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1. 들어가는 말

선 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 수행은 기사구명(己事究明) 즉 우리 자신의 일을 궁극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일이란 삶의 근본 문제인 태어나고 죽는 근원을 밝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궁극의 일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에 자비로 회향될 수밖에 없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의 근원을 깨닫는 까닭에 구경각이라고 한다[又以覺心源故 名究竟覺].”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삶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가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삶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연기의 진리를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평온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기사구명 하지 못한 삶의 모습은 자신과 남을 생명의 장 밖으로 소외시켜 끊임없는 괴로움의 고리를 만든다.

예를 들면, 많은 나라가 군비 경쟁에 치달려 각종 복지나 구호 사업에 쓰일 수 있는 소중한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서 발표한 2015년 세계 10대 군사비의 총액이 1조 6,760억 달러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우리 마음의 독이 사회와 국가적인 재앙으로 반영되어가는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마음의 근원을 자각하지 못한 측면이 나타난 것이다.

선 수행은 바로 우리 마음의 탐진치를 지혜와 자비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평범한 중생이 부처가 되고 그 부처는 다시 중생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모습은 단순한 세속화도 아니고 욕망의 추구도 아닌 자비의 실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발보리심의 방편적인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선 수행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을 ‘발심한 자의 분심’과 ‘깨달은 자의 자비’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발심한 자의 분심’에서는 특히 간화선 수행의 삼요(三要)로 강조되고 있는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가운데서 대분지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대분지는 분발심(憤發心) 혹은 분심(憤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봉원묘의 《선요(禪要)》를 중심으로 그것이 생사심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발보리심으로 나아가는지 논의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깨달은 자의 자비’에서는 이러한 분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깨달음이 어떠한 모습으로 선사들에게 보였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선사들의 자비는 분심에서 촉발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선사들의 깊은 평정심이 시절인연에 따라서 다양한 근기와 상황에 맞는 방편으로 나타난 것이다.

2. 발심(發心)한 사람의 분심

선 수행에서 발심(發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선을 통하여 진리를 증득하려고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수행을 하는 개인에 따라서 수만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두 글자로 압축하면 ‘생사(生死)’로 표현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를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근원적인 고통으로 보았다. 즉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실존적인 고통 때문이다. 만약 실존적인 고통이 없다면 아무도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태어나기 전의 삶을 단정할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대하여 명확히 말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펼쳐지는 삶을 아무렇게나 허비할 수 없다. 생사의 문제를 고민했던 니체도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자기변형을 강조하고 영원회귀(永遠回歸)를 말하였다. 영원히 반복되는 이 순간을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로 만드는 ‘초인’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자리이타의 모습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고 철학적 관념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선 수행은 발심의 문제부터 철저하게 타자(他者)가 고민된다. 생사의 문제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자각에서 출발하나 그 자각이 추구되는 보편적인 장면은 삶 속의 관계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한 수행자가 생사의 문제로 인하여 발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발심이 선의 실천이라는 역사적인 모습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주관적인 체험으로 그치고 타자의 역동에 참여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래서 선 수행자의 생사에 대한 고민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개인을 넘어선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생사’라는 삶 속에서 함께하기 때문이고, 그러한 생사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얻는 것 역시 ‘스승’ ‘수행법’ ‘불교’ 등의 전통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 수행자의 발심은 발보리심이 되는 것이다.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가 강조하는 서원에는 이러한 발심과 보리심이 하나로 결합되고 있다. 대혜는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해 선지식을 만나 뵙기를
선지식의 말 한마디 아래서 단숨에 나고 죽음을 잊어버려
더 이상 위가 없는 비할 바 없이 올바른 보리를 밝혀내기를
그리하여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게 되기를

여기서 우리는 발심이 선지식을 만나고, 보리를 밝히고,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역사적 사건에 동참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 수행자의 발심에는 개인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뿐 아니라 스승, 부처님, 중생 등에 대한 타자를 향한 열림도 함께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심 즉 분발심은 공분(公憤)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확대되고 확장될 수 있다. 그러면 《선요》에서 말하는 간화삼요 가운데 분심의 내용을 살펴보자.

