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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단주(短珠) / 이원규
[68호] 2016년 12월 01일 (목) 이원규 소설가

내가 이만큼 살아온 것은 불은(佛恩) 때문이야. 베트남 참전 전우였던 박 형의 죽음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박 형은 나와 동갑, 중년에 들어 참전 트라우마에 걸려 공포증을 앓았다. 무서워서 시내버스도 못 타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20년을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나는 작가가 되고 교수도 했고, 건강한 몸으로 테니스를 하고 먹고살 걱정 안 하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스물세 살 때 특전사에서 낙하산병으로 복무하던 나는 지명 차출을 받아 속절없이 전쟁터에 가게 되었다. 나보다 한 계급 낮았던 박 형도 함께 갔다. 12명의 소규모 장거리 정찰대 임무였으므로 우리는 절체절명의 위험에 처했다.

파병열차가 청량리역에 서고 마지막 10분간 면회가 허용되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단주를 손에 쥐여 주셨다.

“꼭 몸에 지녀라. 관음보살님이 널 지켜주실 게다.”

나는 오랜 손때로 인해 은은한 광택이 나는 단주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 김포 한강 하구 강변 언덕에 앉은 작은 도량 용화사, 내 증조모가 거기서 백일기도를 하신 뒤 할아버지를 잉태하셨다. 외가도 근방이어서 어머니 조상님들도 그 절에 다니셨다. 그 할아버지의 짝인 할머니도 독실한 불자로 사셨고, 며느리 중 내 어머니를 데리고 자주 절에 가셨다. 어머니의 단주는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고 예닐곱 살에 오체투지를 익혔다. 동국대에서 소설을 공부하며 불교 과목을 수강한 뒤 눈이 높아졌다. 《반야바라밀다심경》 외우기에 매달렸고 대승적으로 자비를 실천하며 공덕을 쌓는 길이 참되게 부처님께 귀의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2학년 때 입대했다.

우리는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장거리 정찰에 투입되었다. 해방전선 게릴라들과 조우해 후다닥 맞붙는 전투를 몇 번 겪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의 접전이었다. 함께 떠난 4개 팀 48명 중 5명이 한 달 만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순간적인 망설임 때문에 당했고 소년 포로를 놓아주었다가 그놈이 데려온 적에게 기습당했다.

우리는 냉정함으로써 위기를 이겨냈다.

 ‘단순해져야 한다. 양심이나 인간애는 자신과 동료들을 죽음으로 떨어뜨린다. 자비심 따위는 땅속에 묻어두자.’

그런 정신이 우리를 지배했다. 기계처럼 밀림을 정찰하고 자신과 동료를 지키기 위해 총을 쏘았다. 무사히 귀환해서는 콘돔을 들고 여자를 사러 나갔다. 박 형도 나도 다른 동료들도 똑같았다.

“이렇게 실존을 확인하는 거야.”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가끔은 정찰 출정 시에 군목이 와서 기도해주었다. 우리는 뒤에서 비웃었다.

“목사님, 독실한 신자인 김 병장이 총을 빨리 못 쏴서 죽었는데, 뭐 기도하면 구원 받는다구요?”

나는 품고 다니던 단주를 사물함에 넣었다. 불자가 가져야 하는 첫 번째 계율이 살생을 피하는 것인데 살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섰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의 무사를 위해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고 계셨지만, 그때 나는 그랬다.

게다가 내 병과는 폭파공작, 죽는 것보다 두려운 임무가 있었다. 야간에 적이 이동할 만한 길에 파편 700개가 전방으로 튀어나가는 클레이모어 폭뢰를 자동폭발장치로 10개쯤 설치하고 아침에 거두는 일이었다. 선두에 선 사람이 거미줄 장치를 건드리면 한꺼번에 폭발해 그 화망에 들어선 사람들 100명이고 200명이고 몰살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은 전후방 구분이 없었다. 두려운 것은 내가 설치한 화망에 민간인들이 들어오는 것, 혹시 친척 집에 가서 제사 지내고 돌아가던 일가족이 들어서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간인을 살상하는 일이 다른 정찰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무인 클레이모어를 설치하고 건전지를 연결할 때마다 나는 중얼거렸다.

“제발 양민이 여기 들어오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다면 천벌을 받을 거야.”

파병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4박 5일의 장거리 정찰 27회 경력을 쌓고 찬찬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무사했고 무인 클레이모어 매설이 50회 이상이었는데 화망에 멧돼지나 들개 한 마리 들어오지 않았다. 그건 거의 기적이었다.

‘단주를 내팽개쳤었는데도 내가 불은을 입었구나.’ 하고 다시 그것을 가슴에 품었다. 그 순간 대자대비하신 관음보살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후 복학해서 소설을 썼고 베트남 참전 배경 장편소설을 써서 현상공모에 당선되었다. 전쟁 속의 양심과 인간애를 주제로 잡은 것이었다. 중편소설과 단편소설도 몇 편 썼는데 비슷했다. 비평가들은 내 소설의 휴머니즘을 불교 종단의 동국대에 다닌 것, 혹은 문청 시절에 빠졌던 톨스토이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썼다.
단주는 내가 30년쯤 더 갖고 있다가 어머니가 중병이 걸리셨을 때 돌려 드렸다. 어머니는 단주를 잡은 채 운명하셨다.

내가 설치한 클레이모어 화망에 민간인들이 들어와 십여 명쯤 죽었다면 나는 어찌 됐을까? 그 화망이 허탕만 친 것이,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이 어머니의 백일기도와 단주에 깃들인 할머니와 어머니의 공덕 때문일까? 아니면 트라우마를 소설로 풀어낸 때문일까? 공포증에 걸려 속죄하다가 간 박 형은 극락정토로 갔고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불교의 업보는 아승기겁(阿僧祇劫)을 뛰어넘는 것이니 아직 그것을 쌓는 것인가? 나는 답을 모른다. 그럴 때마다 겸허해지고 적선을 생각하며 모든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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