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불교의 현장과 미주 한국 불교의 전망

1. 부처가 없는 땅

서양은 본래 부처가 없는 땅이었다. 한 세기 반 전만해도 서양에서 불교는 미지의 것이었고 몇몇 여행가나 동양학자들에 의해서 그 존재가 가끔 확인될 뿐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불교는 갑자기 서양 땅 이곳 저곳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가끔 눈에 띠던 민들레꽃이 어느 봄날, 갑자기 온 뜰을 뒤덮은 듯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활짝 피어나고 있는 것과 같다.

이제 불교는 서양 땅 어느 곳이건, 그것이 구라파 대륙이 되었건 신대륙 미주가 되었건, 심지어 구라파의 유형지였던 호주에서까지 손쉽게 눈에 띠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원에도 초대되지 않는 꽃이 민들레이다. 생명력이 강한 야생화인 이 민들레는 어떻게 그 씨앗을 뿌렸으며 어떤 경로를 밟아 퍼져 나간 것일까.

회색장삼을 걸친 파란 눈의 서양 승려를 거리에서 목도하거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으로 우리의 전통 사찰에서 수련하는 서양 청신사, 청신녀들을 쉽게 조우한다. 이제 이런 모습은 더 이상 신기로운 장면도 못되고 새로울 것도 없다. 아마 우리들의 스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들을 맞이하고 있을 듯하다. 그러나 여기까지 다다르기에는 단순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우여곡절의 역사가 그 배면에 깔려있다.

우리가 손쉽게 발설하는 몇 가지 자부심에서 돌출된 논법이 있다. 이제 우리 불교의 위대성이 그렇게 발현됐다거나 서양의 한계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단순논법과 자기 만족감 속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신라시대의 마라난타나 묵호자를 받아들이던 시절로 역행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파란 눈의 수행자이건 템플스테이의 서양 불교 애호인들은 자신의 문제해결과 자신의 확대를 위해 이러한 일들을 한다. 불교는 그들의 문제이고 그들의 화두일 뿐 우리의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스님들의 은근한 미소이건 우리의 자부심은 우리가 세계 불교를 얼마나 나이브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대로 노출시킨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만발하고 있지만 불교는 불모의 땅인 구라파에서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른 것은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 경우가 시발점이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단은 식민지 정책에 깊이 관련한 식민관료이자 동양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불교는 이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들의 학문적 관심을 따른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이해하는 폭을 따라 불교는 그때마다 재정리되고 다시 규정되기 시작했다.

마치 미국대륙이 콜럼부스 이전에도 그곳에 엄연히 존재했지만 미 대륙 발견 이후 그때마다 다시 정립되고 서구의 취향에 따라 재규정 되는 것과 같다. 이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태도에 일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이해의 폭이나 우호적인 태도가 결여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빅토리아조의 동양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그것을 이상화 낭만화 시킨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곧 책상 위의 학문적 대상과 타자ㆍ타지역에 대한 자기투영적 이상화의 결실이 불교발견의 관건으로 생각된다.1)

어떤 학자는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호기심 가득 찬 낭만적 상상력으로 불교를 대했고 어떤 학자는 소위 종교적인 황화론(黃禍論)의 입장에서 불교가 서양 기독교에 어떤 재해를 불러 올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곧 의구심 가득 찬 배타적 태도와 불교 폄하, 기독교 찬양의 태도였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로서는 외젠느 뷰르누프(E. Burnouf, 1801~1851)가 있으며 그는 근대 불교학의 개창주로 알려진 블란서 동양학자였다 후자로서는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의 한 유산이며 인도학 연구의 한 주축을 이룩한 모니에 윌리암즈(M. Mornier-Williams)를 들 수 있다.

또 한 사람으로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그대로 자신의 몸으로 체현시킨 정치인 겸 언론인인 발텔레미 틸레르(Barthelemy Saint-Hilaire)를 들 수 있다. 학자적인 호기심과 빅토리아조의 상상력이 그들의 불교에 대한 호의적 태도였다면 그들의 배면에는 타자에 대한 차별화와 타자 지배를 내포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반응과 선교주의는 그 대표적인 예증이었다. 당시에 풍미하고 있던 인도학의 열풍은 슐레겔의 “모든 것, 그렇다. 거의 예외 없이(서양의) 모든 것은 인도를 시원으로 하고 있다”는 언표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열풍의 분위기에서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 1832~1904)의 『아시아의 빛(1879년 간행)』이 간행되고 공전 전후의 인기리에 판매된다. 외형상 열광하며 받아들이는 측면의 배후에는 전통적 서구의 싸늘한 반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놀드의 부처님과 역사적 부처님을 대비시키면서 아시아의 빛인 부처님은 “진정한 실제의 부처님의 상(像)일 수는 없다. 마치 알프렛 테니슨의 아더왕이 진정한 아더왕의 상이 아니듯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발설하는 것이다.