만일 착실히 참선함을 말하자면 반드시 세 가지 중요한 것을 구족해야 한다. 첫째 중요한 것은 커다란 신근이 있어야 하니 이 일은 하나의 수미산을 의지함과 같은 줄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둘째 중요한 것은 크게 분한 생각이 있어야 하나니,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났을 때 당장 한칼에 두 동강을 내려는 것과 같다. 셋째 중요한 것은 커다란 의정이 있어야 하니 마치 어두운 곳에서 한 가지 중대한 일을 하였는데 곧 드러나려고 하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에 있는 것과 같다. 십이시 가운데에 과연 이 세 가지 중요함만을 갖출 수 있다면 (……) 그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마치 다리 부러진 솥이 마침내 쓰지 못할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

고봉은 분심을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났을 때 당장 한칼에 두 동강 내려는 마음”으로 묘사한다. 그러면 이러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이러한 마음에 대하여 고봉은 《선요》에서 두 가지 측면으로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생사심이고 둘째는 간절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그가 직접적인 수행을 통하여 얻은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생사심에 대하여 살펴보자. 고봉은 〈앙산 노화상께 사법의 의심함을 풀어 주는 글〉에서 그의 생생한 참선 경험을 들려준다. 그는 “15세에 출가하여 16세에 스님이 되었으며 18세에 불경을 배워 20세에 옷을 바꿔 입고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가 3년 동안 죽음을 한정하고 참선을 배우려고 단교 화상에게 물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생사에 대한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만약 3년 안에 깨침을 얻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고봉은 소참에서 “생사의 일이 크고 무상함이 빠르다. 태어났으나 어디서 온 줄 모르는 것을 태어남의 큰일이라 하고, 죽어서 가되 어디로 가는 줄 모르는 것을 죽음의 큰일이라고 한다. 다만 이 생사의 일대사가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목구멍이며 성불하고 조사가 되는 기관이다. (……) 그대들이 발심하여 출가하고 발심하여 행각하며, 발심하여 고봉을 와서 보고 낮으로 세 차례씩 밤으로 세 차례씩 눈썹을 겨루는 것도 이 일대사의 본원 때문이다. 사생 육도 중생들이 천겁, 만겁에 머리를 바꾸고 얼굴을 바꿔가면서 쓰라린 고통을 받는 것도 이 일대사의 본원을 미혹했기 때문이다. (……) 내지 위로부터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중생들을 제도한 것이 모두 일대사의 본원을 깨달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불법의 근원은 마음의 본원을 깨치는 일이고 이 일은 다름 아닌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중생이 되어 끊임없는 고통에서 윤회하는 것도 이 생사 때문이기에 생사의 본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생사에 대한 분심이 개인을 넘어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불교적 수행으로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봉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 제도하는 근본 기치도 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발심의 시작과 끝이 철저하게 ‘이생접물(利生接物)’ 하지 않으면 그 깊이나 당위성이 확보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발심은 철저하게 사분(私憤)이 아니라 공분(公憤)이다.

분심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간절함이다. 고봉은 “만일 이 일을 말하자면 다만 본인이 적실히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간절한 마음이 있기만 하면 참 의심이 곧 생길 것이다. 참 의심이 생길 때 점차(漸次)에 속하지 않고 당장에 번뇌가 끊어지고 혼침과 산란이 모두 제거되어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지게 될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간절한 마음의 상태를 “천 길 우물에 빠졌을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으로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운 스님은 《참선요지》에서 생사심에 대하여 본인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들려준다. 청나라 경자년(庚子年, 1900)에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 왔을 때 광서 황제(光西 皇帝), 자희 태후(慈禧 太后) 일행과 함께 피난을 갔을 때 얼마 동안은 걸어서 섬서(陝西) 방면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날마다 수십 리 길을 걸었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 노상에서 한 노인이 고구마 줄기를 광서 황제에게 좀 올렸습니다. 그는 다 먹고 나서 노인에게 “이것이 뭔데 이렇게 맛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 어째서 그와 같이 놓아 버릴 수 있었습니까? 연합군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니 그가 살겠다는 일념으로 도망치려 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나중에 강화 협상이 잘 되어 어가(御駕)가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자 다시 거드름도 피우게 되었고, 위풍도 과시하게 되었습니다. (……) 어째서 그가 이제는 놓아 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연합군이 그의 목숨을 노리지 않게 되자 살기 위해 도망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가 늘 살기 위해 도망칠 때의 마음가짐으로 도를 닦았다면 무엇을 이루지 못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그런 장원심이 없었기 때문에 순경(順境)을 만나자 예전의 태도가 다시 싹튼 것입니다.

