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묻지마’라 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돌이켜 생각하기도 싫은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에 이어서 최근 강남역과 등산로 살인사건 등등에 이르기까지, 매스컴 용어로 ‘묻지마 폭력’의 사건사고가 늘고 있다. 그나마 드러난 것은 어떤 경위로 취재하여 보도된 사건들이지만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채 벌어진 사건들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나는 ‘묻지마’라는 용어 자체가 그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서 너무나 간단하게 범주화되고 마는 것 같아서 마땅치가 않다. 그동안 이 땅에서 유사한 사고들을 수시로 겪으며 긴 세월을 지나왔는데도 아직까지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무능력 · 무책임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오직 미안하고 또 미안해야 할 수밖에 없다.

매스컴의 보도 내용과 그 방향이 널리 일반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오늘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컨대 ‘묻지마’ 폭력사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대부분 매스컴을 통해서 자기 머릿속에 그리게 될 첫인상과 개념을 얻는 것이다. 날마다 수많은 사건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what) 주목하게 할 것인지와 관련하여 언론은 의도적으로 사건 보도의 제목 위치, 크기, 빈도, 기사 길이 등등을 조정한다. 뿐만 아니라 사건의 특정한 속성을 두드러지게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how) 생각해야 할지를 유도한다. 소위 매스미디어의 ‘의제설정 이론’이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묻지마’ 폭력사건에서도,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해칠 때 사회통념상의 동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잔혹한 범죄의 새 유형처럼 간단히 ‘묻지마’라고 이름 지어 놓고는 대개 거기서 그만이었다. 그런 경향의 언론보도 때문에 사회불안이 야기될까, 일각에서 우려한다 싶으면 경찰수사가 유사범죄의 원인을 다르게 결론지을 수도 있다. 언론과 경찰이 해당 사건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든지 간에, 황당하고 참혹한 그 범죄 행위들이 우리 사회에서 줄어들지 않는 배경과 그 맥락을 누군가는 제대로 추궁했어야 할 것이다.

가해자가 선천적 혹은 기질적 요인에 의한 정신질환자이거나, 후천적 혹은 심리사회적 요인에 의한 정신질환자이거나 간에, 대개는 정신질환을 포함한 병리적 심리상태가 ‘묻지마’ 사건의 핵심인 듯 다루어져 왔다. 흔히 우리가 ‘제정신이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말하듯이, 가해자들이 차마 제정신이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범행의 동기가 정신질환인지 아닌지의 문제보다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어쩌다가’ 그렇게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인지, 오히려 그 문제가 현 사태에 대한 성찰의 우선 초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조현병이나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가족들이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억울함을 호소한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폭력적이지는 않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유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신질환을 품고 사는 여타 가족의 심적 고통이 어떠할지를 헤아린다면, 너무 쉽게 단죄하고 도외시할 일이 아니다. 정신질환자가 모두 그렇게 폭력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 필자도 동의하면서 아울러 매스미디어의 방향처럼, 그런 범죄사건의 가해자 개개인을 지목하고 그들의 비정상성(非正常性)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오늘의 참담한 현실이 개선될 리 없다고 생각한다. 몇몇 개인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앓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의 이런 관점이 행여나 가해자의 죄질(罪質)을 가볍게 하고 모든 책임을 사회에 전가하려는 의도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건사고가 줄고 사회가 널리 편안해지기를 바란다면, 좀 더 근본적인 요인에 착안하여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픈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어떻게 앓고 있는지를 비교적 확연히 알기 위한 방편으로, 다소 지루하더라도 신뢰성이 있는 조사 통계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정신보건법”에 의거하여 2001년부터 5년마다 전국적으로 정신질환에 관한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2011년도 조사결과에 의하면, 평생에 한 번 이상 정신질환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은 27.6%(남자 31.7%, 여자 23.5%)로서 성인 10명 중 3명꼴이다. 그 가운데서 담배 관련 장애 문제를 제외하고 알코올 장애 및 기타 정신질환의 평생유병률은 24.7%라 하니, 성인 10명이 모인 자리가 있다면 그 속에 2~3명은 알게 모르게 그간 한 번 이상 환자가 된 경험이 있을 거라는 뜻이다.
술과 담배 문제 외의 정신질환 평생 유병률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나 많이 정신질환에 걸린다(남자 9.2%, 여자 19.6%)는 조사치도 눈에 띈다. 술과 담배 문제를 포함하여 최근 1년 동안의 정신질환 유병률은 16%인데 그중 담배 문제를 제외하면, 성인의 13.5%(남자 11.5%, 여자 15.5%)가 최근 1년 내 알코올 장애 및 기타 정신질환을 앓은 경험이 있다. 즉 18~74세 이하의 성인 10명이 모이면 1~2명쯤은 최근 1년 사이에 정신질환에 걸린 적이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의 유병률은 조사 당시 정신의료기관이나 정신질환자 보호시설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지역사회 거주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이므로 정신질환 경험자의 실제 수는 이보다 더 많다.

