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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의분(義憤)을 어떻게 보았는가 / 허우성
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67호] 2016년 09월 01일 (목) 허우성 woohuh@hanmail.net

 ‐ 달라이 라마에게 묻다

1. 머리말

2천 수백 년 전의 붓다는 의분(義憤)과 그에 따른 폭력이나 살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사명당의 의병(義兵)과 안중근 의사(義士)의 가해 행위는 어떻게 보았을까? 역사에 의병이나 의사의 기록 없는 국가나 민족은 없을 것이지만, 이런 물음은 다루기가 어렵다. 고대 인도에 사명당과 안중근과 비슷한 인물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그들에 대한 붓다의 윤리적인 평가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처라면 스스로 그들의 행위를 평가할 수도 있지만, 우리 가운데 부처는 없다.

필자가 달라이 라마(1935~ )에게 묻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는 우리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고, 그의 조국 티베트가 1950년 중국에 의해 강점된 이래 탄압을 계속해서 받아 오면서 중국 군인과의 전투에서 티베트인들이 많이 죽었으며, 최근 수년 동안 티베트 독립을 외치면서 1백 수십 명이 분신자살했고, 이런 비극적 사건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반응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분이 붓다를 비롯한 자신의 스승들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고, 소년 시절 이래 간디를 영감의 원천으로, 자신을 간디의 추종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와 붓다

1) 아리스토텔레스: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 분노하는 인간)

감정과 인간의 표정을 선구적으로 연구해온 미국의 폴 에크만(Paul Ekman, 1934~ )에 따르면, 누군가가 우리를 신체적으로 해치려고 하거나, 경멸이나 모욕 등을 통해 정서적으로 해치려고 할 때 우리는 보통 분노하게 되는데, 분노하는 표정은 보편적이라고 한다. 분노에 대한 이런 ‘상식적인’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잘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수사학》에서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분노(ὀργή)는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친지들에게 가해진 인지(認知)된 어떤 부당한 모욕(ὀλιγωρία)에 대한 인지된 복수에 대한 욕망이고 그 욕망에는 고통도 수반된다.” 자신이나 자신의 친족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게 되면 복수의 욕망이 생긴다. 그것이 분노라는 것이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화를 낼 때 내는 사람, 그것도 적당하게 내는 사람을 ‘온화한 사람(πραοτης)’이라고 불렀다. 화를 내면서도 이성의 요구를 잘 지키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마땅히 화(ὀργή)를 낼 만한 일에 대해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더 나아가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때, 마땅한 시간 동안 화를 내는 사람은 칭찬을 받는다. ……마땅히 화를 내야 할 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되고, 마땅한 방식으로 화를 낼 줄도, 마땅한 때에 마땅한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낼 줄도 모르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각할 줄도 모르고 고통을 느낄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화를 내지 못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방어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니까. 또 모욕을 당하고도 그냥 참는 것,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당한 모욕을 도외시하는 것은 노예적인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인용에 따르면, 나 자신이나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 자기방어도 하지 못하는 노예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온화한 사람은 마땅한 일, 마땅한 사람, 마땅한 방식, 때, 화를 내는 시간이라는 다섯 기준을 지킨다. 그는 ‘중간의 품성 상태’ 또는 ‘중용의 성격(the middle characteristic)’을 지닌 자로 칭송받는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거나 모욕을 가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분노하라! 하지만 중용을 지키면서.” 이것이 분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침이다. 손병석의 말을 빌리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사람은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분노할 때 분노할 수 있는 호모 이라쿤두스도 되어야 한다.” 분노에 대한 이런 논의는 특정 민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즉 우리 민족이 모욕당하는 경우 우리는 화를 내고 보복해야 한다. 단 중용의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따르면 감정은 신체의 움직임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혼의 모든 상태는 신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여기에는 분노, 온유함, 공포, 용기가 포함되어 있고 기쁨, 사랑, 증오는 말할 것도 없다. 신체는 이들 각각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 공포, 증오심과 같은 감정들은 신체와 연결되어 있어서 감정이 일어나면 신체도 변한다고 한다.

2) 붓다의 분노 비판과 자비명상

분노에 대한 초기불교 경전의 비판은 단호했다. 아마 붓다도 그랬을 것이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으면
마침내 분노(vera)가 가라앉으리라.

