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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조선시대 불교의 역사적 성격 / 이봉춘
[66호] 2016년 06월 01일 (수) 이봉춘 lbc@dongguk.ac.kr

1. ‘오늘’의 눈으로 다시 보는 조선불교

한국불교사에서 조선불교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여전히 어둡고 부정적이다. 그것은 변함없이 ‘숭유억불 정책에 의한 수난의 불교’이며 ‘교학과 선사상이 쇠퇴한 불교’일 뿐이다. 이처럼 거의 고정된 인식들이 연역해 낸 조선불교 5백 년의 역사 과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의 인적, 물적, 제도적 기반의 해체, 신앙활동의 억압과 봉쇄, 하층 신분으로 전락한 승도들의 사회적 위상, 피지배 집단으로서 불교교단의 굴종 등 역시 황폐한 현실의 확인에서만 그치고 있다.

조선불교의 이 같은 쇠락상은 찬란한 신라불교나 국교적 지위를 누린 고려불교의 성세와 대비되면서 더욱 부각된 측면이 없지 않다. 혹은 국가의 불교 억압과 배척에 대한 피해의식과 호교적 반감이 그것을 더 크게 강조해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비나 강조가 아니라 해도 조선불교의 억압과 수난이 허구나 과장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조선시대 불교의 엄연한 역사적 경험이고 현실이었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과 무관하게 조선불교를 논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일은 억불 현실의 지나친 강조와 그 자의적인 해석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같은 태도는 두 가지 모두 조선불교에 대한 균형 있는 판단과 올바른 인식을 저해하기 쉽다. 조선불교가 으레 침체와 쇠퇴의 길만을 걸어왔다는 도식적 규정은 물론, 이런 고정된 시각에 대한 반성에서 오히려 조선불교를 과대평가하려는 경우들도 이에 해당한다.

어떻게 말하든 조선불교가 억불 수난을 겪으면서 쇠퇴해왔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불교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이 같은 수난에 의한 외적 양상 또는 그 결과만의 확인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역경의 현실 속에서도 조선불교가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그런 노력이 이루어낸 결과와 긍정성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밝혀내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조선불교는 어둡고 부정적인 모습만이 그 전체가 아니다. 사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야 할 만큼 역동적이고 강인한 새로운 면모 또한 함께 지니고 있다.

