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 기상(奇想)의 질문

혜안 서경수
慧眼 徐景洙,
1925~1986

필자는 혜안(慧眼) 서경수(徐景洙, 1925~1986) 교수(이하 존칭 생략)에 대한 평전적 글을 이미 몇 편 썼다. 그런데 필자와는 너무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이분에 관한 자료집을 모을 때(《서경수 저작집》 I, II 편) 그의 학문적 업적 이외에 그의 행위를 주목해 달라는 요청으로 서문을 썼고, 다른 두 편은 지극히 맥락적(contextual) 상황에서 썼다. 곧 한 편은 재가 불자들에 대한 활동을 부각하는 강연 원고로서 이분을 재가불자들이 본받아야 할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썼고, 또 다른 한 편은 ‘불교유신론 심포지엄’에서 오늘의 유신론을 선도적으로 이끈 학자들로서 이기영과 서경수를 묶어 발표했었다.

따라서 일정한 주제 아래에서 서경수의 재가불교론과 불교유신론의 관점을 부각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글은 말 그대로 전기적 특색을 지녀야 한다는 부담감이 따른다. 하지만 전기도 하나의 텍스트이다. 완결된 하나의 삶은 그 자체가 텍스트일 수밖에 없다. 이분의 삶이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면 그만큼 생애 텍스트에 대한 독법(讀法)은 다양해질 수 있고 나만의 독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평전의 서술에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요청은 이 시점에서 나의 독법과의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듯하다. 어떻건 이 글을 쓰며 동학의 황용식 교수의 ‘서경수 평전’과 도표화한 연대기에 크게 힘입고 있음을 밝힌다.

도입부의 글이 길어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남긴 유고나 학적 활동은 외형상 무척 간결하다. 그분을 기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아 편찬한 2권의 저작집(3번째 저작집이 2016년 9월 발간될 예정이다)이 고작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글은 묵직한 학술논문이 아니다. 오히려 쉽게 읽힐 수 있는 에세이적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치 않다. 그가 살았던 세대의 특징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혼란스런 현대기를 고스란히 겪으며 살았다. 그리고 그 사건 하나하나에 그는 참여되어 있었고 거기에 자신의 몸을 투사시켰다. 그대로 넘어갈 일도 그는 항시 중지시키고 따졌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고집했고 나름의 학문과 인생 역정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었다.

강의실로 들어선 그는 몇 번 강단을 왔다 갔다 하고는 오늘 강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준비해온 것 중에 질문이 없느냐고 학생들에게  다시 묻는다. 질문이 없으면 계속 책을 읽고 질문을 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책상에 걸터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이런 상황을 좋아할 학생은 없다. 학생들이 오히려 교수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설(說)은 교과서에 있고 자네들은 이미 책을 읽었으니 응당 질문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없으면 질문이 있을 때까지 읽는 것은 자네들의 몫이지 나의 책임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이런 파격의 강의 자세는 그의 학문을 일관하는 태도였다. 서울대학교의 종교학에서 동국대학교의 불교학 연구로 전향한 이후 그의 이런 기상천외한 태도는 몰이해한 주변에 의해 구타당하는 사건까지 일으킨 바 있다. 그는 기존의 불교학 연구와 담당교수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일본의 불교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이미 늦은 나이로(34세)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한 그는 이미 일본어와 영어를 거의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관계 서적을 누구 못잖게 독파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인생 역정은 일제치하의 신산을 겪은 이후였다. 이 세대의 학자들이 대부분 겪은 과정이었겠지만 그에게는 더 유별난 체험을 가져다주었다. 함경북도 명천에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1925년) 그는 중학교 때 이미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당할 정도로 의식의 깨어남이 있었다. 금서로 된 이광수의 《흙》을 읽는 독서회에 연루되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물고문을 받고 결국 폐 한쪽을 도려내는 건강의 약점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변 이야기를 거의 공개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때의 일은 기록해 놓았다. 심지어 혹 주변에서 사회명사들이 자신의 신변 이야기나 후일담을 발설하면 그는 “타락의 시초이며 가까이하지 못할 사람”으로 평가했다. 따라서 이분 자신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희소하고 모두 전해 들은 간접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신비 속에 가려진 면모를 드러낼 뿐이다. 어떻건 그는 자신의 최초 수필집인 《세속의 길 열반의 길》 서문에서 자전적인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북녘 날씨가 몹시 싸늘하던 초겨울 해 질 무렵 난데없이 일본인 정복 경관 세 명이 학교에 나타났다. …… 내 손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순간 하늘이 캄캄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길이 끊어졌다. 그 시간부터 18세 소년은 끊어진 길목에 서서 한 아름 절망을 안은 채 태양 없는 세월을 살아야 했다. …… 해방은 일시적으로 흥분과 도취에 몰아넣는 독주와 같은 것이었다. 흥분과 도취 속에서 끊어진 길을 잇는 지혜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6 · 25 비극이 터지던 날 그때까지 디디고 섰던 모든 질서가 모두 무너질 때 나는 다시 앞이 캄캄하여 길을 잃었다. …… 그럭저럭 한세상 살아오는 동안 길은 끊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혀버린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도리어 길은 한 길뿐이 아니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선택해야 하는 무거운 불안을 인간은 짊어지게 되는지 모른다.

