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고령화 사회와 불교

‐ 노고(老苦)에 대한 불교적 이해

1. 들어가는 말

어느 날 코살라(Kosala)의 빠세나디(Pasenadi) 왕이 고따마 붓다에게 “세존이시여, 태어나는 자에게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예외인 자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붓다는 금과 은이 많고 재산과 자구가 많고 재물과 곡식이 많고 크게 부유하고 큰 재산을 지닌 풍요로운 대부호로서, 대신이든지 바라문이든지 장자이든지 모두 태어난 자라면 그들에게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예외는 없다고 답했다.

이 대화에서 보듯이 죽음과 더불어 늙음은 큰 권력을 지닌 대신이든지 종교 성직자이든지 매우 부유한 장자이든지 태어난 자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태이다. 심지어 번뇌를 파괴한 아라한이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반야를 통해 해탈된 비구일지라도 그가 파괴되고 사라지는 속성을 지닌 몸으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예외일 수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늙음이라는 고통은 붓다의 대답처럼 태어난 자라면 죽음과 함께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특성을 지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늙음을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초전법륜에서 설해진 사성제를 참조하면 늙음이라는 고통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다시 말하면 늙음의 원인이 소멸한 경우 현재 늙음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늙음이 없는 안온한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붓다의 정각이 그 제자들의 해탈 체험으로 재생산되는 초전법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늙음이 없는 상태로서 열반을 성취했더라도 미래세에 재생하지 않음을 통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며, 현재 이미 태어난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태어남이 파괴되었고 범행이 완성되었고 해야 할 일을 다 끝냈고, 더 이상 후유가 없는 상태를 성취한 아라한에게는 늙음이 경험되더라도 그것이 재생을 야기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늙음과 아직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늙음이 태어난 자에게 보편적으로 경험된다’는 붓다의 말씀은 그 자체만으로 유익한 지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늙음이라는 경계에서 아파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늙은이에 대한 이러저런 복지 정책이 실행되고 있더라도 늙음에 직면하여 당황하고 번민하고 불안해하는 자의 근본적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더욱이 늙음이 홀로 덮치는 경우는 드물다. 대체로 질병, 빈곤, 버려짐이라는 부정적 요소와 결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붓다 당시 사위성에서 크게 재산이 많고 권력이 있었던 바라문이 남루하고 초라한 옷을 입은 노인의 모습으로 붓다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붓다가 그 이유를 묻자, 노인은 자신에게 4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들이 아내와 모의하여 자신을 내쫓았고, 따라서 지금 구걸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사정을 들은 붓다는 노인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알려주면서 자식들이 모두 참가하는 대중적인 집회에 가서 게송을 읊으라고 가르쳐주었다.

내 그들의 태어남으로 기뻐했고 내 그들이 존재하길 원했노라.
그들은 아내들과 모의한 후 개나 돼지처럼 나를 내쫓았다네.
참으로 나쁜 후손들이 나를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른다네.
마치 늙어 쓸모없어진 말이 여물이 담긴 구유로부터 내쫓기듯이
아들의 모습을 지닌 야차들이 늙어가는 자를 버렸다네.
바보 같은 자식들의 늙은 아버지는 다른 집들에서 구걸하며 살아간다네.
나에게는 성실하지 않은 아들들보다 참으로 지팡이가 더 낫다네.
그것은 사나운 황소도, 무섭게 그르렁거리는 개도 몰아내 주고,
어둠 속에서 앞으로 가게 해주고, 깊은 곳에서 그 바닥을 찾아준다네.
(나는) 지팡이의 힘으로 발부리가 걸린 후에도 재차 일어난다네.

