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용암사 주지

노부부가 절에 찾아왔다. 영구위패를 하려고 왔다고 한다. 내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더니 영구위패가 모셔진 걸 한번 보자고 하였다. 법당에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법당을 나오면서 처사님이 보살님에게 말했다. “여긴 거기보다 깨끗하네. 거기는 지저분하더만.”

노부부를 모시고 법당에 들어가면서부터 물건을 파는 장사치가 된 기분이 살짝 들었다. 그래서 왠지 부처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또 스님을 장사치 취급하는 게 약간 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사치가 맞는데 장사치 같다는 건 또 뭐야?’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자주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노부부의 방문은 내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려는 자신과 나름 예의를 갖추는 신도들이 만들어 내는 일상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문제 삼을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나 노부부의 솔직담백한 태도는 편안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쪼개진 틈새로 평소에 애써 외면하던 적나라한 나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언뜻 보기에도 노부부는 절집의 기본적인 예법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영구위패 서비스에 가입하기 위해 온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그분들에게 영구위패 서비스를 판매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장사치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현실이 부정되는 건 아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나는 수행자야.’라고 세 번 뇌까리면 수행자가 되는 게 아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할 일이다.

자본주의는 뭐든 사고판다. 개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느덧 우리는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일상을 소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공기처럼 자본주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다. 그러다 보니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행위를 천연덕스럽게 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주의적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절집이라고 이런 흐름에 예외일 수는 없다.

절집에 오랫동안 내려온 관행들, 각종 신행 활동들 역시 어느새 자본주의적 질서로 재편되었다. 일부 스님들의 노골적인 영리추구나 밀어붙이기식의 불사 추진은 누가 봐도 문제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당연히 평범하고 선량한 불자와 스님들은 그런 현실을 비판하지만, 그들이 하루하루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행하는 사찰의 일상적인 각종 의식과 신행활동 속엔 이미 자본주의적 질서가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서 자본주의의 체제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서 사찰을 운영하는 현실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찰이 비영리단체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느 비영리단체처럼 후원회비나 기부에 의지해 사찰을 운영해서 유지가능한 절이 과연 이 나라에서 몇이나 있을까?

이 지구 상에서 절이 가장 많은 도시가 LA라고 한다. LA의 그 많은 절이 지금 우리처럼 산 좋고 물 좋은 산속에 비싼 한옥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지어놓고, 제사와 기도, 각종 불사 등으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LA에 절이 가장 많은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불교는 지나치게 무거운 과거의 정신적, 물질적 유산들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은 아닐까.

갈수록 대형화, 기업화되어 가는 이웃종교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는 무지할 정도로 눈이 멀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현대의 속담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제삼자가 보기엔 너무도 명백한 불륜이지만, 당사자들은 둘 사이의 뜨거운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르는 건 아니지만, 뜨거운 사랑에 눈이 멀어 잠시 잊을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즈넉한 산사의 정경, 대웅전의 엄숙한 부처님, 화려한 단청과 후불탱화, 승복을 입은 나에게 예의를 갖추는 신도들에 눈이 멀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노부부로부터 느꼈던 당혹감은 옴짝달싹 못 하는 현실에 오히려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는 자신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저녁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공양주 보살이 마치 어른에게 아이를 인사시키듯, 절에서 키우는 진돗개 용순이의 앞발을 번쩍 들어 두 발로 서게 하고 내게 인사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스님한테 인사해야지. 자! 인사! 날도 더운데 우리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절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해 기도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한 적이 없었는데, 다만 성직자의 의무라 생각했는데, 내 수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니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내가 밥벌이하려고 기도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도를 마친 뒤라 피곤하기도 했지만, 보살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투 때문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나는 밥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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