이미 18세에 투옥당하고 해방을 맞고 6 · 25 전쟁이란 신산의 세월을 이렇게 삼자화시켜 서술하고 있다. 훗날 결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건강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는 건강회복과 안정을 위해 평생을 산사를 찾아 휴양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불교와의 접점은 이 산사의 휴양에서 맺어지는 인연이 되었으니 기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선친이 목사이기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보다 더 기독교와 근접하려는 의도가 있었겠지만, 오히려 기독교와는 멀어지고 불교로 급속히 빠져드는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에는 고 신사훈 교수가 미국 드류 신학대에서 정통 기독교신학을 전공하고 돌아왔는데, 그의 편향된 신학 일변도와 타 종교 배척의 태도에 반발심을 느꼈다. 일종의 저항의식이 그에게 배어 있었다. 누구 못지않은 기독교 활동을 하며 리더십은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지만 내용 없는 권위, 진리를 표방한 일방적 주장은 극도로 싫어했다. 결국 두 가지 계기, 곧 산사에서의 휴양과 독학, 기독교 제일주의에 대한 식상이 그를 불교로 이끌었고 때늦은 불교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졌다. 이때 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장면이 미국 뉴욕 스토니브룩대학의 박성배 교수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1958년 봄에 저는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과 대학원 입학시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머리는 홀랑 벗어지고 수염이 많이 난 할아버지였습니다. ……체구는 작은데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대학원 시험을 보러 올 리는 없고, 저분은 왜 저기에 앉아 계실까 궁금해졌습니다. 드디어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가가서 정중하게 인사드리며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대학원 입학시험 보러 왔소.” 내뱉는 듯한 짤막한 대꾸였습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 우리는 어느 대폿집으로 들어가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북 출신으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며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고 기독교 일색의 종교학과가 싫어서 동국대학교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대학원 생활 만 2년을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그는 이미 온갖 세파를 겪은 개성이 강한 독립된 개체였다. 서울대에 적을 둔 시기에 그는 국민당 정권 초청의 유학생으로 중국에 갔으나 국민당의 패주와 함께 귀국했고 전쟁 때는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어느 연회 좌석에서 정부 비판의 목소리를 내자 다시 체포되고 독일계 미국인 장교의 주선으로 풀려나는 경험도 겪었다. 그의 비판 정신과 현실참여는 철저했다. 그런 고통의 세월을 겪은 후 그는 동국대학원 불교학을 전공으로 입시를 치르며 박성배 교수에 의해 착목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불교학 공부는 주로 산사에서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그에게 동국대 교수진들은 아무것도 가르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기존의 불교학 연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평생 그를 추적하며 괴롭힐 멍에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처럼 살았고 주변과의 알음알이도 피했다. 오늘날 불교학 연구의 기본 상식으로 되어 있는 산스크리트어의 필요성을 느껴 그는 아무런 가이드 없이 홀로 산사에서 공부하며 연마했다. 물론 그는 이 세대가 지닌 특징인 일본의 불교학 연구의 선도적인 지식을 그대로 접할 수 있었고 덧붙여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만큼 서양 학문에 대한 지식도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이런 학문적 수련은 훗날 평생의 지기로 삼는 고 이기영 교수와 대조를 이룬다. 서로 존경하며 끝날까지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이 이기영의 회고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서경수,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승도 없고 친구도 없는 적막 속에서 적막과 공(空)의 묘미를 체험하며 살아왔다. 아마 그 기간이 내가 유럽에서 같은 길을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나는 국외에서 서로 만난 일은 없지만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책들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강인하면서도 자상하고 이지적이면서도 퍽이나 다정다감했던 그를 맞이한 것은 1960년 6년간의 유럽 유학을 마치고 동국대학교에 들어온 이후부터이다. 그에게는 수준 높은 현대적 교양이 갖추어져 있었다. ……모아놓은 글들이 보여주는 주제의 다양성, 사고의 깊이와 날카로움, 특유한 위트 등이 그의 인품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평생을 지기로 지낸 고 이기영 교수와 박성배 교수의 거의 가감 없는 실토이니 이 시기의 서경수의 면모를 추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는 비판적 학문의 세계인 아카데미즘을 추구했으나 한국의 불교학계는 그를 용납하지 못했다. 학위논문이 통과되지 못해서 그는 학위 없는 신분으로 오랫동안 이곳저곳의 대학 강사로 떠돌았다. 그의 논문은 당시로는 우리 학계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논제는 〈존재(Bhava)와 비존재(Abhava)에 대한 연구〉였다. 지금 우리 학계의 수준으로 보면 창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지금의 우리 학계의 수준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겠지만 당시로는 거의 파격적인 제목이고 문제의 핵심에 접근한 참신한 연구로 서구의 연구실적을 충분히 참조하고 있었다. 주로 용수의 중관론을 근거로 산스크리트어와 한문 원전의 문헌학적 비교연구였다. 이런 접근은 이미 일본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던 경향이었고 서구 학계가 주류로 삼는 연구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의 참신한 학위논문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는 학문 외적인 데 있었다. 그의 불교학계에 대한 비판과 주변 교수들에 대한 평가가 불러온 부메랑이었다. 이 후유증은 거의 50에 가까워서야 때늦게 동국대에서 전임교수직을 얻게 했다. 따라서 그의 한참 때의 학술적, 지적인 활동, 곧 이분만이 지닌 재기발랄함은 아카데미즘의 성채(城砦)인 대학 캠퍼스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제자들이나 동료 학자들과의 공동체인 대학 캠퍼스가 아닌 엉뚱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서(徐)사모회(속칭 毛사모회)’의 형성도 이때 태동이 되었다. 곧 그를 인지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와의 소통을 희구하게 됐고, 그는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개별적 강의’를 했다. 대개는 산사를 찾는 산행길이거나 청년수련회(후에 대학생 불교연합회를 성립시키고 책임 지도법사의 역할을 한다.)가 아니면 그가 즐겨하는 노래(그의 음악적 재질은 피아노 연주는 물론 고전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의 호연지기가 발휘되는 곳이거나 두주불사의 주석(酒席)이었다.

