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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베드까르와 분노 그리고 불교 / 박경준
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67호] 2016년 09월 01일 (목) 박경준 sjkj@dongguk.edu

1. 머리글

요즈음의 한국사회는 가히 ‘분노사회’라 할 만하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분노를 적절하게 조절하거나 억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폭행하거나 심지어 살해까지 한다.

얼마 전 수원에서는 길을 가던 70대 노인이 30대 여성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노인이 자신을 째려보는 것 같았다는 것이 폭행의 이유였다. 그 여성은 자신을 제지하던 다른 여인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지난 5월에는 서울 강남역 근처에 있는 한 건물의 화장실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 모두를 충격 속에 빠뜨린 바 있다. 개인적인 원한 관계도 없이 일어난 이 사건을 한편에서는 ‘여성 혐오’ 범죄라고 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의 범행이라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사실이 뭐든, 이 사건은 크게 보면 개인적인 분노에서 비롯된 ‘묻지마 범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묻지마 범죄는 한국사회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 더욱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또한 지난 5월 28일에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19세 노동자가 승강장 안전문 정비 작업을 하다 전동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하여 국민의 공분을 샀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 및 사회 안전 시스템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별로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여러 방송과 신문에서 서울의 한 사립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입학전형 과정에서 출신 대학과 나이에 따라 지원자를 차별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 보도 역시 많은 국민을 분노케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립 로스쿨은 우리 사회에 학벌 카스트 제도를 확산시킴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를 실망케 하고 분노케 하는 일들은 이 밖에도 수없이 많지만, 특히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교는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초세간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각적 실천 또는 내적 성찰의 종교로 이해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유가는 불교를 ‘허원적멸’의 현실도피적 종교, 나아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반인륜적 종교라고 비판해 왔으며, 서구에서는 대부분 불교를 개인적인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비사회적인 종교쯤으로 치부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또는 인간불교(또는 인생불교)가 대세다.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도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중요시하는 큰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필자는 인도의 암베드까르에 주목하고자 한다. 암베드까르는 카스트 제도의 인도사회에서 계급차별에 분노하면서 불교개종운동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바, 인도의 신불교도 사이에서는 ‘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암베드까르 불교는 인도의 오래된 ‘분노 시스템’, 곧 ‘카스트 제도’의 토양에서 자라난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오늘의 한국사회에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 암베드까르와 분노

1) 암베드까르의 생애

브힘 라오 람지 암베드까르는 1891년 4월 14일 인도 모우에서 아버지 사크팔과 어머니 비마바이의 1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1904년 암베드까르의 가족들은 사타라에서 봄베이로 이사했으며 그는 엘핀스톤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1908년 어린 나이에 라마바이와 결혼하고 엘핀스톤대학에 입학했다. 1913년 아버지를 여의고 바로다 주(州) 한 토후의 경제적 지원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석 · 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1917년에는 〈인도에 지불해야 할 국가 배상금-역사적 · 분석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년 후, 봄베이 시데남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로 임용되지만 얼마 안 있어 교수직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1923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또한 런던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암베드까르는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봄베이 국립법과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동 대학의 학장 소임을 맡기도 한 그는, 인도 정부 국방자문위원과 행정위원회 노동문제 담당관 그리고 법무부장관을 역임하면서도 피압박계층인 불가촉천민들의 권익을 위해 각종 집회를 이끌고 국내외의 여러 회의에 참석하여 강연했다. 1952년에는 봄베이 하원입법회의에서 의회 상원위원에 선출되었다. 더욱이 그는 〈민중의 지도자〉 〈소외된 인도〉 〈평등〉 〈인민〉 등의 격주간지를 발간하고, 《카스트의 박멸》을 비롯한 많은 책을 저술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암베드까르는 그의 생애 말엽에는 불교 관련 국제모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56년 10월 14일에는 나그푸르에서 역사적인 ‘불교 개종식’을 거행함으로써 ‘힌두교도로서 죽지 않겠다’던 생전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같은 해 12월 6일 델리에서 불교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저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들과 부인 곁에 영원히 머물게 되었다. 그의 타계 1년 후인 1957년에는 그의 유명한 저술인 《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and His Dhamma)》이 출간되었다.

2) 암베드까르와 분노

암베드까르는 피나는 노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인도사회의 엘리트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불가촉천민’ 신분으로서 어릴 때부터 겪은 갖은 수모와 학대는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히고 분노케 하였으며 동시에 그것은 그로 하여금 힌두 카스트에 저항하게 하는 추동력이 되었다.

