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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석굴 기행 / 김지헌
구법승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67호] 2016년 09월 01일 (목) 김지헌 kimj2850@hanmail.net

   
비단과 문명이 오고 간 실크로드 옛길.
지금까지 세계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눈’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中華)의 눈’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이 길은 동서의 문명과 종교가 교류하면서 비로소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여 서역을 건너 인도와 중동, 로마까지 이어진 실크로드는 동서의 문명이 교류하던 문명의 길이며 역사의 길이며 세계화의 길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길을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지난 6월 말, 알 만한 문인들 몇이 실크로드 기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여행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실크로드, 현장 법사와 혜초 스님이 걸었던, 수많은 대상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갔던 그 길을 가보기로 했다.

실크로드(Silk Road)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erdinand Paul Willhelm Richthofen)이다. 그는 이 길이 사막의 대상(隊商)들에 의해 인류 역사가 오고 간 길이고 문명이 소통된 길이며 또한 사막에 점점이 박혀 있는 오아시스를 연결한 길이라는 뜻으로 비단길이라 명명했다. 그 옛날 대상들은 지금의 서안에서 낙타의 등에 비단을 가득 싣고(100kg 정도까지 실었다고 함) 내륙 아시아 지방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 길은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를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고 서아시아의 사막을 거치는 12,000㎞에 달하는 긴 노정이다. 낙타가 하루에 30~40㎞씩 쉬지 않고 걸어도 1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실크로드는 오아시스 비단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쪽의 유라시아초원을 연결하는 초원 비단길도 있었고, 중국 앞바다와 인도양, 아라비아 해를 잇는 바다 비단길도 있었다. 오아시스 비단길은 다시 오아시스남로, 오아시스북로, 천산북로 등으로 나뉜다. 이 길들을 따라 많은 진귀한 물품이 오갔고 종교와 예술도 함께 전해졌다.

오아시스 비단길은 시대에 따라 그 노선이 달랐다. 여러 나라를 거치는 길이기 때문에 나라들 간에 전쟁이 있거나 다툼이 있을 경우 매우 불안정한 길이 되기도 했다. 주변 정세에 따라 길이 폐쇄되기도 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다. 또 번성하던 오아시스 도시가 갑자기 모래에 묻혀 길이 없어지는 바람에 새로운 길이 개척되기도 하고 지름길로 노선이 단축되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대상들만 오간 것은 아니다. 불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같은 종교도 그 길을 따라 퍼져 나갔다. 또한 이 길은 인도로 불교 경전을 구하러 떠난 현장 법사,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한 법현, 혜생(惠生), 현조(玄照), 무행(無行) 등 모험심과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승려들, 장건 같은 사신들, 신라인 고승 혜초(慧超), 마르코 폴로나 이븐 바투타 같은 이름난 여행가들,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 기타 학자와 예술가 등 수많은 사람의 드라마가 살아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일행은 중국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출발해 신장위구르의 우루무치까지 그 옛날의 낙타와 대상들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던 6월 말,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안에 도착하니 아직 한낮이었다. 땡볕 속에 첫 방문지인 법문사를 찾아갔다. 부처님 지골사리(指骨舍利)를 모신 절이라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합장사리탑이 멀리서도 보였다. 전동차를 타고 입구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이곳에서는 2014년 세계불교도대회가 개최되었다는데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일까, 별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합심사리탑보다 오래전에 지골사리를 봉안했던 다층전탑이 있는 쪽으로 갔다. 마침 대웅전에서는 법회가 진행 중이었고 외국인 스님도 보였다. 나도 잠시 부처님께 두 손을 합장했다. 참배를 마친 우리는 지골사리 발견 당시 함께 나온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을 둘러보고 첫 숙박지인 천수(天水)로 향했다. 천수로 가는 길 양편은 수목이 우거져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사행천으로 구불구불 돌아가는 황하(黃河)의 지류가 보이기 시작했다.

   
맥적산(麥積山) 석굴.