필자 역시 이분과의 만남은 이런 기회를 통해서였다. 지금 필자는 이분의 제자이고 후배를 자처하지만, 학교 강의나 연구실을 통한 만남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옛날의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 요즘 말하는 구루(Guru) 밑에 모이는 수행 제자들과 같은 전인적 관계였다. 일거수일투족이 교육 내용이었고 요즘 흔히 말하는 ‘몸을 통한(embodyment)’ 교수법이었다. 그것이 담길 그릇 없었던 한 불교학자의 처지였다. 훗날 필자 자신이 이런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사회 속을 전전하며 학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경험을 겪고 나니 그때 그의 처지가 오히려 지금 절감된다. 그러나 이런 입지는 의외로 그의 활동의 폭을 넓혀 주었다. 이곳저곳의 시간강사(주로 전북대, 동국대)를 제외하고 그는 불교계 언론과 문화계 일반과 청년 재가신행 활동의 리더로서 역할을 자임했다.

2. 울타리 벗기기-불교의 확대

캠퍼스에서는 일탈되었지만 〈불교신문〉 주간과 ‘삼보학회’ 간사를 역임하며 40대의 그는 문화계 전반에서 활동했다. 한국의 불교학계가 지극히 좁은 의미의 종교로 불교를 국한하여 문화, 사회, 정치계와 차단하고 자신들의 영역에 울타리 치는 일을 과감히 벗겨내려 했다. 〈불교신문〉에 대담의 장을 마련하여 황산덕, 오종식, 김기석, 한상범과 같은 사회과학이나 시민 영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이거나 조명기 전 동국대 총장, 김대은 스님, 김어수 시인, 안덕암 전 태고종 원장 스님 들과 같이 전혀 다른 시각을 지닌 분들과의 대담을 시도하며 불교와 현실문제를 다뤘다. 특히 법정 스님을 대담인사로 초청하며 교우관계를 나눴다. 서로 전혀 다른 승과 속의 입지였지만 불교계의 개혁과 불교의 문화적 영역에의 접근을 두고 평생 함께 교감을 나누었다. 법정 스님의 불교개혁을 위한 글 〈부처님 전 상서〉를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이후 최고의 글로 평가했다.

또 김철준 교수와 가진 한국불교사에 대한 대론이나, 《해동고승전》을 영역한 하와이대학 이학수 교수가 잠시 귀국했을 때 마련한 세계 불교학의 동향에 대한 대담은 우리 불교의 학문적 위상을 짚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때 그는 주로 이학수 교수의 입을 빌려 당시 세계 불교학계의 동향과 추이를 소개했다. 자신이 간혹 세계 불교학에 대한 정황을 과감하게 발언하면 항시 불교학계에서 차단되는 것을 의식하여 그렇게 표출시켰다. “미국이나 유럽의 불교학연구 활동 내지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라고 질문하며 “그게 큰 문제입니다. 해외로 뻗을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해야 하고 또 그들(서구학자)의 요구가 있을 때 받아들일 만한 자세도 갖추어야 합니다.”라고 우리의 실상을 실토했다. 이학수 교수는 당시 서구의 불교학 연구뿐만 아니라 아시아학회 전반에 대한 서구 학계의 활발한 정황을 소개했다. 또 당시 서양 기독교계를 뒤흔든 ‘사신신학(死神神學, God Dead Theology)’의 알타이저(Thomas J.J Altizer) 교수의 방한을 맞아 그와 대론을 했다. 그는 이미 종교학적 방법론이며 기독교 신학을 거쳤기 때문에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비교종교학적인 담론에 대한 소신을 흔쾌하게 교환했다.