이 세상에서 분노는
분노에 의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분노가 아닌 것에 의해서 사라지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

《법구경》 10장 6절에서는 “열반을 얻게 되면 어떤 격분(sāram-bha)도 네 속에 없을 것”이라고 하고, 금생에 아라한이 성취한 열반계(nibbānadhātu)를 “탐욕의 지멸(rāgakkhaya), 증오(dosa)와 미망(moha)의 지멸”이라고 한 곳도 있다.

붓다는 숲 속에서 “분노의 마음(byāpannacitto) 대신에 자비심(慈悲心, mettācitto)이 되어 행한다.”고 하므로(M Ⅰ 18), 그는 열반 이후 스토아 철학자처럼 무정념(ἀπάτεια)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열반을 이룬 세존의 아주 달라진 오온에 대해 경전은 “여래는 색[수, 상 등]의 말로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해탈했다. 그는 바다와 같이 아주 깊고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이제 몸이 아주 달라진 붓다는 분노의 표정마저 짓지 않게, 아니면 짓지 못하게 되었을까?

3. 붓다 대신에 달라이 라마에게 묻다

1) 붓다의 발이 돌 조각에 찔리다

붓다처럼 종종 자비명상을 하는 사람은 호모 이라쿤두스 인간관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분이 돌조각에 발이 찔린 적이 있었다. 상응부경전(SN 4, 13)의 《파편경》에 따르면, 붓다는 발이 돌조각에 찔려서 심한 통증을 느꼈고, 신체적 고통(sārīrikā dukkhā)이 크고, 심하고, 신랄하고, 불쾌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그분은 정념하고 정지(正知)하며 누워 있었다. 그때 악마 파순이 와서 비웃으며 “나태하게 누워 있는가? 시작(詩作)에 빠졌는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은가?” 하고 묻자 붓다는 “나는 누워 있으면서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다(sayām aham sabbabhūānukampī).”라고 말했다.

달라이 라마는 여기에 나오는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 산스크리트 경전 전통 내의 ‘주고받기 명상(Tib. 똥렌, tonglen)’-남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대신 자신의 행복을 준다는 명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비심을 길러서 티베트인들의 자유를 뺏고 그들에게 모욕을 가하는 중국인들에게 거리낌 없이 보낸다고 한다.

최근의 티베트 역사는 비극적이다. 달라이 라마는 1950년부터 1983년까지 감옥과 전투에서 그리고 기아로 12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백수십 명의 티베트인이 독립을 외치며 분신자살한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적이 없다고 하고 “어떤 의미로는 그들은 가장 좋은 우리 스승”이라고 말한다.

그는 베이징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지칭하며, “특히 티베트와 나를 향해서 분노하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자들은, 나의 특별한 기도를 얻습니다.”라고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노관에 비춰보면 달라이 라마는 자기방어도 하지 못하는 노예의 품성을 지닌 사람일까? 아니면 상대가 너무 강해서 화를 낼 수 없는 것일까?

2)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일본의 한국 침략

1950년에 시작된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탄압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탄압 이상으로 무자비해 보인다. 중국은 1950년 10월, 8만 명의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티베트 동부 지역을 침공해왔다. 1950년 11월, 나이 열다섯에 불과한 달라이 라마는 성년식과 함께 연약한 티베트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병력 철수를 협상하기 위해 그해 말 중국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티베트 평화 해방 협정
가보(Ngabo Ngawang Jigme, 1910~2009)가 이끄는 티베트 대표단은 1951년 4월에 베이징에 도착했고, 라싸 침공의 위협 앞에 그해 5월 ‘티베트 평화 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협정의 중국 측 주도자는 마오쩌둥이었다. 1조는 다음과 같다. “티베트인들은 단결해서 제국주의자 침략자 세력을 몰아낼 것이고, 티베트인들은 조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족으로 돌아갈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 내용을 해괴망측하다고 하고, ‘조국에의 복귀’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이는 “후안무치의 극치였다. 티베트는 한 번도 중국의 속국이 된 적이 없었다”고 항변한다. 그는 제2항은 티베트의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조항으로, 제14항은 모든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항으로 보았다.

