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규 극작가

1. 불교 영화의 해석

불교는 이미 우리 민족의 상징적이며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다. 불교 영화의 개념 역시, 불교 문학이나 불교 연극의 개념과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우리 민족의 정서, 설화, 신화, 역사, 그리고 민담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영화로 나타난 것을 이름 한다. 그러한 까닭에 불교 영화 또한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불교라는 공통의 개념 줄거리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 영화는 어떤 이야기 구조를 갖는 영화를 말할까?

이 범주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불교적 소재 혹은 불교 사상적 주제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 영화란 좁은 의미로는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넓은 의미로는 스님, 불교의 교리, 의식, 일화가 굳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불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면 불교 영화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영화 속에서의 불교 영화란 불교 소재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불교 소재 영화 속에서는 반드시 스님이 등장하고 불교의 교리, 의식, 일화가 등장한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불교적인 소재로 영화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 없지는 않다. 조폭 영화나 코미디 영화에 식상한 관객들을 의식하여 정제된 의식과 호흡으로 나름대로 불교 영화의 지평을 연 영화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교 영화들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불교라는 무거운 종교적 주제 속에서 불교를 다뤄 일반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불교 영화는 불교 문학과 같이 스님과 절, 부처님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꼭 나와야 한다는 과도한 소재주의에 빠져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를 오히려 왜곡하는 현상을 빚고 만 것이다.

즉, 제목만 불교 영화이고 그림만 불교 영화인 영화가 생산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나마 그러한 절름발이 불교 영화도 찾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 까닭으로 본고에서는 구체적으로 기존에 제작 상영된 영화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려 한다. 몇 작품을 제외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불교 영화의 대부분은 그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거북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불교 영화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불교 영화는 단순히 소재의 문제만이 아니어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 세상 대부분의 영화는 다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령 기독교 영화라고 해도 불교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세상의 희로애락 모두를 불교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문화적으로 인간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불교 영화이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영화의 과제는 그 생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한 선사의 일대기를 그리거나 불교적 소재를 영화적으로 생산해내는 일 보다는 그러한 소재를 얼마나 불교적인 입장에서 해석해내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서양에서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후, 기독교 영화는 그 나름대로 확고한 위치를 점령했다. 그것은 소재주의가 아니라 정확한 교리의 해석, 그리고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와 그 주변인들의 비교적 상세한 묘사에서 비롯되었다.

한 인간과 사회, 그리고 그 중간에 생존하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여지없이 파고든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는 불교보다는 훨씬 더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종교 생성 초기 기독교인들을 압박하는 로마라는 거대한 벽이 상존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뚫고 ‘복음’을 전하려는 주인공들의 처절한 삶이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했던 것이다.

누구나 아픈 현실을 살고 있는 일반인들의 삶과 기독교 영화가 담고 있는 작의와 시대는 다르지만 별반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교인들도 그런 기독교 영화를 감동적으로 본 기억이 있는 것이다. 그런 영화는 종교적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영화적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러한 영화들이 유럽을 제외한 제 3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전위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영화사 초기의 일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종교 영화는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잠깐 도락의 경박단소를 요구하는 일반인들에게 종교적 영화는 그만큼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그들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매년 단편 영화제를 개최, 기독교적 관점을 담은 짧은 영화를 공모해 10∼15편을 선정하고 이 기간 동안에 공식 경쟁작으로 상영하며, 기독교적 주제를 담은 장편영화를 선정해 적지 않은 기독교 영화축제기금을 지원하는 사전제작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또 기독교 영상 단체와 교회 및 개인들이 만든 기독교영화를 소개하며 해외 애니메이션 초청전, 영화인들과의 만남, 학술 심포지엄 및 기독교 영화비평 세미나를 갖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불교계에서도 매년 이와 같은 단편영화제나 시나리오 공모제를 통해 불교 영화의 진흥을 꾀한다면 기독교의 단편영화제보다 훨씬 많은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는 아직까지 기독교보다는 풍부한 불교만의 사상적 역사적 물적 자료들이 많기 때문이다.

