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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중계] ‘종교 이후’의 사회적 영성* / 정경일
[68호] 2016년 12월 01일 (목) 정경일 jungkyeongil@gmail.com

편집자 주
 * 이 글은 “탈종교화 시대, 종교의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주제로 조계종 포교연구실과 불광연구원이 9월 3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공동 학술연찬회에서 발제한 내용이다. 개신교, 가톨릭, 불교의 학자들이 모여 탈종교화 시대 종교의 역할을 조명했다.

   

1. 여는 말: 가시를 가시로 빼낸다

종교가 ‘사회문제’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이제는 상식을 넘어 식상하게 들린다. 탈종교화 현상은 종교에 대한 사회적 불신과 직결되어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2013년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장 신뢰받는 사회 기관은 시민단체(27.8%), 언론(10.6%), 종교(9.2%) 순이다. 종교를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정부(6.9%), 사법부(6.1%), 기업(4%), 국회(1.5%) 순이다. ‘도토리 키 재기’이기는 해도 종교가 국가기관과 기업을 제치고 3위는 차지했으니 면피는 한 것일까?

요즘 종교인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지난 2012년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지하철 이용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전동차 안에서 가장 불편한 행위’는 무엇인지 물었을 때 설문 참가자의 27%가 ‘취객들의 난동’이라고 답했다. 그게 2위다. 그렇다면 1위는? 33%의 응답자가 ‘전동차 내 종교 전도 행위’를 꼽았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개신교 전도자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종교인들의 전도 행위가 술 취한 사람들의 추태보다 더 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종교 안에 물질주의, 성장주의, 배타주의, 권위주의가 신앙의 일부로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의 종교는 세상보다 더 세상적이다.

사태가 이러니 종교공동체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그런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그리스도인 종교학자 길희성이 지난해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냈다. 실제로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양희송은 그것을 ‘가나안 성도’ 현상이라고 한다.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들을 거꾸로 읽어 표현한 말이다. 그는 개신교 신자 중 약 10%가 가나안 성도일 거라고 추정한다. 가톨릭이나 불교는 원래부터 신자들의 종교의례 참석률이 낮은 편이다. 한국갤럽의 보고서 《한국인의 종교》(2015)에 따르면 일주일에 1회 이상 종교 의례 참여율이 2014년 현재 개신교는 80%인 데 비해, 가톨릭은 59%이고 불교는 6%다. 이런 신자들의 탈종교공동체 현상은 앞서 말한 종교의 사회적 신뢰 추락이나 추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주로 개신교에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도 오십보백보다. 지난해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 가톨릭, 개신교 학자들이 아홉 달 동안 집중적으로 대화를 나눈 한 포럼에서 확인한 것은 세 전통 모두 세상적 가치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물음에 개신교 그리스도인들만 가슴 뜨끔할 일이 아니다. 아마도 걱정 많은 가톨릭 신자와 불자도 같은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있을 것이다. “아직도 성당/절 다니십니까?”

이처럼 사회문제가 된 종교의 기반은 탈종교화로 인해 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탈종교화는 크게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세속화이고 다른 하나는 탈제도종교화다. 세속화는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현상이고 탈제도종교화는 종교적 삶에서 제도의 중요성이 약화되는 현상이다. 탈종교화는 전통적 종교를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종교의 위기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탈종교화는 종교의 존재 이유를 성찰하고 회복하게 해 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가시를 가시로 빼낸다”는 수행자들의 잠언이 있다. 탈종교화는 종교 안에 박힌 가시를 빼내어 그 자리에 새 살이 돋게 해 주는 가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종교를 종교답게 해 줄 탈종교화 현상을 세속화와 탈제도종교화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 다음으로 고통의 시대에 종교가 다시 세상의 신뢰와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사회적 영성’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2. 세속화와 탈세속화

일반적인 의미의 탈종교화 현상은 세속화다. 세속화는 사회가 종교의 지배와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속화는 신정국가처럼 교회가 사회를 직접 통제하거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서양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주로 일어났다. 서양에서 세속화를 추동한 힘은 계몽주의적 이성과 민주주의적 가치였다.

근대 계몽주의는 신앙의 권위를 이성의 권위로 대체했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근대 세계는 종교를 비이성적 것으로 취급했다. 인류학자들은 소위 ‘원시사회’의 관찰을 통해 주술→종교→과학의 진화를 추론했고(제임스 프레이저), 심리학자들은 종교는 인간의 희망을 투사한 환상이라고 분석했으며(지그문트 프로이트), 사회학자들은 종교의 마법으로부터 벗어나는 합리화를 근대 세계의 지표로 보았다(막스 베버). 또한 합리주의적 이성에 기초한 과학적 세계관은 종교적 세계관의 토대를 허물었다.