특히 술과 담배 문제를 제외했을 때 전국적인 정신질환 평생 유병률은 2006년도에 조사한 통계치에 비해서 즉, 5년 만에 22.9%나 증가하였고 최근 1년의 유병률은 14.3% 증가하였다. 정신질환의 유병률이 이렇게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들 환자 중에서 정신의료 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은 실정이다. 당시 조사에서 정신질환에 걸린 적 있는 사람의 15.3%만이 정신과 의사 · 비정신과 의사 · 기타 정신건강 전문가에게 상담/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받지 못한 채 홀로 정신을 앓고 있는 국민의 수가 이렇게 많다 보니, 대한민국은 결국 충격적인 ‘사건사고 공화국’이 되어가는 것이다.

2003년 이후부터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부동의 1위였다는 사실은 매스컴을 통해서 익히 들어왔다. 위의 2011년 전국 단위 정신질환 실태조사에서도 성인의 15.6%는 평생 동안 한 번 이상으로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하였으며, 3.3%는 자살을 계획하였고, 3.2%는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으로 통계청 사망원인 통계 결과를 보더라도, 최근 3년(2012~2014년)에 걸쳐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8.1명~27.3명에 이르도록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 숫자는 2013년 OECD 평균치(10만 명당 12명)의 무려 2배도 넘는다.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상황이므로, 결과적으로 2015년 OECD 보고에서 한국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OECD 34개국 가운데 27위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또 구체적 자료의 하나로서 국민 각자가 진료받은 현황을 ‘건강보험 통계연보’에서 찾아보자면, 다음 페이지의 〈표 1〉과 같이 11개 만성질환으로 진료받은 인원은 전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이고 특히 ‘정신 및 행동장애’ 계통에서도 증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2014년 현재 총 1,399만 명의 환자 가운데 고혈압이 556만 명으로 가장 많고, 신경계 질환 263만 명, 그다음이 ‘정신 및 행동장애’로 252만 명에 달하고, 당뇨병 241만 명과 간질환 147만 명이 그 뒤를 잇는다. ‘정신 및 행동장애’란 세부적으로 총 78종의 진단유형을 가진 질병들의 범주인데, 거기에는 그간 매스컴을 통해서 자주 소개된 바 있는 조현병 · 정동장애 · 강박장애 · 공황장애 · 불안장애 외에 정신지체나 발달장애 등이 포함된다.

이상에 언급된 것들은 현재 우리 삶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한국 사회가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를 보여주는 지표와 그 통계수치다. 건강과 안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편해도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집단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여기에 옮겨 적으면서도 우울해지는 정보였지만, 굳이 숫자를 동원해가며 실태를 자세히 알리고자 하는 까닭은, 정부와 민간이 어떻게든 협력해서 공동체의 평안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불행히도 이 아픈 사회의 드러난 환자였고, 드러나지 않은 채 앓고 있는 이웃들이 훨씬 더 많으며, 정신질환 당사자의 고통과 갈등을 함께 겪어야 하는 가족의 수를 합하면,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게 규모가 커진다. 우리 주위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의 예비자가 될 사람들이 늘어나 있는 것이다.