무자비한 중국 인민해방군
1956~57년과 1958년 캄(Kham)과 암도(Amdo) 지역에서 티베트의 자유투사들과 중국 군인들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잔혹 행위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십자가형, 생체해부, 희생자들의 창자를 들어내거나 손발을 자르는 일은 보통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머리를 베거나 태워 죽이고,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다.

말 뒤에 사람을 매달고 죽을 때까지 달리게 했으며, 거꾸로 매달아 놓거나, 손발을 묶은 채로 얼음물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달라이 라마 만세!’를 외치는 것을 막기 위해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의 혀를 손으로 찢었다.” 당시 저항군에 가담하고 있던 자들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과 처형이 뒤따랐다. 이들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은 승려였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 단순하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체포된 뒤에 자신들의 종교적인 독신서약을 부정하도록 강요당하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도록 강요당하기까지 했다”고 적고 있다. 비구니 승려에 대한 성적 고문도 언급했다. 당시의 중국 군인에게는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측은지심은 아예 없었던 것일까?

문화적 대학살 ‐ 불교문화의 절멸
달라이 라마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티베트의 고유문화 말살 정책이다. 독일 언론인 알트에 따르면, 티베트에는 60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는데, 베이징은 거기에다 2,000만 명의 한족을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에게 한족 이주 정책은 티베트 문화 말살 정책이다. 그는 1987년 9월 미국 국회의사당 연설에서 이른바 ‘5개 평화안’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 조항은 티베트 전체를 평화(아힘사)구역으로 만든다는 것이고, 두 번째 조항이 중국인 이주정책 중지였다. 그는 왜 티베트 문화를 지키려고 했을까? 그는 자서전에서 ‘자비와 용서의 역사서술 원리’로 불릴 만한 생각을 드러낸다.

나의 주된 관심은 티베트라는 국가나 민족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주요 관심은 불교와 논리학과 철학이 어우러진 티베트의 전통입니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 감정을 탈바꿈시키는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티베트의 영적 전통을 보호하는 것은 단지 6백만 티베트인들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인류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형제자매인 중국인들을 위해 필요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문화의 정수를 불교문화 즉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불교문화에 두고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그것도 그 문화를 말살하려는 중국을 위해, 그리고 인류 공동체를 위해서이다. 그에게 불교의 자비는 티베트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는 가치였다.

‘티베트 해방 협정’과 을사조약(제2차 일한협약)과의 유사성
1951년에 서명된 티베트 해방 협정은 내용, 체결 직전의 강압적인 분위기 그리고 체결 직후의 강대국들의 냉담한 반응에 있어서 1905년의 제2차 일한협정으로 불리는 을사조약과 유사하다. 운노 후쿠쥬(海野福壽, 1931~ )는 1905년 11월 초 고종과 이토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대화에서 드러난 이토 히로부미의 태도를 거만, 폭언, 협박, 결례라고 했다. 이런 태도의 배후에는 서울과 인근 지역에 주둔하던 군대가 있었다.

제2차 일한협약의 제1~2조에서 외교권 박탈이 명기되어 있고, 3조는 통감을 두어서 한국을 통치하게 하는 것이다. 5조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달라이 라마의 지위 보장 조항과 닮았다.

1949년 이래 티베트 운명에 대해 냉담한 국제적인 반응 역시 20세기 초 한국 역사와 비슷하다. 1949년 10월 마오가 공산당의 승리를 선언했을 때, 티베트 정부는 상황의 어려움을 알고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서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서신을 보냈다. 영국과 미국은 관심이 없었고, 인도는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열심이었다. 이는 영국이 영일동맹(1902)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책을 지지했고, 미국이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주일 만에 1882년 이래 유지되어 왔던 한 · 미 간 외교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한 것과 유사했다.

1919년 3월 1일부터 1년 동안 한국인 희생자의 수는 7천여 명 정도였다. 1959년 라싸 봉기가 일어났던 3월부터 이듬해 9월 사이에 군사작전에 의한 사망자는 87,000명에 달한다. 이 숫자는 자살, 고문, 기아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제외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정부는 라싸 봉기의 원인을 달리 보고 있고, 사상자 수도 다르게 제시하지만 적게 잡아도 삼일 운동의 사상자 수는 훌쩍 넘을 것이다.