민주주의적 가치도 세속화로서의 탈종교화를 심화시켰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군사적 상징으로 사용해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기를 그만두고 ‘십자군의 종교’가 되었다. 억압받는 이들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가 억압하는 이들의 종교로 변질된 것이다. 그 후 그리스도교 교회는 정치권력의 억압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대가로 얻은 종교권력을 천 년 동안 누렸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눈을 뜬 현대인은 종교 비판을 억압적 법과 정치 비판의 전제로 삼았다(카를 마르크스).

계몽주의적 이성과 민주주의적 가치의 도전은 종교를 사회의 중심에서 물러나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영역 중 하나가 되게 하였다. 마치 오늘날의 신문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등으로 지면을 구분하는 것처럼 종교도 세상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신문에는 아예 ‘종교면’이 없다. 종교는 문제를 일으킬 때는 ‘사회면’에, 화제가 될 때는 ‘문화면’에 등장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종교는 사회에서 공적 지위를 잃고 사적 영역으로 밀려났다. 세속화 사회에서 종교는 사멸된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것이 세속화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인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다. 이제 종교를 갖거나 갖지 않는 것은 개인의 사적 문제일 뿐이다.

도전은 응전을 부른다. 세속화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발은 종교적 근본주의다. 근본주의는 여러 종교 전통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선 그리스도교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생겨났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서구의 식민주의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생겨났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면, 스리랑카의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는 서양의 정치적, 종교적 제국주의와 대립하면서 생겨났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가장 다원주의적이라는 인도에서도 힌두 민족주의 세력인 인도국민당(BJP)이 종교 간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종교적 근본주의는 다양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지만 종교의 사회적 지배력과 영향력을 재주장한다는 점에서 ‘반세속화’ 운동으로서 공통점을 갖는다.

세속화 이후에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복음주의는 20세기 후반 이후 오히려 더 성장하고 있고, 불교는 ‘서쪽’으로 건너가 확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종교의 지속과 확산을 경험적으로 관찰한 종교 연구자들은 상식처럼 여겨져 왔던 세속화 이론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자신이 세속화 이론의 주요한 주창자였던 피터 버거는 세속화론은 틀렸다고 단언하면서 ‘탈세속화론’을 주장했다. 오늘날 일부 서유럽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계에서 종교가 부흥하고 있고, 또한 매우 세속화된 사회에서도 초월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탈세속화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세속화가 선물해 준 합리적 이성과 민주적 가치를 탈세속화가 위협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 이웃종교에 대한 적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은 탈세속화의 산물인 종교적 근본주의와 관련이 있다. 특히 종교적 근본주의와 정치적 근본주의가 화학적으로 결합될 때 끔찍한 폭력이 발생한다. 9 · 11 테러나 최근의 IS 테러는 그 비극적 예다. 그렇다면 ‘재세속화’가 대안일까? 그 답을 찾기 전에 먼저 탈종교화의 또 다른 현상인 탈제도종교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3. 탈제도종교화: ‘종교 이후’의 종교