“어떻게 가장 조악한 암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시아의 빛’일 수 있겠는가.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감히 여러분에게 이 지구상의 그 어떤 사람이 되었건 불교의 추종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유혈과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겠는가를 묻겠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고통과 인간생활에 대해 이토록 사악하고 끔찍한 무관심을 지닌 이들이 동물의 생활에 대해서만은 알뜰하게 생각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바로 『아시아의 빛』으로부터 유출되는‘암흑’이라고 봅니다….(박수)”라고 야유적인 비판을 가한다.2)

서구 문화계의 상류사회 반응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기도 하지만 또한 불교학 형성의 한 일익을 담당했던 모니에-윌리암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최대의 산스크리트 사전으로 여겨지는 『Sanskrit-English 사전』의 편찬 책임자이며 당시 영국 사회의 교양과 지식을 뒷받침한 옥스포드 대학의 보든 석좌교수(Boden Chair Professorship)직에 있었다. 그는 불교학 연구에 몰두한 학자이면서도 동시에 불교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연구자였다.

곧, 그마저 당시의 문화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불교 개론서에 해당하는 저술을 쓰면서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나는 불교를 기독교 신앙자의 입장으로부터 서술하였다. 나의 공정하려는 열망에도 불구하고…나의 생각에서 연원될 모든 편견을 불식하려고 노력했고…불편부당한 판단의 태도를 견지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언어문헌학적 불교학 연구를 지탱하는 축이었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이후 서구 불교학 연구의 대가들에게서도 면면히 흘러내리는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 문헌학적 태도의 이면은 간과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서구적 에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음에 나올 페이지들에서 불교는 초기부터 그 자체 속에 질병과 부패와 죽음에 이르는 씨앗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현재 상황은 급속히 분해 되고 퇴락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3)

“불교는 서서히 그 활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한 때 불교 지배의 충직했던 막대한 인구들을 지탱하던 장악력이 이완되고 있다. 그렇다. 불교의 저항적인 능력이 강력한 힘 앞에서 길을 비켜가고 있으며 이 강력한 힘은 종국에 가서 불교를 지상에서 쓸어버릴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4)

인용구의 내용들이 스스로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인용구는 그의 서언 마지막 구절로서 장중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자신의 저술 목적을 극명하게 표명하는 글이다. 그리고 그의 서언은 대부분 불교인구에 관한 논의와 누구를 불교추종자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돌리고 있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이런 질문은 서구의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서 오늘날 서구 불교학자들마저 아직도 불교 이해의 관건적인 이슈로 지니고 있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불교인의 숫자를 축소화시키고 있으며 아시아 전통의 특징인 유교적 생활인이면서도 불자가 된다거나 민속전통에 젖어있으면서도 불교신자인 경우를 불교인의 규정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전형적인 기독교적인 규정에 편의적으로 맞추려는 시도를 행한다. 그리고 그 결론에 이르러 장중한 어투로 불교가 이 지상에서 소멸될 것을 언표하고 있으며 그 소멸의 불전적 전거마저 법멸(法滅)사상에 근거시키고 있다.

대표적 서구의 불교학자에게서 나온 태도와 언표가 이렇고 보면 서구의 불교에 대한 태도의 이면을 충분히 규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과연 대표적 불교학자이냐 하는 점은 그가 즐겨 거명하는 당대 석학들의 이름으로도 충분히 뒷받침된다. 알렉산더 커밍햄(Alexander Cummingham), E.B 코웰(Cowell), 리즈 데이빗즈(Rhys Davids), 올덴베르크(Aldenberg), 벤R(Wengel), 제임스 레게(James Legge) 사무엘 빌(Samuel Beal), 아벨 레뮈자(Abel Remusat), 스타니스라즈 줄리엥(Stanislas Julien) 만해도 급히 들쳐본 그의 저술에 나타난 이름들이다.

영국의 분위기가 그러했다면 블란서의 상황은 어떠했던가? 앞서 언급했던 불교학의 개창주로 간주되는 E. 뷰르누프와는 동료학자였고 함께 산스크리트을 공부했던 쌩틸레르를 보자.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로서 당시 문화사회정치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물로 평가해도 좋을 사람이었다. 그는 저널리스트였고 정치계에도 투신하여 그의 자유로운 사상은 항상 정부의 요시찰 인물로 주목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학문적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저작을 60년간에 걸쳐 불어로 번역하는 전형적인 유럽의 지성이었다. 산스크리트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중국·일본의 불교역사까지 확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막스 뮬러(Max Muller)는 그를‘최초의 불교사학자’라고 칭송할 정도로 불교 역사를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전혀 상반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기대를 어그러뜨리고 있다. 그는 불교를 감염력이 강한 니힐리즘으로 인간에 대한 봉사를 불모적인 것으로 만드는‘기괴한 일(monstrous enterprise)’이라고 비평했다. 그는 자신의 불교저술 서문을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를 연구한다는 일이 오늘날 지구상에서 어느 종교보다도 더 많은 추종자를 지닌 한 종교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작은 기여를 하는 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교가 현시하는 이상하고, 개탄할 수밖에 없는 교설 가운데서 선(善)을 위한 무기력함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불교신앙을 따를 때 무엇을 두고 영원한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윤회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오직 하나의 길, 곧 열반(涅般 ; Nirvana)을 획득하는 일뿐이다. 그것은 절멸(絶滅)시키는 일이다….”5)