앞의 언급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의 억불 · 배불 정책은 강경하고 혹독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는 국가의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임의집단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국도(國都)를 떠나 산중불교화가 시작되는 연산군 대 말에서부터 중종 대, 그리고 다시 명종 이후 국망까지의 긴 기간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기간 중에도 그 내용으로 보면 불교와 국가와의 관계는 완전한 단절이나 파국이 아니었다. 나름의 관계와 교섭이 있었으며, 이 같은 현상은 억불 · 배불의 조선조 전 시대에 걸쳐 마찬가지였다. 국가정책과는 무관하게 일정 정도 불교에 대한 인정과 배려의 모습을 이어왔고, 국왕의 성향에 따라서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흥불을 지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과 함께 먼저 주목할 만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조선 왕실의 신불활동(信佛活動)이다. 대비나 중궁 등을 중심으로 한 왕실의 신불활동은 특히 조선 전기 중에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반드시 특정 시기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범위를 넓혀 말하면 종실 대군 및 그 배우자들과 공주 후궁 및 유력한 상궁 등 수많은 왕실 관련 인물들의 신불활동이 왕조 말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 왕실의 불교신앙 전통과 함께 일단의 신불 세력을 상정하기에 충분한 이런 현상과 관련해서는, 당시 지도적 고승들의 지도와 교화의 노력 또한 함께 감안해야 한다. 고려에서는 물론, 조선 왕실의 신불활동에서도 당시 고승들의 역할은 뚜렷하다. 어떤 형태로든 국왕과 왕실로부터 존경받는 고승들이 있었고 이들이 왕실의 신앙 및 정신 지도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왕실의 신불활동이 억불의 시대에 그나마 그 목소리를 내면서 불교의 외호 세력으로 기능하였다면 또 다른 한편의 불교 세력으로는 말없이 불교를 지지하는 하층 서민 대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비록 왕실의 신불자들처럼 공개적으로 신앙활동을 펴거나 불사를 지원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하지만 서민 대중의 불교신앙 역시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들은 유교 왕조의 이념적 예교(禮敎) 질서보다는 이미 체질화한 불교의 세계가 더욱 자연스러웠던, 말 그대로 기층민중들이다. 이런 민중의 특별하게 드러나지 않은 불교신앙은 곧 침묵 속의 불교 지지였으며, 이 또한 조선불교에는 무시하지 못할 중요한 세력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당시 승려들의 관심과 역할이 함께했을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교국시(儒敎國是)와 억불정책의 기조로 일관한 조선에서 불교의 외형적 변화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구체화한 불교 종파의 정리 감축과 폐쇄, 국가의 각종 불교 관련 제도의 혁파, 산간으로의 교단 퇴거 등 조선불교의 변화와 축소된 윤곽은 그 전기에 이미 거의 확정되고 있다. 대변혁의 시대, 더구나 급격하게 진행된 정치 사회 사상 등의 변동 속에서 불교의 대응 및 극복이란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한 일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 왕조가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강제한 각종 억불 조치와 그에 따른 교단의 외형적 변화는 당시 불교로서는 거의 불가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런 사정을 인정했을 때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문제는 그러한 변화 이후 불교계의 직접 간접적인 대응이다. 사찰의 토지 감축 및 노비의 속공(屬公)과 사찰 사태(沙汰)가 강행된 태종 대 초의 1차 억불정책 3개월 후, 불교계의 집단적인 저항의 의사표시가 있었지만 무위에 그쳤다. 또 세종 원년과 3년에는 금강산의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명의 황제에게 국내의 불교 박해 사정과 구원을 호소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의욕적인 억불정책이 이 정도의 미약한 대응으로 바뀔 대세는 아니었다. 불교의 변화 양상은 이미 국가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그 폭을 넓히며 진행되어 갔고, 불교계로서는 그런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는 불교 스스로의 교단 유지와 그 존속이 필연적인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조선불교는 불가피한 변화를 수용하고 그에 적응하면서 종래와는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불교의 자구 · 자활을 모색해 가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조선불교의 의외의 모습이다. 그것은 오늘의 일반적 인식처럼 다만 수난과 쇠퇴의 길만을 걸어간 무기력한 집단의 모습이 아니다. 위에서 본 왕실의 신불활동과 기층민중의 지지가 말해주듯, 이 땅에서 불교는 뿌리 깊은 정신이었고 종교 세력이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다양한 호법, 흥불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조선불교는 이들 세력과 더불어 의외의 생명력을 발휘하고 긍정성을 보이고 있다.

오늘의 시대에 와서, 이 같은 조선불교는 과연 외면하거나 애써 덮어두고 싶어 할 만큼 부담스러운 어두운 역사이며 유산인가. 찬연하고 자랑스러운 앞 시대의 불교들과 비교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크게 다른 외형과 변화한 위상만으로 반드시 조선불교를 수난과 쇠퇴의 불교, 그리고 무기력한 불교로 규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시점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그동안 조선불교를 얼마나 선입견과 함께 피상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 왔는가, 조선불교가 지닌 진면모를 밝혀내고 파악하는 일에 얼마나 무성의했는가를 반성하는 일일 것이다.

어느 시대라도, 더욱이 전제적인 왕조시대에서는 불교 등 종교집단의 유지와 성쇠가 그 독자적 여건과 의지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연계 조건 가운데서도 특히 군주의 의도와 국가권력으로부터 받는 직접 간접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이다. 조선불교에 주어진 온갖 수난과 불행한 여건들이 우선 이에 해당하며, 다소의 흥불 기회나 그 결과의 경우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불교의 수난과 쇠퇴에 대해서는 결코 당시의 불교 스스로의 문제나 무능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조선불교가 처해온 상황과 관련하여 굳이 그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앞 시대의 불교 또한 자유로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오랫동안 국가의 전폭적인 보호 및 지원과 더불어 사회 내의 특권 집단과 세력으로 존재해온 고려불교, 특히 그 후기에 더욱 만연한 폐해의 현상들이 그러하다. 즉 고려불교가 누적시켜온 여러 가지 폐해와 그로부터 파생된 결과들이 조선의 개국 이후 불교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의 개국과 함께 불교교단이 직면해야 했던, 특히 경제적 인적 압박의 조치들이 반드시 불교만을 겨냥한 억압이나 배척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는 역성혁명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그들의 정치적 행위의 한 부분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가 입은 타격의 결과를 두고 말하면 그 의미는 동일하다.

