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대 겸임교수

인간복제가 동물복제의 최종 목표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경연으로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졌다. AI가 인간이 제조한 도구이듯 아잔타와 엘로라 역시 고통과 연민, 경탄과 욕망으로 흐느꼈던 호모 파베르들에 의해 만들어진 현양의 흔적이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쪼았던 것은 단순한 돌덩이들이 아니라 영원한 상이 이룩되기를 염원한 드높은 가치였을 것이다.

예배와 기원의 대상인 부처님을 보면서 갖는 경외감은 미술작품을 보고 느끼는 스탕달 신드롬을 초월한 숭고한 감정이다. 이 신성한 경외감이야말로 조형물이 인간의 삶에 뿌리내린 영속적인 정신성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봉헌물로서의 통돌 조각이나 부조 속 인물들은 그리스 신화를 인간이 만들어 낸 것처럼 또 다른 인간복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붙들고 시간의 아웃렛을 향해 달린다.

2월인데도 장한 햇살은 땀을 선물한다. 아우랑가비드 북동쪽 110Km 지점에 자리한 아잔타. 차는 황량한 갈색 대지 데칸 고원을 달린다. 굽이쳐 흐르는 와고라 강 위로 불쑥 솟아오른 절벽의 측면에 있는 말발굽형의 아잔타 유적지에 도착한다. 수직의 암벽은 마치 벌집처럼 뚫려 있다. 인도문화 황금기인 2세기에 머물러 있는 29개의 석굴군은 승려가 수도하는 독방인 ‘비하라’와 불탑인 ‘스투파’ 불교 공동체인 기도 홀 ‘차이티야 그리하스’로 나뉘어 있다. 나는 천천히 붉은 해를 등지고 석굴로 걸어 들어간다.

비하라인 제1굴의 ‘연꽃을 든 보살’ 벽화는 고려불화에서 늘 보아왔던 인체묘사 기법이라 친근감이 촉발된다. 역시 오래된 벽화는 오래된 눈빛으로 사람을 위로한다. 거대한 천장화와 거위 23마리가 현대감각으로 그려진 제2굴의 프레스코 불전(佛傳) 회화양식은 중앙아시아, 둔황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 낙양의 용문석굴을 거쳐 한국으로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석굴암의 부처님과 가장 흡사한 형상을 지녔다. 흰 코끼리와 검은 코끼리가 입구 양쪽에서 반갑게 맞이하는 16굴은 조각과 벽화가 단정한 굽타 양식으로 장중하기 그지없다. 제17굴은 부처님의 전생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각가들의 보석상자라 불리는 제19굴은 말발굽 모양의 창문으로 외관부터 아름답다. 중세 고딕 성당같이 천정이 아치형인 불당에서는 부처님이 서서 찬불가를 부르시는데,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둥근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이며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내린다. 와불이 있는 제26굴에는 노래를 계속 부르시느라 피곤하셨던지 사자와 코끼리가 떠받친 화려한 왕좌에 좌식으로 앉아 계신 부처님의 종아리와 상면하는 공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 없는 좌식 자세인지라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다시 뒤뚱뒤뚱 비포장도로를 따라 버스가 달린다. 기복이 많은 데칸고원 자락의 구불구불한 길이 지나자 바위 언덕이 물결처럼 보이는 곳에 최고의 신에게 바친 카일라사 사원이 불쑥 솟아오른다. 불교사원 12개, 힌두사원 17개, 자이나교 5개로 살아 있는 종교의 신기(神技) 경연장이다. 최고 상단의 조각은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며 내부의 가장 화려한 조각품은 대서사시인 〈라마야 4〉의 한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여성스러운 아잔타가 깊숙한 오메가형 어머니의 자궁을 닮아 오밀조밀 아름답다면, 남성스러운 엘로라는 하늘을 뚫을 듯이 거대하게 뻗쳐 있는데, 남성 성기를 닮아 다이나믹하지만 한편으론 머쓱한 느낌을 준다.

굴, 굴마다 서서, 혹은 앉아서, 때론 누워서 중생의 아픔을 들어주시느라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계신 부처님. 온 존재를 기울여 바위산을 끌로 망치로 자신을 부수듯 조각해 나간 수많은 수행자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충일한 생명력과 신성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원형 돋을새김에서 인간의 살 냄새를 맡아서일까? 그 압도하는 친근한 실체들의 현학적 강의 속에서 마르틴 부버는 ‘너’를 통해 비로소 ‘나’가 의미를 갖는다며, 부처님의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을 은근슬쩍 오마주 한다.

부처님 무덤이나 사원의 비하라(승방)나, 깃털 달린 왕의 침대, 영롱한 공주의 침대 모두 다 돌로 이루어졌다. 인도의 모든 건축물은 돌의 캔버스, 돌의 축제다. 마찬가지로 아잔타, 엘로라 석굴은 삶의 기원과 절규가 지나간 돌의 시간이다.

철저하게 인간의 허위성을 배제시킨 인간 최고의 열망을 기록한 불교의 고향에서 내가 만난 건 그러나 바로 나였다. 과거로부터 연속되고 있는 부끄러운 나, 설레던 나, 아팠던 나, 흐뭇했던 나. 하나의 석굴을 지날 때마다 나에게 이름 지어졌던 껍데기가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말하지 않아도, 미소 짓지 않아도, 침묵을 통해 세상의 모든 평화가 모여 장엄함과 절대성을 노래한다.

법향 만리, 아잔타 석굴 앞이었다.
눈만 반짝이는 아리안들이
흰 코끼리와 검은 코끼리의 울음소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늘의 신인 흰 코끼리는 비오롱 같은 목소리로 세상의 아침을 찬란하게 깨우고 땅의 신인 검은 코끼리는 자장가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로 세상의 아픔을 잠재운다고 누군가가 내게 말해준다.
무우수 꽃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날
하나만 선택하라고.

고민고민하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어느새 창밖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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