폭력의 배후에 분노가 있고

지금까지 국내외 많은 연구가 ‘폭력’과 공격성은 분노 · 우울 · 불안 등의 부정적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혀왔다. 우울이나 불안은 일찍이 아동 · 청소년기부터 부모와의 관계 · 학업 · 성적 · 또래와의 관계 · 가정형편 · 외모 등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때 생겨나고, 성인기까지 이어지면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장애요인이 된다. 생활사건에서 일어난 불만이나 분노감을 적절하게 표출하지 못하고 부인하거나 억제하면서 스스로에게 ‘내재화’하는 사람들의 우울과 불안 · 절망감 수준이, 분노를 밖으로 드러내 ‘외현화’하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러한 우울은 생활의 흥미나 즐거움을 상실케 할 뿐만 아니라 수면장애 · 정신성 운동장애 · 불안장애 · 신체화 증상 · 부정적 자동사고 · 자살사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증상으로 나타난다. 분노와 우울 등이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으로 확산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에서 그에 대처하는 행동이 이성적 · 합리적이고 억제나 회피를 하지 않을수록 주관적 안녕감이 증가된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반면에, 분노감의 부적절한 표출과 과도한 억제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각종 성격장애 · 스트레스 장애 · 간헐적 폭발성 장애 · 품행장애 · 자살 위험성 등의 심리적 장애는 물론이고, 알코올 관련 문제 · 심장혈관계 및 소화계 질환 · 섭식장애 등의 신체적 질환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필자가 앞서 건강보험공단의 진료현황을 굳이 소개한 것은, 보다시피 정신질환 계통 이외에도 각종 만성질환자가 늘고 있는 대한민국의 병든 모습을 돌아보는 의도뿐만 아니라, 신체질환과 정신질환의 발병요인에 분노 등의 부정적 정서가 깊이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리 내적으로 분노가 일어나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활 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상황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동적 인지 과정이 먼저 생긴다. 그 순간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존중을 받지 못한다거나, 평소 상대방과 나누어 오던 신뢰를 배반당하고 실망했다는 등으로 스스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 심리적 불편감[일차적 분노사고]이 발생한다. 이어서 생각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불쾌감을 어떻게 반영 · 대처할 것인지로 옮겨가는데 그것을 이차적 분노사고라 부르고, 거기에는 해당 타인에 대한 비난과 보복 · 공격성 · 무력감 · 분노 통제 · 건설적 대처 등이 관련된 인지와 정서가 수반된다.

자신에게 발생한 상황을 주관적으로 평가하고 반영하는 일차적 자동사고는, ‘자동사고(automatic thinking)’라는 말 그대로 반사적 ·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라서 흔히 인지적 왜곡이나 오류가 생기기 쉽다. 왜곡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일상(日常)으로 속하고 경험하는 모든 관계에서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고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적지 않음을 기억한다면, 인지오류의 보편성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인지왜곡의 정도가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더 나가서 적대적인 신념으로 심화되어 버릴 경우이다. 또, 누군가 그릇된 생각을 가진 채 잠자코 있을 때는 그 생각을 바로잡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왜곡된 생각이 역기능적인 행동전략을 선택했을 때는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해진다.

잠깐, 우리의 자동사고들을 기억해보자. 지나가던 사람이 어쩌다 나를 쳐다볼 때의 순간.

A. ‘왜 쳐다볼까?’ ‘뭐 묻었나, 내 옷차림이 오늘 이상한가?’ ‘옷차림이 이상하다 해도 왜 지가 나를 쳐다보는데?’ ‘비싼 옷 입지 않아서 나를 깔보는 건가?’ ‘맞다, 깔보듯이 쳐다봤어’ ‘에이 재수 없이 가다가 넘어져 버려라’ ‘담에 또 만나면 그때는 내가 혼내줘야지’……

B. ‘괜히 나를 보네’ ‘내게 관심이 있는가?’ ‘내 모습이 멋진가?’ ‘전부터 나를 보고 쫓아다닌 건 아닐까?’ ‘좋은 표정으로 답해줄 걸’ ‘담에 또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하지’……

이렇게 연속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들이 곧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과연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옳았는지를 장담할 수 없는데도 생각은 멀리까지 전개될 뿐만 아니라, 혹은 즉각적으로 후속 행동을 취해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남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거나 스스로 자신을 쓸모없다고 보는 부정적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된 사람들이 그 신념에 대한 반응 행동 역시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불행한 사건사고의 주인공이 된다.