결국 조선불교의 수난과 역경은 상당 부분 불교 자체의 역사적 업인(業因)에 의한 과보(果報)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인과론적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 침체와 쇠퇴 그리고 무기력함까지도 다만 조선불교의 문제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조선불교는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어둡고 어려운 시대를 홀로 감당해왔다. 그것은 신라 · 고려불교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혹한 조건들과의 투쟁이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구 · 자활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구축하면서 끝까지 불법을 수호하고 교단을 유지해온 것이 바로 조선불교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불교는 이 시대에 새로운 관심으로 다시 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조선불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를 위해서는 물론, 오늘의 한국불교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미 보편화한 명제이지만 흔히 역사는 거울이라고들 말한다. 과거의 사실로써 현재를 비추어 확인하고 현재의 일로써 미래의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에서이다. 역사의 거울이라는 의미 그대로, 우리는 지금 수난과 역경을 견디어 온 조선불교의 경험 위에 오늘의 불교계 현실을 비추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의 자화상 확인과 그 각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적 여건이나 여러 가지 환경 면에서라면 오늘의 불교와 조선시대 불교의 그것과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만큼 오늘의 불교가 가진 조건과 환경은 월등한 편이다. 우선 사찰의 경제적 사정만 해도 대체로 무난하다 할 것이며 혹은 부유한 사찰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사찰이든 승려 개인이든 이들 사이의 빈부 격차가 큰 것도 인정되지만, 이마저 조선시대 불교의 어려운 상황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또 신앙의 자유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간혹 정권이나 최고 권력자의 성향에 따라 다소의 종교적 편향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불교인들의 신앙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기타 신심 깊은 두터운 불자층, 이들의 삼보공경과 애교 · 애종심 등 오늘의 한국불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풍요롭고 안정적인 조건과 환경을 누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한국불교에 기생하고 있는 비불교적인 요소와 경향들이다. 이에 관한 우려 · 실망과 함께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그것은 사방에서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주요 대상은 승단 자체이며 출가자들이다. “신도들이 비굴할 정도로 떠받드는 ‘스님’들” 모두가 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오늘의 한국불교는 ‘불자들이 스님을 걱정하는’ 지경에 와 있다. 우려와 비판의 내용들은 대체로, ① 비구 · 비구니 등 출가자의 지나친 부유함 ② 바라문화한 승려들의 권위주의 ③ 닭 볏보다 못하다는 중 벼슬 자랑 ④ 수행자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승려 ⑤ 전근대적인 사찰운영 ⑥ 음주, 도박, 파계 등 승려의 타락 등이다. 이들을 굳이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마치 고려 후기 불교의 폐해상을 다시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반드시 되새겨 둘 일이 있다. 조선불교가 억압 수난과 고통을 받게 된 불교 자체의 원인은 무엇인가, 불행한 여건 속에서 조선불교는 어떻게 교단을 지키고 불교를 이어 왔는가, 그런 조선불교의 인내와 노력 그리고 전환은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가 함이다. 이 시대에 굳이 조선불교의 억압과 수난의 원인, 그리고 고난 극복의 과정과 그 남겨진 결과를 생각하는 것은 곧 오늘의 불교를 성찰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불교는 이 시대에 더없이 귀중한 역사적 교훈을 함께 일깨워주고 있다.