고대 인도의 힌두 성전인 《리그베다》에 따르면, 태초에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 계급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되었다. 허벅지에서는 상인 계급인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 계급인 수드라가 탄생하였다. 불가촉천민은 이 네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수드라보다도 더 낮은, 인도사회의 최하층민이다. 불가촉천민은 전생에 지은 죄로 천하게 태어나므로 사람들과 접촉하면 그 사람들이 오염된다. 그들의 그림자만 드리워져도 오염되기 때문에 그들은 사원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불가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불가촉천민 신분의 소년, 빔라오 암베드까르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견뎌야만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암베드까르와 그의 형은 교실 뒤쪽에 마대 돗자리 한 장을 깔아놓고 얌전히 앉아 지내야 했다. 어떤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오염될까 봐 그의 공책을 만지는 것조차 꺼리곤 했다. 공동 우물을 함께 사용할 수 없어 물을 먹지 않고 지내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훗날 바로다 주에서 고위 관리로 지낼 때도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물을 마실 수 없었고 그의 부하직원들은 그와 거리를 두고 앉았으며 심지어는 사환들조차 파일이나 종이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의 책상을 향해 던져주곤 하였다. 그가 봄베이에서 교수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힌두교도 교수들은 그를 천민 취급을 하고 교수 휴게실의 물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먹지 못하게 하였다. 1923년 봄베이고등법원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할 때에, 법무사들은 그가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로 그와 일하기를 꺼렸고, 심지어는 매점의 점원도 그에게 차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고등학력의 소유자에다 봄베이 같은 대도시에서 사는 암베드까르가 이러한 대접을 받았다면, 시골에 사는 가난하고 불행한 불가촉천민들의 경우는 어떠했겠는가. 그들이 겪은 수모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을 것이다. 암베드까르 자신은 물론 학대받는 다른 달리트들의 인권이 유린당하는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20세기의 지식인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생애를 지배한 압도적으로 강렬한 세 가지 열정에 대해 고백한 바 있다. 그중의 하나는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었다. 이에 관해 러셀은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고통에 찬 사람들의 비명이 내 가슴 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들에게 고문당하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혐오스러운 짐이 되어버린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그리고 고독과 빈곤과 고통으로 가득한 전 세계는 인간의 삶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이상을 비웃고 있다.

암베드까르 역시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더욱이 카스트 사회에서 단지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갖은 모멸과 굴욕 속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비참한 달리트들에 대한 연민은 격렬했다. 불가촉천민들의 정치집회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여러분의 얼굴에 담겨있는 비참한 표정을 볼 때마다, 그리고 여러분의 슬픈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의 가슴은 찢어집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비참하고 비열하고 비굴하게 살면서, 슬프고 가난하고 세상에 대한 의무만이 있는 노예 신세를 더욱 악화시키고 더욱 슬프게 하는 것입니까?

그의 연민은 연민에 그치지 않고 분노로 나아갔다. 그는 인도의 사회 질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카스트 제도에 정면으로 맞섰다. 불평등한 카스트 사회에서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불가촉천민을 구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을 행동에 옮겼다.

1927년 3월 19일, 암베드까르는 마하드 시 초다르 저수지에서 달리트들이 급수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1차 ‘마하드 대회’를 개최했다. 봄베이 입법회의가 1923년 달리트들의 급수시설, 우물, 학교, 병원 등의 공공시설 이용 허용 법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진보적인 성향의 마하드 시 당국자들은 그 이듬해 ‘초다르 저수지’의 식수 사용을 달리트들에게 개방하였다. 그러나 상위 카스트 주민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암베드까르는 대중집회를 열기로 결정하였고 마침내 3월 19일, 1만여 명의 군중이 선두에 선 암베드까르를 따라 초다르 저수지까지 행진하여 ‘금지된 저수지’에서 물을 떠 마심으로써 달리트들의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만천하에 천명하였다. 그러자 상위 카스트 주민들은 해산하는 집회 참가자들을 급습하여 잔혹하게 폭행하였다. 하지만 암베드까르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보복은 금물이라고 타일렀다. 그 후 정통파 힌두교도들의 압박에 굴복하여 마하드 시 당국자들은 달리트들에게 초다르 저수지를 개방키로 한 결정을 그해 8월 24일에 철회하였다. 그러자 불가촉천민들은 더욱 격분하여 12월 25일 제2차 ‘마하드 대회’를 개최하며 이에 항의했다. 더 나아가 참가자들은 이 집회에서 계급차별을 정당화하는 힌두교 법전인 《마누 법전》 사본을 불태워 땅속에 폐기해 버렸다. 달리트들의 인권을 회복하고자 불평등의 상징인 《마누 법전》 화형식을 거행한 것이다.

