가면, 무량겁 동안 흘러내려온 업식(業識)의 강물을 하루아침에 되돌려,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보리정념(菩提正念)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인연을 다 놓아 버리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간화선 수행의 대전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대전제가 되지 않으면 화두 참구는 그냥 않아서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다. 온갖 인연에 얽매이고 번뇌가 죽 끓듯 하여, 망념이 폭포처럼 쏟아져 잠시도 쉴 수 없는데 어느 곳에 발을 붙여 화두를 들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일체 분별망상을 옛 사당 안의 향로와 같이 고요하게 하고, 화두는 뚜렷하게 하여 밝은 달이 허공에 뚜렷하게 드러난 것 같이 하여야 한다. 이 때에 망상은 적적(寂寂)하고 화두는 성성(惺惺)하여, 적적하고 성성함이 밝은 달과 달의 광명이 서로 어김이 없는 것 같이 화두를 지어가야 한다. 화두를 제대로 참구하기 위해서는 육근과 육진의 일체 경계에서 죽어야만 살길이 생긴다. 밖으로 모든 반연을 다 놓아 버리고 안으로 한 생각도 없이 무심해져야 화두가 일여(一如)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은 대혜종고 스님이 묵조사선을 향해 비판한 바 있는 무기정(無記定)에 떨어진 것과는 출입(出入)이 있다. 왜냐하면 ‘화두 위에서 의심을 거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인연을 놓아 버리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고 분별은 일어나지 않아 집착을 여의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자성광명이 온통 환히 들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참선의 조건이 구비된 것이며, 다시 노력하여 진실로 참구하면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볼 수 있는 분(分)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온갖 인연을 통째로 놓아버리고 일체 망념이 모두 죽는 것이 간화선 수행의 대전제가 된다.

3. 간화선 수행

화두는 스승인 선지식이 제자에게 제시한 것으로 제자는 이 화두를 들고 한바탕 생사를 건 씨름을 해야 한다. 화두는 의식과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에 몰입하고 나아가 그 화두와 하나가 되어 마침내 화두를 타파했을 때 활발발한 한 소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사관을 타파해야 천하를 홀로 거니는 대장부가 될 수 있다.

간화선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심(發心)부터 해야 한다. 발심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준말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목마름이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을 여의고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나는 본래 부처인데,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하며 온갖 시비분별을 하며 괴롭게 사는 삶에서 벗어나 매일매일 좋은 날을 살려고 하는 ‘간절한 염원’이 바로 발심이다. 선은 깨달음으로 얻는다.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연기, 무아, 공이다.

간화선 수행자의 발심은 이 근원적인 일대사를 기필코 해결하고 증득하겠다는 결심의 출발이다. 이 ‘일대사인연’은 말로 전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모름지기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하며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쉬어야만 비로소 공부에 철저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나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이성 작용으로 밝힐 길이 없다. 본래적 나는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말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

선문에 들어 발심한 수행자는 마땅히 선지식을 찾아 법을 물어야 한다. 선지식이란 안목과 덕행을 갖추고 정도(正道)로 인도하여 정법(正法)을 깨닫게 해주는 스승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스승은 발심 수행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바르게 이끌어주다가 근기가 익었을 때 깨달은 바를 시험하고 그 안목을 일깨우는 법거량을 하여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발심이 사그라질 조짐이 보이면 문답을 통해 다시 발심을 불러일으킨다.

