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2010년 12월 초, 나는 충주 대원사에 갔다. 대중선방 및 요사채 신축 불사 회향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대원사는 충주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절인데 1960년대 이래 충주 지역의 불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중도 줄어들고 살림 형편도 예전만 못하였다. 대중들을 위한 적절한 수행공간도 갖추지 못한 데다 기존의 요사채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아서 허물어질 지경이었다.

이를 보다 못해 뜻있는 불자들이 주지 스님을 도와 기존 건물을 헐고 다시 짓기 위해 불사 추진에 나섰다. 특히 학생 시절부터 이 절에서 법회를 열고 불심을 키웠던 대불련 충주지부 출신 동문 선후배들이 경향 각지에서 참여하였다. 그 뜻을 전해 듣고 나도 불사모연에 작은 정성을 보탰다. 그 인연으로 회향법회 전야에 불사추진위원회가 베푸는 축하연 자리에 참석하면서 충주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연말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해서 대학 시절 대불련 활동을 함께했던 선후배 동문들도 만나 인사도 나눌 겸 들뜬 마음으로 내려갔다.

축하연이 끝난 뒤 숙소를 정하고 오랜만에 선후배 불자들 2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환갑을 훨씬 넘긴 선배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 개그맨 뺨치는 담화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가운데 한 선배가 갑자기 내게 질문을 하였다. “어이, 서울서 온 법우, 아직 우리보다는 젊어 보이는데 알랑가 모르겄네. 남자가 죽을 때 ‘걸’ 셋을 찾는디, 걸 말이여. 그대는 누구를 찾을 것 같은지 답해 보슈?” 내내 우스갯소리를 하던 중 웬 죽음 관련 진지 모드로 들어가는가 싶어 나는 순간 당황스러워 머뭇거리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다들 정답을 안다는 표정들이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남자가 죽을 때 찾는 걸 셋은 그 첫 번째는 착하게 살 ‘걸’이고, 두 번째는 욕심부리지 말 ‘걸’이며, 세 번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걸’이유.”라고 말하며 웃는다. 말장난 같은 웃기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용은 장난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웬만한 사람에게는 정답일 수 있겠다고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환갑 나이가 된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평생 다른 사람에게 못된 일만 많이 하고 산 것 같고, 또한 지나친 욕심에 낭패를 본 일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은커녕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 생업에만 매달리지 않았던가. 참 별 볼 일 없는 생애를 살아온 것만 같다. 이튿날 불사 회향 법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걸 셋의 내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충주에 갔다 온 뒤 12월 말일 나는 25년을 봉직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퇴직일 며칠 전 동료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기념식 자리에서 소위 고별강연을 하였다. 주제는 ‘불교윤리의 본질’이었다. 나는 이 강연에서 서두에 충주에서 들은 ‘남자가 죽을 때 찾는 걸 셋’의 에피소드를 소개하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걸이 소위 불교의 대의와 잘 부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주제나 내용보다는 내가 윤리학, 특히 불교윤리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 그리하여 학창시절부터 직장 및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저질렀던 학생운동, 불교운동, 노동운동 등 이러저러한 일들에서 추구했던 이상과 불교관에 대하여 시쳇말로 썰을 풀었던 것으로 더 기억된다. 

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학문이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든 간에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귀결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의 도리를 찾는다는 관점에서 특히 불교의 윤리사상을 연구하였다. 학자가 된다기보다는 바람직한 삶의 지침을 얻고자 한 것이다.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 즉 덕성을 갖추고 행할 때 바람직한 삶이 실현된다고 믿었다.

덕성을 갖추는 일의 궁극은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수행법을 보면 대승의 선 수행이든 소승의 위빠사나 명상 수행이든 기본적으로 악행을 피하는 계를 지킬 것을 수행의 방편과 조건으로 삼는다. 바른 생활이 바른 수행을 가져오고 마침내 온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언젠가 계룡산의 토굴 심우정사 수련회에서 지금은 이름도 잊은 어느 선사가 던졌던 법구가 생각난다. “계의 그릇이 청정해야 법의 그릇이 청정하고 지혜의 달이 빛을 낸다(戒器淸淨 法器淸淨 慧月放光).” 착하게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불교의 수행은 오염된 마음을 청정한 본래의 마음으로 확 바꾸어 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그것은 악한 마음을 착하게, 삿된 마음을 바르게, 속된 마음을 참되게, 그리고 미혹한 마음을 밝고 맑게 바꾸는 것 아니겠는가? 불자라면 적어도 죽을 때 앞에서 든 예의 걸들을 찾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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