암베드까르의 다음 목표는 고다바리 강변의 도시 나시크에 있는 ‘칼라람 사원’이었다. 이 힌두사원에 달리트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집회가 1930년 3월 2일 개최되었다. 1만 5천여 명의 군중이 행진하여 사원에 도착했으나 경찰들의 경계 속에서 칼라람 사원의 모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암베드까르는 3월 3일 집회에 참석하여 비폭력적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시위는 한 달 이상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나시크 주민들의 폭력 공세에 암베드까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 후로도 약 5년간 꾸준히 계속되었지만, 정통파 힌두교인들은 더욱 완강하게 달리트들의 사원 출입을 저지하였다. 암베드까르는 결국 1935년 10월 13일 인근 마을 욜라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힌두교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른 종교로 개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그 집회에 모인 1천여 명의 피억압계급 지도자들에게 종교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택적인 것이라며 개종을 호소하였다.

자존심을 얻고 싶다면 개종하십시오.
협동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개종하십시오.
힘을 원한다면 개종하십시오.
평등을 원한다면 개종하십시오.
독립을 원한다면 개종하십시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개종하십시오.

이와 같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에 대한 암베드까르의 반대 입장은 단호하였다. 이렇게 단호한 태도가 근대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와 갈등을 빚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신의 자식들’이라는 의미)이라고 부르며 보호하려 했고, 그들의 권익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라는 울타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간디는 카스트 제도와 불가촉제는 상관없는 제도라고 주장한 반면, 암베드까르는 카스트 제도는 불가촉제의 온상이라고 주장했다. 간디는 달리트를 힌두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목숨을 걸었고, 암베드까르는 달리트를 힌두의 틀에서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3. 암베드까르와 불교

1) 암베드까르와 불교 개종

힌두교의 카스트 관습과 이념 속에서 불가촉천민의 권익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암베드까르는, 달리트들이 개종할 만한 다른 종교들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했다. 결국은 불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암베드까르는 자신의 사상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카비르와 마하트마 풀레, 그리고 붓다의 생애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가 처음으로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바로 전이었던 것 같다. 1907년 암베드까르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는 그의 집안에서는 큰 경사였으므로 그의 일가친척과 지역 유지들이 모여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축하 모임에서 고등학교 교장이며 사회사업가였던 크리슈나지 아르준 켈루스카가 축사를 해 주었다. 또한 켈루스카는 축하 선물로 그가 그 무렵 집필한 책 한 권을 암베드까르에게 주었다. 그것은 바로 마라티어로 쓰인 《붓다의 생애》였다. 암베드까르는 이 책을 통해 붓다의 삶과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훗날 좀 더 깊이 있게 불교 공부를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훗날 그가 불교로 개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암베드까르는 욜라 집회 이후 개종 문제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수많은 종교 관련 서적을 살피고 여러 종교사상가 및 성직자들과 연락하며, 국내외의 여러 종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암베드까르의 힌두교 포기와 개종 선포 이후에는 이슬람교, 기독교, 시크교, 그리고 불교계 인사들로부터 각각 자신들의 종교가 불가촉천민들에게 어울리는 종교임을 주장하는 편지와 전보가 쇄도하였다. 그는 한때 시크교로의 개종을 진지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슬람교나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피억압 계급인들의 국적이 박탈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무슬림의 수는 두 배가 되어 무슬림 지배의 위험 또한 현실화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기독교인의 인구는 5,000만 명에서 6,000만 명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나라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피억압 계급인들이 종교를 바꾸려고 한다면 시크교로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이슬람교나 기독교로 개종했을 경우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우려가 엿보인다. 암베드까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슬람교는 꾸란(Quran)의 평등 정신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계급차별의 폐습이 남아 있고, 일부다처제, 축첩의 관습 등을 허용하여 여성을 억압하며 배타적 폭력성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경우는, 영국의 지배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이유 외에 “기독교 개종자들은 기독교인이 되어 출세하기만 하면 과거에 같은 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서 인도의 기독교인들이 복음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었다. 자이나교는 아힘사를 극단적으로 고집하는 점이 문제였다. 시크교는 힌두교의 한 종파이지만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고 사회 개혁적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에서 암베드까르의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크교도 그 가르침과 달리 실제로는 개종 전의 카스트에 따라 교단 내에서의 신분이 규정됨으로써, 현실적으로는 결국 카스트를 인정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배제하게 되었다.