분노는 구조적 절망에서 일어나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고, 그러면서 분노하게 되는 역기능적 사고 과정이 어쩌다 우리에게 생겨나는가. 분노는 우리 각자의 안살림과 총체적 바깥살림의 상호관계에서 희망이 줄고, 대책 없는 절망이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구조 아래 일어난다. 장차 자신이 바라는 결과가 생기기는커녕 불만스러운 결과가 생겨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개선해볼 가망도 기대심리도 없는 무망감(hopelessness)이야말로 사람들을 우울증과 자살사고로 이끈다. 예컨대, 경제적 스트레스 수준이 높을수록 취업 무망감은 증가하고, 취업 무망감이 증가할수록 신체화 · 불안 · 적대감 등 심리적 장애 증상들이 증가하고, 이같이 지속적인 무망감은 사회생활이나 개인의 생존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가정생활의 구조를 돌아보자. 한국의 아동 · 청소년기를 연구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부모의 양육 태도가 자녀에게 우울과 분노를 일으키고 나아가 폭력적 행동으로 반응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 있다. 즉, 부모와 정서적으로 좋은 애착 관계나 열린 대화의 경험, 수용적인 태도 등은 자녀의 외현적 공격성을 낮추는 요인이 되고, 부모의 처벌과 학대 혹은 부모끼리의 공격적 행동에 노출되는 것은 자녀의 불안과 공격성이 높아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부모로부터 심리적 통제를 많이 겪은 자녀일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공격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부모의 과잉보호야말로 자녀에 대한 심리적 · 물리적 통제이고, 자녀로서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다는 무망감과 일탈행동을 부추기는 부정적 양육 태도라고 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사회적 근심거리가 된 청소년기 학교폭력과 마찬가지로, 근래의 연인 사이 폭력 문제도 ‘분노’와의 연관성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 폭력의 가해자는 대개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서 수용적으로 양육된 경험이 부족하고, 부모끼리의 갈등이나 가정폭력 등에 직접 노출되면서 마음에 내재된 특성분노(trait anger)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비록 연인이 생겨 데이트를 하더라도, 상대방을 통제 · 조종하려 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그런 특성분노의 수준으로 폭력의 예측변수를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13년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가정폭력 실태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폭력을 당한 경험이 응답자의 57.6%, 부모끼리의 언어폭력을 목격한 경험은 40.5%, 부모끼리의 신체폭력을 목격한 경험은 18.5%로 나타났다. 지난 1년 중 응답자가 18세 미만의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46.1%, 응답자의 배우자가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31.3%이며, 19세~65세 미만의 기혼남녀가 지난 1년 중 부부간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45.5%라고 응답하였다. 비록 5,000가구를 대상으로 한 표본조사의 결과이긴 하지만, 아직도 가정 내에서의 폭력성향이 간과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이 같은 가족생활 관계의 속사정을 안다면, 한 사람의 폭력이나 비행문제가 더 이상 그 개인만의 책임이 아닐 수 있음을 우선 깨닫게 된다. 가족이라는 조직체계에서 누적된 상호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족 성원 모두의 심리적 · 사회적 건강성을 어떻게 담보 혹은 회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가족 문제가 세대를 이어 전수된다고 보는 가족치료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현재 한국사회의 높은 이혼율과 1인 가구(총가구 대비, 2010년 24%/ 2015년 27% 추정)가 늘어가는 가족구조의 특성을 볼 때, 비록 혈연이라도 공동체적 협력은 점점 줄어들고 자기 본위의 이기적 개체로 변종(變種)하고 인간으로서는 자기소외를 시키는 결과가 되고 있다.