그 바라문은 붓다에게 이 게송을 배워 자신의 아들들이 모두 참여한 대중적인 집회에서 읊었고, 그것을 들은 자식들은 크게 반성하고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가는 것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것은 어쩌면 늙음과 그것에 수반된 고통의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늙음으로 인해 자식들로부터 내쫓긴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구걸하러 다니면서 사나운 개에게도 위협을 받는 상황, 즉 늙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설상가상 굶주리고 짐승에게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노인의 불행한 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 붓다 당시 이러한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한 사례는 없는가? 이와 관련하여 밧지 족의 7가지 결코 쇠망하지 않는 법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밧지 족을 침략하려고 대신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묻는 마가다국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 왕에게 붓다는 아난다와의 대화를 통해 밧지 족에게는 7가지 법칙이 있는데, 그 때문에 결코 밧지 족이 쇠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알려준다. 그 법칙 중에 네 번째가 ‘밧지 족은 그 나라의 어떤 노인이든지 그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양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것이다. 붓다는 밧지 족의 이 법칙을 모델로 하여 비구들의 7가지 불퇴법(不退法)을 제정하는데, ‘구참 비구를 공경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조목이 위의 네 번째와 상응한다. 붓다가 찬탄하고 나중에 응용하는 것을 고려할 때 이 법칙을 부족을 다스리는 통치 이념으로서 일종의 노인 정책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해탈도에서 늙음은 고통의 범주로 분류된 것이다. 즉 사회 정책의 일환으로만 그 해결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도에게 늙음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해결 차원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수행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주제라는 것이다.

2. 늙음(老, jarā)이란 무엇인가?

초기불전에서 단독적으로 늙음이라는 주제로 설해진 가르침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주로 생로병사와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되거나 죽음과 묶여 노사라는 한 요소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뿐 아니라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등과 같은 묶음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형태이든지 늙음은 모두 고통이라는 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것은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늙음이라는 고통은 무엇이고, 늙음의 원인은 무엇이며, 늙음이 없는 상태는 실현 가능한지, 늙음이 없는 상태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라는 주제 아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초기불전에 나타난 늙음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이에 대한 정의는 2가지에서 기술되는데, 사성제의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와 십이연기[=緣起]의 노사지(老死支)가 그것이다. 주지하듯이 사성제와 십이연기는 붓다의 정각 체험과 그 제자들의 해탈적 통찰로서 제시된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두 교법에서 늙음이라는 주제가 붓다에 의해 설명되었다면 이것이 불교 해탈도의 문맥에서 다루어졌다는 뜻이 된다.
그 둘 중에 사성제에 포함된 늙음이라는 고통은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속에 포함된 하나로서 정의된 것이다. 따라서 늙음은 거기에 포함된 다른 요소인 태어남 등의 8가지 고통과 동일한 선상에 놓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고통의 일어남[集聖諦], 고통의 소멸[滅聖諦],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방식이라는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와 같은 선상에서 놓인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보편적 진리로서 늙음, 늙음의 원인, 늙음의 소멸, 늙음의 소멸로 이끄는 방식으로 설해졌다는 것이다.

연기와 동의어로 간주되는 십이연기에서도 늙음은 단독적으로 설해지지 않는다. 고온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그 연쇄를 구성하는 12개 요소 가운데 하나이면서 죽음과 더불어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위상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노사지는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무명이라는 특정한 원인과 결합된 재생으로부터 일어나는 고온의 발생 과정에서 이것은 무명 등의 11개 요소와 유기적으로 연계된 조건으로서 늙음이고 동시에 슬픔 등과 결합된 요소이다.

① 늙음이란 말하자면 그런저런 중생들의 그런저런 중생의 부류에서 늙어 늙은이가 되고, 머리가 희어지고, 치아는 부서지고, 기운 좋은 나날은 줄어들고, 몸이 굽어지면서 다리가 어그러지고, 신체가 무거워져 상기가 되고, 지팡이로 지탱하여 다니고, 피부가 줄어들거나 늘어져 삼씨처럼 주름지고, 감관들이 훼손되어 가고, 얼굴빛이 더럽고 지저분해지는 것이다.

②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에서 늙음이란 무엇인가? 머리가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되고, 피부는 늘어지고, 나이가 많아지고, 무너져 가고, 대들보가 굽은 것처럼 등이 굽고, 숨을 내뱉을 때마다 쿨룩거리고, 신체가 앞으로 넘어질 듯 기울고, 지팡이에 기대고, 사지가 띨라(tila) 나무처럼 딱딱해지고, 아둔해지고, 쇠약해지고, 점점 쇠약해지고, 감관들이 노쇠해지고, 파괴되어 가고, 상스카라(saṃskāra)들이 노후화되고, 손상되어 무너져 가는 것이다.