그의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는 상관없이 불교에 대한 그의 부정적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러한 부정적 태도는 불교의 열반에 대한 이해에서 도출된 결과였다. 열반에 대한 당시의 이해는 서구 지성인들은 물론 수많은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공포 대상이었다. 불교교설의 오메가라 할 열반은‘무명의 공포(nameless terror)’닦아왔다. 불교의 종교성은 서구지성과 신학체계에 대한 큰 도전으로 비쳤다. 열반과 무아(無我) 무상(無常)을 주장하는 불교는 공포의‘무(無)의 종교’였다. 소위 무(無)와 무화(無化), 또는 공(空, Sunyata)을 신봉하는 끔찍한 종교인 것이다(horrible religion of nothingness).6)

불교에 대한 서양의 이해와 불교를 대하는 태도는 결코 호의적이지도 않았고 올바른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태도는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에서 볼 때 불교라는 이단적인 신앙은 또 하나의 공략해야 할 선교의 목표이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유화적인 태도가 있었다면 자기신앙을 확인하고 다변화하는, 글로벌화한 세계정황에서 자신의 신앙내용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좋은 소재이었다. 아마 이런 후자적인 태도의 상당한 부분이 오늘날까지도 서구에서의 불교와의 대화이거나 유명한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불교에 대한 강좌와 세미나가 개설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굳이 불교와 기독교를 대치시키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길항관계를 지녔던가를 강조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공통점이나 공감되는 부분,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어떻게 동등한 종교인으로서 동반자적인 입장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느냐에 더 큰 관심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선결조건은 엄밀하게 과거를 보아야 하고 또 우리의 입지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막연한 근거 없는 호혜주의나 일반화시킨 개념들, 서양은 물질위주의 세계이고 동양은 정신주도의 세계이니 서양에서의 불교유행은 동양 정신성의 승리정도로 치부하는 우(愚)는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서양은 결코 불교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다변화된 서구는 서구 나름대로의 자신의 고민을 하며 모든 것이 지구화되어가고 있는 차원에서 동양의 종교를 어떻게 서구적으로 수용하느냐의 화두를 갖고 있을 뿐이다. 아마 그 일단이 우리가 쉽게 조우하는 파란 눈의 불자들일지도 모른다.

2. 불교 신행의 발단

서양에서의 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발단이 과거의 역사적 정황과 맞물려 있었고 그것은 신대륙 발견과 같은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면 과연 오늘날의 서구, 특히 미국에서의 불교 발현은 어떤 것에 이유를 둘 것인가? 여러 측면에서의 검토가 이루어져 있지만 현상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서‘세계종교의회(World Parliament of Religion)’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893년 세계만국박람회와 함께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지도자들의 만남은 서양에서 불교를 공식으로 인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회의의 의의는 여러 모로 평가되고 있지만 일본의 임제종 승려인 샤쿠쇼엔의 연설은 이 회의에 참석했던 미국의 기독교인은 물론 많은 타종교인들에게 불교에 대한 인상을 각인시켰다. 그러기에는 인도인 아나가리카 달마팔라(1864~1939)의 강력하고 유려한 연설이 큰 도움을 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미국에서 아시안계 이민의 발생은 불교 신행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곧 중국계 이민이 이미 1850년대 철도 부설을 위해 미주에 상륙했고 이들과 함께 불교는 중국 이민 사회 속에 들어와 있었다. 이후 일본인들의 이민으로 불교는 더 널리 퍼져 있었으나 이민 그룹 속에 갇혀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사회에 그 존재를 알리며 공개리에 자신을 표출시키는 계기는 바로 이 회의를 통해서였다.

포올 케이러스(Paul Carus 1851~1919)라는 독일계 미국학자는 광범위한 불교에 대한 지식과 그 전파에 적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이미 몇 권의 불교저술들(The Gospel of Buddha와 The Karma)을 내고 있다. 자신의 출판사인 ‘Open Court Publishing Co.’를 통해 불교관계 글을 쓰는 일은 물론 철학잡지인 Monist를 통해서도 불교를 선양하고 있었다. 일본 샤쿠쇼엔의 글을 영문으로 만들며 그를 수행했던 D.T. 스즈키는 이후 1897년에 포올 케이러스의 Open Court 출판사에 취업하게 되고 그곳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

이때 폴 케이러스를 위해 『부처님의 복음(The Gospel of Buddha)』을 위시한 동양의 문헌들을 번역하는 데 조력한다. 한편 쇼엔은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다시 미국을 방문하고 스즈키의 동행을 받으며 미주를 여행하고 각지에서 강연을 한다. 이후 스즈키는 불교에 대한 일관성 있는 번역서를 만들고 있으니 대표적인 작업으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한 주해를 가하며 그 영역본을 만든다. 또 선(禪)에 대한 개요서를 만들고 있다.