몽둥이를 휘두르고 고함을 쳐서라도 수행자의 공부를 점검한다. 그리고 수행자가 혹시라도 화두 수행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면 용기를 복돋워 주는 적절한 가르침을 베풀어 다시 화두를 간절하게 참구하도록 이끌어준다. 스승은 제자가 화두를 들면서 어디엔가 매달리고 의지하면서 조금이라도 분별을 내면 그 분별의 근거를 여지없이 무너뜨려 그것을 박탈해버린다. 이렇게 해서 스승은 제자가 어떤 분별과 미세한 알음알이에도 속지 않도록 화두를 들고 은산철벽에 들어가게 이끌어 준다. 그러다가 적절한 기연으로 오도(悟道)의 계기를 마련해주며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때 제자에게 법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화두 공부인은 대신심(大信心)·대분심(大憤心)·대의심(大疑心)의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간화선 수행자는 화두에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은 자신은 물론 일체 중생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믿음이고, 이 믿음은 나와 부처님은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믿음이다. 더 나아가서 이 믿음은 화두 공부를 하면 반드시 일대사를 깨칠 수 있다고 하는 견고한 믿음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고 공부해 나아가는 자세를 말한다.

둘째, 간화선 수행자는 크게 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화두는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이 자신의 본래면목을 눈 앞에 드러내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여기에서 자신의 본분을 회복하여 대자유인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길래 나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가? 자신이 본래 부처이건만 스스로를 중생으로 여겨 중생노릇을 달게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간화선 수행자는 화두를 참구함에 이렇게 자책감으로 치밀어 오르는 대분심이 울컥울컥 솟아나야 한다. 이 분한 마음으로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 단칼에 두 동강 내듯 화두를 타파해야 한다.

셋째, 간화선 수행자는 크게 의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화두는 생각의 길이 끊어진 본래면목이기에 망념과 무명에 바탕한 중생의 분별심으로는 알 수가 없다. 화두는 어떤 방법으로도 가히 잡아볼 수 없고 형용할 수도 없다.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며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수행자는 여기 이르러 전심전력을 기울여 정면 승부를 할 수 밖에 없다. 간화선 수행에서 의심한다 함은 바로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께서는 법을 화두라는 형태로 우리 눈 앞에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렇게 불조께서는 내게 있는 본래 물건을 눈 앞에서 밝게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어째서 불법을 마른 똥막대기라 했을까?”,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어째서 나는 모르는가?” 이렇게 하여 큰 의심이 일어나면 온몸 온 생각이 하나의 화두 덩어리로 바뀌게 된다.

화두에 의심이 생겨 지극하고 간절하게 의심을 지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되는데, 이것을 ‘의정(疑情)’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의정이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순일하게 되어 그 의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의식적으로 애써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심이 일종의 감정처럼 지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의정에 들면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 속에 몰입하게 된다. 의심하지 않아도 자연히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화두가 들린다.

화두를 간절히 의심해 들어가다 보면 의정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뭉치는 데, 이것을 ‘의단(疑團)’이라 한다. 의심 덩어리로 똘똘 뭉친 것이 의단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단만이 홀로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의단독로(疑團獨路)’라 한다. 이 의단이 독로하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서로 나누어지지 않고 한 몸을 이룬다. 의심 덩어리가 불덩어리가 되어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한다. 화두가 뚜렷이 한 조각을 이루는 것이다. 타성일편이 되면 습관이나 계산하고 비교하는 일을 떠나 천차만물의 사물과 융합하여 하나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차별상을 떠나며, 화두와 하나가 되어, 화두를 들고서도 밥먹고 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화두가 타성일편이 된 상태에서 은산철벽을 투과하여 확철대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산철벽이란 견고하고 단단하고 험준하여 뚫고 나가거나 뛰어 넘기 어려운 경계를 일컫는다. 그것은 화두에 대한 의정이 순일해져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앞으로도 뒤로도 나갈 수 없는 대안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말한다. 은산철벽이란 은으로 만든 두께를 알 수 없는 철벽을 말하는데, 그 철벽이 앞과 뒤, 좌우 사방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한 발짝도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은산철벽을 뚫고 나가야만 비로소 밝은 소식이 온다.