2. 바람직한 불교 영화

그렇다면 이토록 접근하기 힘든 종교 영화, 특히 불교 영화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또한 진정한 불교 영화, 관객이 박수를 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히려 사람들의 인식이 종교에서 멀어질 때, 종교는 더욱 절실해진다. 앞으로의 시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전망과는 다르게 더 많은 종교성을 요구한다.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가 갇힌 공간에서의 소통은 종교만이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 지금 국제 소통 시스템이 된 스포츠로는 그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고대나 현대나 인간의 생로병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엄숙한 종교적 교리만을 가지고 대중을 이끄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이 바로 영화라는 옷이다. 더구나 불교는 이 영화라는 옷을 장엄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국경과 시대, 세대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일차적으로 그것은 어쭙잖은 불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더 이상 사찰이 아니고, 스님이 아니며, 더구나 먹물장삼이 아니라는 긴박한 상황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권위적인 종교의 틀 속에서 찾고자 하는 불교 문학이나 불교 영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교를 표방하여 부처님의 참뜻을 훼손한 많은 작품들을 보아왔다. 기실 불법홍포의 가장 무서운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상존하는 굳은 불교적 인식인 것이다.

겉이 아니고 속이 불교인 작품들이 진정한 불교 문학이고 불교 영화다. 일반 대중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불성을 끄집어낼 때 비로소 불교 영화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잘 된 불교 영화는 불교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불교소재를 가지고 불교 작품들을 만들고자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불교 포교를 위한 영화, 또는 그 바람을 위한 긍정적 영화보기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비록 이 땅에서 생성되지는 않았지만 세계사 속의 우리 불교는 현금 최 고갱이 불교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부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선배 조사들의 피나는 수행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불교는 영화는 물론이고 앞으로 전개될 문화전쟁에서 한켠이 아닌 한국 사상의 중심에 서야 한다. 오늘날 가장 큰 화두가‘문화가 곧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로 보면 한국 문학, 혹은 한국 영화의 발전과 쇠퇴는 한국 불교의 영락성쇠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불교가 이토록 절박한 위험에 처한 적은 없었다. 전대의 중앙 정부에서 불교를 핍박했다고는 하지만 그 핍박을 상쇄해주고도 남을 민초들의 지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불교와 타종교 간의 신자 비율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혼자뿐이라서 불교를 믿는다고 손을 들기가 창피했다는 아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런 불행한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낡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신선함, 싱싱함, 그것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죽음까지 불사했던 선사들의 벼랑 끝 승부가 아니면 한국 불교는 그저 쇠락한 산 밑의 작은 암자에 켜켜로 쌓인 먼지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앞으로의 한국 불교는 한국 문화와 연대하지 않으면 그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긴박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곧 대승의 방향, 그림에 얽매이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대승사상은 한국의 불교 영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불교 영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는 임권택의 ‘만다라’는 불교적 대승사상을 실현하고자 방황하는 스님들의 내적 고뇌이기도 하면서 대중에게 있어서는 현대인의 실존적 자각을 사유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좋은 불교 영화는 결코 대중과 유리되지 않은 정서를 담고 있어야 한다.

불교는 결코 은둔의 종교가 아니다. 비사회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불교는 은둔적이고 비사회적인 종교로 낙인찍는다. 그 잘못된 인식을 바꾸는 것이 바로 좋은 불교 영화를 만드는 지름길인 셈이다.

우리 공동의 고통을 개인적 고통의 상처로 인식하는, 개인적인 고통의 상처를 우리 공동의 그것으로 인식하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불교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토대 위에 우리의 불교가 일반적인 종교성을 초월하여 한국 문화와 굳건하게 결속할 때 비로소 한국 불교는 또 다른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3. 한국 영화에 대한 짧은 진단

불교가 우리 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 그곳이 바로 영화다. 그러한 소통,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것은 시대적 대세다. 다행히 불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해법을 찾는 메시지를 갖고 있다. 충돌을 차용하는 독특한 교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우리의 눈은 불교 영화가 아니라 한국 영화로 돌아와야 한다. 불교 영화도 엄연히 한국영화 속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짧게나마 한국 영화에 대한 진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미래 한국 영화산업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보다 비관적 전망이 훨씬 많다. 놀랍도록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 신문방송을 장식해도 그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오히려 몇몇 영화에 쏠리는 편중현상이 우리 영화산업에 대한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 산업 전반에 걸친 취약점이다. 초 베스트셀러 저작물이 쏟아져도 한국 출판계가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현상과 동일한 현상이다. 결국 몇몇 제작자와 배우들의 배만 불리는 지금의 구조로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이한-줄서기 경향-한국 관객의 성향은 영화산업에서 계속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세계의 영화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다양한 범위의 영화들을 칭찬한다. 할리우드와 다른 한국 영화만의 매카니즘을 향해 박수를 친다.