『Essays in Zen Buddhism』도 이때의 결실이다. 한 마디로 D.T. 스즈키와 선에 대한 미주의 관심과 인기는 이 회의로 발효되는 셈이니 ‘세계종교의회’의 미주에서 관건적인 역할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올 케이러스의 영향은 토마스 트위드가 지적하듯 “미국의 불교에 대한 지속적이며 충동적인 자극에서 포올 케이러스만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그 밑에서 수련 받은 스즈키 선의 ‘순수정신’ ‘동양적 선’이란 실체도 어느 면 서구적 취향과 미국적 입맛과 무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7)

어떻건 초기에 미주에 소개된 동양의 불교는 이런 발단에서 출발되고 애호받기 시작한다. 케이러스는 그러면 왜 이토록 불교에 대해 관심을 표하고 불교를 선양하기 시작했는가? 19세기 후반의 서구 지성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 광범위한 정신적 위기를 맞고 있으며 그 중요한 계기는 과학적 방법과 과학적 전망으로부터 연원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우를 이렇게 심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경건심 강한 열렬한 신자였다. 나의 신앙은 시몬처럼 확고부동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반석이라고 부를 그런 확고함이 있었다. 성장함에 따라 나 자신도 기독교에 대한 봉사로서 선교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방어하려 한 성채의 기반을 추궁했을 때 나는 이 전체 구조물이 붕괴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선택하고 확신을 갖기 시작한 것이 과학이란 종교였고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불교였다고 술회한다.

곧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린 것이 과학이었고 다른 신앙인 불교에 대해 확신시킨 것도 과학이었고 그것의 합리성이었다. 케이러스 한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당시의 정신계를 대변하는 하나의 예증이 과학정신과 합리성이었고 그것을 가장 가깝게 논증하는 종교가 불교이었다.

오늘날 불교가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연유는 과학이 바로 서구에서 불교를 접근하게끔 한 하나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또 주목해야 할 현상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초절주의(Transcendentalism) 의 대두, 에머슨이나 토로우(Thoreau)의 자유주의적인 종교의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의 이러한 문화·사회분위기의 전제 없이 불교가 저절로 미주 땅에 안착한 것은 아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불교를 서구에 이식시키려는 노력이나 계기가 앞섰다기보다는 서구나 미국 자신이 자기 필요와 자신의 계기에 의해 불교를 요청한 쪽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3. 미국 속의 불교의 양태

얀 내티에(Jan Nattier)라고 하는 한 미국의 불교학자는 미주 속의 불교를 세 유형으로 나누어 불교의 존재양태를 적시하고 있다.

수입 불교(Import Buddhsim), 수출 불교(Export Buddhism), 수하물 불교(Baggage Buddhism)로 나눈다. 다른 형태의 분류들, 아시아 이민불교(Asian Immigrant)/코카시안 아메리칸 불교(Caucasian American)이거나 백인 불교(White Buddhist)/소수인종 불교(Ethnic Buddhist) 혹은 아시아 아메리카 불교(Asian-American Buddhist)/서구 아메리칸 불교(Euro-American Buddhist)로도 나누지만 앞의 세 분류방법이 미주 내의 불교도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점에서 뛰어난 특징이 있다.

첫째, 수입 불교는 말 그대로 실수요자의 요청과 필요에 따른 것으로 각자의 취향을 따라 받아들인 불교이다. 이 수입 불교는 또 「엘리트 불교(Elite Buddhism)」라고도 호칭되고 있으며 대개 미국 중상류층의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이 대종을 이룬다. 특징을 이렇게 범례적으로 가시화시켜 볼 수 있다.

1960년대 미국 중서부에 거주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어느 날 동네 도서관에 가서 우연히 선(禪)에 관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불교라는 일찍 듣지 못한 굉장한 것이 있구나하고 생각한다. 몇 년쯤 관심을 두고 책방을 갈 때마다 선이나 불교에 관한 책이 있으면 기웃거린다. 그리고 선과 관계된 강연이나 수련회에도 몇 번 참석해 본다. 그러다 어느 날 비행기표를 사들고 일본의 교토나 태국의 방콕, 혹은 한국의 송광사로 날아가 참선 수행에 참여한다. 몇 년 후 돌아올 때쯤 해서 선 센터(Zen Center)를 설립한다. 또는 자신이 수련 받은 스승을 이곳으로 초빙한다.

