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1. 머리글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도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폭력은 일상이 되었으며, 부당한 권력에 대한 대중의 분노도 자주 표출되고 있다. 한국만으로 국한하여 생각하면, 성인의 절반이 분노조절 장애를 겪고 있고 10명 중 3명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며, 자살률도 세계 최상위권이다.

분노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정신적 외상이 있거나 성격이 급하거나 수양이 덜 되어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발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 모순과 부조리가 심하고 유대가 약하고 성과를 강요할수록 구성원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부당함에 대한 불만감이 증대한다. 이에 많은 사람이 개인의 수행과 치유를 강조하는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청년과 대중에게 분노하라고 선동하고 있다.

불자에게 분노의 문제는 딜레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분노(瞋)를 삼독(三毒)의 하나로 간주하고 마음수행을 잘하여 지멸할 것을 강조한다. 붓다는 분노가 분노를 부른다며 자비만이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선량한 민간인을 마구 죽이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기도가 아니라 맞서야 하는 경우처럼, 중생구제의 방편으로 정의나 자비의 분노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동안 분노에 대한 불교계의 연구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한 부류는 분노와 불살생, 비폭력에 대한 경전이나 율장의 텍스트, 간디와 달라이 라마 등의 사례를 근거로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말고 비폭력과 자비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하는 부류는 붓다가 특정 상황에서 분노를 용인한 문구나 사명당과 암베드카르 등의 사례를 근거로 정의로운 분노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또 다른 부류의 학자들은 딜레마를 제시하거나 양자를 절충하거나 종합하려 한다.

어떤 주장을 할지라도 불교의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불교나 관련 텍스트, 사례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딜레마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거나 절충으로 그친다면, 겉핥기에 불과하거나 무책임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에 분노와 자비, 분노의 지멸과 표출, 개인과 사회, 불교와 현대과학을 종합하여 이를 논증하고 치유의 길, 분노에 대한 평화롭고 자비로운 대안을 모색하기로 한다. 논의를 명징하게 하고자 개인적 분노와 사회적 분노로 나눈 후 종합한다.

 2. 개인적 분노의 원인과 치유

개인적 분노에 대해서는 교리상 딜레마가 없기에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논증을 전개할 필요는 없다. 다만, 현대 과학이나 심리학과 결합할 필요는 있다.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거나, 빼앗기거나, 부당한 대우나 나쁜 말과 욕설, 간섭, 억압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자신의 요구나 욕구,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거나, 개인이나 사회의 가치나 신념이 위협받았을 때, 분노를 느낀다. 현재만이 아니다.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거나 미래 일을 앞당겨 떠올리면서 분노하기도 한다. 분노는 적대적 공격과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내적인 억압과 고통을 야기하여 증오, 울분, 좌절, 절망, 자살 등이 뒤따르기도 한다. 분노는 타인에게 파괴적 행동을 유발하여 타인의 인격을 손상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타인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해치고 결국 구성원의 유대를 깬다. 분노는 자신에 대해서도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우울증, 강박장애, 편집증, 인격 장애, 약물남용, 알코올중독, 마약 중독을 일으키며, 때로는 암을 비롯하여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경전에서는 분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성냄(dosa)은 해로움이다. 악독한 자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의도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모두 해로움이다. 성내고 성냄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된 자는 ‘나는 힘 있고 능력 있는 자다’라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고문이나 구속이나 (재산의) 압수나 모욕이나 추방으로 부당하게 괴로움을 겪게 한다. 그런 괴로움을 겪게 하는 것도 해로움이다. 이리하여 그에게 성냄에서 생겼고 성냄이 원인이고 성냄에서 일어났고 성냄이 조건인 여러 가지 나쁜 해로운 법들이 일어난다.
 
초기 경전에서 성냄의 원인에 대해 잘 통찰하고 있다.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오만한 자가 권력에 기대어 타인에게 고문, 구속, 압수, 모욕, 추방 등을 하여 부당한 고통을 주는 일임을 밝히고 있다. 미시적이건 거시적이건, 성냄은 두 사람 사이에서 권력이 우월하거나 약하지만 이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하여 힘을 사용하여 부당한 괴로움을 주는 행위다.