2. 조선불교 연구의 현실과 과제

조선불교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충분하지 못하거나 오류가 있다면 이는 일차적으로 그 시대 불교에 대한 관심 부족과 미흡한 연구와도 관련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자주 한국불교 1,7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 가운데 유독 조선불교 부분에서는 그 시대의 암울함을 지적하거나 거의 침묵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온다. 이런 경향은 조선불교 연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700년 한국불교 역사를 기간별로 구분하면 대략 삼국 및 신라불교가 560년, 고려불교가 470여 년, 그리고 조선불교가 500년이다. 이처럼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본 불교 역사의 기간은 각각 3분의 1 정도씩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같은 한국불교 역사에 관한 연구는 거의 고대의 신라와 중세의 고려불교에 편중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 시대와 접해 있는 조선불교가 연구의 관심 대상에서 밀려나 소외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각 시대별 불교의 연구 결과 전반을 통계로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조선불교 연구의 집계만을 본다면 저술 및 연구논문 등이 대략 1,900편 정도가 된다. 아쉽게도 이는 2004년 현재 기준으로서 10년이 지난 자료이므로7) 다시 그동안의 연구 결과 상당량을 추가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2,100~2,200편을 상회하지는 않을 것으로 일단 추정해 본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의한 조선불교 연구 성과 1,900건 가운데는 조선불교에 관한 직접적인 연구 외에 방계적인 연구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연구의 경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좀 더 구분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대략 ① 불교사 일반 · 사상 1,040여 건 ② 어문학 460여 건 ③ 미술 · 고고 · 건축 기타 370여 건으로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보면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각종 언해불전 등에 관한 어문학적 연구와 불상, 불화, 법당, 불탑 등 불교미술과 건축 등에 관한 연구가 그동안 의외로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체 조선불교 연구 성과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여서, 불교사 일반 및 사상 부분 연구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어문학 및 미술, 건축 부분 등의 연구가 조선불교의 전체 면모를 밝혀내는 일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할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불교의 사상 및 성격 등을 전제로 한 면모라면 그 관련성 면에서는 아무래도 불교사 일반 및 사상 부분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의 연구 1,040여 건은 역시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이 같은 연구의 미흡함에 대해서는, 가령 신라불교 가운데 원효 관련 연구 성과 한 분야만을 들어 비교하더라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2010년 현재 조사 집계한 원효 관련 연구는 총 930여 건으로 나타난다. 이들 가운데 원효의 저술과 관련 편저 및 번역서 간행이 40건, 석 · 박사 논문을 포함한 일반논문이 822편, 원효에 대한 저술이 68종이다. 이는 조선불교에 관한 역사 일반 및 사상 연구 전체 집계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숫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라의 원효 한 사람에 관한 연구임을 감안한다면 5백 년 역사의 조선불교가 그동안 얼마나 부진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의 이 같은 부진 현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불교가 억불책에 의한 핍박으로 발전하지 못한 불교라는 선입견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많은 조선불교 연구자의 배출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불과 몇몇을 손으로 헤아려야 할 만큼 드문 국내 조선불교 연구자의 희소성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불교 연구 부진의 이유가 이 같은 피상적이고 단순한 사실만으로 모두 설명되지는 않으며, 이에 관해서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규명해볼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의 학문적 유산과 그와 관련한 문제의 검토를 빼어놓을 수 없다. 이는 식민지기의 학문적 유산에 대한 재평가나 그로부터 가능한 학문 전통의 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불교 연구가 부진한 이유로서 다음 세 가지를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첫째 식민사학의 극복이나 주체적 민족주의, 내재적 발전론 등 역사학의 시대적 과제에 부응할 만한 매력적인 요인을 불교에서 찾기 어렵다는 점, 둘째 불교가 민족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성은 있지만 조선시대는 신라나 고려불교에 비해 역사적 위상과 사상적 비중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 셋째 근대의 종교 경쟁에서 불교가 택했던 방식이 학문 전통이나 불교적 가치관의 중시 보다는 생존기반의 확보에 치우쳤던 나머지 객관적 학문영역으로서가 아닌 종교적 신념체계로 사회적으로 인지된 점 등이다.”

이 같은 분석은 광복 이후 조선불교 연구가 일반 학계로 확대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불교 내부 문제의 시각으로서도 크게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불교학계 또한 식민기 사학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만큼 그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극복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식민지배기의 학문적 영향에 훈습되어 조선불교의 면모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일제 강점기의 연구를 포함하여 그동안 한국불교사 가운데 조선시대 불교 연구의 대강 흐름만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조선불교 연구의 첫 물꼬를 튼 것은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1910년 한국의 강제 병탄과 함께 시작된 이들의 논문과 저술 등 조선불교 연구는 예측할 수 있는 바대로 식민사관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조선불교 연구의 효시가 되는 후루타니 기요시(古谷 淸)의 논문 〈조선 이조불교사 개설〉에서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가운데 조선불교를 한 편의 불교쇠망사로 규정하였다. 조선불교에 대한 이 같은 부정적 인식은 이후 대부분 학자의 연구에서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즉 역사학, 불교학, 종교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억불정책, 사상의 쇠퇴, 기층의 기복신앙에 초점을 두어 조선시대 불교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조선불교 연구로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의 《이조불교(李朝佛敎)》이다. 그 또한 불교사 인식, 나아가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부정적인 편견이 깔려 있다. 그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특징을 ‘의타성’과 ‘정체성’으로 규정하였고, 조선불교에 대해서는 ‘국가에 교권을 빼앗기고 모욕과 압박을 받은 괴기한 역사’라는 전제하에 사회적 역할 및 사상적 측면에서 불교가 위축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경향이 비록 이와 같았지만, 그렇다 해도 조선불교에 대한 이들의 연구 노력과 성과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근대불교학의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를 통해 한국인 학자들로서도 일단의 자극을 받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불교사를 최초로 정리한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1917)나 한국불교 관련 자료의 총집성인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상 · 중 · 하(1918)도 이렇게 해서 나올 수 있었다.