상황이 안 좋아서 날마다 수십 리 길을 걸었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을 때 노상에서 만난 한 노인이 고구마 줄기를 광서 황제에게 올렸고 황제는 이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으나,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게 되자 조금이라도 맛없는 음식은 아예 입에 댈 수도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생사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일도 받아들이고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이러한 생사에 대한 분발심과 간절함으로 도를 닦으면 반드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할 때 생사에 대한 자각은 우리 마음의 거친 번뇌를 쉬게 할 뿐 아니라 수행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생사에 대한 자각은 우리 인간이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부정과 두려움을 통하여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해 간다고 주장했던 미국의 인류학자 어네스트 베커의 관점과 연결될 수 있다. 그는 키르케고르(S. Kierkegaard)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다음처럼 말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실재, 새로운 가능성에 도달하는 것은 실존의 공포에 대한 걱정에 정면으로 맞서 자아를 파괴함으로써 가능하다. 자아는 자아를 초월하기 위해 파괴되어야 하고 무(nothingness)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아는 그 유한성을 극복해야 하고, 유한성에 대해 탐구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알기 위해 ‘죽어야’ 한다.

무엇에 이르기 위해서인가? 키르케고르가 대답하는바 그것은 무한성, 절대적인 초월, 유한한 피조물을 만드는 궁극적인 창조력에 이르는 것이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생사에 대한 자각 자체가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실존의 공포에 대한 도전이자 극복이며 우리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생사와 열반은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간화선 수행에서 생사심에 대한 자각은 결국 화두에 대한 의정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신심, 분심, 의심은 한 솥의 세 다리처럼 서로가 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상호보완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심은 분심과 의심의 토대가 되고, 분심은 신심과 의심으로 나아가게 하며, 의심은 신심과 분심을 촉발시킨다. 이 셋의 관계는 순차적이며 병렬적인 구조가 아니라 다른 특성들을 지지해주는 동시에 다른 특성들에 의하여 힘을 받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세 가지 요소는 선 수행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에 분심은 신심과 의심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신심이 의심으로 촉발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간화선 수행에서 분심은 생사의 고해를 건너겠다는 커다란 원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행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생사심과 간절함을 토대로 자칫하면 수행자가 개인적 문제의 해결과 주관적 착각에 빠질 수 있는 함정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분심은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는 서원이자 자비심의 표현인 것이다. 왜 우리는 생사에서 유전하는가? 태어남은 무엇이고 죽음은 또 무엇인가? 이러한 간절한 의문이 없으면 수행은 시작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이 지지를 받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분심이란 우리가 처한 실존적 상황에 대한 직면을 통한 자각이며 공감이며 연민이다.

3. 깨달은 사람의 자비

선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비록 일상을 초월한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 구체적인 일상과 실제적인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선사들이 보여주는 수많은 기행과 기언, 논리나 사변을 벗어난 언어와 행위는 세간을 벗어난 초월의 몸짓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현재를 단순하게 살라는 외침이며 경보이다. 비록 선의 언어가 때로는 과격하고, 파격적이며 그것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상식을 초월하는 것 같으나 모두 우리 마음의 활발발(活鱍鱍)함을 일깨우기 위한 방편이다. 따라서 선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었던 편견과 관념을 놓아 버리고 낯설게 그들의 언행과 마주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우리의 지식과 사량 그리고 개념의 틀을 부여하는 순간 선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릴 것이다.

본 장에서는 선이 가진 위와 같은 특징을 염두에 두고 선사들의 자비에 대하여 논의해 볼 것이다. 선사들의 자비는 깨달음을 통한 깊은 평정심에 기초하고 있으나 그것이 드러나는 측면에서는 맑은 하늘에 별안간 몰아치는 천둥같이 때로는 과격하고 격정적이며 거침없다. 그러나 우리가 선사들의 언동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이면 순식간에 우리를 쓰러뜨려 버린다. 때로는 몽둥이로 혹은 거친 고함이나 발길질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린다. 《무문관(無門關)》 제35칙의 ‘동산삼돈(洞山三頓)’에는 위와 같은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다.