위 예문들은 모두 산스끄리뜨, 한역 전승에 입각한 것으로서 ①은 사성제를 분별한 내용에 속하는 것이고, 늙음이라는 고통[老苦]과 대비적으로 설명된 것이다. ②는 연기법을 분별하는 차원에서 설해진 것이고 ‘태어남에 의한 조건적 발생’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늙음에 대한 정의이다. 이 두 전승과 비교해 팔리어 전승에서는 ①이든 ②이든 모두 “이런저런 중생들의 이런저런 중생의 부류에서 늙음, 나이 늘어감, 치아의 부서짐, 머리의 희어짐, 피부의 주름짐, 수명의 줄어듦, 감관들의 노쇠함이다.”라고 더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세 전승 모두 신체적 노후화에 초점을 맞추어 늙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감관들의 노쇠함이라는 표현에서 의근이 포함될 여지가 있지만, 전후 문맥을 고려하면 법경(法境)을 받아들이는 문으로서 의근을 제외한 나머지, 색을 볼 수 있는 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 맛을 알 수 있는 혀,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온몸을 가리키고 있다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태어남에 의한 조건적 발생으로서 늙음이 무상하고 무너지는 속성을 지닌 것 등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또한 ②에서만 언급된 상스카라(saṃskāra)를 좁은 의미로서 의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준비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넓은 맥락에서 일체 현상, 특히 노후화되는 신체적 현상으로 그 뜻을 국한시키더라도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반면 ②와 달리 ①과 팔리어 전승에서 전반적으로 중생들에게 일어나는 것으로서 늙음을 한정한 것은 태어남에 의존한 정각자들도 이런 현상을 동일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②처럼 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백발, 주름, 자세의 구부러짐, 호흡의 가쁨 등으로 묘사되는 늙음에 대한 붓다의 위 설명은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늙기 시작한다’는 일반적 상식과 견주어 볼 때 그 뉘앙스가 다르다. 후자는 늙음을 인생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심신이 쇠퇴하는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 비해, 전자는 죽음과 가까운 만년에 신체적으로 늙어가는 현상만으로 그 설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자 그대로 늙어가는 자에 일어나는 신체적 현상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붓다의 해탈지견으로서 늙음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나 연기의 구성요소로 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늙어가는 현상이 아닌 고통의 대표성을 띤 늙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느 날 문득 부딪치는 고통이라는 경계로서 늙음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머리가 빠지거나 머리가 백발이 되거나 얼굴에서 주름이 발견되거나 치아가 손상되거나 척추가 주저앉아 굽어지거나 자세가 앞으로 기울거나 눈에 노안이 와서 잘 보이지 않거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이런저런 냄새를 못 맡거나 음식의 짠맛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등의 사태가 늙어가는 자에게 경험될 때, 당황하고 슬프고 불안해하는 심리적인 것까지 함축하는 늙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늙음의 경계에 부딪히면 대부분 노인은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커다란 바위산이 자신에게만 사방으로 짓이기면서 완전히 에워싸듯이 덮쳐오는 늙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태에서 심리적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늙는 자이다. 늙음은 나의 것이다’라고 간주하여 자신의 자아나 자아의 것으로서 늙음을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자아(ātman)는 ‘나’라고 할 때마다 항상 지시되는 불변의 실체로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변화를 초월하는 개체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런 까닭에 좀처럼 임시적이고 세간적 방법으로는 늙음이라는 고통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럼에도 초전법륜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의 늙음과 죽음을 넘어선 열반의 성취를 보여줌으로써 늙음의 보편성과 아울러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실로 실현 가능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말하자면 붓다에 의해 정의된 늙음이란 단순히 자연현상과 같은 특징을 밝힌 것이라기보다 노후화를 경험하는 자에게 늙음을 보편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늙음의 원인을 사유하고 늙음으로부터 해탈하는 방법을 찾아 해탈된 상태를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3. 늙음이라는 고통의 원인