맥적산(麥積山) 석굴

이튿날 우리가 방문한 곳은 천수 인근의 맥적산(麥積山) 석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둔황석굴, 용문석굴,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4대 석굴이다. 4대 석굴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맥적산의 이름은 산봉우리의 모양에서 따왔다. 하부가 좁고 정상 부분이 더 넓은 모양새가 마치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맥적산(麥積山) 석굴은 개기(開基) 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진(秦)나라 후기에서 명청(明淸) 대에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절벽에는 194개의 굴실(窟室)과 감실(龕室)이 현존하고 있으며 봉안된 불상은 소상(塑像) 3,513구, 석상(石像) 3,662구로 총 7,200여 구가 있다. 불상과 함께 본생도(本生圖)나 서방정토변상도(西方淨土變相圖)와 같은 벽화도 대량으로 조성되었는데 벽의 손상으로 현재는 1,300㎡ 정도만 남아 있다.

이 굴 가운데 북주(北周) 시기의 석굴은 황실(皇室)이었던 우문도(宇文導), 우문광(宇文廣) 부자가 진주자사를 맡으면서 조성되었다. 특히 26, 27굴의 천정 부분에 그려진 불화는 치밀한 구조와 우아한 형태로 당대 최고의 수준작으로 꼽힌다. 절벽에 안치한 불상 대부분은 소조불이다. 맥적산이 역암(礫岩)으로 이루어진 산이므로, 나무로 기본 틀을 만들고 그 뒤에 삼베를 감은 뒤 달걀흰자와 찹쌀풀, 약재를 섞은 흙을 입혀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채색하는 식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달걀흰자와 찹쌀풀은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하고 약재는 벌레를 막기 위한 옛사람들의 지혜다.

통일국가를 건설한 수(隋)에서는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맥적산 석굴을 다시 한 번 크게 중창하였다. 대부분 황실에서 후원하였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불상은 13굴의 3존대불과 94굴의 소조 3존불로 굴과 감은 마제형(馬蹄形)의 평면에 돔형의 천정, 불상은 삼존불이나 오존불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많다. 삼존대불 입상의 본존불은 표정이 근엄하나 양옆의 불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제1굴의 열반동 와불상, 제4굴의 상칠각불 7개의 불상이다. 

맥적산 석굴은 대부분이 철망으로 갇혀 있다. 37굴의 수나라 때의 협시보살은 아담한 체구에 두 손을 정성스럽게 모아 가슴에 대고 있었다. 수나라 불상의 특징은 체구가 아담하다는 것이다. 불상의 채색이 마치 불심이 깊은 화가가 정성 들여 붓질한 듯 생생하게 살아 있다. 43굴의 금강역사는 어마어마한 체구에 불거져 나온 검은 눈동자가 까만 유리로 끼워져 있다.  또한 43굴에는 여인 불상이 있다. 석굴 이름은 ‘서위 문제원배황후을불씨묘굴(西魏文帝原配皇后乙弗氏墓窟)’이다. 원래 을불황후는 서위 문제의 비(妃)로서 12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성인이 된 자식은 태자 1명뿐이었다. 그런데 몽골계 유목민인 유연족이 자주 국경을 쳐들어오므로 하는 수 없이 왕은 을불황후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고, 유연족 출신의 14세 여인과 다시 결혼했다. 결혼 후 투기가 심했던 유연족 출신 여인의 성화를 견디지 못한 왕은 결국 옛 왕비인 을불황후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 유연족 출신의 새 황후는 황후가 된 지 2년 만에 산고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인과응보가 아닐 수 없다. 그 양 옆에는 조그마한 시종들이 서 있다.

사람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철망 안의 석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불상을 살펴보다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옛날 사람들은 까마득한 절벽에 어찌 불상을 새기고 석굴을 만들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군데군데 불상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채색이 바랜 것도 있었으나 목숨 걸고 험한 여정을 떠나던 대상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보니 길가에는 호두열매로 만든 공예품과 각종 열매나 씨앗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호두나무도 중국에서 처음 들여온 것인데 중국의 호두나무는 또 비단길을 통해 서역에서 가져온 것이라니……. 길이 있어 나 또한 예까지 오게 된 것 아닌가. 비단길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모든 길은 아름답다.