“당신은(알타이저) 신의 죽음의 신학을 말할 때 특히 종말론에서 불교의 열반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열반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합니까?” 알타이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열반이란 심오한 뜻을 가진 용어입니다. 열반을 서양적 의미의 하늘나라도, 최고의 목적지도 아니고 바로 ‘즉각적’으로 또 ‘내향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또 열반의 길은 신의 죽음으로도 열린다고도 봅니다. 그래서 공(空)의 이치나 열반의 의미는 신이 죽을 때 또는 신이 죽은 동안에만 서양인들에게 이해된다고 생각합니다. 곧 신이 죽었다는 선언은 기독교가 불교로 접근하는 문호를 개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알타이저와 학문적 친구가 됐다. 1974년대의 일이었다. 이 모든 활동은 불교를 오늘의 현장에 자리하게 하며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연관 속에서 우리 불교의 위상을 진단하는 작업이었다. 특히나 여러 면에서 현실과 차단된 스님들의 입지나 은폐된 불교를 우리의 현장에 부각하려 했다. 과거의 현재화라는 그의 의도는 오늘날 하나의 흐름이 된 현대 고승전(高僧傳) 편찬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잊힌 선승들을 우리 근현대 불교사에 위치 지우려 시도했다. 수월 스님, 혜월 스님에 대한 행장과 경허 스님에 대해 쓴 글들이 그것이다. 산사 스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승전)’들은 그저 이야기로 그쳐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고승들 행장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지금은 ‘구술사’가 우리 근현대 역사기술의 중요한 영역으로 떠올랐지만 1960년대에 구술과 전승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불교학계에서는 그가 처음이었다. 물론 조계종 승단의 큰스님들의 고승들에 대한 법통의 시원에 대한 욕구와 발원이 선결적인 것이었다. 그는 재가 불자로서는 드물게 효봉 스님의 비문과 석두 스님과 같은 큰스님들의 비문을 썼다(1968년). 그리고 “큰스님의 자취를 따라”라는 표제로 고승평전에 대한 서설도 작성했다. 불교학자 가운데 우리와 호흡을 함께한 고승들을 이렇게 현장화시키고 문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한 작업을 펼친 것이다.

결국 이런 시도는 아직도 유효한 《한국근세불교백년사》 편찬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는 편찬부장의 역할을 했다. 이때 정광호 교수와 박경훈 편집국장, 안진오 교수의 역할이 큰 몫을 차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 근현대 불교를 다루는 소장학자들의 전거 인용에서는 이분들의 선도적 노력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에 무척 인색한 것 같다. 어떻건 《한국근세불교백년사》에 대한 관심과 현대 고승전은 그의 산사 탐방의 결실임에 틀림없다. 백년사 편찬을 끝마치고 쓴 후기의 감회에 찬 글은 그가 불교 근대화론에 얼마나 몰두하였고 그 필요성을 절감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옛날 것은 그렇게 억세게 보존하기를 애쓰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오늘에 가까운 100년 동안의 문서자료에는 그렇게 무관심하지 모르겠다. 100년사의 자료는 그럭저럭 미비한대로 모아 보았다. 이제 분석과 정리 작업이 남았다. 이 방면에 뜻을 둔 동학이나 후학들이 많이 나와 주기를 바란다.

언론매체를 통한 글들과 불교 근대성론에 관한 그의 관점들이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저작집 대부분을 차지한다. 본격적인 논문은 적고 오히려 단문의 평론이 그가 남긴 유고의 특징이다. 따라서 에세이적 글들이 많다. 평가하기에 따라서 그의 글은 에세이적 논문과 논문적 에세이의 성격을 지녔다. 실제로 그의 글들에서는 전문용어나 학술용어를 극도로 자제한다. 거의 독학으로 불교를 공부한 그는 상식인이 이해할 수 있는 불교 서술을 바랐다. 따라서 우리에게 원고를 쓰라고 하는 경우 “너희들만 아는 암호 같은 글”은 쓰지 말라고 경고했다. 학술 전문인들의 병폐인 특정 집단의 전문용어(jargon)의 남용을 자제하는 것이다.

곧 산스크리트어나 한문으로 된 경전 용어를 모두 풀어쓰며 또 가급적 논문에 따르는 주해(註解)도 달지 않았다. 현학적으로 보이거나 남의 논문에서 이끌어 인용하는 일마저 자제했다. “인용에서 시작해서 인용으로 끝내는 논문”은 자신의 논문이 아니라고 평가하며 근자의 학문적인 전문화를 비판했다. 곧 이분의 글들은 논문과 에세이의 경계에 서 있어 규격화된 논문의 영역을 허물고 있다. 나는 오히려 이런 형태의 글에서 이분만의 번뜩이는 직관과 창의성을 감지하고 진정한 논문의 무게를 느낀다. 조선조 불교의 억압과 탄압의 역사를 “순교자 없는 박해사”라고 하거나 ‘호국과 호법의 동일률(同一律)이 한국불교의 특이성’이라는 지적은 이미 논문 몇 편을 능가하는 탁월한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불교가 젊기를 원했다. 흔히 말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불교지만 우리 불교는 전통의 활력은커녕 현대인들 특히 젊은 계층을 과거 속으로 함몰시키는 낡고 늙은 전통이라고 비판했다. 뒤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그의 한국불교를 평가하는 커다란 프로젝트의 하나는 불교를 젊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가 참여한 일은 ‘한국대학생 불교연합’을 활성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이때쯤 각 대학교 중심으로 ‘대학생 불교연합’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기구의 한 부분으로 보다 신행을 강조하며 직접 불교신행에 참여하는 운동이 발주되었다.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 구도부 산하에 봉은사 대학생 수도원이 창설되었고 바로 평생의 도반인 박성배 교수가 이 구도회에 앞장섰다.
서경수는 그 옆에서 삼보학회를 기반으로 이 운동에 적극 동조하며 동참했다. 그리고 이 구도회 소속의 수련 대학생들은 일종의 엘리트의식을 지니고 불교 수련과 학문 연마를 겸행하는 것을 모토로 했다. 훗날 박성배 교수와 일단의 수련생들은 그대로 출가하는 적극적 참여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했다. 이때쯤 성철 스님은 이 운동의 승려 지도자로서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 또 다른 대학생 불교운동으로서 화랑대회를 결성하여 옛 신라의 화랑정신을 구현하며 민족정신과 불교를 일치화시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도교수는 역시 서경수와 반려였던 이기영이 주도하였다. 이 두 가지 운동에 서경수는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며 동료학자로서 혹은 불교 도반으로 함께하였다. 지금 회고해 보면 이 세 분의 불교의 현실참여는 오늘날 지성불교의 참여의식의 표본이 되고 있으며 불교 재가성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는 결정적인 발언을 했다.