탈제도종교화는 다소 복잡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것은 세속화와도 다르고 세속화에 대한 반발인 탈세속화/재종교화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여전히 인생과 우주의 초월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적이지만, 종교의 제도적 차원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탈종교적이다. 그래서 탈-제도-종교화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탈제도종교화는 종교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지 종교성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탈제도종교화는 ‘종교 이후의 종교’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탈제도종교화의 가장 흔한 현상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사람들의 출현이다. ‘영적인 것’은 종교의 내적인 것을 뜻하고 ‘종교적인 것’은 종교의 외적인 것을 뜻한다.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그것을 개인 인격체적 ‘신앙’과 ‘축적적 전통’−사원, 경전, 신학적 체계, 무용 양식, 법적 혹은 그 밖의 사회제도, 관습, 도덕적 규범, 신화 등−의 대조로 설명한다. 오강남이 종교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이 이런 대조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종교의 외적 제도는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탈제도종교화는 종교적 삶의 방식도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 변화 중 하나는 서양 종교학자들이 큰 관심으로 연구하고 있는 ‘종교적 다중 소속’ 현상이다. 서양에서는 자신들을 ‘유대인 불자’ ‘힌두교적 그리스도인’ ‘무슬림 그리스도인’ ‘불교적 그리스도인’ 등으로 부르는 종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명시적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여러 종교의 가르침과 수행을 배우고 실천하는 종교인들도 많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종교적 다중 소속 현상은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은 종교 전통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신앙을 공통의 기원으로 하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은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많지만, 불교와 그리스도교처럼 전혀 다른 전통에서는 오히려 다중 소속이 쉬운 것이다. 이는 종교적으로 유사할수록 서로에게 더 공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교인이 이교(異敎)보다 이단(異端)에 더 적대적인 것도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종교적 다중 소속은 차이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탈제도종교화는 종교적 소속의 경계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방식도 변화시킨다. 과거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주로 ‘뿌리’의 은유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뿌리에서 태어나 살다 죽었고, 불자는 불교문화의 뿌리에서 태어나 살다 죽었다. 하지만 경계를 가로지르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더 적합한 은유는 ‘길’이다. 뿌리로서 정체성에서는 ‘같음’ 아니면 ‘다름’이 중요하지만, 길로서 정체성에서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서로 같을 때만이 아니라 다를 때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런 관계를 통해 우리의 종교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길 위에서 만나는 이웃종교인, 비종교인과의 관계를 통해 종교적 인간이 되어간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은 ‘길 위의 인간(homo viator)’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물음이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속화나 탈제도종교화는 서양만의 독특한 종교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늘의 한국 종교는 서양이 근현대사에서 연속적으로 겪어온 세속화, 탈세속화, 탈제도종교화를 동시적으로 겪고 있다. 첫째,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인 46.4%가 ‘무종교인’일 정도로 한국사회는 매우 세속화되어 있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교적 심성을 공유하고 있고 무교(巫敎), 불교, 도교 등의 종교적 영향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마틴 부버의 통찰처럼 ‘종교’는 없는 사람들에게도 ‘종교성’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무종교인의 비율이 이토록 높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세속성을 보여준다. 일례로 탈세속화론자들도 예외로 인정하는 프랑스의 무종교인 비율은 겨우 28%에 불과하다. 참고로 한국은 무종교인 인구수에서는 중국, 일본, 미국, 베트남, 러시아에 이어 세계 6위이고, 비율로는 북한(71.3%), 일본(57%), 중국(52.2%)에 이은 세계 4위의 세속적 국가다.

둘째, 오늘의 한국 종교들은 반세속화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개신교는 가장 분명하게 반세속화 경향을 보인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의 대부분이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는 태생적으로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다.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의 사회구원에 대한 무관심,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주의, 성소수자에 대한 적대 등은 근본주의의 영향이다. 한국 가톨릭도 개신교와 비교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민이 “보수적 신앙들의 저항”이라고 정의한 반세속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불교는 재종교화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것은 조선 말기의 불교전통 복원 과정과 해방 후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한국)불교적인 것’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한국인의 종교성에는 탈제도종교화의 한 특성인 탈경계성이 내면화되어 있다. 사실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적 다중 소속은 서양에서보다 동양에서 더 흔한 종교현상이다. 동양에서 종교 간 관계는 상호적이다. 예를 들면, 선불교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신유교(성리학)는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민간신앙 차원에서는 종교적 경계가 흐릿해서 습합현상도 나타난다. 심지어 서양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의 심성에도 동양 종교의 영적 DNA가 남아 있다. 그래서 종교신학자 변선환은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유교적 그리스도교’ ‘불교적 그리스도교’ ‘무교적 그리스도교’ 세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여러 종교가 단순히 공존해 온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생해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속화, 탈세속화/재종교화, 탈제도종교화는 종교의 현상일 뿐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교의 본질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적 현상의 의미는 그것이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렇게 보면 탈제도종교화 현상에도 문제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개인주의다. 실제로 탈제도종교적인 뉴에이지 영성, 신비술(occultism), ‘가나안 성도’ 현상, 유사종교적 힐링 요법 등은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개인주의적 구원의 길은 ‘지금 여기(now/here)’가 아닌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 즉 내세나 내면을 향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지 세상의 구원은 아니다. 고통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는 공동체적이고 변혁적인 탈/종교성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사회적 영성’이 그것이다.