4. 주고받기 명상법과 상호의존성 자각 훈련

달라이 라마는 분노나 미움 등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자비심을 기르기 위해 여러 수행법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적에게도 적용한다는 똥렌(주고받기) 명상법과 상호의존성 자각 훈련만을 간략히 기술한다.

1) 주고받기(똥렌) 명상법

주고받기(tonglen, གཏོང་ལེན) 명상법의 핵심은 상대방의 나쁜 감정을 내 속으로 받아들이고 익혀서 마침내 변화시키는 것이고, 대신 내가 기른 좋은 감정은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2008년 3월 라싸와 다른 도시에서 티베트인들은 중국 공산주의 정부에 대해 항의했고, 중국 군인은 시위대에게 발포했고 수많은 항의자를 체포했다. 특히 승려들이 많았다.

그때 달라이 라마는 중국 관리들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의 분노, 의심,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나의 사랑, 나의 자비, 나의 용서를 주었다.”고 한다. 그에게 용서는 가해자들이 사죄하고 반성하고 난 다음에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는 것이다. 한국인이 한일 간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이런 용서의 방법을 활용할 능력이 있을까?

2) 상호의존성 자각 훈련: ‘나’와 ‘적’의 유체성(有體性, tangibility)을 약화시킴

달라이 라마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의 훈련이 나와 적 양자 모두 ‘견고하지도 않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고, 우리에게 더 넓은 시각을 가져다주고, 분노와 미움과 같은 파괴적인 감정에 덜 집착하게 해 주고, 더 용서하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상호의존성을 터득하면 각자의 신체가 가진 유체성(有體性)이나 구체성이 실제로 사라져서 개인적인 경계선(personal boun-daries) 곧 물리적인 경계선이 사라져 버린 듯했다는 것이다.

‘나’와 ‘적’의 이분법은 처음부터 오류라는 것이다. 부시와 사담 후세인 등이 서로 미워하면서 상대방을 ‘견고하고, 독립적이고 절대적 존재’로 보고 있는데, 달라이 라마는 그러지 말고, ‘상호의존적인 관점, 보다 넓은, 부드러운’ 관점에서 보라는 것이다. 상호의존의 관점에서는 ‘남한은 북한의 일부이고, 남한은 김정은의 일부’가 된다.

5.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주의와 폭력 비판

달라이 라마는 2008년의 라싸 봉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과 같이 나도 나 안에 분노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파괴적인 감정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의 심신에 해로우니, “그것을 환영하거나, 자연스러운 것, 친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티베트 독립을 외치며 분신자살한 티베트인들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난처해 하지만 폭력은 분명히 비판한다. 2008년 3월 라싸 봉기 때 중국 군인들이 잔혹하게 진압했을 때 티베트 청년들이 조직적인 약탈, 방화, 적대적 행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폭력이 티베트 내에서 2등 국민 취급을 받는 절망감에서 나온 것은 인정하면서도 “만약 티베트 국민이 비폭력의 길에서 이탈한다면 자신은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대변인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비폭력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확신은 실용적인 측면도 강하다. 심재룡 교수가 2001년 9월 비폭력이 과연 달라이 라마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임에 대해, 자치가 아니라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 일반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달라이 라마는 “결국에는 비폭력 노선이 도덕적으로 바른 길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건설적인 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티베트인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실용적인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태도를 닮았다.

붓다의 전생 대비(大悲) 선장 이야기

2011년 달라이 라마는 프랑스인 스테판 에셀(Stéphane Hessel, 1917~2013)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 대화를 주선한 측이 먼저 간디와 관련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나(간디)는 비겁과 폭력 사이에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폭력 쪽을 권하겠다”고. 1908년 간디는 암살당할 뻔했다. 나중에 장남이 어떤 행동을 취했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간디는 “너의 의무는 설령 폭력을 써서라도 나를 지키는 것이어야 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불교경전(《대방편경》의 티베트 역)에 나오는 대비(大悲) 선장 이야기를 꺼냈다. 붓다는 여러 전생 중 선원이 500명이 되는 어느 배의 선장이었다. 선장은 한 악한 선원이 나머지 499명을 죽이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장은 세 차례나 그러지 말라고 그 선원을 설득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선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내가 저 선원을 죽이지 않는다면 다른 499명이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면 499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가 499명을 죽이는 죄를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인 죄에 따른 악업의 결과를 그대로 받게 된다. 게다가 만약 내가 음모를 꾸미는 저 선원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499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선장은 무기를 들고 그 선원을 죽인다. 화가 나서 죽인 것이 아니라, 499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499명을 죽이는 악업에서 그 악한 선원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이는 자비행이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는 저런 악독한 선원이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다고 생각했을까? 히틀러, 스탈린, 이디 아민, 마오쩌둥? 물론 인류사에 대비 선장처럼 지혜와 무기를 함께 가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반성적 평가와 살인이 허용되는 경우

