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는 승단분규 종식시킬 주요한 대안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
씨아이알, 2016년 9월 발행, 416쪽
책의 특징과 가치

김호성 교수(이하 ‘저자’로 호칭)는 이번에 또 비중 있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씨아이알, 2016)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25년간 결사에 관해 연구한 업적을 정리한 중간 결산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자는 앞으로도 계속 ‘결사’라는 화두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책의 출판과 동시에 수정 · 보완 작업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결사’라는 주제어(key word)를 통해 근현대 한국불교의 흐름을 조명하고 있다. 그것도 역사적 방법이 아닌 철학적 방법으로 저자의 평소 지론인 ‘홀로결사’의 타당성을 논증해 나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승단분규’를 종식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결사’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승단분규의 근본원인은 출가정신을 상실하고 권력의 길이나 명리의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실 결사정신과 출가정신은 둘이 아니다.”(p.54) 따라서 출가정신을 되살리자는 것이 곧 ‘결사’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고타마 싯다르타는 왜 출가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스스로 답하고 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권력의 길이나 명리의 길이 아니라 본래면목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고타마 붓다의 출가정신을 망각하는 순간 개인의 삶도 불교 교단의 운명도 나락을 향해서 타락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54) 이 대목은 출가자들에게 외치는 저자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승단의 구성원인 승려들이 출가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승단은 결코 타락하지 않을 것이며, 승단분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언급했듯이, “교단(엄격히 말하면 ‘승단’이라고 표기해야 옳다. 왜냐하면 교단은 사부대중 공동체를 의미하고, 승단은 출가자 공동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사는 타락한 승단을 개혁하자는 운동이기 때문에 ‘승단’이라고 표기해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이 어려울 때마다 명예와 이익, 그리고 권력을 떠나서 불교를 지키고, 살리고, 새롭게 하기 위한 선각자들의 고독한 몸부림이 결사로 발현되지 않았던가.”(p.vi) 이 문장을 통해 저자가 왜 이 책의 제목을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이라고 표현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이미 발표했던 결사에 관한 논문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발행한 것이 아니다. 기존에 발표했던 논문을 바탕으로 다시 재가공이라는 공정을 거쳤다는 데 이 책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결사에 관한 저자의 평소 지론을 바탕으로 다시 집필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학자는 자신이 발표했던 논문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발행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학문에 대해 책임을 다하겠다는 자세와 학자의 성실함이 돋보인다. 어쨌든 이 책은 ‘좀 특이한’ 책임은 분명하다.

결사에 대한 저자의 시각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와 제2부에서는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정혜결사, 학명(鶴鳴)의 선농결사, 퇴옹(退翁)의 봉암사 결사, 한암(漢岩)의 건봉사 결사, 탄허(呑虛)의 결사운동 순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자성(自省)과 쇄신(刷新)결사〉 〈결사의 정의에 대한 재검토〉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권말에 김성순의 〈김호성의 결사 연구〉라는 해설을 싣고 있다. 이것도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저자는 〈보조지눌의 정혜결사〉를 논하면서 교단 개혁의 두 가지 양식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교단의 타락된 현실 속에 스스로를 투신하여 ‘참여 속의 개혁’을 추구하는 길이다…… 둘째, 타락한 반윤리적 교단 현실 속에 같이 몸을 담지 아니하고, 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길벗들이 먼저 모여 소(小)그룹을 형성하여 그 안에서 우선 윤리적 청정성을 회복하고,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가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는 개혁주체의 윤리성을 개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온전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pp.22-23)고 주장했다.