곧 모든 일을 자기 필요에 따라 자신이 주선하고 불교를 수입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위해 그는 사회의 중상류에 속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돈과 여유 있는 시간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이다. 아마 우리 불교계의 인기 스타 현각 스님(포올 몬즌, 속명)도 결정적으로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예일대 학부와 하버드대 대학원 출신이고 중상류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사회정의를 위한 데모에도 참여했다.

불교를 알기 위해 대학원 강의는 물론 한국에 나와 많은 참선 수행을 했다. 우리의 현각 스님은 전형적인 미국 불교신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 수입 불교에 해당하는 미국의 불교도가 미국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엘리트 불교의 특성은 항상 참선 수행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남방 불교의 관법수행(觀法修行, Vipassana)이나 동북아시아의 참선, 간화선이거나 묵조선 등의 명상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 좀처럼 사원제도나 윤리적 계율 실천에는 관심이 없고 있어도 미약할 뿐이다.

이 불교신행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요인들이 돌출된다. 취침 전에 명상수행서를 읽고 벽을 향해 수십분 명상을 하기 때문에 이런 불자들을 ‘침실조명등 불교도(Nightstand Buddhist)’라고 부른다. 불교단체나 사찰에는 관여하지 않고 불교수행과 신앙에 대한 책만 읽고 불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도들이기 때문에 ‘책방 불교도(Bookstore Buddhist)’라고도 한다. 또는 불교라는 대상물을 놓고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어떻게 소용이 되는 것인지 끊임없이 따지며 상품품목 고르듯 한 입장에 있다고 하여 ‘구매자 불교도(Shopper Buddhist)’라고도 한다.

이런 법회, 저런 수행명상회를 따라 다닌다고 하여 ‘법메뚜기 불교도(Dharmahopper Buddhist)’라고도 한다. 이런 저런 형태의 불교를 접하며 나름대로 불법을 추구한다고 하여 자신을 독각승으로 자처하는 불교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불교도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불교도라고 못을 박고 있지는 않는다. 편하게 자신의 입장을 “아직은-아닌-불교신자(Not-Just-Buddhist)”로 자처한다.

불교전문잡지인 『Tricycle(三輪)』의 정기구독자 6만명 가운데 절반은 자신을 불교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편집장인 헬렌 퉈르코브(Helen Twarkov)는 추산한다. 또 평균 9년 반 이상 불교단체에 관여한 사람 가운데 1/3이 아직도 자신을 불교신자로 정체성을 밝히고 있지 않다. 오계도 받고, 참선수행을 정기적으로 실천하고 일정한 불교단체를 9년 반이나 다닌 사람들이 “아직은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들의 종교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 불교도이며 불교도가 아닌 듯한 불교도. 유대인으로 독실한 불교 수행인인 어느 여류 심리학자는 이런 제목의 저술을 내고 있다. 『이상한데, 너는 불교도같이 보이지 않네(It Is Funny, You Don’t Look Buddhist)』이다. 이것이 수입 불교의 큰 특징이다.

두 번째, 수출 불교는 기독교와 똑같이 선교를 통해 미국 땅에서 불교로의 개종운동을 전개시키는 경우이다. 우리의 경우 서양에서 기독교가 한국 땅에 들어와 우리들을 개종시켰지만 이번에는 한국의 불교 본부에서 미국 땅에 불교를 수출하고 그곳의 현지민을 불교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처럼 이것을 ‘복음주의적 불교(Evangelical Buddhism)’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며 일본의 창가학회가 그 대표적 예가 될 것 같다.

혹은 원불교가 본부에서 일정한 목적과 계획을 수립해 놓고 불교 교당을 미주에 설립한다면 이 경우에 해당될 것 같다. 또 우리 조계종 총무원의 경우도 마찬가지 경우이겠으나 그 목적과 계획, 그리고 실행사항들이 얼마나 일관성을 가지고 실천되느냐에 따라 수출 불교의 범주에 속할 것 같다. 어떻건 공급 위주의 불교이고 모체가 되는 교단에서 현실적 물질적 보조를 제공하며 일정한 직업과 직책까지 부여받는다.

앞서 언급한 수입 불교가 여유 있는 백인 상류층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라면 이 범주는 사회 하류층에 속하며, 아프로아메리칸, 라틴계 중남미인들 혹은 동양계 미국인들로 교육수준과 생활수준이 뒤떨어진 유색인종의 것이 통계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흑인들 전체, 유색인들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아프로아메리칸인 불교도로 벨 후크스(Bell Hooks)와 같은 교수이자 저명한 시인이 있고 잰 윌리스(Jan Willis)와 같은 뛰어난 여류교수도 있음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수하물 불교는, 짐작이 가겠지만 우선 필자인 내 자신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 진출해 있는 대다수의 한국 불교사찰이 이 범주에 귀착되고 있다. 이민 보따리 속에 불교라는 집안 전래의 종교를 그대로 싸가지고 들어온 경우로 1850년대 중국이민자들, 1890년대의 일본이민자들의 불교신행은 바로 이 이민불교의 선조적인 위치에 서있는 셈이다. 다른 말로 ‘이민 불교(Immigrated Buddhism)’라고 불릴 수 있는 이 부류는 실제로는 종교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다.