에크만에 따르면, 사람들의 분노는 주로 자극에 대한 자동적 평가(automatic appraising)에서 나온다. 그런데 파괴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불교적 수행법에 대해서는, 불교도들이 수년 동안의 훈련을 통해 자동적 평가를 반성적 평가(reflective app-raising)로 대체할 수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에크만은 달라이 라마에게서, 어떤 요기들은 평가의 시간을 늘릴 수 있다(to stretch time)는 말을 들었다.

즉 그들 요기에게 자동적 평가가 일어나는 수천 분의 몇 초는 충분히 늘어나서 그들이 자동적 평가를 수정하거나 취소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가 이런 종류의 평가 인지(appraisal awareness)가 자신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능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고 에크만은 덧붙였다. 달라이 라마는 요기의 평가 인지가 자신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고백했던 셈이다. 그는 붓다와는 달리 오온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일까? 

누군가가 자식을 살해하려고 협박할 때,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우리는 화를 내고 그를 해치더라도 정당화된다고 에크만은 보고 달라이 라마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는 ‘약간 주저하면서(with some hesitation)’ 이 점에 동의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자서전에서 중국인들의 무자비함을 고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의 선량한 인민들에게 티베트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중국인에 대한, 베이징의 지도자들에 대한 적대감, 원한과 분노는 없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에는 자비와 용서의 역사기술 원리로 불릴 만한 것, 곧 반성적 평가가 작동하는 것 같다. 
 
 6. 한국사의 두 장면

1) 사명당: 혈기와 수치 사이에서

아래 두 시에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이 의승을 일으킨 동기가 보인다.

……
赤頭綠衣兮絡繹縱橫   적두와 녹의가 종횡으로 줄을 이어
魚肉我民兮相枕道路   어육된 우리 백성 길가에 즐비하네
痛哭兮痛哭                 통곡하고 통곡하나니
日暮兮山蒼蒼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네
遼海兮何處                  아득한 바다는 어느 곳에 있는고
望美人兮天一方          하늘 한쪽 임금님 바라보네
〈시월삼일에눈이오기에 회포를 적다(十月初三日雨雪寫懷)〉

十月湘南渡義兵   시월에 상남 건너는 의병이여
角聲旗影動江城   뿔피리 소리 깃발 그림자 강성을 뒤흔드네
匣中寶劒中宵啂   상자 속의 보검이 한밤중에 우나니
願斬妖邪報聖明   요사의 목을 베어 성명에 보답하려고 
〈임진시월에 의승을 이끌고 상원을 건너다
(壬辰十月領義僧渡祥原)〉

1592년 임진왜란 발발 6개월 뒤쯤의 시이다. 처음의 시는 10월 초 눈 내리는 날 통곡하며 쓴 시이다. 적두와 녹의의 왜군에 의해 어육처럼 짓밟힌 백성과 파천한 임금, 이들이 사명당이 의병을 일으키고 칼을 뺀 직접적인 동기일 것이다. 그는 의병이 칼로써 ‘요사’의 목을 베는 것을 임금에 보답하는 길로 보았다.
사명당이 51세가 되는 갑오년(1594) 9월에 선조에게 올린 〈갑오상소문〉의 전반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통탄스럽게도 이 훼갈(虺蝎, 독사와 전갈) 같은 무리들이 큰 나라를 제 마음대로 해쳐서 생민이 어육(肆毒大邦 生民魚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족히 말할 것도 못되옵고 더욱이 종사(宗社)가 몽진하고 임금의 행차가 파천까지 하셨사오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그 누가 분격해서 팔뚝을 걷어 올리지 않으오리까(凡有血氣 莫不扼腕). [중략] 신(臣)은 본래 미록(고라니와 들사슴)의 몸(臣本麋鹿之身)으로서 병가의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오나 적 하나라도 죽여서(殺一敵) 성상(聖上)의 망극한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오니 어찌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들에게 뒤지오리까.