‘누가 늙고 죽는 자인가? 늙음과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 붓다는 그것을 ‘영혼과 신체가 동일하다.’ 혹은 ‘영혼과 신체는 다른 것이다’라는 부류의 극단으로 치부하면서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라고 그 대답을 보류한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으로 교정한다. 기본적으로 그 주체를 상정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것의 원인과 조건을 묻도록 하는 붓다의 방식은 늙음과 죽음을 바라보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이것은 연기적 사유 체계로서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두 극단을 떠난 중도이고 여실하게 전도되지 않는 정견이다. 이와 유사하게 불교 해탈도의 측면에서 ‘무엇 때문에 늙음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물음은 여러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75에 의하면 집착된 오온에 대한 탐욕을 버린 수행자에게 “나는 오랫동안 참으로 이 마음에 의해 속고 사기당하고 현혹되었다. 나는 실로 몸(色), 감수작용[受], 관념[想], 형성력[行]들, 식별작용[識]을 집착하면서 집착했다. 그러한 나에게 취착을 조건으로 유(有)가 일어나고, 유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일어나고, 생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들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이 모든 고온이 일어난다”라는 생각이 떠오른다고 한다. 이를테면 늙음이라는 고통은 오온, 즉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집착은 오랫동안 속이고 현혹시킨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현혹시킨 마음이란 엄밀하게 오온 각각에 대해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라 관념화하여 동일시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에 비해 늙음의 원인으로서 무명과 갈애를 모두 제시한 다음과 같은 경전도 있다.

나는 유전과 윤회에서 무명에 의해 뒤덮이고 갈애에 의해 속박된 중생들에게 고통의 소멸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인을 보지 못하고…… 훌륭한 사람의 다르마로 인도되지 못하기 때문에 몸을 자아라고 간주하거나 몸을 지닌 것을 자아라고 간주하거나 자아 가운데 몸이 있다고 여기거나 몸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간주한다. 그는 바로 그 몸에서 구르고 회전한다. 그리고 구르고 회전하는 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태어남, 늙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라는 고통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붓다는 오온 각각에 대해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발생한 구르고 회전하는 전도로부터 늙음이라는 고통이 일어난 것이지만, 최종적인 원인은 무명에 의한 덮임과 갈애에 의한 속박이라고 두 가지를 모두 제시하고 있다.

또한 사성제의 체계라면 늙음의 원인은 당연히 재생으로 이끌고 즐거워할 만한 탐욕을 수반하고 여기저기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갈애일 것이다. 이 갈애 역시 붓다에 의해 고통의 일어남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로 분류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갈애가 원인이 되어 태어나고, 태어나는 것으로 인해 늙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팔리(pāli) 율장에서는 이 갈애를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에 대해 만족을 모르는 목마름,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현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 혹은 비존재에 대해 만족을 모르는 목마름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비유경(Nagaropamasūtra)》에 의하면 갈애가 늙음의 최종 원인일 수 없다. 그 텍스트에서 붓다는 늙음과 죽음의 원인에 대해 자문하고 여리작의(如理作意)하는 동안 그것이 태어남 때문임을 여실하게 현관하고, 나아가 근본적으로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 혹은 무명에 의한 조건적 발생임을 여실하게 현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적 발생의 연쇄에서 연기를 구성하는 요소는 늙음을 포함한 고온이 일어난다는 측면에서 분류할 경우, 순서대로 태어남, 현존하면서 계속 존재할 가능성으로서 유(bhava), 연료와 같은 취착(upādāna), 재생으로 이끄는 갈애(tṛṣṇā), 감수 작용(vedanā), 감관과 대상과 인식 주체의 만남으로서 촉(sparśa), 6가지 존재로 들어오는 곳인 육입처(ṣaḍāyatana), 오온 혹은 색(色) · 수(受) · 상(想) · 사(思) · 촉(觸) · 작의(作意)로서 명색(nāmarūpa), 감각적 지각(vijñāna), 형성된 의도로서 행(行, saṃs-kāra)들, 무명(無明, avidyā)이다. 한마디로 태어남에서부터 무명까지 11가지 구성요소가 조건 지어진 순서에 따라 발생하는 늙음과 죽음이라는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무명이라는 특정한 원인에서부터 시작하는 조건적 발생이기 때문에 무명을 제거해야 늙음이라는 고통으로부터 넘어설 수 있다.