그렇지만 이런 경향은 제작자와 투자자들이 애초에 영화의 다양화에 힘쓴 결과라기보다는 한국 관객이 다음에는 무엇을 택할지를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측면이 강하다. 오늘날 한국 영화는 일부 감독과 배우들을 제외한 수많은 배고픈 종사자들의 피와 땀, 눈물 위에 마련된 성찬인 것이다.

이러한 기형적인 구조가 지속될 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벌써 이런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반란의 조짐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화려한 조명 뒤에 숨죽여 있던 스텝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단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영화 예산 속에 빠져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영화가 취약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나리오에 기인한다. 영화의 근본이 시나리오임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는 제작자나 감독은 없다. 한국에서의 시나리오 쓰기는 이미 유행처럼 번진 감독 데뷔의 한 관문이 되어버렸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한다는 잘못된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영화 중에 완성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그대로 영화화한 작품은 거의 없다. 다른 스텝들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는 그저 작가 겸 감독의 소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들에게는 시나리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시놉시스가 필요한 것이다. 그나마 이러한 제작구조에서 한국 영화가 기대 이상 선전하고 있는 것은 김기덕 등으로 대표되는 젊은 감독들의 탁월한 능력에 있었다. 그렇지만 한 나라의 영화산업을 몇몇 역량 있는 감독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더구나 이제 영화는 단순한 산업의 의미만이 아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고유한 문화수준에 의해 각 나라의 후진성이 가려지고, 영상정보산업이 산업전반의 성장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문화전쟁’이라고까지 말해지는 이런 상황에서 국내 영상소프트웨어 공급의 원천인 ‘한국 영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아직 한국 영화의 힘은 미약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 영화계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영화를 질적으로 윤택하게 하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치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조직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다.

4. 아름다운 불교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제언

그렇다면 우리의 고유문화는 어떤 것일까?
불교 영화가, 불교 문학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불교 영화는 한국 영화 속에 존재하지만 불교가 빠진 한국 영화는 그만큼 초라하다는 것이다. 불교가 빠진 한국 문학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같은 것이다.

한국 영화의 대표 브랜드가 되어 버린 조폭, 분단, 코미디 영화는 이제 그 획일적인 이야기 전개로 하여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러한 영화에서 시나리오는 그저 괜찮은 시놉시스 위에 감독이 대강의 마무리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제 수명을 다하고 있다. 시나리오 한편을 가지고 데뷔하여, 곧 사라진 수많은 신인 감독들처럼 하얗게 명멸해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불교 영화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첫째, 하루속히 시나리오 작가 연수원을 만드는 것이다. 잘 된 시나리오, 잘 만든 영화 한편은 수 만 명의 부루나 존자를 양성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시나리오는 절대적 요소다. 더구나 다른 영화도 아닌 불교 영화라면 시나리오의 중요성은 그만큼 커진다.

그러나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 정확한 의미의 시나리오 작가는 거의 부재한다. 항시 시나리오를 자를 준비가 되어 있는 감독과 그 감독의 말에 따라 충성을 맹약해야 하는 슬픈 스텝들만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불교가 한국 영화 속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빠른 방법이 시나리오 작가 양성에 있다.
다행히 아직도 우리의 젊은 작가 지망생들은 우리 고유의 사상을 불교에서 찾는다.