4. 사회적 영성: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회적-영적 수행

오늘의 종교가 정말 염려해야 할 것은 탈종교화가 아니라 ‘탈사회화’다. 우리 사회는 ‘사회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여사제인 마거릿 대처가 사회라는 것은 없고 개인과 가족만이 있다고 한 것은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런 탈사회화 현상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위기다. 사회의 부재는 구조적 위기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위기이기도 하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는 신자유주의의 미끼를 물어버린 사람들은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럴수록 개인의 불안은 더욱 커진다. 자신이 남을 돌보지 않는 것처럼 남도 자신을 돌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마치 악령에 현혹된 것처럼 사회 곳곳에서 〈곡성〉이 들리고, 〈부산행〉이든 서울행이든 광주행이든 어디에서나 좀비에 쫓기듯 숨 가쁘게 달아나야 하고, 무너진 〈터널〉에 갇힌 듯 절망적이다. 사회적 불안이 개인의 불안을 키우고 개인의 불안이 사회적 불안을 늘린다. 그래서 이 시대 불안의 총량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견딜 수 있는 한계를 한참 넘었다.

현실이 이런데도 종교는 불안을 잊거나 못 느끼도록 하는 ‘아편’ 역할만 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고통을 개인적 구원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사회와 종교는 본래 공동체적 인간 경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시대에는 사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종교도 없다. 각자도생을 원리로 하는 사회와 개인구원을 목표로 삼는 종교는 일란성 쌍둥이다. 둘은 인간 경험의 ‘사사화’를 사회적, 종교적으로 극단화하여 공동체를 파괴한다. 시인 김남주는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해방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임을 깨우쳐 준다(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우리 사회의 구조적, 영적 위기는 고통의 존재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일으켜 줄 수 있는 공동체의 부재다.

사회적 영성은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회적-영적 수행이다. 사회적 영성에 대한 관심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영적 위기에 대한 집단적 자각에서 생겨났지만, 그것을 담론으로 확산시킨 이는 신학자 김진호다. 그는 사회적 영성에서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는 한편에서는 ‘관계적’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구조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고 설명한다.

우선 사회적 영성의 관계적 성격은 공동체적 인간관에 기초해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서로 기대어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의 불안과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길이다. 이런 공동체적 인간 이해는 종교적 인간 이해와도 통한다. 예를 들면, 김진호가 강조하는 “타자 되기”는 종교들이 가르쳐 온 이기적 ‘나’를 넘어 ‘너’와 하나 되는 관계론적 지혜와 일치한다. 관계론에 근거한 영적 수행의 목표는 공동체적 구원이다. 만약 개인적 해탈과 구원이 수행의 목표였다면 붓다는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도 광야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나시와 갈릴리로 돌아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깨달음을 나누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형성이었다. 불자들이 붓다(佛), 가르침(法), 공동체(僧)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공동체가 구원의 출발점이며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한편 김진호가 말하는 사회적 영성의 ‘구조적’ 성격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의미한다. 영성과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영성에 대한 관심과 역사에 대한 관심은 반비례할 때가 많다. 헨리 나웬은 남미 해방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그때까지 추구하던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영성을 ‘영성화된(spiritualized)’ 영성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영성의 영성화에 대한 대안은 영성의 역사화다. 그것은 영성을 역사적 삶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는 영성의 역사화가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적 삶을 위해서는 먼저 ‘삶’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역사적, 현실적 ‘삶’ 없이 ‘영적 삶’은 있을 수 없다.”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참여적 영성의 그리스도교적 이상은 예언자이고 불교적 이상은 보살이다. 예언자와 보살은 역사 속에서 깨닫고 역사 속에서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회적 영성가들이다.

사회적 영성의 관계적, 구조적 의미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불이적(不二的)’ 의미일 것이다. 내가 앞에서 ‘사회적-영적 수행’을 말하면서 ‘사회적’이라는 형용사와 ‘영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임표(-)로 이은 것은 사회적 실천과 영적 수행의 불이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전통적 종교의 문제는 사회적 실천과 영적 수행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게다가 둘 사이에 위계를 나눈다. 대개 사회적 실천보다 영적 수행을 더 중시한다. 이에 반해 사회적 영성은 사회적 실천과 영적 수행을 분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영성의 목적이 단지 사회적 실천과 영적 수행의 균형과 조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영성의 새로움은 영적인 것이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넘어 사회적인 것이 영적일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 영성의 탈종교성이 드러난다. 사회적 영성은 종교와 사회의 경계를 허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탈종교성은 전통적 종교 안에 씨앗으로 이미 존재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조건은 종교적 신조의 고백이 아니라 약자를 위한 사회적 사랑의 실천이다. 굶주린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고 나그네를 환대하고 헐벗은 이를 입히고 병든 이를 돌보고 갇힌 자를 방문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 사회적 실천이 종교적 구원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실천은 영적 수행이다. 불교도 깨어서 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라고 주장한다. 오늘의 참여불자들은 그 ‘모든 것’에 사회적 실천도 포함한다. 영성의 목표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넘어 타자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누가 진정으로 영적일까? 신자유주의의 각자도생 원리를 내면화한 종교인들인가, 아니면 종교 없이도 타자와 하나 되는 사람들인가?