대승에서도 분노에 대한 태도는 유사하다. 《화엄경》 〈보현보살행품〉에서는 분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들이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한 번만이라도 성내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모든 악 중에서 그보다 더한 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로서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진리의 문(門)에 드는 길을 방해하는 백, 천 가지 장애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백천 가지 장애란 무엇입니까. 이른바 보리(菩提)를 보지 못하는 장애와 바른 진리를 듣지 못하는 장애, 청정하지 못한 나라에서 태어나는 장애, 악도(惡道)에서 태어나는 장애, 팔난(八難)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는 장애, 병이 많은 장애, 비방을 많이 듣는 장애, 우둔한 곳에서 나는 장애, 바른 생각을 상실하는 장애, 지혜가 줄어드는 장애,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六根)에 얽매이는 장애, 악지식(惡知識)을 가까이하는 장애, 나쁜 무리를 가까이하는 장애,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는 장애, 악인과 같이 사는 장애, 선량한 사람과 함께 수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장애, 바른 견해를 멀리하는 장애, 외도(外道)의 집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나 마귀의 경계에 들어가는 장애, 선지식(善知識)을 보지 못하는 장애…… 등을 받는 것입니다.

성냄은 모든 악행 가운데 최고의 악행이다. 이를 일으키면 바른 생각과 지혜를 갖지 못하고 나쁜 곳에서 태어나 나쁜 사람들과만 어울리게 되는 등 숱한 장애를 겪게 된다. 그러니, 분노는 완전히 없애야 한다. 그럼, 어떻게 분노를 일소할 것인가.

일소는 원인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 분노의 원인에 대해 경전은 10가지를 지목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유 없는 것을 제하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상대방이 나와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는 손해를 끼치고, 나와 내가 싫어하는 이에게는 이익을 끼친다는 생각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원인은 더욱 복잡하다. 대체로 무아라는 것을 망각하고 나에 대한 환상으로 인하여 상처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공격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가치나 신념이 위협받았을 때 분노가 생긴다. 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서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수 있고, 편도체나 전전두엽에 이상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분노가 일어날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억압, 노골적인 공격, 소극적인 공격, 적극적인 의사 표현, 놓아 보내기, 수행 등이다.” 이는 치유가 아니라 분노에 대한 대응양상이다. 분노를 삭이는 것 또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해 있다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기에 긍정적이지 않다. 그럼, 어떻게 분노를 없애거나 치유할 것인가.

심리학에서 볼 때, 분노의 치유는 원인에 따라 다양하다. 상담치료, 분노조절, 약물치료, 문제해결전략, 인지행동치료 등 여러 방법이 있다. 이는 심리학에 맡기고 여기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성과를 종합하기로 한다. 

치료에 앞서 가장 먼저 행할 것은 당사자가 분노하고 있는 자신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치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행할 일은 인내하며 분노의 여여한 실상을 성찰하는 것이다. 나에 대해, 분노에 대해 명상을 하며 분노의 뿌리를 성찰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분노의 원인을 직시하고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이 작업을 할 때 성찰의 대상은 과거와 무의식까지 이어져야 한다.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분노란 과거의 반복된 행위의 업(業)으로 인하여 습(習)이 된 것이 알라야식에 종자로 저장되었다가 그럴 만한 연(緣)을 만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연(緣)에 타자와 상황이 포함된다. 과거 업의 결과가 종자가 되어 알라야식에 머물고, 이 종자는 알라야식에 머물다가 새로운 업과 인연에 따라 종자들이 싹을 틔우고, 그것이 익어서 그 업과 인연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고 다른 업을 가진 종자들을 발생시키고 이는 다시 알라야식으로 들어가 저장된다. 그러기에, 수행을 통하여 분노를 낳은 습과 업을 깊이 성찰하여 그 종자를 없애고 청정한 알라야식에 이르러야 한다.

분노는 요구, 욕구, 욕망의 좌절에서 비롯되기에 무엇보다 헛된 욕망에서 떠나 참된 존재를 회복해야 한다. 한 사람이 초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그토록 선망하던 변호사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가. 그가 공부하기 싫어 학원에 가지 않았을 때 그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화를 냈는가. 그 사람은 변호사를 멋지게 묘사한 드라마와 영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달성하려는 어머니의 욕망, 변호사로 큰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 그를 변호사로 호명한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 등이 어우러져 변호사가 되기를 꿈꾼 것이지 자신의 순수한 존재가 열망한 것은 아니다. “욕망은 욕망을 위한 욕망, 대타자의 욕망, 다시 말해, 법에 종속된 욕망이다.” 나라는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주체를 구성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 엄마의 인정, 아버지의 이름, 부모의 바람, 기표, 법과 규약 등 타자들이다.” 내 안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타자들, 온갖 환상과 이데올로기를 깊이 성찰하면 내 욕망의 기원을 알게 되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허깨비들을 인식하게 되고 참된 나를 만나게 된다.