“현실을 떠난 교설은 가공의 다리일 뿐 그 가상의 무지개를 따른다면 현장을 상실한 허상의 종교로서 역사적 시간에서 소외된 토우적(土偶的)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곧 그는 “불교는 항상 현장에서만 존재해 왔고 그것이 불교의 본질이며 종교로서 기능”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현장의식이야말로 종교 존재의 이유이고 그것의 결여는 불교이기를 거부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오늘의 불교현실에 대한 적확한 지적이 되기도 했다. 동시에 불교를 일정한 변하지 않는 형태를 상정하는 본질론적 실체론을 극복한 새로운 불교 해석을 시도하여 주목을 끌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자기가 설 자리조차 상실하고 역사의 미아가 되고 만다. 역사의 미아가 된 종교는 자기 자신조차 구제할 힘이 없는 무력한 종교다. 대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불구의 종교”라고 단정했다. 과거로의 복귀의 면모만 보이는 오늘의 한국불교는 “오늘의 문제보다는 어제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 종교는 오늘의 시간에 사는 유물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질타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현실참여는 막연한 이론적인 자기 논리의 전개이거나 현장의 행동 논리를 추종한 것이 아니었다. 뚜렷한 자기의식과 현실참여의식의 조합이었다.

3. 인생은 나그넷길

불교 언론이나 삼보학회를 통한 현실참여적인 활동 이외에 캠퍼스를 주 거처로 삼을 수 없었던 그의 여정은 산사와 사찰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여행은 끝 간 데를 모를 이곳저곳을 순방하는 천방지축의 긴 여정이었다. 젊은 시절 중국으로부터 시작된 여행은 가까운 이웃 일본을 자주 찾았고, 독일 등지를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돌아다녔다. 결혼도 않고 홀로 사는 그에게 여행은 무엇보다도 산다는 활력을 주는 듯했다. 여행 때마다 “좀 쉬러 갔다 온다”는 것이 우리에게 내뱉는 말이었다. 우리는 휴식하러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는 휴식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결국 잦은 출타는 목사님이셨던 아버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도를 고향처럼 찾았다. 당시의 그의 인도 기행은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었다. 요즘처럼 인도를 불탄(佛誕)의 성지라거나 정신적 휴식과 영성을 위해 찾는 장소로 여긴 것이 아니었다. 당시로는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막연한 미지의 세계였고 정치적으로도 우리가 꺼려야 하는 지역이었다. 북한과는 대사급의 관계였으나 우리와는 총영사급의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었고 일종의 공산블럭에 속했다. 북한 주재 인도 대사는 인도고대사를 저술하며 영국의 인도 식민지사를 혹독하게 비판 한 코삼비(Kosambi)였다. 그의 책인 《서구의 인도 지배(Western Dominance and India)》란 저술은 국내에서 금서였다. 소위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의 훌륭한 저술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런 정치적인 상관관계를 그는 무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인도를 사랑했다. 그러기에 인도는 그에게 많은 함의를 지닌 정신적인 보고(寶庫)였다.

미국이 한때 인도와의 이념 대결을 종식시키고자 하버드 대학의 학자인 갤브레이스(Galbraith)를 인도 대사로 파견하였고 그는 인도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짧은 시간에 인도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오래 머문다고 인도가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서경수에게도 인도는 끊임없는 천착이 요구되는 지역이었고 무궁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그에게 인도는 세계를 향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기도 했으며 영원으로 향하는 창문이었다. 그가 인도를 보는 시각은 우리와는 달랐고 또 자신에 대한 성찰이기도 했다.

(인도의) 교수와 학생들을 통하여 인도의 현대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길고 오랜 과거를 짊어진 인도는 오늘 거대한 빈곤을 안고 심한 진통 중에 있습니다. ……그 가난의 문제를 인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며 일상을 살아가는가 하는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모에 대한 효가 자신의 입신출세에 대한 ‘부(富)와 귀(貴)’와 직결될 때 자식의 가난은 불효로까지 번져갑니다. 인도인들은 가난에 대하여 무관심을 넘어 초연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빈곤보다는 정신적 빈곤을 더욱 우려합니다.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정신적 풍요와 비례한다는 환상을 빨리 버리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도리어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는 반비례하는 선례가 많기 때문입니다.(〈한국불교연구원 회보〉 1978)