대부분의 이민 그룹이 초기 청교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천지에 발을 디딘 것은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세속적인 이유들, 곧 경제적 기회, 정치적 박해, 개인 혹은 가정의 안정을 위한 것이 일차적인 이유였다면 종교는 부수적으로 첨가되어 따라 왔을 뿐이다. 곧 이민의 경험이 이민 보따리의 구성내용이 되겠는데 그 가운데 불교라는 또 하나의 내용물이 들어있는 셈이다.

1850년대를 시점으로 중국이민자와 일본이민자들이 이민불교를 선호했다면 1965년의 새 이민법 발효로 이번에는 교육받은 전문계층의 이민그룹의 새 물결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빈약한 영어, 미국주류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됐으므로 사회경제적으로 하류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전 세기에 하와이 사탕수수 밭이나 서부철도부설 ‘꾸리(苦力)’로 이민 온 사람들과 사회계층상 신분의 차이는 실제로 별로 크지 않은 듯 보인다. 이런 여건에서 이민 불교는 일정한 특권적 위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조직을 갖고 불교모임을 시작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이민 불교의 승단은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말 그대로 ‘피난처’, 곧 삼귀의례의 불법승 삼보에로의 귀의처, 피난처를 구한다고 서원하는 바로 그 피난처의 역할을 한다.

이 이민불교조직은 앞서 말한 백인 엘리트 불교이거나 복음주의적 선교대상의 불교유형과는 달리 광범위한 기능과 목적을 지니게 된다. 곧 생존을 위한 것이 일차적이어서 마치 미주한인교회 들이 초기 이민자들을 위한 ‘생존의 출발점’ 역할을 했듯이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 이민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거점역할을 한다. 미주 한국 사찰에도 이런 주류이민그룹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또 다른 기능이 발달되고 있다. 곧 문화적인 충족을 위해서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행동양식과 고국의 문화사회적 유산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적합한 장소가 이민 불교의 모임인 것이다.8)

어느 일면 이민 사회를 위한 좋은 기능을 이 이민불교가 담당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것은 또 전혀 상반되는 측면도 반영하고 있다.

4. 섬 같은 불교, 피자 같은 불교

이민불교의 순기능이 ‘피난처’같은 역할을 하여 초기 이민자들에게 안정을 갖게 해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섬과 같은 기능을 한다. 거대한 땅에서 홀로 물 가운데 떠 있는 섬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또한 ‘피난처’ 이민불교의 모습이다. 주류 사회와 서로 교섭하지 못하고 동화되거나 또는 대등한 교차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고유한 것만을 유지하는 배타성을 지닌 역기능을 하는 것이다.

곧 주류사회에서 소외되고 만다. 아마 한국 불교가 해외로 확대된 가장 좋은 예로 적산법화원을 들고 있으나 그것이 거대한 당토(唐土)에서 어떤 기능을 한 것인지는 막연하다. 당나라 땅에 신라방이 형성되고 그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이 다니던 절이 적선법화원이라고 역사는 말해 주고 있으나 그것이 당 불교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그곳의 불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우선은 신라 땅을 넘어서 당나라까지 진출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미상불 그것은 거대한 당토에 하나의 섬처럼 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섬처럼 떠있는 피난처로서의 한국 이민불교 현장은 많은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앞서 제시한 ① 부처 없는 땅인 서구에서의 불교 발단이나 ② 미주 속의 불교 발아와 그 전개, 그리하여 ③ 현재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미주불교의 존재양태는 우리의 미주 불교 현장을 짚어 보기 위한 서언적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곧, 미주에서 한국 불교의 포교 필요성이 요청되는 것인지 혹은 현상적으로 이미 피어나고 있는 꽃이라면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를 짚어볼 수밖에 없다.

이민불교는 자신이 본래 위치하던 장소를 떠나 전혀 이질적인 다른 문화사회권으로 옮겨졌다는 의미로 흔히 ‘Diasporic Buddhism(流民佛敎)’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불교의 발전 역사는 그 자체가 이미 다른 문화사회권으로의 유입과 적응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만치 적응력이 뛰어났으므로 굳이 유대교나 기독교의 Diaspora와 상관시킬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서구기독교적 Diaspora의 어휘를 차용한 것은 이민불교의 문제점이 이민 교회의 문제점을 더욱 확대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곧 우리 자신의 문제점을 적출하기 위한 방편적 개념의 필요성 때문이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온 불교는 문화적·사회적으로 세계화(Globalized)된 분위기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시원이 되고 있는 고국과 옮겨 정착된 미국과 사이의 이중적 상황에 처한다. 이중적 상황은 상당한 부분 모순된 입장과 상치적인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법회의 편의에 따른 왜곡이거나 생략 혹은 불필요한 부분의 확대가 아무런 정통적 교리의 고려 없이 집행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고국의 것과는 축소모방형(mimicry)으로 귀착된다.