다음으로 증오를 버리고 자비의 마음을 낸다.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 어떤 악업도 풀지 못한다. 화 또한 마찬가지로 반발을 부른다. 이때 필요한 것이 대대(待對)의 참구다. 양 안에서 음으로 작용하고 음 안에서 양이 작용하는 것처럼, 화가 나더라도 일단 참고 숨을 고르게 쉬며 가해자가 놓인 맥락에서 그의 입장에서 그가 행한 말과 행동, 그것이 나오게 된 원인과 고통에 대해 참구하는 것이다. 분노하기에 앞서서 그렇게 참구하면 분노의 근본 원인과 고통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작은 이해관계나 목적에 휘둘려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인간 존재의 속성을 들여다보고 가련한 마음에 잠긴다. 더 나아가 가해자 또한 피해자이며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잘못된 사회제도와 구조임을 깨닫고 가해자를 연민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모든 살아 있고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는 생명들이 이고득락(離苦得樂)하기를 기원하는 자비명상을 하게 된다.

틱낫한 스님은 호흡법과 마음챙김 수행, 자비명상을 결합하여 화를 다스리는 법에 대하여 “1. 화가 난 사람을 깊이 생각하면서 숨을 들이쉰다”에서 “(……) 내게는 화가 난 사람을 도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숨을 내쉰다.”에 이르기까지 9가지로 잘 정리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 요인을 간과하고 체계적이지 못하고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성과를 반영하지 못한 단점이 있지만,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을 명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원한과 미움, 성냄, 폭력, 시기, 교만을 모두 없애고 지극히 평정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평소에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인격을 구성하려면, 다시 말해 중생들의 마음속에서 자비심의 종자들이 싹을 틔우고 선의 꽃밭을 만들게 하려면, 자기의 통제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향상시키고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을 활성화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하여 공감과 자비심을 발생시키는 거울신경세포를 발달시키는 교육과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대안 가운데 하나는 메리 고든의 ‘공감의 뿌리 교육’이다. “이 프로그램을 실시한 집단에서는 적극적 공격 성향을 보이던 아동의 88%가 사후 검사에서 적극적 공격 성향이 줄어든 반면, 비교집단에서는 9%만 줄어들었다.” 자비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는 데서 기원한다.

“파르마 대학의 신경심리학연구소의 리촐라티 소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은 머카그원숭이 실험을 통해 영장류와 인간은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가 있어서 이를 통해 타인의 언어나 행위를 모방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한다고 밝혔다.” 사회적 협력을 하여 상호 발전을 도모한 인간의 진화적 선택과 문화, 공감을 통해 발달한 것이 바로 거울신경체계(mirror neuron system)일 것으로 보인다. 2013년에 페라리 등은 “거울신경체제가 타인에게 자신의 표현을 더 쉽고 안정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 기인한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밝혔다.” 인간은 누구나 거울신경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타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을 하며 이는 체험과 학습, 수행을 통하여 향상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향상되는 만큼 인간은 자비의 마음으로 분노를 소멸시키게 된다. 음악치료학이나 문학치료학에서 잘 밝혀졌듯, 글쓰기와 예술 행위는 분노를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좋은 방편이다.

무엇보다도 분노는 대부분 가아(假我)의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자신의 욕구, 요구, 욕망이 좌절되거나 나라는 정체성에 훼손이 가해졌을 때, 나라는 환상을 복원하기 위해 내 두뇌에서 작동하는 반응이다. 탐욕이 고통을 낳고, 그 고통이 분노를 낳는다. 아만(我慢)이 있기에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분심을 표출하는 것이다.