우리는 맥적산(麥積山)을 뒤로하고 다시 4시간을 달려 란저우(蘭州)로 향했다. 란저우는 중국 간쑤 성(甘肅省)의 성도이다. 황하(黃河)강 상류 연안에 있으며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시작점이고, 중국 영토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다. 실크로드 여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도시다. 서북쪽에 있어서인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다. 우루무치로 가는 철도가 완공될 때까지 중국 북서부의 대동맥 역할을 했다. 일본군의 폭격으로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으나 1949년부터 중요한 공업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란저우로 가는 길은 길 양편 산에 큰 나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민둥산에 묘목들을 금방 심어놓은 것 같았다. 서너 시간을 달려도 같은 모습이었다. 심은 지 10년이 넘은 나무들이라는데 이곳이 얼마나 건조하고 척박한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시내로 들어서니 도심 한복판에 황하가 흐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인류 4대 문명 발상지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뛴다. 중국 사람들에게 황하는 강의 어머니로 불린다. 상류라서인지 강물이 맑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 후 모처럼 시내 산책을 나왔다. 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공업도시가 되면서 공기가 아주 나빠졌다는데 밤하늘에 별도 제법 많이 보이고 마음도 넉넉해졌다. 우리는 노상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모처럼 여유를 즐겼다.

   
병령사 석굴 대불.
황하 협곡의 극락정토, 병령사(炳靈寺) 석굴

다음 날 아침, 황하의 댐인 유가협과 병령사(炳靈寺) 석굴을 보기 위해 선착장에서 보트를 탔다. 황하 협곡에 조성된 병령사 역시 중국과 서역을 잇는 통로로, 많은 스님이 머물며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던 곳이다. ‘병령(炳靈)’은 티베트어로 10만을 뜻하는데 이곳이 티베트의 고대왕국 토번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곳으로 가자면 쾌속 보트로 50분쯤 들어가야 한다. 황하의 맑은 물이 붉은 사암으로 인해 점차 탁해지면서 강 양안으로 붉은 바위산들의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나타났다. 신비스럽고 비현실적인 풍경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다. 기암괴석 사이로 나 있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니 멀리 산 절벽에 조각된 28m 높이의 현암 좌불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석굴은 상하로 나뉘어 산기슭을 따라 2㎞가량 이어져 있다. 홍사암의 바위산에 북위(北魏) 때부터 조성됐다는 195개의 석굴이 나타났다. 원나라 이후에는 라마불교(티베트불교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종파)가 유행해서 라마교 양식의 불상도 발견된다. 다양한 불상과 보살상, 비천상은 저마다 빼어난 조각과 색채미를 자랑한다. 미완성의 불상도 보이고, 좌불의 경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왼쪽 손은 배꼽에 대고 있으나 왼쪽 손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절벽 60m 위에 만들어진 169번 굴 안에 있는 무량수불은 오호십육국 시대(4~5세기) 중국인들의 서방극락정토 신앙을 엿볼 수 있다. 황하에 도열한 기암괴석은 그 수려한 자태에 눈을 떼기 어려웠다. 신선이 되기 위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벽화와 석굴을 만들며 살았던가. 야자나무 아래 부처가 평화롭게 앉아 있기도 하고 벽화의 채색과 불상의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옷자락과 채색이 그대로 살아 있어 놀랍기만 했다.
높이 27m의 대불은 731년 시작해 803년에 완공했다. 원래 대불을 보호하기 위한 7층짜리 누각이 있었으나 청나라 말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각양각색 부처님의 모습은 내게는 그저 자비를 가득 품고 미소를 보내며 중생을 품어주는 것만 같았다.

병령사 석굴을 뒤로하고 우리는 둔황(敦煌)으로 가기 위해 란저우(蘭州) 기차역으로 갔다. 란저우에서 둔황까지는 서쪽으로 12시간을 달려야 한다. 야간열차를 타고 무위(武威), 주천(酒泉), 안서(安西)를 거쳐 아침 6시 둔황에 도착했다. 실크로드 기행을 시작할 때 중국 시안(西安) 공항에 내려 계속 서쪽으로 달려온 터라 저녁이 되어도 해가 질 줄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서역으로 가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둔황 막고굴 전경.