동산이 운문에게 참문하러 왔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동산은 “사도(渣渡)에서 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운문이 “올여름은 어디에서 지냈는가?”라고 물었다. 동산은 “호남(湖南)의 보자(報慈)에서 지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운문이 “언제 그곳을 떠났지?”라고 묻자, 동산은 “8월 25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은 “세 차례 후려쳐야겠구나.”라고 말했다. 동산은 다음 날 다시 운문의 처소로 올라와 물었다. “어제는 스님께서 세 차례 몽둥이질을 하셨으나 허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운문은 “이 밥통 같은 놈아! 강서로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닌 것이냐!” 이때 동산은 크게 깨달았다.

논자는 선의 자비가 가진 특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는 남전참묘(南泉斬猫) 공안을 중심으로 살리는 자비와 죽이는 자비가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통합되고 있는지 사중득활(死中得活), 활중득사(活中得死)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임제가 황벽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게 된 인연인 ‘삼도발문삼도피타(三度發問三度被打)’를 중심으로 진정한 자비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논의하여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을 통하여 선사들의 자비가 긍정적인 분노인 분심에서 촉발된 자비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남전참묘 공안을 살펴보자. 남전참묘 공안은 《벽암록》 제63칙에 소개되어 있으며 제64칙은 ‘조주두대초혜(趙州頭戴草鞋)’와 연속된 한 편의 스토리로 이해할 수 있다. 《무문관》 제14칙과 《종용록(從容錄)》 제8칙에서는 두 이야기가 하나로 엮여서 소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둘을 하나의 공안으로 볼 때는 조주의 역할이 강조된다고 할 수 있으며, 나누어 볼 때는 남전과 조주를 각각 강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벽암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루는 동서 양편 승당에서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자, 남전 스님이 이를 보고서 마침내 고양이를 잡으며 말하였다. “말할 수 있다면 베지 않겠다.” 대중들이 대답이 없자, 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두 동강으로 베어버렸다.

남전 스님이 다시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 조주 스님에게 묻자, 조주 스님은 문득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전 스님은 말하였다.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이 이야기의 발단은 한 마리 고양이를 두고 동당과 서당의 승려들이 다투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 마리 고양이를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는 모습을 보더라도 양당의 스님들은 수행에 매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출가해서는 고양이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다투는 승려들에게 남전은 깊은 연민과 구제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탐욕과 분별을 버리지 못한 승려들에 대한 분심은 그들을 깨우쳐주기 위한 일종의 긍정적 분노인 자비로 표출되었다. 남전은 고양이를 매개로 승려들에게 깨우침의 기회를 준 것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깨우친 자가 있다면 한마디 외쳐보라고. 이것은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친 자만이 모든 분별과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간절한 선언이면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자비심을 대중에게 시험해 본 것이다. 진정으로 한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자비로운 자가 있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한마디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양이는 보통의 중생이 갖는 집착심을 의미하며, 양당의 승려들은 집착심에서 벗어나 이익중생 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집착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 출가인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남전은 바로 한 생명을 두고 승려들의 자비심을 시험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남전의 언행은 자비란 관념적인 해석이나 이해가 아니라 언제든지 실천해서 보여야 한다는 절박함과 이타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전의 퍼포먼스(Performance)는 양당의 승려들을 깨우쳐주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그는 진정한 자비가 무엇인지 그리고 깨달음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고양이는 두 동강 났으나 양당의 승려들은 남전의 자비심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한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며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는 소중한 사명을 띠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양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난 것이다. 사중득활(死中得活)!

《벽암록》 제64칙 ‘조주두대초혜(趙州頭戴草鞋)’ 공안은 남전이 조주에게 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주에게 어떻게 했을 것인지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자 조주는 문득 짚신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문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러자 남전은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한다. 남전의 위의 말이 조주에 대한 칭찬인지 아니면 비아냥거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주는 자신의 본래면목에서 터져 나오는 한마디를 뱉은 것이다. 발에 신어야 할 신발을 머리에 인 것은 스승 남전을 향한 준엄한 일격(一擊)일 수도 있고 고양이를 살리겠다는 자비의 몸부림일 수도 있으나 결국 고양이는 남전에 의해 죽었다. 