헛된 욕망을 떠나 참된 존재를 회복하는 것이 분노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참된 존재를 회복하였다 하더라도 그조차 집착이라며 해체해야 한다. 모든 개인적 분노는 ‘나’에서 빚어지는 것이니, 명상과 수행을 통하여 아만과 가아를 제거하고 절실하게 무아를 깨닫는다. 필자가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종합하여 틱낫한 스님의 자비명상을 참고하되,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한 분노 치유 명상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숨을 들이쉬며 분노에 휩싸인 나를 바라보고 내쉬며 그런 자신을 연민한다.
2. 숨을 들이쉬며 내 분노의 정당함에 대해 생각하고 내쉬며 부당함에 대해 생각한다.
3. 숨을 들이쉬며 내 분노의 원인을 생각하고 내쉬며 분노를 토해낸다.
4. 숨을 들이쉬며 내가 바라던 것은 타인의 욕망임을 성찰하고 내쉬며 욕망을 버리고 순수한 존재를 성찰한다.
5. 숨을 들이쉬며 분노로 추해진 나를 성찰하고 내쉬면서 그리 추해진 나를 버린다. 
6. 숨을 들이쉬며 내 분노의 뿌리를 들여다보고 내쉬며 그릇된 판단과 무지에 대해 생각하며 지워나간다.
7. 숨을 들이쉬며 나라는 환상을 들여다보고 내쉬며 나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버리며 무아를 절실히 깨닫는다.
8. 숨을 들이쉬며 분노하게 한 사람의 고통과 상처를 생각하고, 내쉬며 이해관계와 목적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 존재에 대해 연민한다.
9. 숨을 들이쉬며 분노하게 한 잘못된 구조와 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내쉬며 개인과 사회의 연기적 관계에 대해 성찰한다.
10. 숨을 들이쉬며 서로에 대한 분노로 죽어가는 타인과 생명의 고통에 대해 성찰하고 내쉬며 그들에 대한 동체대비심을 갖는다.
11. 숨을 들이쉬며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사람과 생명에 대한 자비심의 종자들의 싹을 틔우고, 내쉬며 그 종자들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모든 사람과 생명의 이고득락에 동참하리라는 서원을 한다.


3. 분노와 치유의 사회성

의도했든 아니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식의 담론이나 무수한 힐링 저서들과 담론들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여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는 동시에, 그에 기반하여 권력을 강화하려는 지배층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그처럼 분노를 개인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연구, 정의로운 분노나 약자에 대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분노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이 또한 무조건 지멸의 대상이라는 주장, 개인의 치유에 한정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논리는 모두 독점과 착취와 폭력으로 대중의 분노를 야기하는 지배층의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기 십상이다.

분노는 소멸시켜야 하는 악인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분노가 악이 아니라 인간의 반응이나 정서 가운데 하나이며 긍정적 기능도 수행한다는 점이다. 시랄디와 커는 “활기를 돋우게 된다; 재능, 초점과 집중력을 증가시킨다; 추진력과 통제력을 갖게 된다; 두려움을 둔화시킨다; 죄책감, 공포, 슬픔, 상처, 고통, 무력감, 비애로부터 자아를 방어해 준다; 자신을 표현해 준다.” 등 분노의 긍정적 측면 22가지를 서술한다.
아힘사를 지키려면, 생명을 죽일 수도 있으므로 분노는 무조건 절제해야 하는가. 분노가 편도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노가 생물학적인 본능의 일환임을 밝힌다. 편도체는 인간의 조상이 파충류일 때 공포를 기억하는 데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대뇌변연계에 존재하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amygdaloid complex)는 감정과 공포에 대한 감각과 기억을 담당한다. 원숭이의 편도체를 제거하면 원숭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뱀을 먹으려고 달려든다.” 분노가 인간이 파충류일 때부터 적이나 위협과 공포에 대응하기 위한 작용이나 정서로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이는 분노가 생명성의 한 부분임을 의미한다. “분노는 위협과 공격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감정이며,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분노는 38억 년의 생명의 역사와 600만 년의 인류 역사를 통하여 외부의 위협과 다른 생명이나 사람들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적응된 진화의 산물일 뿐이다. 분노 또한 적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생명체의 생 의지의 하나다. 그렇다면 분노를 삼독의 하나인 악으로 규정하여 무조건 지멸하거나 불살생의 논리로 이를 무화하는 것은 오히려 불성과도 통하는 생명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개체적 불살생보다 연기적 불상생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른 생명을 해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닌 한, 더 나아가 다른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생명성의 일환으로 간주해야 한다. 

다음의 딜레마는 깨달음의 방편으로서 분노의 문제다. 분노를 포함하여 삼독을 제거해야 깨달음에 이르지만, 방편으로서 분심은 필요한가. 깨달음이란 삼독은 물론, 모든 집착과 망상,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해체하고 참나를 만나고 진여문의 세계를 구축할 때 다가오는 것이다. 이 해체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 에너지는 분심에서 나온다. 혜가가 팔을 자르고 혜통이 머리에 화로를 뒤집어쓴 것은 분심에서 나온 것이다. “신심은 분심과 의심의 토대가 되고, 분심은 신심과 의심으로 나아가게 하고 의심은 신심과 분심을 촉발시킨다. ……분심은 신심과 의심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신심이 의심으로 촉발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간화선 수행에서 분심은 생사의 고해를 건너겠다는 커다란 원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방편으로서, 원동력으로서 분심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필요하다.