이후 1930~40년대는 주로 한국 학자들의 조선불교 연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또한 조선불교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를 대체로 수용하거나 다소의 다른 시각을 첨가하는 정도의 연구들이었다. 그 가운데 김영수의 논문 〈조선불교 종지에 대하여〉(《신불교》 9, 1937)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직결된 종단의 종조 관련 논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 〈오교양종에 대하여〉(《진단학보》 8, 1937)는 한국불교 교학과 선의 전통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서 눈길을 끈다.

그러나 오교양종 문제는 일본의 종파불교 활동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나온 대응으로,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반영으로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또 자신의 《조선불교 약사》를 재편한 권상로의 《조선불교사개설》(1934)과 김영수의 《조선불교 사고(史蒿)》(1939)도 통사(通史)의 보완으로서 지속적인 연구 노력을 보여준다.

한편 1945년 광복 이후의 조선불교를 포함한 한국불교사 연구는 고승 등 인물 중심이나 교단사, 또는 정책사 등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연구 주제의 폭을 다소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후 대략 1960년대까지는 식민지기에 형성된 전통 인식의 편향성 극복을 위해 고민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조선불교에 대한 입론(立論)은 그 토대와 근본적 시각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런 조선불교 연구가 본격적인 제도에 오른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주체적인 연구의 의욕들이 일어났고, 다방면에 걸친 세부적인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조선불교의 사상, 교학, 법통, 제도, 불사, 의례 등 분야 연구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확산해 간 것이다. 이 같은 다양한 분야의 연구들은 분명 기존의 조선불교에 대한 편견과 시각 교정의 근거를 제공할 만한 것들이다. 이런 현상은 조선불교의 실상 파악이라는 점에서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1970년대로부터 이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조선불교 연구는 전체적으로 충분하지 못한 형편에 있다. 여전히 새로운 구명과 심층적인 연구 노력을 기다리는 분야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다. 이 상황과 관련하여, 여기에서는 더욱 확장해야 할 연구 분야를 포함하여 다음 몇 가지 과제들을 제시해본다.

① 연구의 시각과 관점의 전환
조선시대 불교 연구에서 조선의 정치 및 불교정책에 대한 구명은 일차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가정책이 불교의 현실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부분 연구는 불가결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다. 억불과 배불이 중심인 불교정책 문제의 강조는 오히려 조선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상만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이는 조선불교의 실상 파악에는 도움되는 일이 아니다. 이제 조선불교 연구는 그 시각과 관점을 이 시대 불교의 긍정성 확인의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억불 · 배불의 문제와는 별도로, 불교인들의 역경극복 의지와 다양한 호법 노력 등 조선불교의 또 다른 실상을 밝히는 일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② 일반 승려들의 활동 조명
그동안 조선불교 연구에서는 흔히 자초, 기화, 보우, 휴정과 유정 등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고승들이 크게 주목받아 왔다. 이들의 사상과 활동 및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척되어 있는 편이다. 조선불교에서 이들 고승의 영향이 지대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5백 년 조선불교사 전개에는 이들 외에도 수많은 승려의 크고 작은 활동과 역할이 함께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또 다른 고승들을 포함하여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반 승려들에 대한 발굴 노력이 요구된다. 지도적 위치의 고승은 물론 일반 승려들의 각 방면에 걸친 활동이 조선불교 유지 존속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일상생활과 활동 또한 충분하게 조명되어야 한다.