이제 암베드까르의 마음은 점점 더 불교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이미 1940년, 불가촉천민의 기원에 대해 독특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즉, 기원후 4세기경 불교와 브라만교 사이에는 치열한 분쟁이 있었고 결국 주도권을 브라만교가 장악했는데, 일부 부족민은 끝까지 불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브라만들은 이들에게 사제의 권위로 천한 직업을 강제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훗날 불가촉천민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불가촉천민의 개종은 ‘개종’이 아니라 본래 종교인 불교의 ‘회복’이고 ‘중흥’이라고 강변하는 불교개종자들도 많다.

또한 1948년 락슈미 나라수 교수의 역저 《불교의 정수(The Esse-nce of Buddhism)》를 재간행할 때 암베드까르가 서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나라수 교수에게서 많은 불교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유작 《붓다와 그의 가르침》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1950년 암베드까르는 스리랑카에서 처음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부인과 함께 참석하여 불교적 정서를 익혔다. 인도에 돌아온 후 그는 여생을 불교를 부흥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1951년 공직에서 은퇴한 암베드까르는 불교 부흥을 위해 여기저기에 기고하고 연설을 하며 회의에 참석했다. 1954년 양곤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해서 인도불교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마침내 암베드까르는 붓다 열반 2500년인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의 야외에서 불교 개종 의식(diksha)을 치렀다. 약 38만 명의 불가촉천민이 개종식에 참여했다. 그와 그의 부인은 찬드라마니 대장로의 지도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의 수지를 서약하였으며, 암베드까르가 만든 22가지 서약을 외우면서 힌두교와 결별하였다. 그 다음 날에는 암베드까르의 지도로 그의 추종자 약 50만 명(혹은 100만 명)이 서약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2) 암베드까르의 불교 이해

암베드까르가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유작 《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and His Dhamma)》에 잘 나타나 있다. 암베드까르는 이 책을 크게 보아 세 가지 목적에서 집필한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붓다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잘못 이해하여 비난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이다.

둘째, 불교가 현대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불교 경전이 너무 방대하여 사람들이 쉽게 불교의 핵심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불교를 가급적 간단명료하게 서술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셋째,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신불교도들에게 불교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암베드까르는 불교를 시종일관 합리적, 과학적, 근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의 미국(및 영국) 유학 생활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특히 존 듀이(John Dewey)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삶은 이성과 경험에 바탕한 대중적인 교육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이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해방신학자 발터 라우센부쉬 등의 복음의 사회화 운동 이념에도 많은 공감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종교는 개별적인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유기체 전체의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개인을 천국에 가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세에서의 삶을 천국의 조화로움으로 바꾸는 문제이다.” 라우센부쉬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암베드까르에 따르면, 전통적인 불교 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 모두 다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다. 거기에는 구전에 의한 경전 전승 과정에서 제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진 내용들도 섞여 있다고 본다. 그는 특히 전생의 업(까르마)과 윤회(환생)에 관련된 내용 가운데에 와전된 사례가 많다고 보았다. 또한 사성제의 가르침도 결집 과정에서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암베드까르는 붓다의 친설(親說)과 와전된 가르침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했다.

붓다는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은 붓다의 말이라고 인정해도 좋다. 둘째, 붓다는 사람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결코 논란을 벌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행복과 무관한 말을 붓다가 한 말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셋째, 붓다는 모든 사항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둘이다. 붓다는 전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의견을 말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잠정적 의견으로서 말했을 뿐이다.

암베드까르는 위의 합리성, 공익성, 확신성의 기준에 의거해서 업과 윤회, 사성제 등의 가르침을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쌓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오히려 자책감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전생의 악업 결과가 아니라 힌두 사회의 카스트 제도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계급적 고통을 전생의 개인적 업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달리트들의 고통이 사회적 착취와 물질적 빈곤, 즉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에서 연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성제의 가르침은 그것을 개인적인 탐욕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 즉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성제를 붓다의 가르침에서 배제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적 진리인 연기법(緣起法)을 불교에서 배제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연기법과 사성제는 그 표현과 형식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성제를 부정하는 것은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이고,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암베드까르가 사성제의 가르침을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한정시켜 이해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암베드까르의 실수(?)는 불교인으로 하여금 인간의 고통을 사회적(구조적 또는 제도적) 차원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사회정의’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강조하고 있다. 암베드까르는 붓다의 정법(正法, 삿다르마)이 첫째, 사람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둘째,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사회적 ‘정의’는 그의 불교관을 이해하는 데 키워드라고 할 만하다.

