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한중일 불교대회 참가기

얼마 전 중국 저장성(浙江省) 관음성지 보타낙가산에서 열린 제19차 한중일 불교대회(10월 11일~15일)에 다녀왔다. 한중일 불교대회는 동북아 삼국의 불교인들이 격년으로 만나 공동관심사는 토론하는 자리다. 이번 모임 역시 그런 관심사를 논의하는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많이 교환되었다. 나뭇가지 위에 사는 새는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울지만 만릿길 먼 땅으로 함께 날아가는 기러기들은 서로를 돕기 위해 운다고 했다. 이번 모임이 바로 그런 성격의 회동이었다.

돌아보면 한중일 삼국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문화가 있고, 함께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이 있으며, 같이 이어가야 할 역사가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는 연기(緣起)의 도리로 보나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관점에서 보나,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동시에 미래의 나아갈 바를 함께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중일 삼국은 벼농사와 조상 숭배 및 한자(漢字) 사용, 유교 · 불교 · 도교를 함께 공유하는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큰 자산이다. 또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의 동해(東海)와 서해(西海) 그리고 남해(南海)를 지중해(地中海) 삼아 세 나라는 모두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바다는 모든 강물을 수용하여 개개의 차별성이 없으며, 또 바다는 호수나 하천에 비교하는 것을 이미 벗어났다”고 하는 《화엄경》 〈십지품〉의 ‘바다십덕[海十德]’ 철학을 함께 공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삼국의 전통과 정서, 다시 말해 문화적 유전자 속에는 유사한 측면이 많다. 때문에 한 나라의 역사 문학 고전적 베스트셀러가 다른 두 나라에서도 큰 호응을 얻는 경우도 있다. 현장(玄奘, 600~664) 법사가 주인공인 소설 《서유기(西遊記)》는 오늘날에도 애니메이션으로 삼국 만화작가의 상상력에 의하여 계속 재창작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삼국이 똑같이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문화적 동질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알다시피 한자의 역사는 수천 년의 문자적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과 일본 역시 한자를 사용한 세월이 이미 일천 년 이상 되었다. 하지만 삼국은 최근 들어 표기법이 많이 달라졌다. 중국은 간체자(簡體字), 일본은 약자(略字), 한국은 정자(正字, 繁體)를 사용한다. 이는 문자공동체(文字共同體)의 해체를 우려케 한다.

그래서 뜻있는 ‘한중일 현(賢) · 명인(名人) 30인 회의’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2013년 ‘공용한자 808자’를 다시 선정하는 작업을 한 바 있다. 이는 한자문명권 삼국의 또 다른 문화적 전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민간주도로 이루어진 ‘808 공용한자 합의’는 현대 한중일 공동문화 발굴이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808 공용한자’를 통한 문화협력은 새롭게 상호이해를 증진시킬 것이며 또한 갈등 완화의 보이지 않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3국 공통의 808 한자를 3국 주요 도시의 도로표지판, 관광용 책자, 관광지역 상점 등에 적극적으로 사용토록 한다면 교린(交隣)과 관계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교학의 교류 측면에서도 좋은 선례는 얼마든지 많다. 예컨대 화엄종 제3조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스님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사(論師)인 마명(馬鳴) 보살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해설한 저작을 남겼다. 그런데 현수법장은 신라 원효(元曉, 617~686) 스님의 《기신론 해동소(海東疏)》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여 난해한 《기신론》을 이해하는 지침으로 삼았다.

화엄종 4조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 스님 역시 《팔십화엄경》의 소초(疏抄)를 달면서 “고효공기신소서운(故曉公起信疏序云)” “고해동효공운(故海東曉公云)” “효공석운(曉公釋云)” “고효공운(故曉公云)”이라고 하여 원효 스님의 소(疏)를 많이 인용하면서 그 안목을 높이 평가했다.

원효 스님은 신라 땅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그 당시에 이미 ‘동아시아 인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의 제관(諦觀, ?~970) 스님은 끊어진 중국 천태종의 법맥을 부흥시켰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10에 의하면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은 고려로 사신을 보내면서 유출되고 소실된 천태 관계 서적을 구해오도록 했다. 제관 스님은 960년 고려 광종(光宗)임금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갔다. 스님은 나계사(螺溪寺) 의적(義寂) 스님을 찾아가 10여년 동안 함께 천태학을 연구하였으며,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다. 하지만 제관 스님은 중국에서 열반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 천태종 법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에 뒷날 대각의천(大覺義天, 1055~1101) 국사가 중국으로 입국하여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대사 부도탑 앞에서 “옛날 제관이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하였으나 지금 대(代)가 끊어져 제가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찾아와 대도(大道)를 구하나이다.”라고 기원하고 천태학을 배워 귀국한 후 고려 천태종을 세웠다고 전해온다. 이런 사례는 불교공동체를 향한 삶을 법장 · 징관 · 제관 스님이 오래전에 후학들에게 귀감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할 것이다.

현재 한중일 삼국 앞에는 여러 가지 정치 · 군사 · 역사적 현안으로 인하여 다소 냉랭한 영역도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인적 교류는 2014년 이후 매년 2,000만 명 이상일 정도로 민간교류는 활성화되었다. 따라서 당면 현안으로 인하여 주변의 다른 문화 교류영역에 미치는 영향력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한중일 불교지도자들이 완충 역할을 자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옛말에 “황하의 동쪽도 삼십 년 후에는 서쪽이 된다[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고 했다. 한중일 삼국이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를, 갈등보다는 협력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명언(名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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