그렇더라도 늙음에 직면한 자에게 늙음은 일차적으로 태어남에 의한 조건적 발생이다. 말하자면 늙음을 겪는 자의 입장에서는 해탈로 이끄는 연기적 사유를 무명이 아니라 태어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해탈지견으로서 정립된 연기의 정형구는 이 순서와 다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붓다는 제자들에게 반야에 의한 훈련이라는 측면에서 정형구에 의한 관찰, 정형구 가운데 ‘태어남은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등의 한 구절에 의거한 관찰을 모두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4. 붓다의 출가와 정각에서 ‘늙음’

늙음이라는 고통을 붓다는 어떻게 넘어섰는가? 초기불전에서 발견된 붓다의 정각 기술은 알려진 것만 적어도 10가지 이상 된다. 문헌사적인 문제나 내용적 불일치는 그만두고라도, 이념사적으로 불교의 출발은 붓다의 정각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면 늙음이라는 고통도 그 연장선 위에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초전법륜과 《도시비유경》의 설명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은 늙음이라는 고통이 진리로 포함되거나 연기지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붓다의 출가 동기를 살펴보자.

나는 왜 스스로 태어남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바로 그 태어남의 속성을 지닌 것을 추구하는 것일까? 스스로 늙음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바로 그 늙음의 속성을 지닌 것을 추구하는 것일까? ……차라리 스스로 늙음의 속성을 지니는 동안 늙음의 속성에 대해 그 위험을 알고서 늙지 않고 속박으로부터 안온한 최고의 열반을 추구할 것이다.

이 붓다의 내적 사유는 출가로 이어지는데, 붓다가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젊은 청년이었던 내가 부모가 원하지 않아 눈물 흘림에도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자르고 가사를 입고서 집으로부터 집이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유행을 떠났다’고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붓다는 생로병사 등의 불가피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속박되지 않는 안온한 열반의 성취를 위해 출가한 것이다. 대부분 일반인은 생로병사에 대한 불가피함과 그 위험을 보더라도 붓다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붓다는 생로병사에 속박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그것만 추구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가 매우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그만큼 간절하게 벗어나려고 출가한 것이다.

그러면 왜 중생은 불가피하게 늙음에 속박되어야 하는가? 붓다는 이에 대해 태어남, 병듦, 죽음 등과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아내와 아들이 늙음의 속성이고, 남녀의 노비가 늙음의 속성이고, 양과 염소가 늙음의 속성이고, 돼지와 수탉이 늙음의 속성이고, 말, 소, 코끼리가 늙음의 속성이고, 금과 은이 늙음의 속성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집착들이 늙음의 속성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즉 자신이 불가피한 늙음의 속성을 지닌 것은 인식 대상에 대해 사사로이 움켜쥐거나 단단히 붙잡으면서 자신의 소유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출가 이후 붓다가 본래의 목적에 도달했는지 여부는 정각 이후 설해진 초전법륜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나아가 그것이 붓다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해탈에도 유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서 붓다는 중도로서 팔정도를 설하고 그 팔정도를 이론적으로 재구성한 사성제를 설하면서 자신이 사성제에 대해 3번 굴린 방식으로 청정한 여실지견이 있고 나서야 모든 존재들 중에 최고로 올바른 정각을 완전히 깨달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고 회고적으로 설한다. 이런 측면에서 사성제는 붓다에게 깨달음을 성취하게 해준 진리로서 붓다의 의해 해탈지견된 내용이다. 이 사성제 가운데 늙음은 다른 요소들과 함께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에 포함된 것이다. 즉 ‘태어남, 병듦, 죽음, 좋아하지 않는 사물[혹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물[혹은 사람]들과 떨어지는 것,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요컨대 5가지 집착된 무더기’라는 고통과 함께 보편적 진리로 여실지견된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에 이 늙음을 적용하면 ‘이것이 늙음의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이 늙음의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이미 알려진 것이다’ ‘이 늙음의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마땅히 알려져야 할 것이다’라는 3가지 방식으로 붓다가 발견한 것이고, 이미 굴린 것이며, 제자들에 의해 굴려질 것이다.

다음으로 붓다의 정각 기술로서 연기법을 설하고 있는 《도시비유경》에서 늙음을 살펴보자. 이 텍스트에 따르면 최고의 정각을 성취하기 이전 독거처에서 은둔하던 고따마 붓다에게 다음과 같이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아! 이 세간인은 괴로움에 빠져 있다. 즉 태어나고 늙어가고 죽어가고 옮겨가고 다시 태어난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늙음과 죽음을 넘어선 출리(出離)를 여실하게 알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한 나에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 [이에 대해] 여리작의(如理作意)하는 동안 그때 나에게 ‘태어남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라고 여실한 현관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늙음은 죽음과 함께 재생에 의거하여 발생된 것이고, 세간인이 겪는 반복이 예상된 고통이다. 그 때문에 붓다의 자비심과 결합되어 내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는 도전 과제가 된 것이다. 문제는 붓다가 이 늙음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는 중생들이 반복적으로 늙음과 죽음이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그 심각성조차 알지 못한다고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 ‘무엇이 있을 때 늙음과 죽임이 있는가’라는 등으로 그 원인을 질문하고 그것에 대해 여리작의한다.