저자는 ‘참여 속의 개혁’을 바람직한 개혁이라고 보지 않았다. 개혁의 주체가 나중에 다시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역사에서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권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우선 윤리적으로 청정성을 회복하고,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개혁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저자는 결사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웠다. 이를테면 결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것이 피은(避隱) 속의 개혁인가, 또 탈(脫)권력/탈정치의 수행운동인가 하는 점에 있다.”(p.52) 저자는 이런 기준에 의해 근현대에 있었던 학명(鶴鳴, 1867~1929)의 선농불교나 탄허(呑虛, 1913~1983)의 역경불사 등을 결사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의 결사에 대한 정의는 변화를 겪었다. 초기의 정의와 후기의 정의가 다르다. 처음에는 결사란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먼저 스스로 수행을 하면서 불교 교단을 새롭게 개혁하고자 실천한 공동체운동.”(p.346)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결사란 “불교 교단의 문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직접 그 상황 속에 참여하여 개혁하고자 하는 대신, 그 상황으로부터 피은하여 먼저 스스로 수행함으로써 장차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을 말한다. 그것은 권력이나 정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므로, 종단의 제도나 조직을 활용하지 않는 순수 민간, 재야 차원이어야 한다. 또 탈권력 내지 탈정치를 지향하므로 반드시 2인 이상의 모임이 아니어도 무방하다.”(p.348)고 수정했다. 이것은 ‘홀로주의’도 결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저자는 ‘홀로주의’의 사상적 근거를 “퇴옹과 청담의 〈서원문〉에 담겨 있는 오불관언(吾不關焉)주의에서 나는 피은의 결사정신을 발견해낸다.”(p.179)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비록 청담과 퇴옹이 함께 서원한 것이라 해도 제각기 홀로주의의 입장에서 종단사나 세간사에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자 서원했던 것이다.”(p.175) 그리고 저자는 “퇴옹과 청담의 〈서원문〉에 나타나 있는 ‘홀로주의’야말로 결사정신의 전범으로서 우리가 이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p.176)고 말했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나중에 ‘홀로결사’라는 용어로 자신의 신념을 굳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홀로결사는 가능한 것인가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은 ‘홀로결사’도 결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수행하는 것을 과연 결사라고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홀로결사는 가능한 것인가?’라는 주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사실 저자는 ‘자기 철학’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가 ‘홀로주의’를 결사라고 한들 타인이 왈가왈부하기 어렵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는 스스로의 학문적 지향성을 ‘자기 철학의 제시’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철학의 제시는 바로 붓다의 가르침이나 경전 · 어록의 생각을 바로 지금-여기에 현전(現前)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불교’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p.327)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역사적 방법으로 근대불교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철학을 통해 근대불교사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은 불교에서 길벗[道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경전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대목도 있지만, 수행에서 선지식(善知識) 혹은 선우(善友)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많이 있다. 특히 근현대에 살았던 만암 송종헌(曼庵 宋宗憲, 1876~1956)은 〈선우회발기취지(禪友會發起趣旨)〉에서 수행하는 도중에 벗[友]을 버리고는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듯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에 선우회를 발족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우(友)라 하는 명사는 지기(知己)를 운위(云謂)하는 바에, 우리의 소기(所期)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도중에 이 수양(修養)의 우(友)를 버리고는 범사(凡事)에 가위(可謂) 연목구어(緣木求魚)의 격(格)을 작(作)할 새, 소이(所以)로 차(此) 선우회(禪友會)를 발족하오니”(申鍾元 《曼庵文集》 大聖出版社, 1967, p.102)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수행에서 선우(善友, kalyāṇa-mitta), 즉 도반(道伴)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승단(Buddhist Saṅgha)은 ‘수행공동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결사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정을 요하는 부분

끝으로 이 책에서 발견되는 옥에 티는 “박용하(이운허)”(p.66)로 표기한 부분이다. 물론 이것은 김광식의 오기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지만, 독자들을 위해서 이 책에서는 바르게 표기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참고로 운허(耘虛, 1892~1980)는 그의 법호이고 법명은 용하(龍夏)이며 본명은 이학수(李學洙)이다. 따라서 ‘운허용하(耘虛龍夏)’나 이운허(李耘虛)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이 책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선원의 목표는 반농반선으로 변경함.”(p.85)이다. 이 문장의 본래 취지는 ‘반농반선(半農半禪)’에서 ‘반선반농(半禪半農)’으로 변경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승려가 본분사(本分事)를 망각하고 오직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에만 종사한다면 속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이수창(마성) 〈백용성의 선농불교에 대한 재조명〉 《대각사상》 제23집(2015. 6), p.81) 그리고 강유문의 〈내장선원일폐〉에는 분명히 ‘반선반농’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연관 편역 《학명집》에서는 혼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저자가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것 같다. 따라서 학명의 선농불교를 언급하면서 ‘반농반선’이라고 표기한 부분은 모두 ‘반선반농’으로 바꾸어야 학명의 본래 취지에 부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마성 / 팔리문헌연구소장.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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