둔황 막고굴, 그 위대한 발견

둔황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10만 정도인데, 관광객이 연 120만 명 정도 찾아온다니 이곳이 실크로드에서 얼마나 중요한 도시인지 알 만하다. 둔황은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과 민둥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면적의 약 4.6% 정도가 오아시스로 인구가 밀집한 곳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1㎜ 정도여서 몹시 건조하다. 다행히도 남쪽의 곤륜산맥에서 얼음이 녹아 흘러드는 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한다. 둔황의 서쪽으로는 광막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파미르 고원을 향해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고비사막이 가로 놓여 있다. 남쪽에는 곤륜산맥을 비롯해 티베트 고원이 첩첩이 이어진다. 기원전 한무제(漢武帝)는 장건(張騫)을 이 지역에 파견하여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개척하였다.

둔황은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牙泉) 그리고 막고굴(莫高窟)이 유명하다. 다행히도 막고굴은 문화혁명 시기에도 파괴되지 않았다. 명사산은 일몰 경치가 유명하다는데 우리는 일정상 어쩔 수 없이 오전에 가보았다. 월아천은 초승달 모양의 호수였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웠다. 맑은 물속에는 잉어까지 노닐고 있었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포플러 나무까지도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둔황의 보물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막고굴은 ‘사막의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백양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막고굴은 5층 높이에 길이가 1.8㎞에 이르는 기다란 동굴지대다. 많은 승려들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해 굴을 파서 수행하던 곳이지만, 불교미술이 화려하게 꽃핀 동서양 문화의 용광로였다. 둔황은 8세기 말에 토번에 의해 점령당하고, 11세기 초 다시 서하의 지배에 들어간 뒤 쇠락의 길을 걸었다. 막고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진(秦)나라 때인 서기 366년부터이며 그 후 원나라 때까지 1,000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모두 합해 1,000개 이상의 굴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492개의 석굴이 보존되어 있다. 모든 석굴에 화려한 벽화가 있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당나라 때 232개, 송나라 때 98개, 수나라 때 79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제작 시기에 따라 복장, 생활 모습 등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문화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막고굴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17굴 장경동(藏經洞)의 드라마다. 이 굴은 서기 1900년에 처음 열렸는데 거기에서는 수많은 경전과 고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 굴에서는 왕원록이라는 도교의 도사가 도를 닦다가 우연히 장경동의 문을 열게 되었다. 거기에는 세계 고고학계가 놀랄만한 고문서가 가득했다. 그는 즉시 간쑤(甘肅) 지방의 관리에게 신고했지만 아무도 이 고문서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마침 그 무렵 동투르키스탄에 여러 나라의 탐사대와 조사단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들이 고문서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막고굴로 찾아왔다. 이어 1907년에는 영국의 스타인(Mark A. Stein)이 막고굴을 찾아왔다. 스타인이 처음 왔을 때 왕 도사는 전혀 고문서를 보여주지 않았다. 스타인이 왕 도사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당대(唐代)의 고승 현장삼장의 숭배자라고 소개함으로써 현장 법사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왕 도사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은화 몇 푼에 막대한 고문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역으로 향하는 관문, 양관 고성.