그러기 때문에 간화선 수행자는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를 참구해야 한다. 활구는 일체의 정식망상(情識妄想)과 분별의식을 초월한 불조(佛祖)의 간명적절한 언구(言句)를 말한다. 여기에는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마저 끊어져서, 아무 재미도 없고, 만져볼 만한 단서도 없다. 다시 말해서 활구는 알음알이가 붙지 않는 산말이요, 참말이며, 생생한 말이다. 반면 사구는 분별이 붙은 빈말이요, 죽은 말이다. 죽은 말로써는 결코 깨침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말의 그림자가 담겨있고 분별의 기미가 스며있으면 사구이다. 생각의 길이 살아있는 말을 쫓아 깨닫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유 형태로 이해하는 깨달음이기에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다.

삶의 당처는 언어나 사유적 성찰로는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사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한 몸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사구는 이른바 납자의 물음에 정면으로 대답함으로써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반면에 이른바 활구는 선사들이 납자들의 물음에 대한 정면의 대답을 피하고, 비밀스런 말과 반대되는 말 등을 사용해 대답했다. 이러한 대답은 묻는 바와 다르게 답하는 것으로 그 자체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사구와 활구를 구별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화두로 삼아 참구한 답어 자체가 참선 수행자를 개오(開悟)시키느냐의 여부의 기능이다.

사구는 그것이 정면의 대답이기 때문에 “말 가운데 말이 있고”, “해석으로 참구할 수 있는 말”이어서 질문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상의 연관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분석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 어구이기 때문에 이러한 화두는 수행자에게 깨달음을 일으키는 공능이 없다. 활구는 정면적인 의미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수행자를 원래의 화제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여 질문과 대답 사이에 논리상의 관련 여부를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유방식을 바꾸어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하는데, 이렇게 하여야 비로소 참선자를 개오시킬 수 있다.

화두 참구에서 중요한 것은 화두에 간단없이 깨어있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다. 화두를 참구할 때 온갖 번뇌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양변을 여윈 상태로 전개되는 것을 ‘적적(寂寂)’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한 상태로 깨끗한 거울이나 물결이 일어나지 않은 맑은 호수와 같다. 이런 상태에서도 무기에 떨어지지 않고 초롱초롱한 정신으로 화두에 대한 의정을 지속해 나가는 것을 ‘성성(惺惺)’이라 한다. 화두에 밝게 깨어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성적적은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고요하되 화두로 깨어있고, 화두일념으로 깨어있되 경계에 걸림이 없어 항상 고요한 순일무잡의 상태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마음을 써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자연히 화두가 들리고, 고요한 가운데(寂寂) 또렷하고(惺惺) 역력하게(歷歷) 화두가 현전할 때에 이르면 몸과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아 동정(動靜)간이나 꿈속에서나, 자나 깨나 또한 끊어짐이 없이 화두가 들리게 된다. 이것을 ‘화두삼매’라고 한다.

화두삼매는 그 철저함의 정도에 따라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비록 단계라 표현했지만 그것은 깨달음에 단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동정일여란 ‘화두가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한결같이 들리는 것’을 말하며, 몽중일여는 ‘화두가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나 한결같이 들리는 것’을 말하고, 오매일여란 ‘화두가 깨어 있을 때나 깊은 잠을 잘 때나 똑같이 들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화두삼매란 화두를 대상화하여 관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화두가 하나가 되어 화두가 순일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화두에 몰입되어 화두와 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은산철벽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이 상태에서 화두를 타파하면 지혜가 바로 나온다. 이것은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오는 이치와 같다.

4. 깨달음의 세계

화두를 타파하여 깨치게 되면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고 하늘에 백천개의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그 세계는 허공과 같이 무한히 넓어 한정이 없다.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평등해서 우열이 없고, 귀천도 없고, 친소도 없고, 시비도 없다.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또 모든 존재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에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 된다. 깨달으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내게도 남에게도 한없이 자애로우며, 모든 순역(順逆)경계에 자유자재하는 대자유인이 된다. 이 역동적인 현상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물을 마셔 보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이치와 같다.