어쨌든 전통 불교교단에서는 대부분 암베드까르의 불교 이해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의 기관지인 〈마하보디〉(1959년 12월)에 실린 다음 서평은 그러한 정황을 잘 대변한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인데 암베드까르의 불교는 미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암베드까르는 정치적 · 사회적 개혁의 목적을 가지고, 법이 될 수 없는 것을 법으로 설하고 있으므로 이 책의 표제는 ‘붓다와 그의 법’이 아니라 ‘암베드까르와 그의 법’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며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암베드까르는 종교의 상징 체제는 과거에 충실하다고 해서 정당화되지 않으며,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의 유작은 이러한 신념에 바탕하여 합리성, 공익성, 확신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것이므로 그의 책을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바단트 아난드 카우살리야얀(Bhadant Anand Kausalyayan)은 원래 영어로 쓰인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힌디어로 번역하면서 이 책에 인용된 모든 팔리 경전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그가 내린 결론은 “암베드까르의 저술은 불교에 대한 ‘새로운 하나의 태도일 뿐이지 왜곡이 아니며’ 전통적인 모든 교리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가 왜 이러한 결론을 내렸는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4. 분노와 불교

1) 암베드까르와 아힘사

암베드까르의 궁극적 목표는 불가촉천민을 온갖 차별과 학대로부터 해방시켜 자유, 평등, 우애에 기초한 평등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개인적인 회개와 참회, 기도와 발원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차별하고 학대하는 구체적인 카스트 상위층과 싸워야 하고 뿌리 깊은 계급 구조를 깨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따르는 문제가 바로 분노 및 폭력의 문제이다.

암베드까르는 오랫동안 힌두교의 아힘사 정신을 몸소 익혀왔고, 당시 마하트마 간디의 아힘사 운동 등의 영향을 받아 카스트 제도에 대한 저항과 투쟁 방식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조심스러워했는지는 다음의 진술 속에 잘 나타난다.

불살생(ahimsa)에 관하여 붓다는 희생제를 위한 살생에 반대하고 모든 생물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한편, 비구들에게 조건을 붙여 육식을 인정했다. 이들 전승으로 판단해보면 붓다는 ‘살생을 위한 살생’과 ‘필요상의 살생’을 구별해서 전자는 금했으나 후자는 인정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붓다의 불살생은 원칙적인 것(principle)이었지 절대적인 것(rule)은 아니었다. 붓다는 악에는 선으로 대하라고 가르쳤으나 선을 악에다 종속시키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선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으로 ‘살생’을 사용하고 있는 것까지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불살생의 가르침과 처형과는 모순되지 않는다. 범죄인은 자기의 행위(업, Karma)의 결과로서 형벌을 받는 것이지 판사의 증오로써 처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그의 고민은, “스리랑카의 승려들은 침략한 외적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국민에게 호소했다. 한편 미얀마의 승려들은 외적과 싸우기를 거부했고 국민에게도 싸우지 말라고 호소했다. 최근 독일불교도협회는 아힘사를 제외한 5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이것이 아힘사 교의가 처해 있는 상황이다.”라는 그의 주장 속에서도 드러나 있다. 이런 고민의 결과는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로 나타난다. 그는 불교 개종식 때 낭송하기 위한 22조항으로 된 ‘불교입문서약’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5계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13) 나는 모든 생물을 자비롭게 보호한다.
(14)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15)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6) 나는 사음을 하지 않는다.
(17)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서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5계 가운데 첫 번째인 “살생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는 모든 생물을 자비롭게 보호한다”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부득이한 경우 살생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부득이하게 살생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자비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가촉천민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 방식으로 암베드까르는 집회, 행진 등을 포함한 시위 외에 폭력 행사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분노와 불교

분노와 폭력에 대해서 불교는 기본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분노를 3독심(탐, 진, 치)의 하나로 인식하는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불교가 분노와 폭력을 거부하는 생명지향, 평화지향의 종교라는 사실은 《법구경》의 잘 알려진 다음 가르침 속에 드러난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기 생명에 이 일을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마라.