조주가 고양이를 살렸다면 양당의 승려들에게 고양이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본인들이 고양이를 구제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당시의 체험은 이차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렸겠으나 결과적으로 조주는 그 자리에 없었고 결국 고양이는 죽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조주는 고양이를 죽였다. 활중득사(活中得死)!

엄밀히 생각해보면 고양이의 생명은 고양이의 것이다. 아무도 고양이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러나 남전은 그 스스로가 승려들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커다란 짐을 짊어졌다. 그러나 깨달음은 승려들 각자가 얻어야 하는 것으로 남전의 몫은 아니다. 남전은 생명의 소중함을 사이에 두고 승려들의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남전은 고양이를 살렸다. 그리고 뒤늦게 대답한 조주는 결국 고양이를 죽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위의 공안이 생명에 대한 절박함과 자비의 실천 그리고 시절인연의 소중함을 보여준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남전과 조주 모두 커다란 자비심이 있었다. 그들의 자비심은 승려들의 분별심을 일깨우고 탐욕을 버리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선사들의 자비가 갖는 두 번째 특징은 자비가 지닌 의타성(依他性)이다. 선사가 제자들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방(棒)과 할(喝)을 보여준다고 하여도 실질적인 주체는 선사가 아니라 제자들 각자이다. 제자에게 그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그때의 방, 할은 자비가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의 자비는 철저하게 타자에 의존된다. 임제가 황벽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게 된 인연인 ‘삼도발문삼도피타(三度發問三度被打)’에는 이러한 의타성이 잘 나타나 있다. 임제는 《임제록(臨濟錄)》에서 다음과 같이 본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임제가 말하기를, “함께 도를 닦는 벗들이여, 불법의 진리를 구하는 이는 신명(身命)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십 년 전, 황벽 스님이 있는 곳에서 세 번 불법의 분명한 대의(大義)를 물었으나 세 번 다 얻어맞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부드러운 쑥대로 건드리는 것 같았다. 지금 다시 한 방망이 얻어맞고 싶구나. 누가 나를 위하여 때려주지 않겠느냐?” 이때 한 승려가 대중 가운데서 나와, “제가 때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임제가 방망이를 집어서 승려에게 내주자 승이 받아 쥐려는 찰나 바로 때렸다.

임제의 체험에는 스승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수용성이 보이고 있다. 거친 방망이를 “부드러운 쑥대로 건드리는 것 같았다”라는 고백은 미사여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진실한 인간이 자신을 완성한 가장 순수한 스승에게 모든 것을 내던졌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어루만짐의 느낌인 것이다. 황벽이 임제를 격발시키기 위하여 나타내었던 분심은 임제에게는 봄바람보다도 부드러운 일깨움이었다. 그것은 마치 아침에 우리의 깊은 잠을 깨우는 새소리처럼 임제를 흔들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임제의 경험은 선사의 자비가 가진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자비의 경험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주체는 선사가 아니라 제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는 제자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열림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제자는 그러한 메시지를 통하여 깨어나는 것이다. 만약 제자가 선사의 언행을 부드러운 쑥대로 건드는 것같이 경험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 혹은 일방적 처사가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선사의 자질이나 깨달음의 경험이 제자를 지도할 만큼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선사의 자비가 타자에 의존된다는 것은 선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자신에 대해 고정된 상을 갖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선사는 매 순간 자신을 깨달음의 대해(大海)에 열어놓고 제자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무문관》 제3칙의 ‘구지수지(俱胝竪指)’ 공안도 눈여겨볼 만하다. 구지 화상은 어떠한 질문을 받더라도 단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고 한다. 구지가 살던 절에 동자 하나가 홀로 남아 있게 되었을 때 손님이 와서 법을 묻자 동자도 구지를 본떠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은 돌아와 정황을 파악하고 동자를 불러서 날카로운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동자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밖으로 나가는데, 구지가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구지는 바로 손가락을 세웠고, 동자는 그 자리에서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지의 손가락은 구지의 것이고 동자의 손가락은 동자의 것이다. 무문도 이 공안에 대하여 해석했던 것처럼 깨달음은 손가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지는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서 자비를 보여주었다. 깨달음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냉혹한 자비를 구지는 동자에게 베풀었고 동자는 깨우침을 얻었다. 만약 동자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구지도 손가락을 잘라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선사들의 자비는 일방적이지 않으며 타자에 의존된다. 선사들의 분심은 깨달음의 등불을 전하려는 그들의 의지와 등불을 전해 받는 수행자들의 각고의 노력에 의해 자비로 완성된다.