그 과정에서 늙음은 태어남에 의한 조건적 발생이라고 있는 그대로 눈앞에서 보듯이 관찰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붓다의 연기적 사유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며, 그 결과 ‘생→유→취→애→수→촉→육처→명색↔식’의 순서로, 그 원인과 결과에 의한 조건적 발생이 늙음을 포함한 고온의 발생임을 여실하게 현관하게 된다. 물론 늙음과 죽음의 소멸에 대한 사유에서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며, 그 일어남에 대한 현관과 달리 결과는 식→행→무명의 소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같이 늙음이라는 고통이 태어남 때문이라는 사실은 붓다의 정각 체험에서 여리작의를 통해 여실하게 현관된 진리이다. 따라서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그 조건에 의해 늙어가고 죽을 것이다. 동시에 누구든지 무명 때문에 늙음에 직면할 것이므로 붓다가 가르친 방식대로 누구라도 무명을 제거하는 수습을 할 경우, 이를 통해 붓다처럼 정각을 성취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리뿟따(Sāriputta)의 언급처럼 늙음과 죽음을 분명하게 하고, 늙음과 죽음의 일어남을 분명하게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분명하게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분명하게 아는 한, 탐욕 등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서 무명이 소멸하자마자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명(明)이 일어나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성취할 수 있다.

5. ‘늙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늙음이란 대들보처럼 등이 굽고 백발이 되고 주름이 지는 등의 사태로서 태어남에 의해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이런 늙음이 개인에게 닥쳐올 때 그는 늙는 자가 없이 단지 늙음이란 사태만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임에도 곧바로 ‘내가 늙는다’고 간주하여 그것을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붓다는 죽음과 늙음을 넘어선 안온한 열반의 성취가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진리로서 정립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사성제의 체계라면 붓다로부터 늙음은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라고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늙음이 자신에게 닥친 순간, 붓다가 여실지견한 진실임을 믿고, 그 사태에서 이 늙음이 홀로 자신에게만 닥쳐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늙음의 원인으로서 갈애, 그 갈애가 제거되어 늙음이 없는 안온한 열반에 이르는 수습 방법도 진리로서 수용하기 때문에 그는 교진여처럼 출가하여 붓다가 가르친 방식 그대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으로 있지 않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반야에 의해 통찰할 것이다.

만약 연기법의 체계라면 붓다처럼 늙음과 죽음의 원인에 대해 자문하고 여리작의를 통해 그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 혹은 ‘늙어가는 자는 없다. 이것은 태어남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이다’라고 올바르게 반야에 의해 통찰할 것이다. 또한 늙음이 태어남에 의한 조건적 발생이라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본질적인 요소로서 지속된 것이고, 진리로서 머무는 것이고, 진리로서 결정된 것이고, 차연성을 지닌 것이라고 이해하고, 동시에 연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하나하나가 무상한 것이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라고 관찰할 것이다. 그 결과 늙어가는 자가 없이 무상한 것으로 특징지어진 요소들에 의한 조건적 발생 때문에 늙음이라는 사태를 누구든지 경험한다는 여실한 반야가 일어나고, 그 반야를 통해 늙음이라는 고통이 엄습하더라도 늙음과 자아가 동일하다는 관념을 토대로 일어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할 것이다.