그가 평생 몸담아 왔던 불교 재가자들의 모임인 한국불교연구원 구도회 멤버들에게 인도에서 보낸 최초 편지의 내용이었다. 그에게 인도는 하나의 지역이거나 국가는 아니었다. 인도라는 명칭, 인도라는 국가는 전적으로 제국주의의 산물이고 근대 민족주의가 창안한 명칭일 뿐임을 지적했다. 그는 부처님의 탄생지와 설법처와 교화의 지역을 샅샅이 찾았고 인도 대륙이 맞닿는 모든 지역을 훑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인도의 각 지방들의 특색을 드러내려 했고 그 지역성을 음미했다. 각 지역마다의 고유한 문화와 생활을 인정할 뿐 인도를 정치적 단위로 삼기를 거부했다. 이런 역사의식과 현장의식은 그의 인문학적 학자의 관심에서 나온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이 겪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희생물이라는 자기의식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의 인도 장기체류가 가능했던 것은 1972년의 인도 정부 초청으로 첫 방문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나 자신도 조교의 신분으로 이분을 모시고 첫 해외여행을 했다. 우리 일행, 곧 동국대 사학과의 안계현 교수, 전남대 철학과의 정종구 교수와 필자는 인도 외무부 산하의 ‘인도 해외교류 위원회(Indian Council for Cultural Relations)’의 초청으로 2개월여에 걸친 인도 문화탐방을 할 수 있었다. 이 위원회(ICCR)는 해외 인사 초청기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교육, 문화 차원에서 인도를 공식적으로 여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기구여서 지금 천거해도 좋은 정부기관이다.

어쨌건 서경수는 이 기구를 통해 한국과 인도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히하는 데 공헌한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만났던 외무성 아시아 담당 차관보인 파란지페(Paranjipe)는 그 이후 한국 초대 인도 대사로 부임했다. 서경수가 이후 네루대학 한국어과 초대 교환교수로 부임한 것(1977~1978)은 이때의 그의 활동에 기인된다. 이기영의 이 시기에 대한 서술은 필자의 앞의 밀착된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주(駐)인도 한국 대사 이범석 씨의 외교활동에서 서 교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었다. 그 시기는 우리나라의 대 인도관계 개선의 결정적 시기였다. 네루대학이 한국어과를 만들고 인도사람들이 한국을 알고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배출되게 한 것도 바로 서 교수의 공로다. 그 소식은 국내의 박 대통령에게까지 알려졌었다.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역시 서 교수가 타이틀 없는 한국의 문화대사 역할을 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4. 인도는 지역이 아니다

그는 1980년에 교환교수로 다시 인도를 찾으며 그의 여행벽과 함께 사상적 깊이를 더욱 확대시켰다. 평상시 자신이 생각하던 인도 사상가들에 대하여 몸소 관여한 참여적인 추적이기도 했다. 서경수는 누구보다 마하트마 간디를 존경하고 그의 사상에 심취했었다. 그래서 간디 사상을 인도철학과를 위시하여 자신이 강의를 담당했던 대학들에서 빼놓지 않고 소개했다. 간디의 전기와 ‘진리파지(眞理把持, Satyagraha)’에 대한 부분 번역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본격적 번역은 그에 의해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간디의 진리파지에 대한 서경수의 이해와 그 현양은 남달랐다. 따라서 그의 인도 사상은 단지 불교의 시원처이거나 부처님의 탄생지이어서가 아니라 영원을 추구하며 현실을 ‘영원의 상(Imago Aeternitas)’ 아래에서 이룩되기를 기원한 염원이었다. 곧 ‘영원’의 역사적 현장화로서 인도를 사랑하고 그 정신성에 매료된 것이다.

또 그의 인도 사랑은 자연스럽게 아힝사(Ahimsa)에 대해 그만이 지닌 독특한 해석으로 이끌고 있다. 곧 비폭력(non-violence)이라는 서구어의 좁은 뜻에서 벗겨내어 해석하는 것이다. 아힝사는 불교의 불살생계에도 해당되겠지만 그는 이 서구적 해석과 불교의 교리적 해석의 틀을 벗어나 인도의 정신성으로서 아힝사를 생각했다. “목숨을 걸고 결의하는 윤리적 엄연한 자세”가 아힝사임을 강조했다. 아힝사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자제하는 소극적 의미에서 출발하지만 적극적 의미에 다다를 때 “그것은 사랑, 모든 것을 향한 사랑이고 각오(覺悟)를 수반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곧 “각오란 목숨을 걸고 결의하는 윤리적 엄연한 자세”의 결단을 요구하는 말이라는 것이었다. 아힝사를 사랑의 메시지로까지 승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아힝사는 십자가에 못지않은 고난을 겪을 각오가 있어야 하고 이와 같은 각오가 꺾일 때 그는 비굴해진다. 그러나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각오가 되어 있을 때 그에게 두려움은 일어날 수 없다. 두려움은 각오의 윤리적 근거가 흔들릴 때 생긴다. ……그 길이 지금은 어둡더라도 그는 털끝만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힝사는 사랑의 종교이면서 또한 소망의 종교이기도 하다.”
영원의 상 아래 전개되는 인도는 그에게 정신적 고향이었고 학문의 원천이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었다. 따라서 인도로의 여행은 그에게 영원으로의 여행이었고 자기 자신으로의 여행이었다. 1985년도에 동국대 인도학술조사단장으로 참여하고 귀국한 것이 그의 마지막 인도 여행이 되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 여정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그에 대한 기록은 이기영에 의해 감명 깊게 절절히 기술되고 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것이 눈에 띈 것은 인도에서 돌아온 때였다. 환갑의 나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갑자기 그도 시간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의 Mysticism이 현실에 부딪히며 나타난 형상이었을 것이다. 같이 살던 어머니의 병환이 아주 심해지고 나이 먹은 총각 아들은 직접 어머니의 수발을 드려야만 했다. ……그때 서 교수를 도우려 나타난 보살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미영 선생이다. 나는 두 사람을 불교연구원 법당에서 부부로 맺어 주면서 진정한 보살 부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얼마 안 있어 노모는 세상을 뜨셨고 결혼생활도 1년이 지났다. 딸 은주가 태어난 지 21일 만에 서 교수는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날 점심 약속을 해 놓고 학교로 출근하던 길이었다. 아, 서경수! ……외로운 기러기, 언제나 저 먼 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기러기, 날아갈 때면 신나던 그 기러기가 이 세상이 역겨워 가셨나? 열반과 세속이 다른 길이 아니라고 믿고 있던 기러기의 깊은 체념이 여운처럼 남아 있다.