스타인 컬렉션은 총 1만 점 남짓이다. 그다음 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aul Pelliot)가 찾아와서 중요한 고문서들을 가져갔다. 특히 한학에 밝았던 펠리오는 질과 양에서 빼어난 고문서를 확보해, 돌아가는 길에 베이징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는데 베이징의 학자들도 경악할 정도였다. 여기에서는 불교 경전, 도교 경전, 유교 경전, 문학작품 등 수많은 진귀한 문헌이 발견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둔황학’이라는 학문까지 생기게 되었다. 신라의 고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역시 왕 도사가 프랑스 고고학자 펠리오에게 팔아버려서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있다. 현재 둔황 문서는 런던에 약 1만 점, 파리에 5,000~6,000점, 베이징에 약 1만 점,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약 1만 점, 일본에 약 1,000점으로, 총 4만 점 가까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막고굴의 석굴은 매년 돌아가면서 7~8개 정도 개방하고 있다. 우리는 젊은 여성 해설가를 따라 석굴을 둘러보았는데 그녀는 서툰 한국어로 해설하면서 연신 “한국어가 서툴러 미안해요”라고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문서 등을 가져간 서구 열강들에 대해 ‘도둑놈’이라는 표현을 하며 자국의 문화재에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둘러본 석굴은 굴 안이 어두워서 해설사가 플래시를 비춰야만 보였다. 채색의 선명함과 불상의 다양한 표정들이 방문객을 압도했다. 벽화들은 서구열강 탐험대가 절취해 갈 때 군데군데 떨어져서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떤 굴 입구에는 시주한 사람의 모습도 벽화로 남겨 놓았다. 촬영은 할 수 없었지만 남아 있는 불상이나 벽화를 지금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섭씨 40도가 넘는 뜨거운 날씨 속에 막고굴 순례를 마치고 우리는 실크로드의 관문인 양관(陽關)으로 향했다. 양관은 옥문관(玉門關)과 함께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이다. 둔황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70km 떨어진 곳에 있다. 한 무제 때 건설된 한나라의 서부 방위군이 있던 성곽과 군사시설이다. 중국의 가장 서쪽에 자리한 방어진지로 오아시스남로로 가는 대상은 이곳에서 신고하고 길을 떠났다. 쇠락해져 흔적만 있던 것을 2003년에 대대적으로 복원해 성곽, 망루, 주둔군 시설 등을 재현하고 박물관도 만들어 놓았다. 양관 고성으로 들어가 전동차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봉수대 가까이 가보니 멀리 하얀 설산의 곤륜산맥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눈 아래는 광활한 황야지대, 더 멀리로는 나무가 빽빽한 오아시스가 보였다. 입구에는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동상과 그의 유명한 시 송별시(送元二使安西)가 새겨져 있었다.

渭城朝雨浥更塵   가랑비 살짝 뿌린 위성 땅 아침
客舍靑靑柳色新   여관집 버드나무 그 빛 더욱 파릇하구나
勸君更進一杯酒   그대여 이 술 한 잔 더 받으시오
西出陽關无故人   이제 저 양관을 나서면 적막강산이라네
       
이 시에서 보듯 이쪽 지방엔 가는 곳마다 백양나무 아니면 버드나무가 많았다. 양관이 이별의 장소였으므로 헤어지는 사람들은 이 버들가지를 꺾어 정표로 삼았을 듯하다.

   
베제크리크 천불동.

투루판 그리고 베제크리크 석굴

서역(西域)이라는 말은 보통 둔황의 양관 밖에 있는 서쪽 지역을 뜻한다. 우리는 계속 그 서역을 향해 서쪽으로 여행하며 태양을 따라 이동했다. 고비사막을 3시간 동안 버스로 달리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사막의 풍경을 원 없이 구경했다. 해골을 이정표 삼아 저 사막을 걸어갔을 구법승들과 대상들을 생각하니, 그들이 전해준 불교와 미지의 문명들을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유원(柳園) 역에서 고속열차를 탔다. 고속열차로 다시 몇 시간, 저녁 8시가 넘어서 트루판을 한 정거장 앞둔 하미 역에 내렸는데 아직도 대낮처럼 환했다. 사막의 일몰을 보기 위해 쿠무타크 사막으로 갔다. 일몰을 놓칠까 봐 가이드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사막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모터카를 타고는 안전벨트를 하란다. 미처 숨 쉴 새도 없이 출발한 모터카는 사막의 언덕을 뒤집힐 듯 내달렸다.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다 보니 일몰이 잘 보이는 능선 근처였다. 해는 막 지평선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멀리 오아시스가 보이고 그 너머로 사막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었다. 모래는 아주 부드러웠고, 여행의 피로도 그 순간만은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일몰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버스로 2시간쯤 달려 트루판에 도착했다. 투루판은 분지라서인지 낮이 길고 뜨거운 도시여서 여기서 나는 과일들은 모두 맛이 좋다. 비가 거의 오지 않지만 톈산산맥(天山山脈)의 빙하 녹은 물로 카레즈라는 독특한 지하 수리시설을 만들어 농사와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트루판은 중국에서 가장 큰 유전이 있어서 중국에서도 잘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철광석 등 많은 자원과 어마어마한 풍력발전단지가 있다. 위구르족이 많이 살지만, 인구의 70%는 한족이다. 도시의 상가에는 한자와 이슬람 문자가 같이 병기되어 있다. 이곳의 여름 날씨는 섭씨 40도가 넘어갈 정도로 아주 뜨겁다.