5. 맺는말: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

탈종교화를 위기로 느끼는 종교인들은 다양한 해법을 모색한다. 어떤 이들은 세속화와 탈종교화의 파도에도 큰 배는 침몰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양적 성장을 추구하고, 어떤 이들은 근본주의적 교리와 제도를 더 강고히 한다. 하지만 성장주의는 타이타닉의 항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고 근본주의는 게토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탈종교화에 부응하여 ‘종교색’을 뺀 채 선교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교회 인문학, 사찰 인문학, 문화로서의 종교체험, 힐링 프로그램, 템플 스테이, 교회 카페 등이 탈종교적 선교의 사례들이다. 물론 그런 시도는 종교의 벽을 허물어 대중이 종교에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게 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종교의 근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미안한 소리지만, 이 모든 시도는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 진짜 위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눈에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어 실속 없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에 종교가 사활을 걸고 매달려야 할 ‘중헌’ 것은 종교의 위기가 아니라 민중의 위기다. 가진 것 없다고 ‘흙수저’로 무시당하고 힘없다고 ‘을’로 모욕당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개돼지’ 취급을 받는 민중의 삶이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성장주의와 근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적 ‘탈색’으로도 민중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고통의 시대에 종교가 해야 할 것은 오히려 ‘종교본색(宗敎本色)’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존재 이유인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종교본색의 힘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종교인은 프란치스코 교종이다. 그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종교인이다. 그가 266대 교종으로 선출된 첫해인 2013년 〈타임〉은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같은 해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교종 프란치스코’였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그를 향한 세계인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이웃종교인도, 심지어 비종교인도 교종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교종이 그렇게 이웃종교인과 비종교인의 사랑도 받는 이유는 그가 탈그리스도교적 또는 탈종교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교종은 《찬미 받으소서》 《복음의 기쁨》 《자비의 얼굴》에서처럼 가장 종교적인 언어로 메시지를 전한다. 교종의 ‘종교적인’ 메시지에 비종교인도 감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거리에서 노숙자를 만나고, 가난한 이와 밥상을 함께하고, 병든 이를 두 팔로 감싸며 안아 준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교종의 이름으로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을 상징했던 분이었고 평화를 대변했던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교회,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 이 어찌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교종의 이 말은 종교가 세상의 사랑을 받는 길은 고통받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가난하고 힘없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배제된 자에 대한 ‘우선적 사랑’이다. 교종은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그는 강한 자의 불의를 비판하고 약한 자의 편에서 정의를 외친다. 

사회적 약자, 고통받는 이에 대한 우선적 사랑의 이유를 교종 프란치스코의 스승인 예수가 비유를 통해 가르쳐 준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습니까?”(《누가복음》 15:4)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놓아두고 위기에 빠진 한 마리 양을 구하기 위하여 험한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이 비유의 의미를 한 기독교인 세월호 유가족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떠났을 때 들판에 남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자기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목자에게 서운함을 느꼈을까요? 아닐 겁니다. ‘아, 내가 길을 잃고 위기에 빠질 때도 저렇게 목자는 나를 찾으러 와 주겠구나’ 하며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낄 겁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다. 고통 속에 있는 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때 아흔아홉 사람의 ‘보편적’ 사랑도 받게 되는 것이다. 탈종교 시대, 고통의 시대에 종교가 세상의 사랑을 받는 길은 오직 하나다. 이 시대의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인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가장 ‘중헌’ 화두는 하나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 시대의 잃은 양은 누구인가?” ■

 

 정경일/ 평신도 신학자로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한국민중신학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 Terrorism, Religion, and Global Peace, 《사회적 영성》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등이 있고, 역서로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공역), 주요 논문으로 “Just-Peace: A Buddhist-Christian Path to Liberation” 〈사랑, 지혜를 만나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참여불교 탐구〉 〈램프는 다르지만 그 빛은 같다: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협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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