오랜 세월 인간에게 가족공동체란 무조건적으로 보호와 안전을 보장할 것 같은 삶의 터전이었으나, 오늘날 한국의 가정은 그 안에서부터 경쟁에 내몰리고 평가받고 때로는 처벌도 있는, 조건부 결사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가족원으로서 나이도 역할도 상관없이 대결하고 서로를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 편안치 못한 가정으로부터 바깥사회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모습은, 마치 든든한 울타리를 잃고 바람에 들썩이는 낡은 집과 위축된 사람의 그림자와 같을 것이다. 인간적인 삶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면 이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생활 환경의 구조를 보자. 흔히들 우리 사회가 불안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입증하는 객관적 지표들 가운데 사회건강 차원을 앞서 살펴보았다. 이 사회가 집단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건강한 상태인지를 통계치 만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수시로 터지는 사건사고들을 통해서 감각적으로 사회불안의 위험 수준에 있음은 이미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사회불안이란 개인 차원의 불안이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불안으로 사회구성원들의 심리적 적응성에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힘을 가진다.

사회불안의 수준이 높을수록 사회구성원인 개개인의 걱정 증상과 신경증 경향성이 커지고, 삶의 만족도는 저하되며 부정적인 심리상태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구성원들의 심리적 적응도란 그 사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성’ 불안의 수준이나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반응성’ 불안의 수준에 깊은 상관이 있고, 그에 따라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걱정 증상이 커지거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심리적 안녕감이 커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특히 삶의 만족도는 사회 전반의 공정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지각에 영향을 받으며, ‘우리 사회에 규칙이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와 같은 공정성 불안과, ‘이 사회에서 앞으로 삶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고 느끼는 미래 불안의 수준이 주요한 변수가 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사회는 구조적으로 그 구성원들에게 집단규범과 가치를 내재화하도록 요구하는데, 요구된 사회규범의 내재화[사회화]가 실패할 때 사회적 ‘긴장’이 일어난다. 긴장을 유발하는 요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구성원으로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가 힘들 것으로 예상될 때[열망과 기대의 격차], 원하는 목표를 실제로 달성하지 못했을 때[기대와 성취의 격차], 그 결과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공정한 결과와 실제 결과의 격차], 소위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목표달성에 실패한 것으로 보며 긴장이 생겨난다. 또한, 자신에게 긍정적 가치를 지닌 대상과의 관계가 소멸되거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자극이 생겨날 때도 긴장이 유발된다. 이런 긴장이 일상생활에서 지속될 때 극단적인 일탈 행위로서 자살을 택하기도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소위 ‘일반긴장이론(general strain theory)’이라고 부르는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더 좋은 학교와 더 좋은 성적을 목표로 하며 학령기 학업성취에 대한 가족적 · 사회적 기대와의 격차로 인해서 팽팽한 긴장이 유발되고 있다. 성년이 되어서도 스펙 · 학력 · 취업 역량 · 소득 · 소비수준 등에서 열망과 기대의 격차가 있고,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는 탓에 공정한 결과와 실제 결과의 격차로 인한 긴장도 유발되고 있다. 여러 국면에서 기대와 성취의 격차를 느끼는 관계로, 누군가는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고, 그 속에서 극심한 긴장을 견디지 못하여 분노와 공격성을 표출하기 위한 비행과 일탈을 시도하는 것이다.

열망과 성취 사이에서 긴장이 지속되면 매우 피로해진다. 오늘의 사회는 자유롭게 무엇이든 바랄 수 있다고 노래하고, 부모는 자녀에게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IT 세상에서 온갖 정보가 흘러넘치고, 그야말로 무한의 자유와 가능성을 약속받은 새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그러나 “세계의 과잉 긍정성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고, 새로운 폭력은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우울증 ·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을 일으키며 시스템적으로 내재하는 폭력이 된다.”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온갖 자유의 구호도 결국 알고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종전의 규율과 통제라는 패러다임에서 ‘성과’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 패러다임으로 면모를 바꾸었을 뿐이다. 그렇게 성과지향의 사회에서는 성과를 향한 압박이 구성원들에게 탈진과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개인의 탄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하는 인간을 반영한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목표는 자기착취로까지 이어지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고,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자체 내에서 폭력으로 돌변하는 역설적 자유의 병리”현상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에 정신질환이 만연하는 까닭을 알게 된다.