 4. 맺는말
 
지금까지 선 수행에서 분심에 대한 측면을 ‘발심한 자의 분심’과 ‘깨달은 자의 자비’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발심한 자의 분심’에서는 고봉원묘의 《선요》에 나타난 간화삼요를 중심으로 분심을 생사심과 간절함의 두 가지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것은 생사에 대한 자각과 간절함이 타자의 구제라는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사건이 되지 않으면 개인적 수행에 매몰되거나 주관적 착각에 빠질 수 있음을 역설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선사들이 선 수행에서 자비심이나 보살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선 수행에서의 분심은 발보리심으로서 사분(私憤)이 아닌 공분(公憤)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깨달은 자의 자비’에서는 《벽암록》에 나타난 남전참묘 공안과 임제가 황벽과 만나 깨달음을 얻게 된 기연인 ‘삼도발문삼도피타(三度發問三度被打)’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남전참묘 공안을 통해서 자비의 두 가지 측면인 사중득활(死中得活), 활중득사(活中得死)가 변증법적으로 통합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선의 자비가 갖는 파격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선사가 제자들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극단적인 방법이나 상식을 초월한 방편을 보이는데 그것은 깊은 자비심을 전제로 한 것이다.

임제가 황벽 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게 된 경험은 선의 자비가 가진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거친 방망이를 부드러운 쑥대로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는 임제의 고백을 통해서 선의 자비가 결코 일방적이지 않으며 반대로 의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의 격외적 가르침이 몰상식하다거나 무자비하다고 이해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선의 자비가 자비심을 느끼는 제자의 경험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함부로 혹은 아무렇게나 남용되어서는 안 되는 측면을 보여준다.

선 수행은 기본적으로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를 중시한다. 이 말은 《열반경》 《능엄경》 등에 나오는 말로 대승불교의 궁극의 지향인 보살도를 의미한다. 《위림선사영산법회록(爲霖禪師靈山法會錄)》에서 위림 선사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진실로 대승심을 발했다면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먼저 다른 사람들을 제도하려고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이익 되게 하는 공덕이 바로 자신을 이익되게 한다.

위림 선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타의 행위가 바로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승심을 발한 보살은 자신과 타자를 이분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단면적으로만 해석하여 스스로의 깨달음보다도 다른 사람들의 해탈을 중시하라는 가치 우위적인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수행자가 대승심을 발했다는 것은 그의 수행이 자신만을 위한 이기성을 탈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의 수행을 위해서 타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이들의 성취를 돕는 것은 곧 나의 성취를 이루는 것이며 나의 성취는 다시 다른 이들에게 회향된다. 선 수행은 바로 이러한 보살심에 기초해 있다. 좌선의 기본 방법과 수행의 원리를 제시한 종색(宗賾)의 〈좌선의(坐禪儀)〉에서도 “대저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먼저 대비심을 일으켜야 하고, 넓은 서원을 발해야 하고, 정미롭게 삼매를 닦고,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서원해야지, 일신을 위해 혼자만을 위한 해탈을 구해서는 안 된다.”로 시작하여 “자리이타하여 함께 정각을 이루자.”로 마치고 있는데 이러한 모든 것은 선 수행의 지향하는 시작과 궁극의 길을 보여준다.

선 수행자에게 분심은 생사심이며 발심이다. 이러한 서원으로 수행을 해나가는 선 수행자는 모든 중생을 돕겠다는 수순한 서원의 힘에 의하여 수행을 성취한다. 그리고 그의 성취는 곧 중생에 대한 자비로 회향된다. 따라서 선 수행에서 분심은 공분(公憤)이며 자비이다. 그리고 자비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며 그들을 돕겠다는 가장 순수한 뜨거움이다. 그러므로 분심은 대승심이다. ■
 

 

오용석 /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동국대 선학과, 동 대학원 선학과 졸업. 중국 남경대학 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임제종 양기파 선자들의 공안 인식〉 〈명상과 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선적 고찰〉 〈간화와 반조에 대한 일고찰〉 〈간화선 위빠사나 논쟁〉 등이 있으며, 저서로 《대혜종고 간화선 연구》 역서로 《깨달음의 실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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