③ 사찰의 중수 · 중창 등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
각 사찰의 중수 · 중창과 이에 수반한 각종 형태의 불사 기록들은 조선불교의 실상을 말해주는 또 다른 중요 자료들이다. 통도사, 화엄사, 법주사, 송광사 등을 비롯하여 유명한 고찰들 상당수가 왜란 중에 부분적으로 파괴 · 소실되거나, 혹은 이후에 쇠락하고 있다. 유의할 것은 전화 또는 쇠락과 관련한 사찰들 대부분이 주로 17세기 중에 중수 · 복원되었으며, 그런 일이 조선 말까지도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중수 · 중창 외에 많은 사찰에서 불상 · 불화 · 범종 · 괘불 조성 등 불사들 또한 활발하였다. 이 같은 사실들은 선입견으로 자리 잡고 있는 억불, 배불의 여건과는 크게 다른 현상이다. 사찰의 중수 · 중창과 불사들은 신앙심의 뒷받침은 물론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에 관한 기록의 수집 등 종합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

④ 의례의 형성과 그 내용 및 성격 파악
의례 · 의식은 종교의 사상과 함께 그 존재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현행 한국불교의 의례는 당연히 조선시대의 의례를 원천으로 하고 있다. 17세기 무렵의 《영산대회작법절차(靈山大會作法節次)》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 《제반문(諸般文)》 등을 거쳐, 근대에 이들 의식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안진호의 《석문의범(釋門儀範)》이 준용되고 있음이 그러하다.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법요집’ ‘통일의식집’ 등이 사용되고 있지만, 큰 주류는 《석문의범》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불교의 선 · 교사상 및 다양한 신앙과 그 성격은 이 같은 조선시대 의례의 형성과 내용 및 성격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⑤ 서민대중의 신앙 경향 규명
흔히 억불의 조선시대에 진정한 민중불교,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대의 악조건으로 인해 오히려 민중이 주체가 되는 불교의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는 이 같은 시각은 어디까지 타당한 것일까. 억불 · 배불의 정책이 불교 집단 자체를 철저하게 피지배 계층화시켰고, 이에 따라 불교는 자연히 하층 민중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생존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민중의 기복양재적(祈福攘災的) 신앙이나 무교 등과의 혼합적 신앙 행위 확산을 그대로 불교의 민중화, 대중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민중의 불교 또는 불교 대중화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서민 대중의 신앙 내용 및 경향과 이에 대한 불교의 지도 역할 등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한다.

⑥ 지식인과 고승 간의 교류 및 소통 이해
숭유배불의 상황 전개 속에서도 불유(佛儒) 간의 교류와 소통은 없지 않았다. 이념 문제와는 별개로 이 시대에도 유교 지식인과 불교 고승의 사상적 교류와 친교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명종 대 흥불사업의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다가 순교한 보우의 경우, 그는 유자들의 가장 큰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유교인들과 가장 폭넓게 교류한 고승이기도 했다. 그는 감사 정만종에게 보내는 글에서 “유교와 불교로 나뉘어 있지만 도는 다르지 않다. 예부터 승의 벗은 명유(名儒)였다”고 적고 있다. 종교적 지성들의 지적 교감과 소통을 보여주는 이 같은 교류는 현종 대의 처능과 조선 후기 혜장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연구는 조선시대 불유 간의 사상적 지형도 이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⑦ 교단의 자활 노력에 대한 평가
조선시대의 불교가 한결같이 배불억압만을 받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았고, 이런 가운데 교단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극도의 고난을 겪어온 것도 현실이었다. 특히 국가 경제와 사회의 사정들이 황폐했던 왜란으로부터 조선 중기 이후의 사정은 더욱 열악하였다. 어려움은 비단 경제적 환경만이 아니었다. 제도적 억압과 사회적 관행도 교단의 유지 존속을 힘겹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여기서 각별이 주목해야 할 것이 교단의 자구 · 자활 노력과 불교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관한 문제이다. 이 시대 불교인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호법 의지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특히 그 결과로서 나타난 불교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보다 적극적인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⑧ 교학 진작과 선론의 전개 사실
‘교학과 선사상의 쇠퇴’라는 지적에서 조선불교가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이 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교학의 진작과 선의 쟁론을 활발하게 전개한 시기가 있었음은 조선불교가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18세기 무렵의 성총, 수연, 팔관, 최눌, 유일, 의첨 그리고 긍선 등의 교학 진흥과 저술 활동들이 그러하다. 특히 긍선의 《선문수경(禪文手鏡)》 저술과 이로부터 촉발된 선의 쟁론은 조선 후기 70여 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이때의 선론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보여주지 못하고 기존 임제선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교학의 진작과 함께 이 같은 선론의 전개는 이 시대 불교의 선교사상이 결코 공소(空疏)하지만은 않았음을 말해준다. 교학과 선론에 집중할 만큼 안정세에 있었다 할 교단의 현실과 함께 교학의 내용과 성과 등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가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⑨ 기타의 연구와 과제들
조선불교의 실상을 밝히기 위한 연구 분야와 과제는 이 밖에도 무수하게 남아 있다. 기본적인 사항만 해도 각 사찰의 사지(寺誌), 고승의 행장, 불교문화재 관련 사항, 불교문학, 조각 회화 등 불교미술, 문헌 및 금석문, 현판기문, 사적비, 권선문, 사찰 계문(契文) 등 광범한 자료들의 수집 정리 등이 시급하다. 우선적으로 이들 자료의 집성과 분석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조선불교 연구의 진척을 기대할 수 있다. 또 이를 위한 학제간의 공동연구도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3. 조선불교의 역사적 성격