가장 큰 딜레마는 정의로운 분노와 자비로운 분노의 문제다. 정의로운 분노와 자비로운 분노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이지만 논증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분리해 보자.

부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정의로운 분노가 늘 정당한 것은 아니다. 어떤 정의로운 분노든 표출하기에 앞서서 깊이 있는 성찰을 거쳐야 한다. 이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히틀러, 전두환, IS 테러리스트의 학살이나 폭력, 테러처럼 절대 악에 대응하는 분노라 할지라도 그 정의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에 갇힌 사고이거나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란 동일성에 갇힐 때 늘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수반하며,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데올로기 내지 폭력의 합리화로 간주된다. 또 하나는,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적 야만적인 폭력과 착취가 IS 테러를 낳고 IS 테러가 서양인의 혐오와 폭력을 낳고 이것이 IS만이 아니라 모든 이슬람인의 분노를 낳는 악순환에서 잘 볼 수 있듯, 분노는 분노로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과 분노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의로운 분노는 먼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한 후에 동일성을 해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대대(待對)의 화쟁적 성찰을 하여 정의에서 이데올로기적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럴지라도 정의의 분노는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탄압받는 약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자비의 실천행에 한정하여 표출하여야 한다.

자비로운 분노에 대해 논해보자. 삼독의 하나로서 분노를 없애야 하지만, 중생을 분노와 고통 속에 몰아놓는 요인에 대한 분노 또한 지멸의 대상인가. 개인의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분노를 잠재우는 것은 자비다. 분노와 자비는 모두 타자, 사회, 세계와 연기적 관계에서 표출된다. 연기를 깨달으면, 이 지혜는 당연히 다른 존재들과 공존으로 이어진다. 연기론은 나와 타인이 서로 의존하면서 조건과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생성하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 곧 필자의 용어로 ‘눈부처-주체’로 상대방을 인식하게 한다. 한 개인만 생각하면 분노는 지멸의 대상이지만, 타인이 고통 속에 있을 때 그 고통의 원인이 자비롭지 못한 제도와 체제에 있다면, 그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은 당연히 고통을 야기하는 제도와 체제로 향하기 마련이다. 

불교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곧 위로 깨달음을 얻어 아래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세친보살은 《불성론(佛性論)》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범부의 집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이승(二乘)의 집착을 버린다.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지혜로 말미암아 불법을 이루며, 큰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을 성숙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집착과 삼독의 원인인 나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만,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에 대한 사랑을 솟아나게 한다. 범부가 갖는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므로 이를 지멸하지만, 큰 자비가 있기에 이승(二乘)만을 방편으로 삼는 집착 또한 버린다. 열반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없애야 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열반에 이르려는 마음 또한 욕망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는 방편으로서 삼독(三毒)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 불법을 이루려 하지만, 자비가 있기에 설혹 불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미루고 중생을 깨닫게 하는 일에 머문다. 《유마경》의 〈문수사리의 병문안품〉은 이에 대해 더욱 논리를 발전시킨다. 여기서 잘 서술하고 있는 대로, 아픔의 원인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 그리고 대비 때문이다. 중생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 인하여 병을 얻지만, 보살은 중생의 아픔에 대한 대비 때문에 병이 생긴다. 보살은 중생이 아프면, 보살은 외아들처럼 중생을 사랑하기에 마치 자신의 외아들이 아픈 것과 같이 아프다. 이 아픔 때문에 열반에 이르렀어도 이를 미루고 생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가 병이 나아야 자신도 모든 아픔에서 벗어난다. “원효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논한다. 내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고통받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그를 부처로 만들 때 그 순간에 비로소 내가 부처가 된다.” 이를 인지과학적으로 한정하며 말하면, 거울신경체계를 작동시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를 구제하는 것이 바로 불성을 보는 것이다.
지혜를 통하여 삼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없애고 열반에 이르려 하지만, 우리는 나보다 더 불쌍한 이들에 대한 자비의 마음으로 그 삼독을 안고 보듬고 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욕망과 분노를 완전히 없애야 하지만, 일상의 세계에서는 열반, 생의 의지, 중생구제를 추구하는 욕망과 분노는 인정하게 된다. “분노가 분노에 의해 사라지지 않으며 오로지 자비에 의해서만 사라진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라는 《법구경》의 가르침은 지켜져야 한다. 붓다 스스로 《대방편경》에서 499명의 선원을 살리기 위하여 살해를 품은 선원을 죽인 선장 이야기를 한 것처럼, 죽어가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설득을 포함하여 모든 비폭력적 방안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분노는 너른 범위의 자비에 포함되는 것이며, 자비심의 분노인 한, 분노는 정당하다.