사명당에게 생민을 어육으로 만드는 왜적은 독사와 전갈의 무리였고, 이 적을 죽임은 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었다. ‘혈기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팔뚝을 걷어 올린다’는 구절은, 성이 나서 팔뚝을 걷어 올렸다는 것이다. 사명당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나타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 상소문에 호모 이라쿤두스의 전형이 보인다.

하지만 출가승 사명당이 의승장이 된 것은 커다란 변신[飜成] 즉 분신(分身)이었다. 임란 후 1604년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또 한 번의 분신이 필요했다. 그에 대해 사명당은 시에서 “백억의 분신을 누가 거짓이라 하는가(分身百億誰云妄)”고 되묻는다. 중생이 백억이면 분신도 백억이 필요하다. 중생의 고통이 거짓이 아니니 분신도 거짓일 수는 없다.

분신에 대한 자각은 미록지신과 같은 본신(本身)이나 실신(實身)에 대한 자각과 함께 온다. 그는 본신과 분신 사이에서 때때로 회의나 딜레마를, 심하면 수치를 느낀 것 같다. 다른 시에 나오는 “석장 날리며 병사를 말한 잘못도 애당초 부끄러워(飛錫初羞誤說兵)”라는 구절이 그것을 말해준다. “석장(錫杖) 날리며” 곧 승려로서 돌아다니면서 병사(兵事)를 말한 것이 수치란다. 그는 전쟁 중 미록지신 곧 숲에 사는 출가자와 왕의 신하 사이에서, 그리고 수치와 혈기 사이에서 고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고뇌에 대해 누가 비판할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이, 아니면 현대의 민족주의자가?

2) 안중근의 분기(忿氣)와 가해

안중근은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이토를 죽이는 순간의 심정을 회고하면서, “분기가 갑자기 일어나고 3천 길 업화가 뇌리에서 치솟았다.(忿氣突起三千丈業火腦裏衝出也)”고 했다. 업화는 불교 용어로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인데 그것이 3천 길에 달했다고 하니, 그는 극도의 분노에서 가해했던 것이다.
당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소속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이 이토를 가해한 일[伊藤加害之事]에 대해 안중근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토가 범했다는 15개의 죄를 열거했다. 거기에 한국민 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열다섯 개의 죄목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희박한 것도 있지만, 이 모든 죄는 자서전의 다음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즉 “한국에 대한 정략이 이같이 잔폭(殘暴)해진 근본을 논한다면 전혀 그것은 일본의 대정치가 늙은 도둑 이등박문의 폭행입니다.” 안중근이 이토를 가해한 두 가지 큰 이유는 폭력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앗아간 죄와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이다.

이런 분노와 가해 행위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는 이런 행위들이 개인적인 원한이나 사적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선 동기는 순수했다고 할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다음에 나오는 간디의 비판에 대해 동조했을까?

3) 간디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모두 비판함

1909년 7월 10일 이래 남아프리카에서 건너와 런던에 잠시 체재하던 간디는 이토가 ‘한국인’에 의해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를 지칭하는 〈용감한 일본 병사〉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 대강은 아래와 같다.