이민불교는 어떤 면에서는 상황에 따른 기회도 주지만 또한 차별적인 체험을 겪는 것도 불가피하다. 또 이동이 가져다 준 일시성이나 잠정성(temporality)을 지니게 되고 지역적 국소성(locality)을 면치 못한다. 고국 불교의 모습, 주류의 사찰과는 달리 이중적 장소성과 이중적 시간성을 이민불교는 항시 의식하고 있어야만 된다. 곧 사찰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항상 내재되어 있다.

사찰의 정체성만이 문제가 아니라 신도들의 의식구조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우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노스탈지어(Nostalgia)에 사로잡혀있는가 하면 동시에 미래를 보는 희망찬 의식에 차 있으며 조그마하나 자치공동체적(Communality)의식을 지닌다. 이런 부분은 긍정적 측면의 일단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 신도들은 고향상실과 실망 속에 무엇인가 결핍된 것을 느낀다. 곧 이민불교 신도들의 정체성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신도 구성(승보)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이민불교가 마련한 불교행사에 엘리트 불교도가 동참하여 서로를 나누는 집회를 행하는 경우는 극히 희소하다. 간혹 외국인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집안제사, 불탄일 같은 큰 행사 때 혼인관계를 가진 외국인 혹은 집안과 혈연관계로 연계된 외국인들이나 그들의 혼혈자제들이 참석할 뿐이다. 그리고 신도구성은 대개의 경우 장년 이상의 늙은 계층이 주류를 이룰 뿐이다.

혹은 보스턴과 같은 교육 도시의 경우 인근 대학과 연구소 등 교육연관기관들이 많아 젊은 지식계층이 다수 참가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민 불교사찰에 참석하는 학생, 연구생, 교수들은 잠정적인 기간동안만 머무를 따름이어서 신도들의 순환이 다른 도시에 비해 매우 빠르다. 따라서 사찰 자체의 정체성과 그들을 중심으로 한 장기적 프로그램을 확정짓기가 어렵게 된다.

어떻든 이민 1세대의 늙은 계층이 사라지면 다음 세대가 얼마나 이 이민 사찰에 참석할 것인지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영어는 물론 미국 문화사회변화와는 차단된 섬 같은 이 ‘귀의처인 피난처’를 즐겨 찾을 2세대, 3세대는 드물 것 같다.

신도들을 지도하는 스님들의 양태는 어떠한가?(개인적 비판이나 결점 찾기 의도는 전혀 없다) 미주의 섬 사찰에서 스님들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우선 상기하고 싶다. 이들은 어떤 형태의 종단 지원이나 연관 없이 미주에 도착하였고 모든 일을 소위 자작(自作)으로 계획수행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해서 놀랄 일도 못 된다. 계율의 준수, 신도와의 갈등, 독선적 행정이 스님들측의 문제라면 신도회나 이사회를 통해 사찰운영을 계속 신도들이 직접 간여하며 스님들을 고용인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 이민 온 스님들이 현지에 적응되기 전에 수시로 갈아 치우고 일거수일투족 스님들의 행태를 짧은 시각으로 판정하려 하고 세속적 행정운영 방침만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농후하다.

다음 법회의 내용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제사와 집안 행사를 대행하는 일이 규모가 작은 사찰일수록 절 행사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내생담이나 사후에 대한 설법, 복 짓는 일에 대한 설법이 주메뉴로 등장한다. 이러한 ‘옛날 옛적의’이야기는 엘리아데적인 신화(myth)에 대한 시간철폐의 기능을 강화하여 역사적 현실적 무력감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일탈을 조장할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참여, 타종교화의 연대, 신도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한 현실적 설법은 희소한 주제가 되고 불교인 자신들의 수행정화를 위한 법회 프로그램도 근소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청소년,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역시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대부분 사찰들이 겪고 있는 모습이다. 예외적으로 L.A에 소재한 도안 스님의 관음사는 그 규모나 역사에 있어서 미주 사찰의 전형이 되는 대표적 사찰로 유치원, 불교대학, 불교서점, 전시장, 강연장 등 외형상 하나의 문화기관, 교육기관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주지스님의 뛰어난 사회적 기여와 참여는 다른 어떤 사회 정치인 못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은 스님 한 개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운영되고 인정될 뿐 이 활동이 제도 속으로 승화되어 다음 세대를 위한 확대이거나 활동의 대물림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선 제도적 정비나 행정적 지원 그리고 재정적 지원 없이는 모처럼 발주된 이런 교육문화활동은 지속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더욱 지금 도안 스님은 암으로 투병 중에 있고 이 사찰은 개인의 소유로 되어 있어 다음 세대에 계속 사찰로 존속될 수 있는 지도 미지수 이다. 하나의 예로 든 경우이지만 미주 사찰의 거의가 재정적·법적 이유, 개인적 소유권 문제 때문에 사찰이 사찰로서 전승되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주 한인 기독교계의 일부에서 교회를 매매하는 형태가 발생하는데 구조적으로 우리 불교도 그런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현실이다.

