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농담처럼 말한 사실이 있다. “우리 집은 개집이 30평이다”라는 말이다. 20년간 3층 주택 집주인으로 살면서, 집 옥상에서 몰티즈 종 개를 키웠다. 옥상에서는 또 화분에 고추며 방울토마토, 깨 등을 키워 여름철 내내 간단한 채소를 얻었다. 그러다가 작은 빌라로 이사했다. 지난해 일이다.

묶은 짐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창고에서 쏟아져 나온 짐과 옥상 가건물에서 나온 책은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4형제가 초등학교때부터 모은 책이다 보니, 1.5톤 한 트럭을 버렸는데도 한 트럭분이 남아 이사할 집으로 옮겨졌다. 짐을 정리하다 버리고, 다시 정리하다 버리고. 일주일간 짐 정리에 매달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지만 집은 여전히 좁았다. 벽마다 물건이 들어차 있어 벽지를 볼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언가를 더 버려야 했다. 일 순위는 피아노였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때였다. 충남의 한 작은 사찰에 갓 부임한 ‘대학 선배’ 스님에게 한번 오라는 연락이 왔다. 대학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고 졸업하여 출가한 스님인데, 주지로 임명받은 사찰은 법당과 요사채, 창고 건물 세 채가 전부였다.

“스님, 제가 뭐 해드릴 것 없나요? 작은 것이라도 보시하겠습니다.” “보시. 그래 저 피아노 좀 가져가. 그게 지금 가장 큰 보시라네.”

3칸 규모의 대웅전 한쪽에 피아노가 떡 하니 차지하고 있다 보니, 법당에서 의식을 하는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전 주지 스님이 합창단을 만든다고 해서 신도들이 보시한 것이라는데, 시골이다 보니 합창단은 잘 운영이 안 돼 해체됐고, 피아노만 수년째 남아 있다고 한다. 결국 그 피아노가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그 덕분(?)에 없는 수입 쪼개 2년 정도 큰 아이를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피아노 소리가 이웃집에 방해될까 봐 낡은 창문을 떼어내고 ‘요즘 잘 나간다는, 방음 잘되는 창문’으로 바꿔 달았다.

큰 아이가 시집갈 때 주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가져온 피아노는 짐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피아노를 칠 시간도 없었다. 생각날 때마다 “피아노 버리면 안 돼?” 하는 마누라의 애원과 “나 시집갈 때 가져갈 거야”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딸 사이에서,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피아노를 중고상에 처리할 마음이 일게 한 한 권의 책이 신문사로 배달됐다. 미니멀라이프 운동을 소개한 책이었다. 책을 덮고 얻은 결론은 ‘버리자’였다.

서양에서 요즘 유행처럼 부는 바람의 하나가 ‘버리기’다. 미니멀라이프로 이름 붙여진 이 운동은 ‘불필요한 소유물을 버리고, 여가를 문화와 즐기기에 쓰자’는 운동이다. 미니멀라이프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부처님이란 점도 이채롭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과거 14인치 크기에서 지금은 40인치, 60인치를 오간다. 언제 읽었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 소설책, 시집, 대학 전공도서까지도 책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릇은 필요 이상으로 층층이 싱크대와 장식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홈쇼핑을 하거나 대형마트를 찾아 물건을 사들인다. 필요할 것 같아서 사지만, 정작 없어도 되는 물건들이 대다수다.

사람들은 외로워지거나, 마음이 공허해질 때 물건에 집착한다고 한다. 사람의 정을 얻기 어렵다 보니, 물건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려는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소유할 때 오는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짧게는 수분에서 며칠 이내의 즐거움이다. 그것을 보유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더욱 크다.

돌아보면 우리는 조선시대 임금보다 더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먹고 있으며, 더 좋은 가구와 시설을 보유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늘 부족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삶이다. 어떤 스님은 ‘냉장고를 버리라’고 말한다. 냉장고가 음식을 쌓아놓고 서서히 부패시켰다가 버리게 하는 장식물은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조언이다.

몇 개 되는 프라이팬을 끄집어내 2개만 남기고 정리했다. 끈으로 묶어 베란다 한쪽에 쌓았던 책도 정리하고, 피아노도 중고상에 연락해 아주 싼 값에 팔았다. 계단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고 나니 집이 달라졌다. 방마다 벽면이 한 곳 이상 비워졌다. 피아노를 치우니 오히려 공간이 휑한 느낌마저 든다.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은 방으로 옮겼다. 아직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래도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렸다.

어쩌면 그토록 버린 물건들이 본질은 아니다. 내가 정작 버려야 하는 것은 집착하는 마음이었다. 문득문득 기분 상할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화가 오른다. 하지만 잠시 지나고 나며 그 정도 화낼 일은 아니었던 것이 많다. 하룻밤 자고 나면 시답지 않은 일이었을 뿐이고, 일주일쯤 지나면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에 우리는 화를 내고, 심각하게 말을 뱉는다. 나에 대해 집착하는 아상이 화를 일으킨다.

나는 수년 전부터 마음 미니멀라이프 운동을 해 왔다. 마음의 집착을 조금씩 버리는 훈련이다. 때론 명상을 하면서, 때론 묵언을 하면서 마음을 좁은 샘물에서 냇가로, 강으로, 바다로 가져가는 훈련을 나름대로 몇 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좀체 화날 일이 생기지 않는다. 주변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변하니 주변이 변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주변 사람과 어울림이 좋아졌다.

지금도 나는 버릴 것이 많다. ‘내가 누군데 까불어……’ 하는 마음이 그 첫 대상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상’ 버리기다. 불필요한 물건도 버리고, 불필요한 마음도 버리는 운동. 미니멀라이프 운동이야말로 지금 사람들을 위해 불교가 제시해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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