우리나라 신문들은 용감한 일본인 이토 후작이 한국인이 쏜 연발권총의 저격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러시아의 피를 맛본 일본은 한국에서 그렇게 쉽게 물러날 리가 없었다. ……수영 선수가 물에 빠져 죽듯이, 칼로 일어난 자는 주로 칼로 망할 것이다. 연발권총으로 이토를 저격했던 자는 그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토를 죽였다는 점을 담대하게 인정했다. ……그[이토]는 용감한 자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한국을 예속시킨 일은 그가 용기를 나쁜 목적에 사용한 것이다. ……만일 일본이 힘을 통해서 통치하고, 방어하고, 자기를 팽창시킨다면, 이웃의 땅을 정복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인민의 참된 복지를 마음속 깊이 생각하는 자라면, 오직 샤타그라하(진리파지)의 길을 따라서 인민을 인도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을 쓴 1909년, 간디는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했다. 그는 이토와 안중근 모두 비폭력의 진리를 따르지 못했다고 보았다. 간디의 눈에 비친 이토는 용감한 자였지만, 그 용기를 잘못 사용해서 한국을 예속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간디는 정복자나 침략자라고 해도 가해하는 것은 아힘사 원리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그런데 간디는 1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을 위해 모병운동을 결행했고, 1940년 2차 세계 대전 중에 폭력적인 전쟁은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침략을 당한 영국을 도덕적으로 지지한 적이 있었다. 도덕적인 지지는 물리적인 지지는 아니다. 간디가 모병한 것은 1918년 유럽의 서부전선이 무너지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하고 있을 무렵이다. 그는 한 연설(1918.7.14)에서 독일이 승리한다면 패배자를 억압하고 핍박할 것이지만, 영국인은 자유를 사랑하고, 인도가 희생하면 영국이 양보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간디는 모병 행위와 아힘사 원리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면서도 영국인의 자유 사랑을 내세우고, 영국이 나중에 양보할 것임을 믿고 모병운동을 한 것이다. 그 이후 영국의 평화주의자 등이 모병 행위에 대해 거듭 질문을 했고, 간디는 그때마다 성실하게 대답했지만 회개한 적은 없다. 

7. 맺는말: 공분(公憤)에도 ‘주저하라’

힌두교와 불교를 낳은 인도 문명은 어떤 다른 문명보다 아힘사와 자비를 강조하는 것 같다. 붓다와 달라이 라마가 이 두 가지 사회적 덕목을 내세워 분노와 살인을 극단적으로 경계한 것은 당연하다. 한국인이 사명당을 의승장으로, 안중근을 의사로 칭송해온 것을 보면 우리 민족문화는 분노의 인간관을 선호해 온 것 같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일까, 아니면 우리 민족이 쌓아온 카르마의 결과일까?

만일 침략군 왜군과 이토가 《대방편경》에 나오는 악한 선원에 해당한다면 부처의 전생인 대비 선장은 숙고 끝에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저 악독한 선원으로 보지 않았다. 간디는 안중근의 행위를 비판했지만, 강탈자에게는 비겁보다는 폭력적인 저항이 더 낫다고 했다. 하지만 간디는 적수에게 맨가슴을 드러내놓고 저항하다가, 속으로는 분노나 악의 없이 죽어가는 것을 더 고귀한 일로 여겼다.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화가 난 경우 상대의 잘못이라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의 90%는 우리가 투사한 것이다. 민족주의에 애(愛) · 불애(不愛)의 감정이 있는 한, 그것은 역사 서술이든 정의의 기억이든 왜곡시킬 가능성은 엄존한다. 앞으로 민족사 기술에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자비와 용서의 역사기술 원리’일 것이다.

한국사회에 분노가 팽배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자신이나 민족이 모욕을 당했을 때, 인간성을 모욕하는 불의의 질서가 있을 때, 우리는 붓다처럼 변신하지 못했으니 분노할 수 있다. 그런데 분노의 다섯 기준은 지켜야 한다. 우리 사회에 중용의 덕목은 어느 정도 실천되고 있을까? 정치가들과 언론들은 때때로 특정 사건에 대해 자신의 평가에 ‘국민의 공분’을 덧씌워서 정적(政敵)을 분노의 표적으로 삼아서 수시로 마녀 사냥한다. 그리고 복수당하고 또 복수한다.

일상화된 소셜 미디어는 분노의 대상은 헛짚고, 강도는 강화하고, 지속 시간은 늘리는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천박한 분노, 흥분, 막말, 욕설이 난무한다. 파토스의 분출은 개인이나 집단에서, 심지어 TV 드라마에서조차도 지나치고, 로고스의 활동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이 필자가 분노를 문제 삼은 이유의 하나다. 

당장 눈앞에서 자식의 산 생명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소위 의분이나 공분 앞에서라도 ‘주저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붓다나 달라이 라마를 따른다면, 우리는 개인과 민족의 일에서 자비의 인간관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것을 개인의 평화와 세계평화의 주요 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수단이 바로 목적이기 때문이다. ■

 

허우성 /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 철학박사. 저서로 《근대 일본의 두얼굴: 니시다 철학》과 역서로 데이비드 로이의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문명 정치 종교(마하뜨마 간디의 도덕 정치사상)》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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