깨달으면 훤하게 밝아진다.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 길이 정확하고 또렷이 보인다. 그래서 불안해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고 앉는 자라자리마다 완성된 삶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인다. 또한 홀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다. 그는 의존할 바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으로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깨달은 이는 허공과 같아 어떤 사물도 그를 가두지 못한다. 깨달은 이는 범부에도 성인에도 구속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다. 이렇게 깨달음은 크나큰 자유로 어떤 경계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마음이 쉬고 무심한 일 없는 도인인지라 만 가지 일들이 함께 닥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달은 이는 그 한가한 마음, 일없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빈틈없이 바르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깨달은 이는 생각을 하되 생각에 걸림이 없는 삶을 산다. 중생은 생각과 대상에 끄달려 그것에 집착하는 속박된 삶을 살아가지만, 깨달은 이는 진정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온종일 일상사를 여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경계에 미혹되지 않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즉 종일토록 밥을 먹어도 한 톨의 밥알도 씹지 않으며, 종일토록 걷지만 한 조각의 땅도 밟지 않는 사람이다.

깨달은 이는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한 사람이다. 그는 나와 너를 분별하는 자기상이 사라져 종일토록 살림을 살지만 그 일에 걸리는 일이 없다. 깨달은 이는 도력이나 신통력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도 보통 사람들처럼 먹고 자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다르다. 왜냐하면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깨달음 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어떤 별천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역력하게 살아있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일러준다는 것조차 맨살에 상처를 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조주 선사가 말했듯이 차나 한잔 마시는 일이다. 더 이상 다시 보태고 얻을 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갖추어져 있기에 불가득(不可得)이요 불가설(不可說)이다.

깨달음의 두 축은 지혜와 자비다. 깨달음은 나와 남,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깨고 자타불이의 세계를 체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친 이의 삶은 그 자체가 동체자비의 실천행이라 할 수 있다. 세간과 산 속을 나누고 승(僧)과 속(俗)을 나누어 보는 것은 중생의 잘못된 견해다 깨달은 이는 세간이든 산 속이든, 세속의 집이든 절이든, 거리든 시장이든 앉으면 법당이요, 머물면 부처님 도량이다. 일거수일투족 그 자체가 무진법문이기에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이고 세간이 그대로 출세간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번뇌 가운데 있되 번뇌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을 부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세간에 있되 세간에 물들지 않고 세간에서 만행을 실천하며 교화활동을 펼친다. 깨달은 이의 삶이라면 산 속에서 학인을 제접하든 세간에서 중생을 교화하든 어느 쪽이든지 문제될 것이 없다. 깊은 산 속에 맑은 약수가 있으면 마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듯 도인은 그렇게 찾아오는 수행자를 제접하기도 하고 번화한 도시에서 모여드는 대중을 교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이는 인연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생제도의 길을 간다.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그때 그때 저마다의 본래면목을 밝게 보여주는 것이다.

5. 글을 끝내면서

『간화선』과 『간화정로』를 필두로 하여, 『간화선입문』과 『간화선의 길』에서 설파하는 주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기할 만 하다.

첫째, ‘생활선으로서의 간화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간화선은 조사선의 전통을 계승하여 선을 대중화하고 사회화하면서 정립된 생활수행법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간화선은 선방 수좌스님들만이 할 수 있는, 일부 근기가 높은 재가자들만이 할 수 있는 수행으로 굳어져 왔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 간화선은 무엇인지, 어떻게 화두를 들고 참구해 나가야 하는지, 화두를 들고 수행한 결과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 제대로 된 책자 한 권도 제대로 없었던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그 결과 간화선 수행법이 보편화되지 못하고 생활화되지 못하면서, 수행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많은 사람들이 제3수련이나 그 외 여러 가지 외도선에 빠지는 것을 그동안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론과 실수를 겸비해서 공부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책들이 2006년 들어 한꺼번에 4권이나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상기의 책들을 꼼꼼하게 숙독하였다. 그 결과 이 책들이 간화선 수행에 처음 입문하려는 초심자들 그리고 지금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뿐 만 아니라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 등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거나, 간화선 수행법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던 많은 재가불자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한 그릇의 감로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이 책들의 저자들에게 깊은 존경의 염을 품게 되었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을 한 것이다.