어느 날 붓다가 빠세나디 왕에게 물었다. “대왕이여, 그대에게 늙음과 죽음이 엄습하고 있다. 그대에게 늙음과 죽음이 엄습하는 동안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빠세나디 왕은 “늙음과 죽음에 대해 정법을 실천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선(善)을 행하고 공덕을 행하는 것밖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붓다에게 자신은 권력을 지니고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나라의 안정을 이루고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여 다스리는 왕으로서 코끼리 부대 등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지만 늙음과 죽음이 닥쳐올 때 그것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빠세나디 왕의 대답을 분석해보면 그는 이미 태어난 자에게 죽음과 함께 늙음이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자신이 소유한 어떤 것도 늙음에 대한 대비책이 될 수 없다는 한계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상식처럼 늙은이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빠세나디 왕이 자신이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아닌 정법의 실천, 올바른 행동, 선과 공덕의 실천을 그 대비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왕이 언급한 행동과 결합된 선이나 공덕 등은 업의 법칙으로 볼 때 현재 뿌린 씨앗이 미래에 좋은 열매로 산출될 요소들이다. 이를테면 업의 법칙을 믿는 우바새로서 왕은 늙음에 엄습할 때 전략적으로 선을 행하고 공덕을 행하는 것으로서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고령이 되어 늙고 노쇠해지고 병이 들어 늘 병고에 시달린 나꿀라삐따(Nakulapitā) 장자는 이제는 세존과 비구 승가를 친견하러 오기도 어려워졌다고 하면서 붓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즐거움을 위해 충고하고 훈계해달라고 했다. 그 장자에게 붓다는 “나에게 병들어 괴로운 몸이 있더라도 괴롭지 않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훈련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장자는 사리뿟따에게 찾아가 그 의미를 물었다. 이에 사리뿟따는 “성인을 보고 성인의 가르침을 알고 성인의 가르침에 인도된 성제자는 몸을 자아라고 간주하지 않고, 몸을 지닌 것을 자아라고 간주하지 않고, 자아 가운데 몸이 있다고 간주하지 않고, 몸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간주하지 않으며, ‘내가 몸이다. 몸은 나의 것이다’라고 간주하지 않아 속박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가르침은 늙음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차라리 병든 늙은이가 갖가지 경계가 부딪칠 때마다 훈련해야 할 주제에 더 가깝다. 그렇더라도 이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나꿀라삐따 장자는 질병이나 늙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곧바로 ‘늙고 병든 몸은 자아가 아니다. 늙고 병든 몸을 지닌 것이 자아가 아니다’는 등으로 올바른 반야에 의해 통찰할 것이다. 또한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통찰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몸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속성을 지님에도 그로부터 일어난 슬픔, 비탄, 근심 등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불교 해탈도에 입각하면 나꿀라삐따 장자가 훈련했던 이러한 방식은 반야에 의한 훈련[慧學]에 속한다. 그 구체적 양상은 “안이든 밖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그 어떤 몸이든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으로 있지 않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반야에 의해 보여져야 할 것이다.” 등으로 설해진 《무아상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서 이 훈련은 법안을 성취한 5비구들에게 설해진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은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따라서 이 훈련 방식에 늙음을 적용해 보면 늙음이 자신에게 엄습하여 닥친 순간, 여실하게 올바른 반야를 통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으로 있지 않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체적 노후화를 경험하는 자에게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자아와 동일하게 간주하는 관념에 의거하여 슬픔이나 불안 등이 일어날 경우, 그 경계에서 훈련해야 할 주제라는 것이다. 그 결과 그에게 진실 그대로 알고 보는 마음 작용으로서 반야가 일어나 늙음이라는 사태와 자아가 동일하다는 관념에 의거하여 일어난 집착이나 욕망으로부터 분리가 이루어질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만약 늙음이 엄습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나의 자아가 늙어간다. 늙음이 나의 것이다’라는 관념이 일어날지라도 당황하고 슬프고 불안하고 근심하기보다 자신과 동일하게 늙어가는 늙은이들에 대한 공감을 토대로 평등한 인식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내가 동일한 고통을 겪는다는 평등성의 획득은 곧바로 자비관이나 삼매 수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중생을 위해 붓다처럼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킬 수도 있고, 혹은 그 대상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으로 있지 않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반야로 늙음을 통찰할 수도 있다. 이러한 수습과 통찰의 효과로 인해 우리는 늙음이라는 사태와 자아가 동일하다는 관념 아래 일어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늙음이 없는 최고로 안온한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

 

원과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강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동 불교대학원 졸업(박사). 박사학위 논문은 〈십이연기 전개과정 연구〉이다. 비구니(정혜사)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등에서 경전을 강의했다. 주요 논저로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응(nidāna-Saṃyutta)의 연기유형〉 〈대지도론의 선바라밀〉 등의 논문과 《우리의 가장 위대한 유산 대승불교의 보살》 《현대인을 위한 불교의례집》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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