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무작정 좋아했던 조각가의 한 사람이다. 제임스 로드(James Lord)가 그와 보낸 18일간의 기록을 읽어보며 그를 생각한다.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가끔 있었다. 자기 앞에 놓인 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기 위해서 당장 하고 있는 일뿐만 아니라 과거에 했던 모든 일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 그에게는 매 순간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와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되었고, 나를 모델로 작업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때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제임스 로드, 오귀원 옮김 《작업실의 자코메티》 p.38.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읽고, 쓰고, 그렸던 적이 있는가. 책을 처음 펼치는 독자처럼, 크레용을 움켜잡고 처음 색칠을 하는 아이처럼 살았던 자코메티가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을 높이 평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선입견을 없애고 있는 그대로만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세잔은 자연 그대로를 그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건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세잔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들 자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위의 책, p.163.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그저 부분과 부분을 맞춰놓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총체를 한 번에 만들어내는 거예요. “붓질 한 번이 전체를 뒤바꾼다는 세잔의 말은 그런 뜻에서 한 말이지요?” 내가 물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 위의 책, p.215.

자코메티는 추상이란 자연 그대로 그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의 자구책이자 정확한 인식의 형상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자연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고 착각했고, 추상이란 이런 경지를 터득한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이라고 믿었다. 추상 역시 자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치열한 노력의 한 형태일 뿐인데…… 아, 나무를 비슷하게 그릴 바에는 나무에서 받은 느낌을 그리는 것이 더욱 솔직하고 인간적인 태도임을 깨우치지 못했다. 뿌리와 줄기 가지의 완벽한 질서, 기하학적으로 전개되는 그 생명력, 오랜 세월을 이겨낸 인내력을 자기의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인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절망 앞에서 솔직했던 자코메티처럼 사유하지도, 형상화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말할 때 말고는 젊었을 때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유년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유년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막 내가 하려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는 중이니까요.
― 위의 책, p.174.

돌이켜보면 온통 부끄러운 기억뿐이지만, 오늘의 출발을 위해 필요했던 시행착오였다고 애써 위로하며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자코메티에게 그림이란 존재하는 어떤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그려내기 위해 끝없이 분투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이를테면 일종의 부산물 같은 것이었음을 기억하기로 하자.

모든 것의 시작과 끝, 그리고 고독의 절대치를 제값으로 간직한 자코메티의 숯덩이 같은 작품을 보면서 얼마 전 지인들과 다녀온 산시성(山西省) 면산(綿山) 정과사(正果寺)의 등신불을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생사일여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선 채로 입적한 선승과도 같다. 장 주네(Jean Genet, 1910~1986)가 자코메티를 이렇게 평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이 더욱더 견딜 수 없어지는데, 그것은 이 예술가가 거짓된 외양이 벗겨진 후 인간에게 남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을 치워버릴 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 장 주네, 윤정임 옮김 《자코메티의 아뜰리에》 p.6.

자코메티의 작품은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의 고독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순수한 지점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끔 전국의 사찰에서 자코메티의 작품처럼 내면화된 새로운 형태의 불상을 보는 날을 꿈꾼다. 깨달음에 동서고금이 없다면, 아니 시와 선은 둘이 아니며 예술에 국경이 없다면, 이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조형미를 구현한 불상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혼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로잡혀 있는 필연성에 대항해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일 수밖에 없다면 나는 파괴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나, 그리고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을 알아봅니다. 당신은 나이고 나는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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