둘째, 간화선이 왜 21세기의 대안인지에 대해서, 소박하지만 하나의 대답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발전을 구가해 온 과학기술과 물질적 풍요는 이제 족쇄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기 보다는, 지구상에 끝없는 대립과 갈등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이 책들은 간화선 수행이 그 족쇄를 푸는 하나의 기회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 즉 ‘고(苦)로부터의 해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우리가 현세에서 당하고 있는 많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절대 자유의 경지’, ‘절대 평화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할 뿐 초자연적이나 우주론적인 심오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 수행은 연기와 무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그것을 자기 삶을 통해 실천해 나가야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세운 다음, 연기와 무아와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여 이것이 인격화되는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즉 간화선에서의 깨달음은 우리의 모든 정신 활동이 이제, 족쇄가 아니라 열쇠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제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보다 더 평화로워져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만함 속에 살게 된다. 그 결과 ‘삶의 색조’가 바뀌어져서 봄날의 꽃들은 더 아름답게 보이며, 계곡의 시냇물은 더 신선하고 맑게 흐르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결국 깨침은 일종의 ‘평안한 상태’, ‘행복한 상태’이다. 이때 이 평안하고 행복한 상태란 우리가 자기애(自己愛)를 극복한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즉 열려서 반응적으로 되고, 감수적으로 되며, 각성되고, 공(空)으로 되는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한 상태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정의적(情意的)으로 충분하게 연결지어져, 분리와 소외를 극복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개아(個我)를 버려, 탐(貪)하는 것을 중단하고, 개아를 보존하고 확대하려는 끊임없는 추구를 그만두며, 단지 자기를 보존하고 탐욕하고 이용하려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깨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궁극적인 전환’은 21세기의 족쇄를 푸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저작물들이 우리의 일부 잘못된 지해(知解)들에 대한 성찰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일관되게, 간화선이란 연기법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여주고 그것을 증득(證得)하는 수행법이라고 설파한다. 이 주장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원시 불교의 가르침은 연기요 무아이며, 더 나아가서 중도요 공이다. 이는 궁극적인 실체나 불변의 본성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불교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 궁극적인 실체나 불변의 본성을 추구하게 되고, 연기론적인 가르침이 존재론적인 본성론의 입장으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경우가 다대하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대승불교의 전통 안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도 모르게 연기를 본체와 현상이라는 이원론적인 틀에서 본체가 현현하는 현상의 논리로 채용하고, 공 역시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의미로써 사용한다. 불변의 실체를 전제로 하는 비불교적인 본성론적 사고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선 수행이 신비주의, 기능주의, 선정주의, 나아가 단순한 양생술로 전락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깨달음이 도구화하거나 대상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이, 선종의 근본종지는 중도법이고,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은 존재의 실상을 중도·연기·무아·공으로 표현하였다고 설파하며, 간화선 수행법은 부처님께서 밝히신 이 진리를 당장 이 자리에서 몰록 체화하거나 환히 드러내 보이는 길이기 때문에, 간화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바로 공에 바탕을 둔 반야행이고, 그 반야 또한 연기와 무아에 근거한다고 주장한 다음, 간화선이 탁월한 수행법인 이유는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데 있지 ‘깨달음의 경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고, 간화선의 당체를 중도·연기·무아·공으로 해석한 것은 대단히 탁월한 안목이라고 하겠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장은 절대주의적인 태도를 지나치게 견지하는 현대의 종교들에 대해 불교가 하나의 훌륭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덕진
창원전문대 장례지도과 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창원전문대학 교수이다. 주요논저로는 (편저)『한국의 대표사상가 10인- 지눌』, (공저)『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普照知訥의 禪思想 硏究」, 「看話禪의 狗子無佛性에 대한 一考察」, 「儒敎와 佛敎의 生死觀에 대한 一考察」, 「新羅末 桐裏山門에 대한 연구」, 「陽明의 ‘心卽理’와 知訥의 ‘卽心卽佛’에 관한 一考察」 등 50여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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