조선시대의 불교를 숭유억불이라는 용어 하나로 평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한 측면의 현상을 전체화하는 오류와 그 편향성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조선불교를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경우도 온당하지 못하다. 이는 기대와 희망이 더 크게 반영된 인식일 수 있다. 어느 편이든, 문제는 그것이 조선불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결론인가 하는 것이다.

조선불교의 정당한 평가와 판단을 위해서도 조선불교 전모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활발한 연구와 그 축적된 성과를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이 시대의 불교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연구 현실은 앞 장에서 살펴본 대로 빈약하고 미진하며, 연구 관심도 연구 인력층도 모두 영세한 형편에 있다. 일반 대중은 물론 학계까지도 조선불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상황이다.

이 같은 사정을 무릅쓰고 이제 조선불교의 역사적 성격을 논해야 할 차례이다. 현재로서는 이런 일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시 조선불교 전체를 조망할 수 없게 하는 빈약하고 미진한 연구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잠정적임을 전제로, 부득이 조선불교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요컨대 조선불교는 ‘억불 · 배불의 현실 속에서 교단의 유지 존속과 불교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구축해낸 저력 있는 불교’였다. 이와 같은 조선불교의 성격 파악은 주로 제1장에서 살펴본 사실들의 재확인으로써 가능하지만, 대략 다음의 내용들이 그 근거가 된다.

첫째, 숭유억불 정책과 외유내불적 현실
유교국가 조선의 종교정책 기조가 숭유억불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만큼 조선조 전시대를 통관하여 불교는 억압과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시기에 따라 그 정책 시행에 강온과 완급의 차이가 있었으며 드물게 흥불의 기회도 없지 않았다. 흥불을 위한 사업들의 경우는 신불 왕의 주선 혹은 지원에 의한 것이지만, 반드시 신불 왕이 아니더라도 각종 불사의 사례는 비일비재하였다. 특히 별다른 제약 없이 활발하게 이어간 왕실의 불교 활동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신앙그룹이자 가장 확실한 외호 세력으로서 그 존재감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조선의 억불 · 배불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대로 조선의 외유내불적(外儒內佛的) 현상에 해당한다. 외적인 국가정책은 유교를 표방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불교가 실천되고 있는 현실을 말함이다.

외유내불에서 ‘내불’에 관련한 인적구성은 국왕 및 왕실에서부터 서민대중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며, 이들이 행하는 불교의 내용 또한 다양하였다. 물론 계층에 따라 달랐지만 억불 · 배불정책에 대한 반감 내지 저항의 표출에서부터, 흥불사업, 불사의 설행, 개인적인 신앙활동 등이 계속되었다. 이는 전통신앙과 정신으로서 불교의 굳건한 위상이 국가정책과 무관하게 여전히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억불의 조선이었지만 이 시대 불교에 고난의 현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 세력의 지원과 외호도 함께했다. 조선불교인들은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외유내불이라는 이 시대 특유의 현실에서 격려받고 고무되면서 호법흥불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해갔다고 하겠다.