불교에는 5계를 비롯해서 8재계, 10선계, 구족계, 보살계 등 다양한 계율이 있다. 이러한 계율들 조항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조항은 역시 ‘불살생’이다. 대승 《범망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불자들아! 직접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을 해서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서 죽이는 따위이니, 죽이는 인(因)이나 죽이는 연(緣)이나 죽이는 방법이나 죽이는 업을 지어서 온갖 생명 있는 것을 짐짓 죽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러한 ‘불살생의 대원칙’에 비추어 보면 암베드까르의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약간 비판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초기 경전인 증일아함 권31에는 분노, 시위, 폭력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발견된다.

대과왕에게 청정태자가 있었다. 단정하고 총명했으나 결혼을 거부하여 왕의 걱정이 컸다. 왕은 한 음녀로 하여금 태자를 유혹케 하여 그 뜻을 돌리려 했다. 태자는 돌변하여 성안의 모든 처녀가 결혼하기 전에 먼저 그와 함께 잠자리를 하도록 부왕이 허락해 준다면, 결혼하겠노라고 제안하여 허락을 받는다. 사람들은 태자가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성안의 한 여인이 일부러 발가벗고 대중 앞으로 나아가 태자의 잘못을 폭로하고 군중을 선동한다. 이에 성난 군중은 궁중으로 몰려가 청정태자를 처형한다(청정태자는 전생의 앙굴리 말라).

이것은 비록 전생담이기는 하지만, 이는 폭정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용인하는 붓다의 입장이 은연중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읽힌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국가권력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시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열반경》에서는 “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이나 병장기를 들고 법사를 호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나오고, 《대살차니건자소설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정법을 지키고 있는 군주가 부득이한 경우, 즉 국내에서 반역이 일어난다든가 국외로부터 침략을 받는다든가 할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하여 인민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들은 특별한 경우, 저항과 시위, 폭력과 무력행사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경전의 입장은 암베드까르의 입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5. 맺음말

암베드까르는 인간 해방을 위해 마하트마 간디 못지않게 치열한 투쟁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인도인들로 하여금 인도의 카스트 체제로 인한 불평등과 불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였다. ‘인도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근대적인 인도 헌법의 제정에 지대한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불가촉천민 신분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도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지만, 불가촉천민을 향한 그의 연민은 한결같았다. 그는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 소외 · 불평등 · 착취 구조에 갇힌 힌두 사회 자체에 있다고 보았다.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힌두 카스트 제도가 사라지고 새로운 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때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은 견고했다. 자유 · 평등 · 박애를 지향하는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종교는 불교임을 깨닫고 그는 생애 후반에 불교부흥운동과 더불어 불교개종운동에 진력했다. 그 결과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에서 개최된 불교개종법회를 통해 그를 포함한 50만 여명의 불가촉천민들이 불교로 개종했다. 1951년의 인도 불교 인구는 18만 명에 그쳤지만 불교개종법회 5년 후인 1961년에는 320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암베드까르를 추종하는 마하라슈트라 주의 불교 개종자들 때문이었다.

암베드까르는 불가촉천민들이, 그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힌두 카스트 제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먼저 카스트 제도에 불만과 분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거룩한 불만’이라고 표현하고 이 거룩한 불만 또는 분노야말로 모든 도약의 출발점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러한 거룩한 분노를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용기’를 강조하였다.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비결은 용기인바, 이 용기는 많은 사람이 힘을 합칠 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폭력에 호소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초다르 저수지’ 식수 사용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집회 때에 많은 참가자들이 상위 카스트 주민들에게 극심한 폭행을 당했지만 암베드까르는 그들에게 보복은 금물이라며 폭력을 자제토록 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만든 ‘불교입신서약’ 22조항 가운데 13번째 조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3번째 조항을 “나는 살생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고 대신에 “나는 모든 생물을 자비롭게 보호한다”로 표현했다. 여기에 감춰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첫째,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폭력 행사는 허용될 수 있고, 둘째, 그런 경우에도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폭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교라고 하면 조용한 산사에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아주 ‘부드럽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암베드까르의 불교는 불의(不義)와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조금 ‘거칠고 소란스러운’ 이미지를 풍긴다. 하지만 대승의 보살은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의 아픔을, 약자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중생의 아픔과 고통은 사회정의가 실현될 때 비로소 근본적으로 치유되며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는 불국정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사회정의의 실현이 불교의 핵심이다. 이것이 아마도 암베드까르가 오늘을 사는 불교인에게 전하는 한결같은 메시지일 것이다. ■

 

박경준 /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 박사. 주요 논문으로 〈불교적 관점에서 본 자연〉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불교적 접근〉 〈불교사상으로 본 사회적 실천〉 등과, 저서로 《민중불교의 탐구》(공저) 《원시불교 사상론》 《불교사회경제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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