트루판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서유기》에도 나오는 화염산이었다. 전체 길이가 98km에 이르는 적갈색의 민둥산인데 멀리서 보면 맹렬한 화염이 솟구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화염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염산을 조금 지나면 서쪽 절벽에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나온다. 이 석굴은 남북조 시대 후기에 창건되어 원나라 때까지 불교 성지 역할을 하다가 14세기 이슬람교가 이 지역에 전파된 후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베제크리크는 서기 13세기 끝날 무렵 몽골 침략군에 의해 한 차례 심한 파괴를 당했다.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세력이 들어와 석굴은 또 한 차례 수난을 당하고 겨우 남아 있던 유물조차 서양과 일본의 수집가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원래 83개였다고 하나 지금은 57개가 남아 있으며 그나마 지금은 6개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20세기 초 독일 탐험대가 수차례에 걸쳐서 주요 벽화들을 칼과 톱으로 떼어가서 베를린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 이슬람교도들이 벽화를 칼로 긁고 심지어 눈알을 파내 버렸다고 한다. 석벽에는 아직도 약탈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곳의 안내인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무척 반가워하며 자기가 지금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며 우리말을 몇 가지 해 보였다.

이 베제크리크 석굴의 보물 상당수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일본의 오타니(大谷)탐험대가 약탈한 베제크리크 유물이 일제 강점기 경성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해방이 되어 우리나라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현재도 유물 300여 점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3층 ‘중앙아시아실’에서 상설 전시 중이다.

투루판에는 고대 중국의 고창왕국과 교하고성이 남아 있다. 고창왕국(高昌王國)은 대략 200여 년 동안 번성하였다. 서역에서 불교가 제일 융성했던 나라로 서기 627년 인도로 가던 현장법사가 이 지역을 지날 때 왕의 요청으로 이곳에 한 달간 머물면서 불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고창고성에는 불교 외에도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이 함께 우호적으로 발전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일대에 아스타나 고분군이 있는데 원래 고창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이다. 이곳에서는 고대의 유물들과 미라, 각종 미술품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인근에는 교하고성(交河古城)도 있다. 강물이 교차하는 곳에 형성된 왕국인데 더운 날씨 탓에 지상보다는 지하에서 생활하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는 마지막 기착지 우루무치로 향했다. 우루무치는 인구 백만의 신장위구르자치구 중심도시로 독립운동 때문에 정정이 불안하다. 그래서 외무부는 이곳을 여행자제 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둘러볼 곳이 많다. 시내에 있는 신장자치구 박물관에 가면 사막지대에서 발견된 유명한 ‘누란의 미녀’ 등 미라들을 볼 수 있다. 워낙 건조한 사막지대라서 미라의 상태도 아주 좋다. 사막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볼거리로는 도시의 남쪽 관문에 풍광이 아름다운 스키장을 겸한 남산목장이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서왕모(西王母)의 전설에 나오는 천산천지도 만년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천지(天池)는 해발 5,445m의 보구다산의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호수다. 덥지도 않고 천상의 화원인 듯 야생화가 흐드러진 풍경이 인상적인 곳인데 관광지로 개발돼 수많은 여행객이 찾아온다. 우리는 천지를 유람선으로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실크로드 여정을 마무리했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전해진 시기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이후의 일이다. 실크로드의 주요 루트였던 둔황을 비롯해 하서의 여러 도시는 구법승과 전법승들의 숨결이 남아 있다. 경전의 부족함을 한탄하고 멀리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떠난 스님들과 광활한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아득한 벌판을 걸어갔던 대상들, 그들의 염원이 파놓은 석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이번 여행은 오직 낙타 한 마리에 의지해 그 험하고 뜨거운 길을 걸어간 저들과 같은 심정으로 나를 돌아본 길이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아직 닿아보지 못한 우루무치 너머 쿠얼러, 쿠차, 악수, 카쉬가르에 이어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의 거점 도시들인 코칸트, 사마르칸트, 부하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이라크 영토를 지나 로마까지 가보고 싶다. 그 머나먼 길로 또다시 떠날 날을 기다리며 이번 여행의 보고서는 여기서 맺는다. ■

 

김지헌 / 시인. 수도여자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졸업. 강원도 동해시에서 과학교사 역임.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시집으로 《배롱나무 사원》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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