절망을 넘어 불교계가 할 일은

우리 사회가 크게 병들고 사회 성원들이 이렇게 탈진하여 분노와 폭력을 겪고 있는데, 불교계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성스러운 진리로 가르치는 불교계가 사회적으로 차고 넘치는 고통을 앞장서서 파악하고 고통의 해소 방안도 이미 궁리했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오히려 대중의 고통 자체에 둔감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제라도 우리 사회에 희망의 씨를 심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고통을 앓고 있는 개개인들을 미시적으로 살필 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지역사회 이웃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넓혀 지속적으로 보살펴야 한다. 모든 상황은 하나의 생태계처럼 상의상관(相依相關)하는 연기법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각 개인을 상대하는 방안이다. 첫째, 우리가 과잉활동성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자폐적 성과 기계”와 같은 태도를 버리게 하고, 수시로 평온을 유지하며 돌이켜 생각하는 힘을 회복하게 할 필요가 있다. 성실하라 · 성공하라 · 끊임없이 성취하라는 강박적 생활목표를 세우지 말도록, 그 대신 천천히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도록, 습관적으로 분주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본연의 무위(無爲)와 공(空)의 법문을 깨우치도록 사찰의 평정한 공간을 사람들에게 더 활짝 개방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인생살이에는 ‘이익 · 손실 · 명성 · 악평 · 칭송 · 비난 · 즐거움 · 괴로움’ 등이 당연히 생긴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는 이득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다. 이익 · 명성 · 칭송 · 즐거움에는 순응하고, 손실 · 악평 · 비난 · 괴로움에는 적대한다. 이렇게 순응함과 적대감을 가져서 생 · 노 · 병 · 사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에서 해탈하지 못한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명심하고, 인생사 부침(浮沈)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익 · 손실 · 명성 · 악평 · 칭송 · 비난 · 즐거움 · 괴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얽매이게 된다는 것을 철저히 알게 한다.

셋째, 세상일의 불편과 적대적인 경험에 사로잡혀 분노가 일어날 때 신속히 다스릴 수 있도록, 잘 알려진 자애명상을 누구라도 어디서든지 실천할 수 있도록 널리 가르친다. “모든 존재들이 안락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는 문구를 자애심으로 반복하고, 자애심을 일으키는 순서는 자기 자신을 시작으로 해서 고맙거나 존경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중립적인 사람, 싫어하는 사람으로 넓혀나가는 원리가 간단하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가족을 상대하는 방안이다. 첫째,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녀에게 가르쳐온 이기적 가족주의를 벗어나게 하며, 자녀를 과잉보호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발달단계를 존중하며 느긋이 성장을 기다리는 부모가 되게 한다. 가정은 인생사 실패와 성공의 심판장이 아니라, 서로 간에 무조건적인 돌봄의 보루(堡壘)이며, 간혹 세상일에 실패하는 가족원이 생기더라도 끝까지 신뢰할 만한 지지체계가 되어야 한다.

둘째, 피로한 노동과잉의 시대에 가족들이 함께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은 곳에서 가족 단위 휴식과 수양 프로그램을 더욱 많이 열어주어야 한다. 아울러 가족 경영에 유익하고 가족 간의 우애와 소통을 증진하기 위한 평생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셋째, 늘어나는 1인 가구의 고독과 소외에 부응하고, 특히 노년세대와 청년세대의 미래 불안에 대처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하고 전문적인 서비스들을 불교계가 개발 · 지원을 해야 한다. 넷째, 모든 가족이 제 가족만을 축원하는 이기적 신행문화가 바뀌고, 이웃 가족의 안녕도 기원하는 대승적 생활태도를 솔선수범 실천하게 한다.

끝으로 국가사회를 상대하는 방안이다. 첫째, 하루빨리 우리 사회가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공동체가 되어서 구성원들의 긴장과 분노가 줄어들 수 있도록, 책임감 있게 감시하고 방향을 선도하는 압력단체의 역할이 불교계에 특화되어야 한다. 둘째, 사회불안의 현 수준을 직시하고 불교계의 모든 축원은 사회불안을 낮추어 공동체적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회향되도록 한다. 셋째, 사회문제나 사회정책에 관련하여 정부와 협력하는 거버넌스 파트너가 되어야 할 때, 전문적이고 유능한 역할이 되도록 사회현안에 깊은 통찰력과 효과적인 실천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넷째, 위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계나 전문기관들과 연대하고 협력함으로써 집행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

 

이혜숙 / 금강대 응용불교학과 객원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