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개교기념 축제 때 두 분의 특별 강연자가 오셨다. 이 두 분은 내 미래를 바꿔놓았다. 한 분은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었고, 또 한 분은 무진장 혜명 스님이었다. 무진장이라는 법명부터가 특이해서 당시 학교신문 기자였던 나는 강연 내용을 속기하러 강당에 들어갔다가 첫 말씀에 눈과 귀가 커지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너’가 아니고 ‘나’를 우선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불교는 종교(religion)에 속하지 않는다. 유신(有神)이 아니라 무신(無神)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 마침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푹 빠져 있을 때였으므로 나는 무진장 스님의 열강에 매료되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 속의 초인의지나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의 부조리 극복 의지, 신과 인간을 대등하게 보려 했던 실존주의 사상과 누구나 자기극복의 참수행을 한다면 인간도 깨달은 자(붓다)가 된다는 불교사상은 서로 통한다는 깨달음이 나를 한껏 고무시켰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그 도전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으로 불교학생회까지 들어갔다. 《반야심경》을 외우며 108배를 하고 참선의 자기 고행의 기쁨에 도전했다.

그때부터 만원버스에 매달려 등교하는 일도 하나의 극복이라 생각되었고, 하기 싫은 수학, 과학 공부도 견딜 만해졌다. 결국 두 분의 영향으로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계신 대학에 갔고, 찬불가를 부르며 불교이론을 교양수업으로 배웠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덴마크로 나가면서 불교는 내게 더 이상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주지 못했다. 부모나 친구 하나 없이 홀로 외국 땅에서 임신 6개월 만에 배 속의 아이를 잃었을 때, 보다 현실적이고 기복적인 의지처가 더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몸을 추슬러 두 번째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가 아플 때면 어쩔 줄 몰랐다. 신을 믿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렇다고 무릎 꿇고 신 앞에 복종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종교로서 불교를 받아들인 게 아니었으므로 현실 속의 부처님은 너무 멀리 있었다. 유럽 그 먼 북구에서 나는 그저 외로운 오리 새끼였다.

나는 2011년부터 일본 히로시마에 3년간 거주했다. 일본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보다 일찍 자리 잡은 나라다. 또 나름대로 훌륭한 불교적 전통을 발전시켜오기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우리네 성황당이나 신당에서 원류를 찾아볼 수 있는 신사를 세우고 토속신앙에 의존하는 걸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일본은 백제시대에 우리나라로부터 불교를 전래받았지만, 정작 수많은 일본 사찰들이 불교 본연의 수행도량 면모보다는 묘지관리 대행업체쯤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고색창연한 엄숙한 절 분위기가 무색하게 부적이나 장식용 액세서리, 당일치기 점보기, 입시나 생일, 결혼을 기념하는 기도카드를 팔기까지 하고 있었다. 마당 구석구석엔 죽은 자식을 위한 아기부처 동상이 빨간 턱받이를 한 채 옹기종기 모여 있고, 큰 나무엔 성황당 종이부적을 걸어놓기도 했다. 뒤뜰엔 어김없이 묘비들이 즐비했다. 일본인들은 ‘결혼은 교회에서, 장례는 사찰에서’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중국이야 공산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하면서 불교전통이 파괴된 바가 크다고 하지만, 일본의 불교는 왜 그렇게 변질되었을까. 여기엔 섬나라라는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으로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종교의 변질, 지진 등의 열악한 자연환경이 낳은 현상 등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불교 본질에 대한 천착의 차이에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2014년 4월에야 한국으로 돌아온 나로서는 아직도 고등학교 때 배운 상식이 불교에 대하여 아는 거의 전부이다. 다만, 몇몇 시인들 작품 속에서 종종 부처님이나 불경 이야기를 마치 우리네 삶 깊숙이 배어 있는 된장국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레 풍겨내는 것을 자주 본다. 비록 자기 수행이 부족한 몇몇 스님들의 지극히 세속적 욕심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이질적 모습으로 변질되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바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동북아시아 세 국가 중 한국불교는 가장 역동적인 불교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부 문제를 고민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나는 여기에서 희망을 본다. 물론 우리나라 불교가 처한 현실이 녹록해 보이지는 않는다. 종교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경쟁적 상황과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종교 패거리문화’는 골치 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과 경쟁은 어떤 의미에서 건강한 종교로 재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특정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언제나 타락과 왜곡이 일어났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가 그러했고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불교가 그러했다. 이러한 적폐를 극복할 때 종교는 새로운 생명을 갖는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분단국가라는 작금의 정치적 사상적 위기감이, 황금만능주의의 폐단이 깊어질수록 자비와 보살행의 불교적 전통이 더 절실하다. 절에 가면 만나는 수많은 게송과 선시, 주련들의 말씀만 제대로 보여주어도 얼마든지 정신과 문화를 윤택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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