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고령화 사회와 불교 : 4인의 불자(佛子), 늙음을 돌아보다-비구니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지난여름, 섭씨 3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한반도를 강타했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오래전 타이완에서 잠시 공부하며 살았던 경험으로 칙칙한 아열대 습기의 찬 기후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우리나라 여름 더위,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이 산중의 여름 한 철은 너무나 감사하고도 고마운 계절로 살아왔다. 그런데 지난 여름방학 한 달 내내 에어컨 없는 방에서 마무리해야 할 과제를 안고 무서운 더위와 씨름했던 그 시간은 참으로 암담하기까지 했다.

어떤 스님은 그 더운 여름 《화엄경》 독송에 심취하여 오히려 더위를 잊고 지내셨다는데 나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올해의 여름이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무더운 여름이 될 것으로 전망했었다니 이건 단순히 나 개인이나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앞으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섭씨 40도를 대비해야 한다는 염려가 뜨거웠던 여름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지금은 서늘한 가을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라진다고들 하는데 그래서일까, 어느 사이 11월이다.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로 부른다고 한다. 포행 중 길에서 자주 만났던 다람쥐랑 청설모 등 이런저런 친구들의 자취가 뜸해지고 나무에서 잎이 떨어져 내린다. 무성했던 숲이 수그러진다. 그렇지만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 그렇게 자리를 비웠다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왕성해질 것이다. 변화해 가는 것이 어디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계절뿐일까. 자리를 선뜻 비워주고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비단 나뭇잎만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렇게 넘겨주고, 내어주고, 변화하는 이치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우주의 질서이고 불변하는 순환의 법칙이다. 이런 질서 속에서 지구는 영원히 건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산중은 11월이 되면 큰 불사가 한바탕 이루어진다. 세상 말로는 이벤트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다. 1년에 단 한 번 11월에 학인 스님들의 수행 공간과 밖의 참배객, 관광객들과의 경계가 되는 아주 작은 불이문(不二門)이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이 문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금지선이었지만, 이날 하루는 안과 밖, 관광객과 스님들의 문이 하나가 되어 한창 곱게 물든 400년의 은행나무 바로 가까이에서 자기 나름의 가을을 보고 들으며 느끼는 날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은행나무 보살 불사하시는 날로 이름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거룩한 불사인가! 인생은 100세라는데 은행나무는 400년의 정정한 거목에 보석을 매단 듯 울창한 숲을 이룬 노란 잎새들로 아름답고 따뜻하다.

‘65+ 아름다운 회향’이라고 제목을 써 두고는 불쑥 여름 이야기부터 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은행나무 이야기까지도 하게 되었다. 이 글의 주제는 ‘나에게 나이 듦이란 무엇인가?’이다. 늙음에 대하여 명실공히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쓰라는 정식 청탁은 나의 생애를 통하여 처음 있는 일이기에 곧장 주제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에둘러오게 된 것이다. 정신적 경련(mental cramp) 같은 걸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면 이해가 될까?

내 생애 첫 번째 스무 살 때 삭발염의라는 대사건을 경험한 이래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발원하고 기도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벌써 세 번째 스무 살 딱 중간 지점까지 온 지금, 늙음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맞게 되었다. 처음 이 소식을 전화로 들었을 때 평소 습관처럼 큰 소리로 유쾌하게 웃었다. 그냥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소 학인 스님들과 강의 중에 조금 부끄럽지만 심정적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던 내용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나의 정신 연령은 고3, 열아홉에 멈춰 있음을 말하며 어쩌다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말을 하더라도 양해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학인들도 그냥 웃는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요즘 학인 스님들은 고학력에 고령 출가자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LTE급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을 한 인생의 선배들이다. 이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 세월을 그만큼 어렵게 살아내고 발심 출가한 사실에 격려와 찬탄을 보내는 의미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나에게 나이 듦, 늙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말은 바로 삶이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다.
나의 삶 중에서 세 번째 스무 살의 중간 지점을 살고 있는 지금, 늙음이라는 단어를 그래도 일단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근래 들어 대학에서 오롯이 교육에 전념해오던 도반 스님의 정년퇴임 기념 강연에 가끔 참석하면서 한층 더 세월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이쯤에서 나 자신의 일상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살아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매여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늙어 간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꼭 주문하고 싶은 사항 하나, 설사 더 많은 세월을 살아야 한다 해도 늘 그 순간만을 살 일이다.

지금은 지나간 과거도, 오지 않은 미래도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지금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지금일 뿐이다. 그러니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순수한 시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을 살 뿐이다.
요즈음 학인 스님들과 함께 보는 《화엄경》 〈회향품〉에 선근회향이라는 말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태어나면서 그 생을 마칠 때까지 모든 이치는 회향하는 일뿐이다.

가을을 흔히 나눔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순전히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오롯이 회향하는 계절이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자기의 그릇만큼 자기 분수만큼 선근으로 회향할 일이다. 이 세상에서 사용되는 많은 언어 중 선근회향(善根廻向), 아름다운 회향보다 더 좋은 말이 또 있을까?

첫 번째 스무 살 시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던 말이었고, 입으로 열심히 외우고 또 잊어버렸던 단어, 회향이라는 이 말이 오늘따라 소중하고 귀한 의미로 진하게 내게 왔다. 나의 시간을 아름답게 회향할 일이다.

그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축복에 대해서도 소중하고 고마운 마음이 점점 크고 절실해진다. 내가 입는 옷과 밥, 몸담고 있는 이 집에 대해서 더 많이 진심으로 감사할 일이다.

하나 더, 녹슬지 않는 꿈을 가질 일이다. 이다음 커서 무엇이 되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처럼, 앞으로 스무 살을 더 보낸 후에도 행복한 노스님, 따뜻한 노스님이길 꿈꾼다.

하나하나의 잎새들이 모여 숲을 이룬 그 속에서 바람을 맞아 가슴을 맞대어 여는 자유를 꿈꾼다. 사소한 것까지 천천히 버리며 아름답게 포기하는 자유를 꿈꾼다.

《장자(莊子)》에서 “노아이생 일아이로 식아이사(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라 했던가!

젊은 시절의 삶이 수고로웠다면 늙음은 나를 편안케 하고 죽음은 쉬게 한다고 한 것처럼 늙으면서 편안해지고 쉬어가고 쉬어갈 일이다. ■


일진 / 운문사승가대학 학장. 1970년 재석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85년 명성 강백스님으로부터 전강. 조계종 교재 편찬위원, 단일계단 니갈마위원, 불교여성개발원 특별자문위원,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 운문사 주지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한국근대불교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 〈불교와 여성〉 주요 저서로 《불교임상심리학》(역서) 《승만경을 읽는 즐거움》 등이 있다. 현재 니존중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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