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424년 전, 조국은 있었으나 조국은 빈껍데기였다. 오죽하면 율곡 이이가 나라가 왜적의 조총과 말발굽에 짓밟히기 직전 선조에게 두 번 올린 상소에서 “나라가 있어도 나라가 아닙니다(其國非其國)”라고 피를 토하듯 절규했겠는가. 당시 조정은 파당(派黨)으로 갈려 싸움질만 했다. 게다가 나라를 지킬 병사와 무기는커녕 백성과 병사의 양식조차 부족했다. 보다 못한 율곡은 선조 9년 진시폐소(陳時弊疏), 10년 육조계(六條啓)를 올려 질타하고 탄식했던 것이다. “2백 년 역사의 나라가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조선은 나라가 있어도 나라가 아닙니다. 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율곡은 마지막 상소를 올린 이듬해 임란 발발을 목도하지 못한 채 타계했다. 첨단 병기로 무장한 왜적에게 강토와 생명을 무참하게 유린당한 눈물의 임진왜란. 아! 임진누란(淚亂). 충무공 이순신이 이끈 수군만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뭍에서 싸운 관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일패도지(一敗塗地)한 관군 대신 의병이 창의(倡義)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승병(僧兵)도 나라를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서산대사는 일흔셋의 노구로 조선 8도 16종 도총섭으로 의승장(義僧長)에 올랐다. 평균수명이 40세를 넘지 못하던 때, 요즘의 백 세 가까운 노장이 전쟁을 진두지휘한 셈이다. 오로지 구국의 일념(一念)만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왜적과의 전쟁에서 사기가 땅에 떨어진 우리 관군은 초기부터 왜적을 보면 도주하기 바빴다. 도성이 개전(開戰) 달포 만에 짓밟히고 선조는 돌팔매를 피하며 의주로 서행(西行)하는 치욕의 피난길에 올랐다.

의승병(義僧兵)의 분투와 희생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강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사의 기록은 소략하다. 특히 승병의 희생과 전공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탓인지 박하기 이를 데 없다. 칠백의총의 진실을 보자. 충남의 2차 금산 전투에서 산화한 호서(湖西) 의병장 조헌과 의병 7백 명을 기리는 무덤으로 알고 있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전투에서 조헌과 그 휘하의 의병 7백 명은 정말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들은 죽음으로 왜적의 전라도 진공을 막아냈다. 당연히 그 뜻을 기려야 한다. 하지만 의병의 희생을 강조하다 금산 전투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사람들이 실종됐다.

금산 전투에서 또 다른 주역들도 몸을 던져 분투했다. 서산대사의 제자 승려 영규가 이끄는 승병들이 그들이다. 청주성 탈환에 나선 조헌의 병력은 고작 1천7백 명으로 정예 2만의 왜적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영규의 승병은 먼저 청주성 탈환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관찰사의 방해로 일단 해산했다. 의승병 연합군은 호남(湖南) 의병장 고경명이 6천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의 호남 침공을 막기 위해 일진일퇴를 벌이다 금산성 전투에서 전멸당한 소식을 들었다. 1차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은 차남 인후와 함께 순절(殉節)하고 장남 종후도 이듬해 진주성이 두 번째로 함락될 위기를 맞자 달려가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고경명 세 부자는 임란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지도층에 따르는 책임)를 눈물겹게 실천했다. 세 부자는 모두 과거에 급제한 문인들이다. 제봉 고경명은 명종 때 전시에서 문과(갑과)에 장원급제했다. 그때 을과 장원은 고봉 기대승이 차지했다. 제봉은 임란 1년 전 59세의 나이로 동래부사를 끝으로 관복을 벗고 낙향한 바 있다. 요즘 말로 고시 수석합격을 한 최고의 문인인 제봉은 생전 주옥같은 시문을 다수 남겼다.

1차 금산 전투는 조선 의병의 패배였다. 하지만 고경명의 결사항전은 왜적에게 타격을 안겼다. 권율이 이치에서 승전을 거둔 것도 왜적이 격전에 지친 탓도 크다. 이어 웅치에서 다시 왜적은 다시 타격을 받고 호남 침공을 포기했다.

2차 금산 전투에서 비록 패했지만 영규의 승병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수에 관해선 설이 분분하다. 《선조실록》에는 조헌과 영규의 의승병이 연합한 사실만 적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중들이 스스로 앞장서서 모이어 거의 8백에 이르렀는데, 조헌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청주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중이라고 합니다.(《선조실록》 중 영규 승병에 대한 기술)

이 기록을 토대로 하면 승병은 8백 명가량이다. 하지만 병력이 2차 금산 전투 때까지 유지됐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이덕형은 ‘영규가 겨우 병력을 모았다’고 했다. 그러나 승병이 의병과 연합할 자격은 갖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조헌의 제자 전승업은 “……생을 홍모(鴻毛)같이 가볍게 여기는 자가 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라고 적고 있다. 7백 명의 의병을 제하면 영규의 승병은 3백 명 정도다. 1천 명의 의승병은 접전 끝에 결국 전멸했다. 조헌과 함께 그의 아들도 전사해 고경명의 세 부자에 이은 두 번째 부자 순절이다. 승병의 활약은 패전으로 다소 빛이 바랬지만 후방 보급기지인 호남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것은 공적이 아닐 수 없다. 의승병이 옥쇄(玉碎)로 왜적에 일격을 가하지 못했다면 이순신의 수군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신세가 됐을지 모른다. 고경명과 조헌의 의병, 영규의 승병이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것이다.

임란 때 승병은 전국 각지에서 성과를 올렸다. 군량의 운송, 성곽의 축조 및 경비의 임무도 충실히 수행했다. 억불을 내세운 조정의 대신들도 승병의 공만은 인정했다. 그러나 몇 의승장(義僧長)을 제외한 무명 승병의 희생과 공은 누가 현창할 것인가. 역사의 기록에도 누락된 마당에……. 이들의 투신은 호국(護國)의 단심(丹心)을 모르는 후대를 가르치는 애국의 길잡이다. 평양, 청주, 금산, 남원 등지에서 순국한 무명 승병을 위령하는 일을 불교계부터 시작하라. 무심한 조국과 후대가 반성하게 하여야 한다.

임란이 발생한 1592년(선조 25년) 7월 1일 조정은 승병 조직을 서산대사에게 명하면서 승통의 직책을 제수했다. 진보 불교계가 중심으로 이날을 ‘승군(僧軍)의 날’로 제정하기 위해 1년여 전부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선의 해인 내년, 범불교계가 이 운동을 확산시켜야 한다. 그래서 새 정부가 출범한 2018년 7월 1일 첫 ‘승군의 날’ 추념식을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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