모든 중생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도모한다. 그런데 성선설과 성악설을 넘어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 인류학을 종합하면, 인간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의 선악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의 선을 서로 증장하게 하여 모든 중생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 실존적 존재, 사회적 존재, 미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다. 지극히 선한 자에게도 타인을 해하여 자신의 이익을 확대하려는 악이 있고, 악마와 같은 이에게도 자신을 희생하여 타자를 구원하려는 선이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종합하여 추론하면, “개인의 차원이든 집단의 차원이든, 선과 악의 비율을 결정하는 요인은 크게 ① 노동과 생산의 분배를 관장하는 체제, ② 타자에 대한 공감, ③ 의미의 창조와 공유, ④ 사회 시스템과 제도 ⑤ 종교와 이데올로기 ⑥ 의례와 문화 ⑦ 집단학습 ⑧ 타자의 시선 및 행위, ⑨ 수행, ⑩ 법과 규정 ⑪ 지도자 등 대략 열한 가지다.” 열한 가지가 잘못되면 그 구성원들의 스트레스와 분노가 증대한다. 그렇다면 분노를 줄이기 위하여 이 열한 가지를 바로잡으려는 분노는 정당할 수 있다. 이 열한 가지 각각에 대하여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을 분노하게 하는 자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분노를 줄이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자비심의 발로다.

지혜 없는 자비가 맹목이라면 자비 없는 지혜는 공허하다. 수행을 통하여 고통과 분노가 일어나는 원인, 모든 것의 연기성과 공성(空性)에 대하여 통찰하고 중생의 고통에 자비심을 가져 이를 해결할 다양한 방편을 모색하고 실천하여 그를 구제하는 것이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뇌나 심장, 배꼽이 아니라 아픈 곳이 우리 몸의 중심이다.”라며 죽어가는 생명,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연장으로 발생하는 분노, 생명을 살리고 구성원의 분노를 줄이기 위하여 구조적 폭력이나 잘못된 국가와 세계 체제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단, 그 분노의 표출은 설득과 협상 등 평화적 방법이 무망한 상황에서 증오 없이 자비심을 잃지 않는 범위에 한정하여 행해야 한다.

이처럼, 고통의 실상을 직시하고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지혜에 바탕하여 생명을 살리고 구성원의 분노를 줄이기 위하여, 설득과 협상 등 평화적 방법이 무망한 상황에서 모든 죽어가는 중생의 고통에 연민하고 공감하는 자비심에서 비롯된, 증오가 없이 최종수단으로서만 폭력을 용인하는 자비로운 분노는 정당하다. 이런 분노는 동력부여 기능 등 분노의 순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는 상실된 존재를 회복하고 사회를 정화하여 모든 중생이 좀 더 분노하지 않는 세상을 만든다.

4. 개인과 사회를 종합한 치유의 길

2장과 3장을 종합하자.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개인은 ‘사회관계 속에 있는 개인(individuals in social relation)’이다. 개인과 개인, 주체와 타자,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연(緣)의 고리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하며, 세계가 변하면 나도 변한다. 개인과 집단, 국가의 연기 관계에 따라 분노의 치유방식은 달라진다. 분노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기에 치유 또한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방식이 종합되어야 한다. 이상사회에서도 분노와 모순은 존재한다. 분노가 일었을 때 이를 자비로 소멸시키느냐 표출시키느냐, 집단과 국가가 분노를 야기하는 모순을 구성원과 활발한 소통을 통하여 극복하려 하느냐 아니면 소통하지 않으면서 모순을 더욱 심화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를 개인의 마음이 자비를 지향하느냐 분노를 지향하느냐, 집단과 국가가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을 소통을 통하여 극복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8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유형별로 치유 및 승화의 방안을 모색하기로 한다.