둘째, 강경한 억불 · 배불 속의 교단유지 활동
조선의 불교정책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누구는 그것을 억불 혹은 배불이라고 말한다. 또는 억불과 배불을 과정적 단계로 이해하여 조선에서는 억불정책만 있을 뿐 배불정책은 없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같은 논란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입장이므로 여기서는 억불 · 배불을 함께 사용한다. 억불과 배불의 경계가 뚜렷하지도 않으며 억불이든 배불이든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불교 측에서는 다 같이 힘겨운 현실이었다는 점에서이다. 가령 국가의 경제적 사정과 불교의 문제성을 이유로 추진한 불교 종파의 통폐합 정책은 억불인가 배불인가,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승려와 대중의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또 무의미한 일이다. 도승 · 도첩제도의 강화, 승과제도의 폐지 등 수많은 불교정책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불교정책과는 구분해야겠지만 사회적 관행으로 지속된 억불 · 배불 또한 불교인들에게 고통과 질곡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승려가 그 대상은 아니라 해도 가령 승려 천시의 경향, 하급 승려들의 부역, 사찰에 대한 횡포와 관행적 수탈 등이 그러하다. 이 같은 억불 · 배불적 상황이 연속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환경 속에서도 교단을 유지해 가는 일, 그리고 호법 흥불은 조선불교의 최대 관심이었고 과제였다. 따라서 이는 여러 가지 노력과 활동으로 나타난다. 생존을 위한 자구 · 자활의 노력, 대사회적 현실 참여를 통한 불교의 역할과 인식재고, 불교의 종교 신앙적 역할, 불교 대중화 등이 그것이다. 범위를 넓혀 말하면 성리학에의 불교적 대응, 선문(禪門)의 법맥 계승과 교학 진흥 등 활동도 모두 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진정 억불 · 배불의 과정을 견디며 끝까지 교단을 잘 유지해낸 저력 있는 불교였다. 

셋째, 새로운 존재방식 구축
조선의 정책적 억불 · 배불은 그 전기 중에 대체적인 윤곽이 확정되고 있다. 연산군 대와 중종 대, 다시 명종 20년(1565) 무렵까지 간단하지 않은 과정을 거치며 선교양종, 도승법 및 도첩법, 승과(僧科)시험 등 불교교단의 근간적 제도들이 모두 폐지 종결되고 있음이 그러하다. 물론 이로써 조선에서 더 이상의 불교 억압과 배척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억불 · 배불은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고 국가적인 불교제도의 폐지로 이제 더 이상 강구할 만한 배불정책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어쨌든 각종 불교제도의 폐지로 국가와 불교 간의 공적인 관계가 단절되고, 이로써 조선불교는 임의 집단으로서 산중불교라는 새로운 현실개척에 나서게 된다.

이로부터 조선불교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의 관행적 억불배척의 상황에 대응하면서 마침내 새로운 불교 형태, 새로운 불교의 존재방식을 구축해내고 있다. 이는 물론 산중불교의 현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 내용만을 몇 가지로 요약해 말하면 ① 불교의 자립경제 구축 ② 국가의존에서 벗어난 불교의 독자성 확보 ③ 선(禪) · 교(敎) · 정(淨) · 밀(密) 등 신앙의 통합적 현상 ④ 강학 · 참선 · 염불의 삼문수업(三門修業) 유행 ⑤ 순수 수행불교로의 회귀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불교제도의 폐지와 국가와의 공적 단절로 인해 산중불교 형태로16) 존속해야 했지만, 이 같은 현실이 오히려 조선불교에는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불교의 종교적 독자성과 수행불교로의 회귀가 가능했다는 뜻에서이다.

소략하지만, 이상과 같은 몇 가지 근거만으로도 조선불교의 성격 대강은 말할 수 있다. 이 시대 불교인들은 국가적 사회적 억불 · 배불에 대해 무기력하지만은 않았다. 뿌리 깊은 불교 전통의 힘 그리고 상하 불교 대중의 협력과 지지 속에서 고난의 시대 극복을 위해 진력하였다. ‘억불 · 배불의 현실 속에서 교단의 유지 존속과 불교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구축해낸 저력 있는 불교’라는 조선불교의 역사적 성격 규정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이봉춘 /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문화대학(경주) 교수,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등 역임. 〈삼국 ·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주체적 수용〉 〈조선전기 불전언해와 그 사상〉 등의 논문과 《불교사상의 이해》(공저),《불교의 역사》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2015 불교평론 학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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