그들을 범불교계 차원에서 수용하고 장려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불자들의 여가선용을 위한 문화센터만이 아니라 현업에 종사하는 실질적인 전문가들로 포진된 작가 연수원 하나면 충분하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작은 교실 하나면 가능한 일인 것이다. 난을 잘 치는 불자 백 명, 교리를 잘 외우는 불자 천 명보다 불심이 녹아 있는 시나리오 한편을 쓰는 작가 한 사람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둘째, 영화 속의 주인공들에게 가짜 옷을 입힐 수는 없다. 배우 양성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단 극단이 창단되어야 한다. 연극은 이제 무대라는 한정된 영역을 넘어 최신 영화기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연극은 그 자체만의 의미만이 아니라 영화를 떠받치는 필연의 디딤돌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연출, 극작, 무대, 배우, 조명, 홍보, 이러한 연극의 기법을 익힌 재원들은 곧바로 영화재원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영화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재정립은 극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현실적으로도 많은 영화 인재들이 극단에서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 불교-조계종단의 문화정책에 있어 가장 큰 취약점은 종립극단 미창단에 있었다. 한국 불교의 심장이랄 수 있는 조계사의 상징적 위상, 서울에서의 중심적 위치, 부처님 탄신일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 이러한 좋은 조건 속에 조계사 안국동에 불교 극장과 극단이 있어 1년 365일을 끊임없이 연극을 올릴 수 있었다면, 오늘의 한국 불교는 이미 한국 영화와 한국 연극의 중심에 서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처럼 관객 동원이 힘든 연극 현실로 볼 때도 그렇지만, 조계사내의 극단 창단은 불자들의 소양 교육에 있어서도 더할 나위 없는 포교 방식이 될 것이다. 커다란 코끼리를 만들고 색색의 연등을 만들어 거리를 행진하는 불교인들만의 초보적인 행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대중들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진일보한 포교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립극단 또한 작가 연수원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그리 많은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고달픈 대중들의 마음속에 불교가 우리가 바라는 마지막 귀의처-고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셋째, 한국 불교의 총본산 조계사 속에 사랑방을 마련해야 한다. 극단을 만드는 일과 마찬가지로 큰 영화, 작은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급변하고 있는 현실에서 영화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영화는 좀 더 전문화되어 누구나 편리한 시스템을 가지고 간단히 영화를 제작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현재 영화를 만들기 위한 공동 작업은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큰 작업이지만, 이제 개인이 컴퓨터나 그 밖의 첨단 기기를 사용해 만들게 될 영화는 제작비도 거의 들이지 않는 1인용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그 수많은 영화 제작자들을 통해 불교의 궁극적 참뜻을 포교해야 하는 것이다.

천지사방으로 난립하는 그 모든 정신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조계사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 아니 조계사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의 방을 비워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고성이 오가야 한다. 탄식이 흘러나와야 한다. 불교 문학, 연극, 영화는 바로 그곳에서 발원한다.

그곳에는 직접적인 포교의 열망보다는 올바른 문화인식으로 무장한 스님들이 포진해야 한다. 마음대로 대출할 수 있는 불서들이 즐비해야 한다. 바둑판을 좋아하는 스님, 영화 포스터의 호불호로 입에 거품을 무는 스님들이 많아질 때에만 아름다운 한국 불교 영화는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 불교는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과의 연대에 그 미래의 향방이 달려 있다. 현실적으로 불교라는 날카로우면서도, 뭉툭한 양날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진정 이 땅에 부처님의 땅을 일구고자 하는-많은 스님들의 인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만이 한국 불교의 앞날을 밝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간략하나마 ‘불교 영상포교의 현실과 전망’이라는 약간은 큰 주제 속에서 한국 영화 속의 불교, 그 미래와 방향 사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이야기를 해보았다. 모쪼록 이 글이 진보냐 퇴보냐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작금 한국 영화 속에서의 불교가 작지만 뜨거운 불꽃으로 작용할 수 있기를 발원한다.

우봉규
극작가.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황금사과』로 동양문학상을, 『객사』로 월간문학상을, 그리고 『눈꽃』이 한국일보사의 광복 50주년 기념작에 당선되면서 작가적 위치를 굳혔다. 『갈매기야 훨훨 날아라』로 계몽사 아동문학상을 받으면서 동화작가로도 자리를 잡았다.
대표작으로는 『은빛 여우왕』 『사과꽃 떨어지면 사과 열리고』 등이 있으며, 그의 동화는 매끄러운 글과 글 전체에 흐르는 서정성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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