 5. 삶의 양태로서 불교학

한 학자의 행적을 어떻게 학문이란 국한된 범위로 축약시키고 환원시켜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이 시대의 학문이 지닌 한계일 수밖에 없다. 서경수의 행적을 좇다 보면 이런 느낌은 더 절실해진다. 그리고 불교학이란 일반 학문 분야와 달리 다루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학은 학문적 추구의 행위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오늘의 학문 범주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불교를 공부하는 행위와 불교적 수행(performative) 그리고 현실참여(Engagement)의 행위는 거의 삼위일체적으로 서로 긴밀히 연관된 총체적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불교적 행위가 뒷받침된 학문의 내용이 불교학이고 불교를 공부한다는 일은 삶의 하나의 양식(A Way Of Life)임을 깨닫게 된다. 서경수의 학문을 생각할 때 이런 불교학적 삶의 모습이 그대로 현시된다.

그에게서는 학문과 삶의 양식, 곧 살아가는 모습을 분리하기가 어렵다. 일견 그는 다면불과 같은 생애를 살았다. 연구실에 있는가 하면 선방에 앉아 있었고, 우리와 산사를 찾는 등반길에 있는가 하면 또 술집에서 파안대소하며 두주를 불사했다. 그런가 하면 훌쩍 우리를 떠나 몇 달 몇 년을 인도의 타지를 떠돌았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학문을 추구했고 그의 연구 방법은 서구 문헌학적 접근이었다. 근대 불교학, 특히 서구 불교학이 빠진 모순은 불교학을 박물관적 대상물로 떨어뜨렸다. 불교를 문헌 속으로 환원시킬 때 불교의 살아 움직이는 현장은 배제된다. 불교를 문헌 속에서 색출함으로써 불교를 책상 위의 상상력으로만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원형은 원전의 문헌 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불교의 현주소는 동양이기에 동양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현행의 종교이지만 서구에서는 학자들의 수집, 번역, 출판이라는 문헌적 과거로부터 출발하여 이 문헌들을 소장하고 연구하는 도서관과 연구소에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곧 불교를 ‘골동품 애호적인 지식’이나 ‘유물관리적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경수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도 이런 근대 불교학 연구의 성격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근대 문헌학적 불교연구 방법이 그런 경향을 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문헌 위주의 방법이 지닌 모순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신기하게도 평생의 학문과 수행과 불교운동의 반려였던 이기영과도 상통하는 ‘서구 극복’의 훌륭한 사례가 되고 있다. 이기영은 서구 불교학계에서 “대체가 불가능하다(Irrepaceable)”는 문헌학적 연구의 대가인 E. 라모뜨(Etienne Lamotte) 밑에서 연구를 했다. 그러나 그는 불교 수행과 연구를 병행시키는 한국불교연구원을 설립하고 중요한 기능으로서 구도회(求道會)를 부속시켰다. 불교 수행과 객관적 학문의 결합이었다. 서경수가 이 연구원의 설립에 참여한 것은 물론 생애의 마지막까지 함께 동행했다. 그들은 근대 서구 불교학 방법론의 모순을 극복한 하나의 확고한 틀을 제시한 셈이고, 더 나아가 서경수의 근대 불교 담론에서 그의 불교의 현장성에 대한 해석과 실존적 참여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그것은 문헌에 매달려 있는 학자적 입장을 극복한 참여적인 자세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만해 한용운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 살아계신 소박한 선승들에 대한 집착과는 또 다른 관점이었고 전혀 다른 의미를 띠고 있었다. 한용운의 현실참여적 행위와 한용운의 말/이론이 일치됨을 전율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만해 한용운을 한국불교 근대성 담론의 표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만해가 주장한 “파괴는 새로운 창조의 어머니”라는 명제를 자신의 불교 현실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 그의 기질적인 성격이 투영되어 있기도 했겠지만, 현실 비판은 철저했다. 그는 당시 불교의 파괴되고 일그러진 현장에서 “불교가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구태의연한 불교가 왜 아직도 잔존해 있는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전통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거부, 그리고 한국불교의 과거 지향성에 대해 과감하게 발설했다. 그러나 그 이면은 바로 창조=새로운 출발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그의 언표는 부정적 비판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만해를 따른 그의 한국불교 현장에 대한 논리구성은 오히려 창조와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컸고 그것을 지양했다. 곧 “부처님을 대신하여 부처님의 사상과 교리를 오늘의 사회에서 구현”되기를 희구한 것이다. 그는 “탈현장적”이고 “탈현실적이고 초시간적 유토피아”에 있는 것이 불교의 이념이 아니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속의 나라”인 가상의 세계가 불교의 교설이거나 불국토의 실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곧 불교가 현실에 위치하기를 요구했다. 부처님을 과거에서 찾는 원형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부처님을 이 현실에서 재현시켜야 한다고 갈파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자기가 설 자리조차 상실하고 역사의 미아가 되고 만다. 역사의 미아가 된 종교는 자기 자신조차 구제할 힘이 없는 무력한 종교다. 대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불구의 종교”라고 단정했다. “불교는 과거의 유산을 자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문제’를 무어라고 한마디 변증할 줄을 알아야 한다. 불교가 ‘현대의 문제’를 변증한다는 말은 불타의 말씀이 현대에 와서 다시 정확히 발음된다는 뜻이다. 불타의 말씀이 현대에 다시 정확히 발음되게 하는 것이 현대불교의 사명이다.”