섬과 같은 미주불교는 피자와 같은 불교로 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알듯이 피자는 이태리 음식이고 미국으로 건너와 대중음식이 되었으며 그 질과 맛이 크게 바뀌었다. 이 바뀌고 개량된 피자가 이태리 원산지의 원조 피자보다 더 이태리인이 기호하는 현대적인 피자가 되었다. 불교는 철학적 어휘로 구성된 개념적인 사상인 것만은 아니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종교이고 그것은 하루하루의 생활, 나의 일거수일투족과 관계는 ‘생활양식(a way of life)’이다.

미주 속에 거주하는 우리 이민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을 수 있는 불교, 불교를 통해 이민자들의 생활을 표출할 수 있는 불교로 변해가야 할 것 같다. 한국이민불교는 섬처럼 외롭게 떠서 모든 것을 차단하고, 소외시키고, 배타적으로 존재 할 수는 없다. 이 해외라는 현실, 이 미국이라는 현장을 배제하고는 불교는 이해될 수도 없고 생존할 수도 없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2,3세대가 참석하지 못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불교의 역사는 변화의 역사이고 동화의 역사이고 변용의 역사이라는 사실을 불교사는 여실히 보여준다. 티벳으로 들어가서 티벳불교 내지는 라마불교가 되고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불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미주에서 봉행하는 법요의식과 불교행사의 내용은 한국사찰에 행해지는 사항을 그대로 편의에 따라 베끼고 있는 실정이다. 곧 축소모방형의 전형이다. 한국불교의 정통성(Orthodoxy)이 어디 있는지 또 그것은 전통(tradition)에 따라 전수되고 있는 것인지, 전통은 그대로 모사하는 일뿐인지를 현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예로‘미국불교교회(Buddhist Church of America)’를 들 수 있다. 변화에 적응한 전형적인 불교교회로서 여기에서는 이민적인 성격보다는 오히려 엘리트 불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 불교교회의 뿌리는 일본이민이 만들어낸 불교사찰로서 전문인들과 고등교육, 좋은 직업을 가진 이민 2, 3세대로 구성된 사찰로 가장 성공적으로 미국화된 불교이다.

그간 숭산 스님, 삼우 스님과 같은 분들이 다분히 수입 불교적 경향을 띤 활동을 했다면, 법안 스님을 위시한 도안 스님, 도범 스님 등 미주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스님들은 이민불교를 선도하고 있다고 보인다. 원불교는 이미 수출불교를 시작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계종에서는 아직 일정한 계획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수출불교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으나 불행하게 미주 한국불교의 현황에 대한 보고서 한 편 없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현대미주불교사장 김형근씨의 개인적 노력으로 미주 불교 40년 자료집이 연대기적으로 기술되어 몇몇 사람에게 나뉘어졌다. 필자와 김형근 선생은 그것을 근거로 『미주불교현황』을 잠정적이나마 편찬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성공하여 하나의 평가서가 제출되려면 우리 불교계의 인적지원, 재정적 지원, 사찰의 협조 없이는 요원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실로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동일한 문화배경, 사상배경, 사회배경을 지닌 한국 기독교가 미주에 정착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지는 잘 알려져 있다. 아마 불교는 더 큰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서 보아온 것처럼 부처 없는 땅이 미주이고 이나마 정착하는 데 수많은 우여곡절이 깔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주에 거주하는 우리 한 개인 한 개인은 미국화의 변모를 겪고 있다. 그리고 미국 속에 불교가 들어와 있고 그것은‘우리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불교는 우리 자신을 통해 미국화되어 가고 있다. 제도로서의 사찰은 한국의 그것과 다름없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으며 그 속에 담긴 불자들은 미국화의 변모를 겪는 이중적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감한 변화를 시도해야 하고 이 변화를 위한 엄밀한 평가나 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끝으로 라이샤워의 말인 “중국이 불교를 변화시킨 것처럼 불교가 종국을 변화시켰다”는 예지적인 발언을 미국이 한국불교를 변화시킨 것처럼 한국불교가 미국을 변화시켰다고 또다시 되풀이 할 수 있을 지는 미주 불교인으로서 초미의 관심이 아닐 수 없다.9)

이민용
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객원교수. 현재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및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다. 논문으로는 「불교학 연구의 문화배경에 대한 성찰」 「 학문의 이종교배」 「미국 속의 불교와 불교의 미국화」 「불교학 형성과 오리엔탈리즘」 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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