A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분노에 차 있고 그가 소속된 공동체 및 집단은 개인의 분노를 야기하는 모순이 가득한데 이를 해결할 소통이나 시스템이 별로 작동하지 않으며, 국가체제 또한 그런 경우다. 지금 한국사회가 이에 거의 부합할 것이다. 이 경우 수행과 치료를 통하여 개인의 분노를 소멸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회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런 요인들이 개인의 분노를 야기하기에 분노는 지속된다. 개인이 사회적 요인으로 분노할 경우 이의 개인적 치유는 별로 효력이 없으며 치유하더라도 재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달램과 치유에 초점을 맞춘 대안들은 분노를 야기한 사회모순을 은폐하기에 사회적 대안을 모색한다. 개인이 소속한 집단이 서로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 국가체제 또한 대의 민주제와 참여민주제, 숙의민주제를 종합하여 불평등,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등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 국가-자본 카르텔의 폭력성과 착취 증대 등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다양한 모순을 극복하도록 개혁을 하고 그런 정책을 실시하도록 시민사회가 압박하여야 한다.

B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분노에 차 있고 그가 소속된 집단은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으로 가득하고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반면에 국가체제는 민주적으로 소통이 잘 이루어져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의 극복이 잘 이루어지는 경우다. 이에 부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이에 가까운 유형을 현실에서 찾는다면 스위스에서 자살이 빈번히 일어나는 한 마을이 이에 조금 유사할 것이다. 이 유형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분노는 수행과 치료를 통하여 해소하면 되지만, 문제는 개인이 소속된 공동체 및 집단이다. 집단의 지도자가 독재적이거나 집단의 구성원이 이기적이거나 집단에서 생산이나 가치를 분배하는 시스템이 잘못되거나 집단의 소통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것이 개인의 분노를 야기하므로, 먼저 그 집단의 이런 모순을 직시하고 소통을 원활히 하고 공감과 유대를 향상하는 교육과 프로그램, 특히 공동육아, 공동놀이체험, 공동식사 등을 자주 마련한다.

C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분노에 차 있고 그가 소속된 집단은 모순도 없고 이를 해결하는 시스템도 잘 작동하고 있지만, 국가체제는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으로 가득한데 소통이나 이의 해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다. 이에 해당하는 예는 1960년대 한국의 농촌 공동체일 것이다. 이 유형에서는 그 공동체가 바깥사회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을 경우 개인적인 분노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수행과 치료를 통하여 해소하면 된다. 문제는 국가체제다. 이 공동체가 바깥사회와 활발하게 교류를 할 경우 국가체제의 모순이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분노를 야기한다. 이럴 경우 국가와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공영역을 구성하여, 이곳에서 활발하게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여기서 합의를 이룬 것을 정책으로 구현하면서 모순을 해결하여야 한다.

D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분노에 차 있지만, 그가 소속된 집단과 국가체제 모두 모순도 없고 이를 해결하는 시스템도 잘 작동하고 있는 경우다. 이에 해당하는 유형은 라다크와 같은 곳에서 개인이 분노할 경우다. 이 유형에서는 분노의 원인이 개인이나 주변 사람에게 있으므로 회복적 정의, 개인의 분노를 치유할 수 있는 수행이나 치료, 주변 사람과 상담과 대화와 놀이를 통해 화해하면 된다.

E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자비로 가득하고 그가 소속된 집단과 국가 모두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으로 가득하고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다. 이에 부합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암자에서 수행하는 몇몇 스님일 것이다. 이 유형에서는 대다수 개인이 자비로 가득하더라도 이는 일시적이거나 그 개인들이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자신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 문제가 있다. 집단과 국가 모두 통제가 강한 데 비하여 국민의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이 낮을 경우 이 유형이 많은 국민에게 폭넓게 존재할 수 있다. 이 유형에서는 먼저 대중이 집단과 국가체제의 모순을 직시하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를 개혁하는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스님들은 개인의 깨달음에 자족하지 말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살행을 행해야 한다.

F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자비로 가득하고 국가체제 또한 소통이 잘 이루어져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나 시스템이 거의 없지만, 그가 소속된 집단은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이 심화한 경우다. 개인이 집단에 대해서는 소속감을 별로 갖지 않은 채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국가체제에 봉사하는 것으로 실존의 의미를 찾는 스위스 공무원 정도가 이에 부합할 것이다. 이 유형에서는 현재 개인들이 자비롭다 하더라도, 언제든 집단과 마주칠 때 그 모순이 개인을 분노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단을 떠나 국가에 귀속되려 하지 말고 집단의 구성원들과 유대를 늘리며, 모순이 보일 경우 이를 구성원들과 함께 해결하는 참여정신이 필요하다.