6. 현장거부와 현장의식의 재현

서경수의 과거 지향성에 대한 비판은 그 반대급부로 현장의식을 문제시한다. 그는 만해의 〈님의 침묵〉 가운데 “중생은 석가의 님”인 것을 다시 부각시켰다. 석가가 중생의 님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고 중생이 오히려 석가의 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석가가 님을 찾아서 중생의 편으로 와야 한다. 다시 말해 불교는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어서 불교는 사회와 중생에게 직접 다가와야 한다. 서경수는 ‘불교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역설적 질문과 항변을 통해 이런 현장의식의 문제를 신랄하게 제기한 것이다.

마치 릴케의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관을 거부하며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한다. 곧 신은 하나님의 현존을 요구하는 인간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 하나님, 제가 없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릴케는 항변했다. 릴케는 만해나 서경수와 같이 중생의 입장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서경수의 현장의식이나 요청적 불교의 현존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현장성은 서경수에게 이르러 철저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대개는 파행적 불교 현상에 대한 비판을 시도할 때 자신이 불교 신자이거나 단순한 불교학자로 정체성을 밝히면 불교 유신과 개혁에 대한 발언의 입지는 확보된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서경수는 자신에게 허용된 불교 비판의 입지마저 비판하였다. 소위 비판의 상식화된 비판 매너리즘을 질타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글의 제목인 〈불교계에 바란다〉는 말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비판에 대해 비판자가 얼마나 참여되어 있는가를 따졌다. 그는 ‘내가 내 가정에 바란다’거나 ‘내가 나에게 바란다’라는 말은 논리적 모순이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 전달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나는 나의 뜻과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참여하지 그것을 남에게 말로 발설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불교의 현장이 객체화되고 타자화되어 비판과 담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나의 참여 없이 언급되는 비판이나 담론은 마치 내가 나에게 바라는 허구적인 위선으로 떨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서경수는 철저하게 자기 허위성을 배제시켰으며 나의 실존적 변화, 나의 참여가 결여된 어떠한 이상론도 불교 현실에 대한 온당한 비판이나 유신론이 될 수 없음을 항변했다. 서경수의 이런 발언은 이미 자신이 ‘참여된 현장’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서경수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이 시각에 살고 있는 현장이 나에게 주어진 삶의 전부라고 하면 나는 이 현장에서 나의 전부를 던져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다. ……오늘 이 현장에서 내가 ‘어찌’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인생 전부를 말해 준다. 내일이 없다는 시간의 단점은 이 현장과 대결하는 각오를 요청한다. 언제 어디서 죽음이 오더라도 선뜻 죽어 줄 수 있는 각오이다.”

이런 철저한 현장의식과 참여의식에 이르면 그가 사용한 불교 교설에서의 이상적인 경지를 기술하는 관행어들인 보살, 자비와 같은 말은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된다. 소위 대승불교의 고정적인 상투적인 의미를 극복하는 것이다. 내가 참여되어 있는 보살행과 내가 함께 가고 있는 현장에서의 자비행은 이상적 관념어이거나 이상향의 무지개는 아니다. 그것이 서경수의 현장의식이다. 우리 불교의 현실과 현장을 이렇게 바라볼 때 그는 외기러기와 같은 몸짓을 할 수밖에 없다. 외롭게 멀리 막연하게 쳐다보는 기러기, 그러나 비상할 때는 모든 활력을 다한 그의 보살 같은 전력질주의 행동, 그것이 서경수였다. 그는 치열하게 참여된 재가 불교학자였다. ■

 

 

이민용 / 한국종교문제연구소 이사. 동국대, 하버드대 박사과정 수료(인도불교사상, 동아시아지성사 전공). 동국대 · 영남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불교의 근대적 전환-이능화의 문화론적 시각과 민족주의》 《원측-법상종의 아류인가?》 《미국의 일본 불교 수용의 굴절-헨리 올콧트, 폴 카루스, 釋宗演, D.T 스즈키의 경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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