G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자비로 가득하고 그가 소속된 집단은 소통이 잘 이루어져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의 극복이 잘 이루어지는 반면에, 국가는 개인을 분노하게 하는 모순으로 가득하고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다. 이에 가까운 사례는 실상사공동체다. 이 유형에서는 분노가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한다 하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분노는 수행과 치료를 통하여 해소하면 되지만, 문제는 국가다. 이 경우 개인이 자비로 충만하더라도 국가의 모순을 인식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국가에서 국민의 분노를 증대하는 모든 제도와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 실제로 실상사공동체의 구성원인 스님, 대안학교인 ‘작은학교’의 선생과 학생들, 귀농학교의 선생과 학생들, 인드라망공동체의 회원들이 서로 어울려 광우병 파동과 4대강 사업 때 촛불시위 참여와 4대강 순례로 분노를 표출하였다.

H유형은 개인의 마음이 자비로 가득하고 그가 소속된 집단과 국가 체제 또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소통을 바탕으로 개인의 분노를 야기하는 모순이 거의 없는 경우다. 이 유형은 이상사회다. 아쇼카왕 시대, 요순시대 등이 여기에 가장 부합할 것이다.

어떤 유형이든 분노의 치유와 극복으로 바람직한 방안 가운데 하나는 회복적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법원과 감옥, 국가의 생사여탈권을 연결한 기존의 응보적 정의 체계는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이에 관련된 모든 사람, 전체 공동체의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가해자가 진정으로 참회하며 잘못을 바로잡아 집단의 분노를 없애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범죄나 폭력으로 인한 분노는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아픔이고 문제이므로 회복적 정의는 “범죄를 높은 추상의 평면에서 끌어내려 사람과 관계에 대한 침해와 피해, 인간관계의 훼손행위로 이해하고,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가 잘못을 시정하고 화해와 안전을 촉진하는 해결책을 찾는다.”

5. 맺음말

이고득락(離苦得樂)이 모든 중생의 꿈이듯, 분노 없는 개인과 사회는 모든 인간의 꿈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분노 없는 삶이 불가능하다. 분노를 치유하는 두 길은 지혜와 자비다. 지혜를 통하여 분노의 원인을 성찰하고 자비를 통하여 다 같이 분노 없는 세상을 연다. 지혜를 통하여 나의 분노를 없애고 자비를 통하여 중생의 분노를 없앤다.

분노가 일 때 명상을 통하여 이를 잠시 미루고 그 실상과 원인을 여여하게 직시하는 것이 모든 일의 우선이다. 분노의 원인을 살피고 모든 것의 연기성과 공성에 대하여 통찰함이 필요하다. 무아와 공에 대한 깨달음은 가아(假我)에 얽매여 집착이 만든 탐욕과 분노를 소멸시킨다. 명상과 수행을 통하여 자비희사의 무량심에 이르고 심리적 치료를 하고, 거울신경세포체계를 활성화하여 공감을 높이면 개인적 분노는 사라질 것이다. 

연기에 대한 깨달음은 나와 밀접한 관련 속에 있는 중생의 고통에 연민하게 하며, 이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외적 요인에 분노하게 한다. 그래서 지혜 없는 자비가 맹목이라면 자비 없는 지혜는 공허하다. 지혜와 자비만이 분노를 없앨 수 있다. 지혜는 자비를 내는 조건으로 작용할 때 힘을 가지며, 자비는 지혜를 바탕으로 할 때 진정으로 분노를 줄이는 과(果)를 낳는다. 중생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분노는 크고 넓은 자비다.

고통의 실상을 직시하고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지혜에 바탕하여 생명을 살리고 구성원의 분노를 줄이기 위하여, 설득과 협상 등 평화적 방법이 무망한 상황에서 모든 죽어가는 중생의 고통에 연민하고 공감하는 자비심에서 비롯된, 증오가 없이 최종수단으로서만 폭력을 용인하는 자비로운 분노는 정당하다. 지혜와 자비를 두 축으로, 수행을 통하여 탐욕과 분노를 낳는 가아(假我)를 해체하고, 생명을 죽이고 분노를 증대하는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면서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고통 속에 있는 중생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자비로운 분노에 참여할 때 분노 없는 세상은 좀 더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

 

이도흠 /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동 대학원 졸업.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의상 · 만해 연구원 연학실장, 《문학과 경계》 주간,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 다수가 있다. 원효학술상 특별상, 유심작품상 학술상 수상. 현재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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